제7회 아시아경기대회, 무너진 정상
선수단 선발, 그리고 박미라 선수의 은퇴
1974년 3월말, 서독 오픈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올리고 돌아온 우리 선수단은 해단과 동시에 당분간 팀으로 돌아가 훈련하기로 했다. 그간에도 협회는 4월 2일부터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릴 아시아탁구연합(ATTU) 주최, 제2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게 될 일본, 중국, 북한 등의 전력을 탐색하기 위해 임원진을 파견시키는 등 단 한 번의 국제경기 출전이라도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또 4~5월말까지 상비군 중에서 아시아경기에 참가할 선수 선발전을 2차에 걸쳐 실시해 남자 4명(최승국, 정차현, 강문수, 최근일)과 여자 4명(정현숙, 이에리사, 김순옥, 김진희)의 선수를 최종 선발했다. 이는 선수들의 국제적 적응도를 감안하여 1,2차 평가전 전수를 합한 남녀 각 2명까지를 성적순으로 뽑고, 나머지 2명은 협회 이사회에서 추천토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협회 이사회에서 추천 선수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고, 결국 결정을 해놓고도 매스컴이나 탁구인들의 반응이 탐탁치 못했다.
문제는 여자부였는데, 서독 오픈대회에 다녀온 이후 이에리사 선수가 편도선염 수술을 받고 이로 인해 안정을 취하고자 선발전에 불참했고, 정현숙 선수 역시 뚜렷한 이유 없이 불참했던 것이 발단이 되었다. 또 최종 평가전에서 종합점수는 1위 김순옥, 2위 박미라, 3위 성낙소(신탁은행), 4위 심경옥(외환은행), 5위 김진희(산업은행) 선수였는데, 순위 여부와 상관없이 5위인 김진희 선수를 선발한데서 문제가 커지고 말았다. 선발전에 참가하진 않았지만 이에리사, 정현숙 선수가 추천이 된 건 그렇다 치더라도, 성적순 1위인 김순옥 선수는 당연히 선발되었지만 2위까지를 뽑기로 한 결의를 뒤집어 2위를 빼고 5위를 선발했으니 여론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협회로서는 박미라 선수의 은퇴 의사를 팀 관계자로부터 보고 받았고, 이에 이에리사 선수의 복식조를 빨리 골라 이듬해 개최되는 세계선수권대회에 대비해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따라서 이에리사 선수와 복식 콤비를 이룰 수 있는 선수가 김진희 선수라는 코치진의 의사에 따른 결정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박미라 선수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사라예보 세계제패 신화를 일군 주인공의 한 사람이었던 박미라 선수는 온 겨레에 기쁨을 주었던 바로 그 눈동자에 눈물을 머금고, 아시아경기대회 파견 선발전을 겸해 그해 5월 미국으로 이민 간 나인숙 선수와 함께 탁구라켓을 놓았다.
전주여중 1년 때부터 탁구를 시작, 동덕여고 2년에 전입하면서 본격적으로 탁구를 배운 박미라 선수는 70년 산업은해 탁구팀에 입단, 72년 12월 스칸디나비안 오픈대회에 참가하면서 대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중국이 문화혁명 후 참가한 대회로 유명해진 이 대회에서 한국 여자팀이 단체 3위의 성적을 거두는데 수훈을 세우며 이에리사와 조를 이룬 복식에서 은메달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유고 사라예보 제32회 세계선수권대회 단체전에서 이에리사 선수와 역시 복식 파트너로 활약, 한국이 처음으로 세계정상에 오르는데 공훈을 세우고 단식에서는 준결승까지 진출, 한국탁구 사상 최초로 개인단식에서 동메달을 획득하고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5.16 민족상을 수상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이렇게 실력도 실력이지만 드물게 보는 미인으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박미라 선수는 자의 반, 타의 반의 은퇴를 맞이하면서 많은 언론 기자들의 물음에 ‘그래도 오는 아시아경기대회와 다음해 세계선수권대회까지는 뛸 생각이었는데…, 라며 말을 잊지 못하기도 했다.
선수들은 은퇴할 때 누구나 시원섭섭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한국 탁구계의 실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박미라의 ‘시원섭섭하다’는 그 흔한 소감에서 많은 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진심에서 우러나는 동정을 보내게 될 것이다. 많은 아쉬움을 남기기는 했지만, 산업은행 소속으로 천영석 감독 밑에서 화려한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탁구계를 떠난 박미라 선수…. 23세의 꽃다운 난이가 무색한 그의 은퇴가 모든 탁구인과 협회로서도 안타까웠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어쨌든 선수선발과 함께 임원진은 감독에 천영석, 손병수 씨를 결정하고 그 해 6월 1일부터 태릉선수촌에 입촌, 승리관에서 무더위를 견뎌내며 신화 재창조를 위해 낮과 밤을 잊을 채 하루 12시간씩의 강훈련으로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 오늘의 고통, 내일의 영광 」이라는 슬로건 아래, 먹고 자는 최소한도의 휴식 시간을 빼고는 훈련에 훈련만을 거듭한 우리 선수단은 여자는 금메달 1개와 은메달 2개, 남자는 동메달 획득에 목표를 두고 필승의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지난 66년 제5회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주최국인 태국과 2위 다툼의 경쟁에서 우리 김충용 선수가 맨 마지막으로 개인단식에서 금메달을 따내 한국이 종합 2위를 차지한 바 있었다. 그런데 70년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하기로 했다가 국내 사정에 의해 25만 달러와 함께 주최를 포기하고 다시 태국으로 반납하게 됐을 때, 전 대회에서 김충용 선수의 금메달 획득으로 인해 태국 당국이 3위로 처졌다는 이류로 태국은 제6회 대회에서 탁구종목을 제외시켰고, 이로써 우리 탁구는 뜻하지 않은 4년여의 공백을 가져야 했었다. 그리고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부터는 중국, 북한, 바레인, 이라크, 쿠웨이트, 라오스, 몽고 등의 7개국이 새로이 참가하게 되어 그 어느 때보다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탁구는 우리 한국을 비롯해 2위인 중국, 3위인 일본이 모두 참가하여 사실상의 세계선수권대회나 다름없는 형편이었고, 여기에 그간 눈부신 성장을 이룩한 북한마저 참가함으로 체력과 정신력, 그 양면에 걸친 강화훈련이 절실했을 뿐 아니라, 이에 임하는 선수단 또한 결사의 의지가 높았다.
17개월 만에 무너진 세계정상
1974년 9월 1일부터 9월 16일까지 16일간,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에서 개최된 제7회 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우리 한국의 15개 경기종목 선수단은 8월 28일, 전세 비행기로 현지에 도착했다. 정해진 선수촌에 여장을 풀자마자 우리 탁구 선수단은 섭씨 30〫〫°를 웃도는 뜨거운 날씨에 적응하기 위한 현지 적응 훈련에 들어가는 동시에 타국의 훈련 상황을 관찰하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드디어 탁구 첫 경기가 열리는 9월 8일, 여자단체 A조 예선에서 한국은 네팔을 3:0, 홍콩을 3:0으로 가볍게 누르고 A조 마지막 경기에서도 일본을 3:2로 이기고 조1위를 차지했다.
이날 일본과의 경기에서 이에리사 선수가 일본의 오제끼와 맞붙어 세트 스코어 2:1로 첫 단식을 따낸데 이어, 2번 단식 역시 정현숙 선수가 에다노를 맞아 2:0으로 이기며 순탄히 경기를 이어가는 듯 했다. 그러나 복식에서 이에리사.김진희 조가 오제끼.에다노 조에서 0:2로 패하고 3번 단식에서도 이에리사 선수가 에다노에게 1:2로 패함으로써, 총 2:2 타이를 이루며 일본과 조1위를 두고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에 오제끼 선수와의 마지막 단식만을 남겨둔 정현숙 선수는 첫 세트를 14로 이기더니 2세트에서는 -13으로 패해 조바심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3세트에 돌입해 19:17로 리드를 하고 있었으나 곧 19:20으로 역전, 절망스런 분위기였다. 그러나 정현숙 선수는 침착한 커트 플레이로 맞서 펀치를 모면, 듀스의 시소 끝에 22:20으로 일본을 누르고 결승 진출의 길을 터냈다.
한편, B조에서는 중국이 1위, 북한이 2위로 올라와 준결승에서 남북대결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1위를 하여 금메달을 딴다는 것보다 남북대결에서 이기느냐, 지느냐가 더 큰 과제였다. 결국 준결승전에서 대전하게 된 양쪽의 임원과 선수 모두는 매우 난감하고 또한 심각했다. 탁구대를 사이에 두고 양편 선수는 물론 응원단까지 남북으로 갈라 앉은 경기장은 득점할 때의 박수 소리를 제외하고는 일절 욕설이나 야유가 없는 숙연하고 엄숙한 분위기였다. 경기장에는 한국에서 1백여 명, 북한에서 70여 명의 응원단이 모여 관전했는데 우리는 승산이 있는 경기임으로 여유로운 마음으로 간간히 박수만 쳤고, 북한은 경기에 지고 있던 탓에 가지고 온 인공기 한번 흔들어보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경기 전적은 한국의 일방적인 게임으로 이에리사가 박영순 선수에게 2:1, 정현숙 선수가 박영옥 선수에게 2:0, 이에리사.김순옥 조가 박영순.김창애 조에게 2:0으로 이겨 토털 스코어 3:0의 수월한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준결승에서 일본을 3:1로 이기고 올라온 중국과의 결승전이 펼쳐지던 9월 11일, 불행하게도 한국은 이에리사 선수의 부진으로 3:1로 패하고 말았다.
첫 단식에서 정현숙 선수가 정회전 선수를 맞아 2:1로 역전승을 거두어 기세를 올렸으나 2번 단식에서 이에리사 선수가 중국의 랭킹 1위인 장립 선수에게 0:2로 허무하게 무너진 데 이어, 복식에서도 이에리사.김순옥 조가 장립.정회전에게 0:2로 져 토털 스코어 1:2가 되었다. 4번 단식에 임한 정현숙 선수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장립 선수에게 -11, -14로 역시 패하고 말아, 17개월 만에 세계정상의 자리를 빼앗겼다.
뿐만 아니라 동메달 획득에 목표를 둔 남자 단체전도 B조 예선에서 홍콩에게 5:4, 일본에게 5;1로 져 B조 3위로서 이란과 5,6위전을 펼쳐 5:4로 승, 5위의 성적에 만족해야 했다.
여자부 개인단식에서는 정현숙 선수가 준준결승에서 일본의 에이스 오제끼를 맞아 시소 끝에 3:2로 이기고 준결승에 진출, 사라예보의 단식 우승자인 중국의 호옥란 선수를 3:0으로 제치고 장립 선수와 결승에서 다시 한 번 맞붙게 되었다. 정현숙 선수는 우승을 의식한 지나친 긴장으로 게임이 잘 풀리지 않아 초반, 1,2세트를 -10, -13으로 쉽게 내주고 말았다. 3세트를 맞아 혼신의 힘을 다하여 19로 이겨 한 세트를 만회했으나 장립 선수의 호전에 밀려 4세트를 -15로 빼앗기고, 토털 스코어 3:1로 아깝게 패해 은메달에 그치고 말았다.
혼합복식에서도 강문수.김순옥 조가 중국의 시은정.호옥란 조를 3:2로 이기고 올라가 결승에 진출하였으나, 중국의 양과량.정희전 조에게 2:3으로 패해 은메달 획득에 그쳤다.
여자복식에서는 이에리사.김진희 조가 준결승전에서 중국의 장립.정희전 조에게 3:0으로 패하고 3,4위전에서 북한의 박영순.김창애 조에게 3:2로 패해 동메달의 입상마저 놓치고 말았다. 따라서 우리 선수단은 여자단체전과 여자 개인단식(정현숙), 혼합복식(강문수.김순옥)에게 3개의 은메달만을 획득했다.
◈ 아시아경기대회 종목별 입상 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