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원효대사’냐, 한승원 ‘소설 원효’냐 |
한국문단, 부처님오신날 맞아 친일작가 도서 출판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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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남에서 펴낸 <원효대사> ⓒ2006 CNBNEWS |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 장편소설의 뿌리라 불리는 <무정>과 근대 단편소설의 씨앗 '소년의 비애'를 쓴 작가 춘원 이광수를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그가 비록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기간 중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을 돕는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하더라도, 그를 빼놓고 우리 소설문학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춘원 이광수는 열한 살 때 부모를 모두 잃고 동학도가 되어 온갖 힘겨운 삶을 살다가 1919년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해 3.1만세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그 뒤 베이징과 상하이, 블라딕보스토크, 하얼빈, 시베리아 등지를 떠돌면서 도산 안창호(1878~1938)를 만나 대한 독립의 큰뜻을 품었다.
이어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맡으면서 <마의태자> <단종애사> <이순신>등 장편 역사소설을 연재했으며, 이순신 장군 유적지 복원사업 등을 폈으며, 조선일보 부사장 및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는 장편소설<이차돈의 사> <세조대왕> <애욕의 피안> 등과 <일사일언> 등을 연재하는 등 일제 강점기 대표적 문인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나는 이 소설에서 원효를 그릴 때 그의 환경인 신라를 그렸다. 왜냐하면 신라라는 나라가 곧 원효이기 때문이다. 크게 말하면 한 개인이 곧 인류 전체이지만 적어도 그 나라를 떠나서는 한 개인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효는 사람이거니와 신라 사람이었고, 중이거니와 신라 중이었다" -이광수, '내가 왜 이 소설을 썼나' 몇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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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한승원이 펴낸 <소설 원효> ⓒ2006 CNBNEWS | 우리 민족이 낳은 부처라고 불리우는 '원효대사'를 놓고 한국문단이 꽤 시끄럽다. 더우기 불기 2550년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있어 논란의 불꽃이 더욱 타오르고 있는 것 같다. 논란의 불씨는 춘원 이광수가 쓴 <원효대사>(화남출판사)와 작가 한승원이 쓴 장편소설 <소설 원효>(김영사)가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것이기 때문.
화남출판사에서 나온 춘원 이광수(1892~1950)의 <원효대사>는 춘원이 지난 1941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연재했던 장편소설의 재출간이며, 김영사에서 나온 작가 한승원(67)의 <소설 원효>는 작가가 3년 넘게 원효의 삶과 사상을 작가의 시선으로 새롭게 비춰낸 세 권짜리 장편소설이다.
먼저 이메일로 논란의 불씨를 지핀 쪽은 작가 한승원. 그는 화남출판사의 편집주간 이승철(48) 시인에게 "친일작가의 작품은 요란스럽게 미사여구를 동원하고, 합리화하더라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라며, "이광수의 책이 시장에 나가게 되면 이주간과 출판사의 면목이 없어진다. 양식이 살아나 주기를 바랄 뿐이다" 라고 꼬집었다.
이에 화남출판사 쪽에서는 "작가 한승원의 출판중지 압력은 다름아닌 우리 헌법에 보장된 '출판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사항"이라고 판단, 한승원의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즉, 친일작가가 쓴 문학작품이라고 해서 독자가 맛본 감동을 의미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독자에 대한 모독일뿐만 아니라 특정작가의 지나친 자기오만"이라는 것,
이승철 주간은 "친일작가이기에 책을 펴내서는 안된다는 주장과 논리는 지금 대표적 친일시인으로 꼽히는 서정주 등 친일작가들의 책들을 모두 출판하지 말라는 주장과 다름 없는 주장"이라며, "출판사가 친일행적이 있는 작가의 작품을 펴낸다고 해서 그 작가의 친일행위를 비호하는 것도 아니다"고 못박았다.
하지만 작가 한승원은 지난 해 12월 하순부터 5차례에 걸쳐 "원효는 중생을 도탄에 빠뜨리는 전쟁을 중단하라고 외친 반전주의자"라고 지적하고, "이광수는 '원효대사'를 전쟁주의자로 묘사해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를 대동아전쟁에 참여하도록 충동질했다"고 되쏘았다.
이에 대해 이승철 주간은 "친일행위는 비판받되, 작품은 작품으로서 읽히고 평가되어야 옳다"라며, "어떤 이유로도 출판의 자유는 침해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원효의 사상은 여러 작가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고 되풀이했다.
이 주간은 "특히 우리 출판사 편집위원으로 있는 이재무, 박선욱, 임동확 시인에게 친분을 이용하여, 이 책의 발간을 중지하라는 내용의 이메일과 전화를 걸었다"라며, 이는 "자기 독존적 의식의 발로"라는 것.
김준태(조선대 교수) 시인은 "작가 춘원 이광수는 '소 한 마리를 잡아서 통으로 삶을 수 있는 큰 기름가마' 속에서 원효를 건져내 살린다"라며, "나는 이광수가 문학적으로 원숙기에 접어든 50대 초(1942)에 쓴 이 소설을 통하여 그의 천재적인 재능 못지 않게 '작가로서의 야심'을 저버리지 않고 창작에 전력투구했다"고 말한다,
김준태는 "소설 '원효대사'의 한계는 주인공 '원효의 한계'가 아니고 일제 강점기를 살다간 춘원 이광수의 한계이었음을 부인하지는 못하리라"라며, 이제는 정말 '원효'를 '걸림이 없이' 자유롭게 읽은 때가 온 것 같다고 덧붙혔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서울대 명예교수)은 "원효를 조선민족으로 보고, 한민족 자체를 인격화한 이 작품은 일제 말살정책에 맞서 우리 말과 글로 쓴 춘원의 대표적 역사소설"이라며, "우리 말과 글이 캄캄해지는 막바지에서 우리 말과 글로써 어둠을 조금 밝힌 점에서도 평가될 수 있다"고 평했다.
이승철 주간은 "춘원 이광수의 <원효대사>가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 발표된 때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직후였으며, 일제가 내선일체를 미끼로 황국신민화정책을 펴던 때"라며, "이 때 총독부는 나라가 어지러울 때 원효가 승병을 일으킨 것처럼 한민족에게 '국가총동원'이라는 선전성을 노렸지만 이광수는 이를 역이용하여 한민족의 민족정기를 불러일으키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삼았다"고 말했다.
한편, 원효대사(617-686)는 한국불교가 낳은 불멸의 성사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은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서 "원효는 단군 이래 처음이면서 마지막 사상가다, 원효는 한반도 사상을 총체적으로 담고 있는 우주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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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철 편집주간. ⓒ2006 CNBNEWS | 다음은 이광수 장편소설 <원효대사 1, 2>를 펴낸 화남출판사 이승철 주간과 작가 한승원 사이에 주고 받은 이메일 논쟁에 대한 일문일답이다.
-작가 한승원과 5차례에 걸친 이메일 논쟁이 있었다는데, 이 논쟁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 책의 발간이 준비 중인 지난 2005년 12월 하순부터 왕복 5차례에 걸쳐 작가 한승원 선생과의 이메일 논쟁이 있었다. 또한 작가 한승원은 편집주간으로 있는 저와 편집위원으로 있는 이재무, 박선욱, 임동확 시인에게 친분을 이용하여, 이 책의 발간을 중지하라는 내용으로 이메일과 전화를 했다"
-작가 한승원이 이광수 작, <원효대사 1, 2>에 대해 재출간을 하지 말라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출판사의 입장은?
"작가 한승원은 이광수가 일제 말기에 친일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이 책의 발간을 하지 말라고 했다. 또한 한승원은 "이광수의 원효대사가 견강부회한 억지 논리이며, 원효의 사상을 오독한 것이다, 친일작가의 작품은 요란스럽게 미사여구를 동원하고, 합리화하더라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 이광수 책이 시장에 나가게 되면 이주간과 출판사의 면목이 없어지고, …이주간과 편집위원들의 양식이 살아나주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하면서 이 책의 발간을 중지하라고 유형무형의 압력을 넣었다.
이에 대해 출판사는 한승원의 출판중지 압력은 다름아닌 우리 헌법에 보장된 <출판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사항이라고 보고, 한승원 선생의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즉, 문학작품이란 친일작가가 쓴 작품이기에 독자가 친일작가의 작품에서 맛본 감동이란 의미없다고 한다면, 이는 이를 읽는 독자들에 대한 모독일뿐더러 특정작가의 지나친 자기오만이라고 비출 수 있다.
또한 친일작가이기에 책을 펴내서는 안된다는 주장과 논리는 지금 대표적 친일시인으로 꼽히는 서정주 등 친일작가들의 책들을 모두 출판하지 말라는 주장과 다름 없는 주장이 아닌가? 출판사가 친일행적이 있는 작가의 작품을 펴낸다고 해서 그 작가의 친일행위를 비호하는 것도 아니며, 친일행위는 비판받되, 작품은 작품으로서 읽히고 평가되어야 옳다.
이광수의 원효대사와 한승원의 원효대사를 비교해보고, 달라진 시대의 스펙트럼을 통해 한 작가가 원효라는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고, 해석해냈는가는 독자와 한국문학의 발전을 위해 오히려 바람직한 현상이 아닌가.
작가 한승원 선생의 주장대로라면 원효에 대한 평가와 작가적 시각은 오직 작가 한승원적 시각과 평가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견해는 어찌보면 불교의 사상을 근본적으로 뒤짚어엎은 오독의 소치이다. 어느 한 영특한 작가만이 원효에 대해 소설을 쓸 수 있고, 화남에서는 '이광수의 원효대사'를 펴내지 말라는 강권적 주장은 작가 한승원 선생님만이 원효사상을 쓸 권리가 있다는 자기 독존적 의식의 발로이다.
게다가 이광수의 <원효대사>를 출판하지 말라는 주장은 이광수의 원효는 필요없고, 한승원의 원효만이 이 세상에 필요하다는 주장처럼 들리며, 이는 한쪽 방향에서만 원효라는 그 큰바다를 봐야한다는 작가 한승원의 주장은 상당 부분 설득력이 없다.
아울러 한승원 선생이 회원이자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문학단체인 민족문학작가회의와 이 문제를 결부하지 말 것과 작가회의가 친일작가의 작품은 출판하지 말라는 주장과 견해를 지금까지 내놓은 일도 없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또한 이광수 작 <원효대사>의 출판을 기화로 원효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의 폭이 깊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한승원 선생이 지난 3년 동안 정말 공들여 쓴 작품이라면 독자들이 그 작품을 외면할 리 없고, 또 이광수의 <원효대사>를 읽는 독자들과 평자들에게 이를 비교해서 읽는 재미를 던져주는 흥미있는 일이 될 것이 아닌가."
-작가 한승원은 이 논쟁의 결과 출판사 측에 책 발간을 중지하라는 자기 주장을 철회하였는가?
"그렇다. 작가 한승원은 이승철 주간의 이러저러한 반박의 글을 보고서 결국 <밥 문제인데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것 같다> 라고 하면서 책 발간을 중지하라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면서 <출판 시장에서 만나서 경쟁하자>라는 식으로 그동안의 주장을 철회하였다".
춘원 이광수는 누구인가?
우리 나라 최초의 장편소설 '무정' 발표
춘원 이광수는 1892년 2월 1일(음)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열한살 때 부모를 잃고, 동학교도가 되었다. 그 뒤 의암 손병희의 추천으로 일본 파견 유학생이 되어 일본 메이지학원을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철학과를 수학했다. 아명은 보경(寶鏡). 호는 고주(孤舟), 외배, 장백산인(長白山人), 춘원(春園).
1917년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을 발표, 우리 나라 소설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했으며, 1919년 도쿄에서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신문> 편집국장, 사장을 지냈다. 1923년부 터 약 12년 동안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 및 편집국장을 맡았다.
1924년, 문예지 <조선문단>을 맡으면서 수많은 창작품을 발표했으며, 시인 김소월을 가르쳤고, 시인 조운 등과 작가 심훈·채만식·한설야·박화성 등을 발굴했다. 1937년 6월에는 도산 안창호 등과 함께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돼 투옥되기도 했다.
하지만 1939년 '조선문인협회' 회장과 '조선문인보국회' 이사 등을 맡으면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기간 중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에 부응하는 친일행적을 남김으로써 한국 근·현대문학사의 영욕과 파란의 상징이 되었다.
대표 장편소설로는 <흙> <유정> <사랑> <그 여자의 일생> <군상> <마의태자> <단종애사> <이순신> <이차돈의 사> <세조대왕> <사랑의 동명왕> <꿈>이 있으며, 대표 단편소설 '소년의 비애' '가실' '무명', 전기 <도산 안창호>, 수필집 <돌베게> 등이 있다.
이 책 <원효대사>는 춘원의 나이 51살(1942년) 때 창작한 장편소설로, 유일한 우리말 신문이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7개월 동안 연재했던 소설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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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