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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길 걷기 ㅡ 입곡저수지 작성: 도희주
경남 함안군 산인면 입곡리 1240번지. 호주(戶主) 입곡저수지. 사방은 온통 낮은 산들로 둘러싸였다. 상반기 아름다운 길 걷기에 동참한 회원들은 모처럼 회색 도시와 아스콘 길을 벗어나 즐거운 표정들이다.
4월의 산야는 눈과 귀 그리고 폐와 심장을 들뜨게 한다. 아파트 뜰에서 잘 안 들리던 새소리는 다 어디로 갔을까 했는데 여기서는 마냥 반갑다고 짹짹거리며 인사들이다. 가파른 길을 걸을 때는 숨이 차다. 그것마저도 즐겁다. 폐에 쌓인 미세먼지와 자동차 배기가스가 시원스럽게 정화되는 느낌이랄까. 오늘은 자연의 세탁소에 내장과 영혼을 제대로 한 번 돌려볼 참이다.
계곡입구에 들어설 때는 산이 전부일 것 같은 풍경이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가 모퉁이를 돌아서니 산 그림자를 모두 담고 조용히 수면에 파동조차 없는 호수가 있었다. 문득 시간이 멎는다는 생각. 바람도 새소리도 없어진 정적!
공기의 흐름마저 멈춘 듯 적막한 호수 옆으로 낚시꾼 하나가 수면을 바라보며 앉았다. 미동도 없다. 시간뿐만 아니라 낚시꾼을 비롯해 내 움직임마저 가위눌린 듯 정지한 느낌. 그런 착각에 잠시 나도 움직이지 않고 수면을 바라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러다가 찌가 살짝 움직였다. 순간 낚시꾼이 고개를 든다. 바람이 일렁이고 여린 가지가 약간 흔들리면서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새들이 지저귀고 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얼른 돌아보았다. 이미 일행들이 저만치 가고 있다. 빠르게 걷다가 돌아보니 낚시꾼도 찌도 보이지 않는다. 잘못 보았던 걸까. 걸음을 옮기면서 혹시 강태공이 잠시 환생했던 것은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다가 혼자 웃고 말았다.
창원문인협회 17녀 3남이 입곡군립문화공원을 걷는다. ‘아름다운 길 걷기’에 ‘함께’의 의미에 각별한 방점을 찍고.
저수지 형상이 뱀을 닮았다지만 나는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싶었다. 일본 신화 속의 물고기 ‘고이’와 흡사하다. 제방에서부터 무지개다리까지 이미지가 그랬다. 기왕이면 이참에 새로운 전설 하나 스토리텔링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전설이었던 곳은 없으니까.
입곡산림욕장 입구에서 낯익은 식물들이 반갑게 다가왔다. 망개나무, 조록싸리, 찔레나무가 키대기를 하고 애기똥풀이 하늘거리며 샛노란 웃음을 짓는다. 또 한눈팔았다. 앞서가던 조재영 부회장이 낙오자 예방을 위해 내 보폭을 맞춘다. 살가운 대화가 오갔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발아래 식물들을 탐지하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치 ‘나는 자연인이다’ 녹화 한 장면 같았다. 발견! 어떤 식물을 빠른 손놀림으로 뿌리째 헤집어냈다.
“그게 뭐예요?”
“작둡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하얀 뿌리였다. 작두는 사전에 없는 말이며 맛은 더덕과 비슷하고 기관지에 좋다는 부연설명이 이어졌다. 연한 줄기를 비틀어 끊고는 앙증맞은 뿌리를 바지주머니에 쓱 넣었다. 작두콩은 들어봤어도 작두라는 식물은 금시초문이었다. 야생화와 식물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공영해 선생 빈자리가 훅 느껴졌다. 일단 메모했다. 이따가 검색해서 잔대임을 알았다. 딱주, 사삼(沙蔘)의 이명을 갖고 있었다. 어쨌거나 삼 종류였다.
돌계단을 차곡차곡 오르자 평지다. 해묵은 떡갈잎 지천이다. 걸음마다 사그작사그작, 바그작바그작 소리가 밟혀왔다. 4월의 숲길에서 지난 계절 멈춘 시간소리를 듣는 소소한 재미가 덤으로 따라왔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고약한 냄새가 다가왔다. 걸음을 더할수록 진하게 인정사정없이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인근에 축사 존재감을 들이댄다. 약속한 듯 침묵으로 앞선 일행들을 부지런히 따라잡는다.
잠시 쉬면서 보니 저수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다. 사실 여기는 인공으로 조성된 저수지다. 진녹색의 수면엔 잔잔한 물결이 일고 있다. 정말 낚시꾼은 어디로 갔을까. 내가 헛것을 본 건가? 찬찬히 저수지 주변을 살피다가 시선이 딱 멈췄다. 이럴 수가! 입곡군립문화공원 안내도에도 없었던 섬이 포착되었다. 코딱지만 한 섬엔 버드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흘러간 시간의 축적현상이었다. 박경리 소설 ‘토지’의 이야기가 태동된 하동 악양벌의 그 유명한 두 그루 소나무가 얼른 오버랩 된다. 묘목에 지나지 않은 버드나무가 훗날 이곳의 명물로 자리 잡는 날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았다.
쉼터가 잠시 쉬어가라고 했다. 먼저 도착한 회원들이 모자를 벗어 땀을 식히기도 하고, 목을 축이고 있었다. 기념촬영에도 여념이 없다. 나도 찍고 너도 찍어준다. 나도 어느 틈에 누군가에 의해 찍혔다. ‘하나, 둘, 셋’은 사진촬영에서 준엄한 구령이다. 셀카봉을 마주한 표정은 한결같은 웃음꽃이지만, 내일보다 하루 젊은 오늘의 젊은 표정은 다양했다.
아름다운 길 걷기 단체 인증 샷이 필요했다. 입곡 제일 명소 출렁다리에 섰다. 카메라는 나들이객에게 부탁했다. 스무 명은 어깨와 어깨를 다닥다닥 붙였다. 제각각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기억을 위한 기록은 셔터를 누른 손가락 타이밍에 좌우됐다.
지척의 팔각정엔 나들이 나온 중년의 남자 댓 명이 엉거주춤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아줌마들의 저력으로 밀어내기에 들어갔다. 강제는 아니지만 요즘 유행하는 위력(?)의 압도적 분위기에 밀린 듯 중년의 남성들은 천천히 일어나다가 우리를 보더니 바쁘게 자리를 비켜준다. 사실은 양보였을 것이지만. 스무 명이 촘촘히 앉았다.
사무국장은 아름다운 길 위에서 레크리에이션 시간을 선언했다. 감독 윤재필 회장, 극본 이희경 사무국장. 생방송이다. 회장과 사무국장을 제외한 열여덟 명은 팔각정에 앉은 자리에서 아홉 명으로 양분되었다. 감초 같은 조재영 부회장 팀과 다재다능한 전석철 감사팀으로. 일명 조 팀과 전 팀이다.
조 팀원은 한후남, 홍혜문, 이동이, 백서연, 도희주, 이주언, 유희선, 안순자
전 팀원은 김명희, 이둘점, 공태점, 강현순, 차순이, 정영선, 조덕연, 김보영
T.V 프로그램 중 ‘가족오락관’의 일부를 모방했다. 1부는 제시어를 언어가 아닌 몸짓으로 표현해야했다. 게임은 진검승부 아니든가. 스케치북에 쓰인 단어가 노출될 위기엔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였다.
“보인다, 보인다!”
엉성한 몸짓에도 불구하고 문인들의 직감이 빛을 더했다. 그게 뭣이라고. 우리 편 진행엔 애가 탔고, 상대편을 지켜보노라니 웃음 작렬이다. 우리가 하면 어렵고 남이 하면 쉽게 보이는 자기애(自己愛)가 높은 까닭이었을 것이다.
잠시 숨 고르기가 필요했다. 1부는 2부를 위한 준비운동에 불과했다. 2부는 속담을 몸짓으로 전달하기다. 희한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몸짓인데 답은 정답이 쏟아진다. 쑥떡같이 설명해도 찰떡같이 알아맞히는 놀라운 재치. 1부와 2부 합산 결과는 대동소이였다. 그러나 우열을 가려야했다. 조 팀이 이겼다.
작지만 큰 선물이 마련되어 있었다. 조 팀은 뜨개질수세미와 여행용 티슈 중에서 알록달록한 뜨개질수세미를 잡았다. 환호가 이어지기 무섭게 사무국장이 제동을 걸었다. 그야말로 진행을 맡은 국장의 재치 발현이었다. 양손 가득히 움켜쥔 뜨개질수세미를 상대 팀에게 선물하란다. 그것도 ‘져줘서 감사합니다.’ 인사까지 곁들여서. 그 속엔 MSG가 없었다. 찬탄과 박장대소가 저수지 수면의 물결을 뒤흔들었다.
인근 ‘국보반상’에 점심을 예약한 시간이 임박하고 있었다. 재미와 추억의 퍼즐을 챙겨 팔각정을 벗어났다.
저수지의 가장자리는 송홧가루가 띠를 이루었다. 바람은 붓이 되어 송홧가루로 추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숲길을 걸으며 나누는 이야기들을 쥐똥나무, 느티나무, 대롱나무, 말채나무, 단풍나무들이 알아듣는 체 가지를 흔든다. 얘들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모양이다. 물아일체였다. 자연과 동화되어 자연과 진심으로 얘기를 나누는 것. 가끔은 자연의 세탁소에 와서 영혼을 정화하고 자연과 동일한 언어로 대화를 나누어 볼 일이다. 혈관에 도는 피가 초록으로 변하는 느낌.
우리가 걷는 숲길 오른편엔 자생하거나 식수한 은방울꽃, 아네모네, 맥문동, 창포, 옥잠화, 붓꽃, 감국, 용머리, 둥굴레 등이 표지판과 함께 시선을 끌기도 했다. 그리고 함안문인협회 시화 10여 편이 걸려 과객을 반긴다. 중간 중간 조망대엔 과객들이 입곡의 풍경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읽고 있었다.
들어설 땐 미처 눈에 띄지 않았던 하류를 나도 모르게 돌아보았다. 좁은 출구를 범람하듯 물기둥에서 포말이 일었다. 상념에 젖었던 뭇 사람들의 방명록을 읽어 주며 멈췄던 시간들을 흘러 보내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근처 국보반상을 향해 달렸다. 전석철 감사 제자가 운영하는 곳이라고 했다. 특별손님을 위한 배려도 식탁에 차려낸다고 했다. 종업원이 식탁에 음식을 차려내는 동안 인당 15,000원은 가히 값어치가 드러났다. 게다가 전석철 감사의 인맥으로 푸짐함이 더해졌다. 음식을 목전에 두니 먼저 눈이 스캔하고, 코가 기미상궁 역을 자청하는 동안 뱃속은 염치와 줄 당기기다.
립 서비스가 아니었다. 회원들은 이구동성으로 극찬 릴레이였다. 신명 난 전석철 감사는 인근 맛 집 몇 군데를 즉석에서 읊었고, 안순자 부회장은 재빠르게 메모하기 바빴다. 강현순 선생은 두어 번 반복 끝에 위치와 상호를 달달 외웠다.
식후 백서연 차장 제안으로 강현순 선생이 추천한 카페에 대다수가 동행을 자청했다. 몇은 사무로 아쉬움을 겨드랑이와 옆구리에 끼고 빠져나갔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커피와 소나무’를 따로 같이 내비게이션에 찍고 출발!
건물주가 작정하고 만든 카페였다. 카페 건물은 평범하지 않았다. 미적 감각이 돋보였다. 입구에서부터 마당은 카페이기 이전에 수목전시장에 가까웠다. 헤벌쭉 반가운 표정으로 누군가의 전화를 받는 조각상. 궁금했다. 가까이 귀를 갖다 댔다. 상대방이 ‘사랑해’하며 전화를 끊는 게 아닌가.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고 싫어할 사람 있을까. 조각상의 저 남자 그래서 헤벌쭉했구나.
덴마크에서 귀화한 나신의 인어공주 옆에 윤재필 회장이 소심하게 앉았다. 어깨동무하고 싶은 마음 왜 없었을까? 그러나 최근 태풍 급으로 세간을 뒤흔든 미투에 적잖이 몸을 사리는듯했다. 적재적소의 소품은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았다. 분재 소나무도 귀한 몸값을 치렀음 직 했다. 야외 테이블은 커피를 파는 상업정신이 아닌 예술의 경지를 능가하는 장인정신이 엿보였다
각자 개성에 걸맞은 테이블을 차지했다. 때마침 물오른 직립의 솔 순은 생명의 이명이었다. 몽실몽실 영근 송화는 잠깐 내려놓은 휴대폰 덮개를 파고들어 액정에 송홧가루 칠갑이었다.
누군가 외쳤다.
“기차가 간다!”
먼 데서 기차가 그림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어쩌면 시간의 흐름은 본래 주관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시계를 없애버린다면 시간은 각자 라이프리듬에 맞춰 움직일 것이다. 아침을 오전 7시에 먹든 11시에 먹든 개인의 자유다. 한밤중에 차를 몰고 여행을 떠난다 해도 자유다. 시간이 내 것이므로. 여행은 바로 그런 자유를 위한 것이 아닐까. 모모의 시간 도둑들은 다 어디에 숨었을까. 아마 도시의 회색 빌딩, 출근차량이나 지하철 바퀴 안이나 시간 맞춰 떠나는 기차역 원형시계 뒤, 우리 집 컴퓨터 뒤 어둑한 곳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 우리들의 시간을 생쥐처럼 갉아먹으면서.
그래 떠나고 볼 일이다. 작은 호수도 그랬고 ‘커피와 소나무’가 그랬듯. 익숙한 도시 바로 옆에 이처럼 싱싱한 초록의 시간들이 여유를 즐기고 있었을 줄이야. <끝>
ㅡ31매ㅡ
첫댓글 아, 정말 새로운 놀라움이 여기에 있네!!!
간결한 문체에 마음이 끌리고
문장의 속도감에 눈을 뗄 수가 없고
서로를 연결시키는 문장력에 감탄하고
세밀한 사물들의 묘사에 놀라고
장문을 다루는 호흡에 다 부러워지고
연속 경탄을 하며 읽었습니다
글을 읽고나니
오늘 아침기분이 새로워집니다!!!
나드리길을 아주 신명나게 다시 그 길을 반복했어 가고 싶은 과거로의 회기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주말에 넉넉한 마음을 안고 우리가 걸었던 그곳에 아직도 남아 있을 창원문인협회 님들을 흔적을 떠 올리며 걷고 싶습니다. ㅋㅋ^^~♡
도희주 샘! 행여 글자 한 자라도 놓칠세라 머리속으로는 그 날을 되세기면서 아주 천천히 라일락 향기 음미하듯 읽었습니다. 연둣빛 아씨/김보영 선생님께서 극찬의 말씀을 해 주셨듯, 저도 김보영 선생님과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무튼 2018 춘계 아름다운 길 걷기 후기를 정말 맛깔스럽게 써주신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면서, 창원문학에 게재시 단체 사진 2~3매와 함께 실어 주시기 바랍니다.
예, 회장님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