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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4년 10월 27일(제43주) 오전 11:00
장소 : 인천은혜교회당
본문 : 신명기 3:18-22
제목 : 가나안 정복의 선봉이 되라
한 주간 잘 지내셨나요? 유명한 탤런트 일용 엄니 김수미 씨가 지난 10월 25일날 75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던 분인데... 사망 원인은 스트레스로 인한 혈당쇼크라고 합니다. 조사 결과 혈당지수가 500이었다고 합니다. 안타깝지만 우리도 언젠가는 그 죽음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그 죽음을 믿음으로 잘 준비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혹시 지난 주일날 설교 제목이 생각나시나요? 무엇이었죠? ‘광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제 그 광야생활 40년을 마치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란 광야에서 선포한 말씀이 신명기서입니다.
신명기(엘레 하데바림-말들은 이러하니라) 명칭은 70인 역에 나오는 것으로 신명기 17:18의 ‘율법서의 등사본’으로 두 번째 율법을 의미합니다. 이 신명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고 40년 광야생활을 인도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교훈하는 세 편의 설교입니다.
신명기서는 예수님과 사도들에 의해 가장 많이 인용된 구약 성경입니다. 신명기의 중요한 주제는 언약의 갱신입니다. 시내 산에서 처음 맺었던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 모압 평지에서 갱신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서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이제 요단강을 앞에 놓고 있습니다. 신명기를 시작하는 1:1에 보면 “이는 모세가 요단 조쪽 숩 맞은 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고 합니다. 즉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거룩하게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필요한 내용들입니다.
마라톤을 할 때 선두 그룹에 서서 달릴 때는 우승할 가능성도 있고 크게 지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라톤 선수가 선두그룹에서 낙오가 되어 뒷전에 밀려 있으면 몇 배나 더 힘이 든다고 합니다.
믿음생활도 선봉에 서 있을 때는 그렇게 피곤한지 모르지만 침체와 낙심에 빠져 뒷전에 밀려 있으면 너무도 힘들다고 합니다. 믿음생활은 죽어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평생 달려가는 영적 마라톤입니다. 그래서 믿음생활은 선두그룹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도록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한번 선두그룹에서 뒷전으로 밀리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나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죽을 힘을 다하여 달려갔다고 하였습니다. “너는 선한 싸움을 사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도다”(딤후 4:7-8절)
성도가 인생을 살 때에도 뒷전에 서 있는 것보다는 선두에 서서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재미가 있고 행복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5%의 상류층 그룹에 들어가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사업하고 돈을 벌려고 몸부림치는 인생을 삽니다. 상류층에 들어가면 인생이 신나고 재미있는 일들이 많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학생들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려고 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고 할까요? 왜 정치인들이 목숨을 걸고 국회의원이 되려고, 대통령이 되려고, 시장이 되려고 몸부림칠까요? 종합해 보면 상류층 그룹에 들어가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선두에 서서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믿음생활에서도 뒷전에 서 있는 것보다는 선두에 서서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자가 될 때 행복하며 영적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왕에 믿음생활을 해야 한다면 미지근하게, 적당하게 하는 것보다는 열정적으로 뜨겁게 하는 성도가 신바람이 나며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지금 우리는 영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헷갈리는 시대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조금만 딴전을 피우다가 보면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가고, 세상의 쾌락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더욱 믿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태도를 분명하게 명령하십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죄악이 가득한 시대에 에녹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세상 풍조를 따라 걷고 있을 때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창 5:22-24). 노아도 모든 사람들이 악독을 행하며 부패하고 타락하였을 때도 선두에 서서 당대에 완전한 자로, 의인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삶들이 당장은 외로워 보이지만 그러나 그 삶은 실로 위대한 것이며 승리의 삶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믿음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회색지대를 걷고 있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주일에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주일이 지나고 나면 세상 방식으로 사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시대를 산다고 하지만 우리는 다니엘과 같이 뜻을 정하고 세상과 구별되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믿음의 색깔을 분명하게 하면 고민과 갈등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철두철미한 삶을 살기로 결단했다면 이러한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 짊어지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봉에 서려고 하면 많은 고난과 역경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누명과 억울함을 각오해야 합니다. 기꺼이 광신자로 불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친구들을 잃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세상을 두려워하거나 손해 볼 것을 걱정하고 있다면 나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잃어버릴 때 영원한 것을 얻을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이나 인기를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게 될 것입니다.
믿음생활은 확실한 진리를 붙잡고 다니엘처럼 결단할 때, 노아처럼 각오할 때 제대로 된 믿음의 삶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봉독한 말씀을 가지고 “가나안 정복의 선봉이 되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출애굽 하여 광야생활 40년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표지는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는 대표적으로 7족속, 많게는 12족속의 원주민들이 터를 잡고 살고 있었습니다. 광야생활 40년을 마치고 이 요단강을 앞에 놓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입성과 정복에 대한 내용이 여호수아서입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정탐꾼들을 여리고로 보내어 그 성을 정탐하는 이이었습니다. 이제 정탐을 마친 후에 또 가장 먼저 해야 할 과제가 요단강을 건너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3장에 보면 이때가 요단강을 건너는데 가장 어려운 시기입니다. 요단강 물이 가장 많이 흐르던 때입니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수 3:15). 그런데 하나님의 기적으로 요단강을 무사히 건넜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그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데는 약 7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결국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습니다. 어떻게 그 어려운 일을 감당하였을까요? 내가 믿음의 가나안 정복을 앞에 놓고 있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선봉에 서라
본문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고 요단강 동쪽에 자리 잡은 두 지파 반인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요단 동편을 기업으로 받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에게 가나안 정복의 선봉에 서라고 명령합니다. 선봉에 서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18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셨은즉 너희의 군인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선봉이 되어 건너가라.”
지금 모세는 가나안 정복이라는 중차대한 일을 앞에 놓고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한 가지 중요한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아도 되는 동편에 기업으로 얻는 두 지파 반에게 가나안 정복의 선봉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아도 되니까 선봉에 설 이유가 없었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전쟁에는 많은 사람이 죽고 부상을 당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들에게 선봉에 서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선봉에 선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잘못하면 선봉에서 선 군인들이 제일 먼저 화살을 맞기도 하며,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여호수아 6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사람도 죽지 않고 그 견고한 여리고 성을 정복하였습니다. 그런데 7장에 보면 아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며 36명이 죽었습니다(수 7:5).
그렇게 볼 때 ‘선봉에 서라’는 말씀은 너희들이 먼저 목숨을 걸고 가나안 정복에 동참하라는 의미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지파 사람들이 큰 용기와 담력을 얻어 가나안 정복에 큰 효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유다 지파는 상당히 중요한 지파입니다. 광야생활 40년일 말하고 있는 민수기에 보면 이스라엘 12지파의 진영과 행군이 나옵니다. 행군할 때든 진을 칠 때든 하나님의 성막이 중앙에 있고 동서남북으로 3지파씩 둘러쌌습니다. 동쪽에는 ‘유잇스’, 서쪽에는 ‘에므베’, 남쪽에는 ‘르시갓’, 북쪽에는 ‘단아납’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행군이나 진을 칠 때 항상 선봉에 선 지파가 바로 유다지파입니다.
사사기 1:1-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1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어느 지파에게 선봉을 맡기셨습니까? 유다 지파에게 선봉을 맡기셨습니다. 진을 치던 행군을 하던 매 순간마다 맨 앞에 서는 지파가 유다 지파였습니다. 유다 지파는 저돌적이고 적극적인 지파였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지파의 이런 저돌성과 적극성을 사랑하셨습니다. 유다 지파에서 메시아가 나온 것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유다 지파는 궂은 일이 있을 때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이렇게 나서는 지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의 이런 점을 귀하게 보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정적인 정탐꾼들의 보고를 받고 가나안 정복을 주저하고 있을 때 유다 지파의 족장이었던 갈렙이 일어나서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이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 14:12). 아주 담대한 요청이요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 때 갈렙의 나이가 몇 살이었을까요? 당시의 나이가 85세이었습니다. 당시 평균 나이가 40세였으니까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닙니다. 아니 다 늙은 노인인데도 청년의 마음을 가지고 ‘제가 맡겠습니다. 제일 어렵다는 헤브론까지 제게 주시옵소서’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갈렙의 이 용감무쌍함 덕분에 헤브론은 유다 지파의 땅이 되었고, 나중에 다윗에 의해 수도로 정해지는 영예를 얻습니다. 매사에 선두에 서서 충성을 다한 유다 지파는 세월이 지난 후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유대민족이란 이름으로 바뀌게 됩니다. 한 집안의 이름이 한 민족의 이름으로 확정된 것입니다.
유다의 가문이 복을 누리게 된 비결은 간단합니다. ‘선봉에 서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들은 선봉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기쁨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새로운 민족을 만들어 가셨습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 힘들어 쓰러졌습니다. 그때 ‘구레네 시몬’이라는 시골 사람이 예루살렘에 왔다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위에까지 올라갔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기쁨으로 자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닙니다. “... 그가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눅 23:26).
그 후에 구레네 시몬이라는 집안이 어떤 복을 받았을까요? 마가복음 15:21절에 보면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시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알렉산더와 루포라는 아들의 이름을 대면 알 정도로 자식이 유명한 초대교회의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감독 폴리갑이 빌립보에 보낸 편지를 보면 루포는 훌륭한 스페인 감독이 되었으며, 알렉산더는 귀한 믿음으로 순교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에 편지를 보내면서 안부를 전할 때 루포의 어머니를 ‘곧 내 어머니니라’고 하였습니다. 루포의 어머니를 자기 어머니로 표현할 정도로 소중한 믿음의 여성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롬 16:13).
하나님께서는 억지로 십자가를 졌던 구레네 시몬에게 자손이 잘 되는 놀라운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억지로 봉사했는데도, 마지못해 충성을 했는데도 좋은 것으로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의 일을 억지로 해도 열매가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면 얼마나 큰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는 것도 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은 인정하시고 상주시기 위하여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교회를 맡겨주셨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일을 하면서도 선봉에 서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세상일에 뒤지는 것은 속상해하고 싫어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에는 뒤지는 것에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영적인 무지함 때입니다.
이제부터는 죽을 때까지 영적인 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선봉에 서야 합니다. 헌신과 충성에도 앞장을 서야 합니다. 주님의 지상명령에 따라 전도하는 일에도 선봉에 서야 합니다. 어제도 호두과자 선봉에 선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부어질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도 선봉을 서야 합니다.
그때에 기뻐할 수 있고,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복을 누리기 원한다면 우리는 믿음의 선봉에 서야 합니다. 선봉에 서는 성도만이 막힌 길을 뚫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위험할 것 같아 보이지만 선봉에 선 사람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습니다.
기러기 떼가 하늘을 날 때에도 선봉에서 나는 기러기가 가장 많은 바람은 맞지만 뒤에서 따르는 동료들의 방향을 좌우한다고 합니다. 교회 전도와 부흥에도 선봉에 서는 성도가 있어야 그 사람을 중심으로 부흥이 일어나며, 새 시대를 열어가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 선봉에 서야 길이 닦이는 것입니다. ‘힘들다, 어렵다’ 하는 일에 가장 먼저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선봉에 서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독특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예배드리러 오는 성도들이 들어오는 순서대로 앞자리에 와 앉으면 그 교회는 되는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먼저 온 성도들이 뒷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 성향이 강하면 그 교회는 부흥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남들에게 우습게 보여도 주일 예배 시에 맨 앞자리에 앉는 것이 부흥의 선봉입니다. 앞자리에 앉아서 부흥을 주도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선봉에 서서 하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앞장서서 주님의 일을 행할 때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다 갚아 주십니다. 더 풍성한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교회의 일, 믿음의 일에는 선봉에 서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생명을 걸고 최선을 다해 협력하라
모세는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고 동편을 기업으로 얻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너희가 선봉에’ 서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안식을 얻어야만 너희 기업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강력하게 권고하였습니다.
요단강 동편을 기업으로 받은 지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땅과 기업을 지속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일까요? 자신들이 가나안 정복의 선봉에 서서 자신의 형제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곳에서 기업을 얻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한 운명 공동체이기 때문에 자신의 형제들이 요단강 서쪽에 있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곳에서 안식을 얻지 못하면 자신들의 기업도 조만간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
축구에서 최고의 공격이 최선의 방비책이라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다 완성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보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성도들이 영적 싸움에서 실패하는 원인은 대개 적당히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요단강 동편에서 먼저 기업을 얻는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 족속들이 왜 선봉에 서서 힘써 싸워야 할까요? 본문 2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 같이 너희의 형제에게도 안식을 주시리니 그들도 요단 저쪽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땅을 받아 기업을 삼기에 이르거든 너희는 각기 내가 준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전쟁에서 승리해야 자기 기업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에 실패하면 너희도 기업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배수진을 친 것입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가 영적인 배수진을 치고 가나안 정복에 앞장서서 목숨을 걸고 선봉에 서서 싸우자 가는 곳마다 승리를 하였습니다.
‘배수진’이란 강이나 바다를 등지고 치는 진을 말합니다. 이 말은 중국 한나라의 한신이 강을 등지고 진을 쳐서 병사들이 물러서지 못하고 힘을 다하여 싸우도록 하여 조나라의 군사를 물리쳤다는 데서 유래된 말입니다. 그래서 ‘배수진’이란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배수진’이란 말속에는 비장함이 서려있는데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 전법입니다. 사람이 큰일을 이루려면 그냥 되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어떤 대가를 치러야만 하고 특별히 배수진을 치고 도전할 때 큰일을 이루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도들도 이 시대에 믿음의 배수진을 치고 목숨을 걸고 싸울 때 영적인 가나안 정복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온 세상을 정복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창 1:27-28). 특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런 지상 명령을 주셨습니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현대 성도들은 대개는 나 혼자 평안한 믿음생활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곧 자신에게 망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소니, 샤프, 파나소닉 등 전자 대기업이 왜 망했을까요? 일본 전자산업이 몰락한 원인으로는 ‘6중고’가 꼽힌다고 합니다. 엔고, 전력난, 높은 법인세, 환경 노동규제, 자유 무역 협정(FTA)지체, 동일본 대지진 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세계 1등 기업이라는 안일함과 나태함에 빠져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지 않고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삼성과 애플에 초월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의 최대 기업이요 세계적 기업인 삼성전자가 그런 꼴이 되었습니다. 대만의 TSMC와 한국의 SK하이닉스에 추월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즉 공격적인 신경영을 도입하지 않고 현실상황에 안주함으로 위기에 빠졌습니다.
성도의 믿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만, 우리 가족만, 우리 교회만 잘되고 큰 어려움이 없으면 괜찮다는 안일함과 나태함이 지금 한국교회 전체를 무너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개척교회가 무너지고, 작은 교회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큰 교회들이 방심하고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 유럽교회이며, 미국 교회입니다.
교회는 생명과 운명공동체입니다. 농어촌 교회, 작은 교회가 무너지고 있으면 대형교회들은 그것을 내 문제로 알고 빨리 도와주며 섬겨주어 다시 일어나게 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중보기도로, 재정적으로, 인원적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교회 주변에 있는 교회들도 문을 닫는 교회가 많아졌습니다. 작은 교회를 살려야 미래가 있습니다. 함께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섬기며 도와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나 교회는 믿음의 일에는 생명을 걸고 최선을 다해 협력해야 승리하게 됩니다. 영혼을 살리고 교회가 잘 되는 일에 생명을 걸고 최선을 다하여 협력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라
본문 20-22절에 보면 모세는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0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 같이 너희의 형제이게도 안식을 주시리니 그들도 요단 저쪽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땅을 받아 기업을 삼기에 이르거든 너희는 각기 내가 준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고, 21 그때에 내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두 왕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네 눈으로 보았거니와 네가 가는 모든 나라에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행하시리라, 22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
모세는 가나안 정복의 선봉에 서야할 그들에게 ‘너희는 선봉에 서서 싸울 때 두려워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는 승리의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요단강 동편에 기업을 받은 자들이 가나안 정복에 선봉에 서서 싸울 때 하나님은 무슨 약속을 해주었을까요? 너희가 선봉에 서서 싸울 때 하나님께서 너희 앞에서 싸우리라고 약속해 주고 있습니다. 22절을 다시 보면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믿음의 일에 선봉에 설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나아갈 때 승리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그냥 부르시지 않습니다. 성도에게 사명을 주실 때에는 반드시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성도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선봉에 설 때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바로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시기에 나는 비록 미련하고, 연약하고, 부족할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명자의 자세이며,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믿음의 자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소명 앞에서 순종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과 같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는 믿음을 갖고 나가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선봉에 서는 성도가 가져야 할 믿음의 고백입니다.
헨리 나우웬이라는 유명한 영성가가 있습니다. 그분이 쓴 ‘죽음, 가장 큰 선물’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서커스 중에 공중 그네타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이 서커스를 보러 갔다가 공중그네타기에 매료됩니다. 그네를 타고 곡예사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아가고 저쪽에 있는 사람이 받아주는 그런 곡예입니다. 헨리 나우웬이 이 곡예사를 만난 자리에서 어떻게 그런 묘기를 펼칠 수 있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곡예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그저 저쪽 그네에 매달린 파트너가 나를 잡아줄 것을 믿고 그 사람을 향해서 손을 뻗기만 하면 됩니다. 만약 내가 그 사람의 손을 잡겠다고 내 힘으로 잡게 되면 그 사람도 다치고, 나도 다치는 불상사가 일어납니다.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안전하게 잡아줄 것을 믿고 그저 믿음으로 손을 뻗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힘으로 하겠다고 나아가면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의 손, 기도의 손, 하나님을 의지하는 손을 뻗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잡아주시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친히 인도하여 주십니다.
주님의 일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하십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손에 들린 마른 막대기일 뿐입니다.
그러나 마른 막대기에 불과한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들리면 그 막대기는 홍해 바다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 만들고,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엄청난 능력의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일어나는 역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놀라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 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이 말씀을 붙들고 맡겨주신 사명을 능력 있게, 담대하게 충성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믿음의 길을 가는 성도들에게는 정복해야 할 가나안 땅이 많습니다. 그 정복해야 할 영적인 가나안 땅이 무엇이든 믿음으로 정복하려면 가져야 할 세 가지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선봉에 서라는 것입니다. 선봉에 서면 위험하고 힘들 것 같지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주셔서 어떤 일이든 정복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둘째는 생명을 걸고 최선을 다해 협력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가나안 땅이라도 정복하게 됩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 두려움의 일들이 작아 보입니다. 그냥 밟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일에 선봉에 서서 정복해 나가는 우리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