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향교(陽川鄕校)는 1963년 김포군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서울에 있는 유일한 향교가 되었다.
궁산 아래에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다.겸재 정선이 양천현감으로 있으면서 진경산수를 그린 풍경이 빼어난 곳이다.
이 향교는 태종 11년(1411) 창건되어 문묘(文廟)의 기능과 함께 지방 교육기관의 기능을 하여 오다가
융희 3년(1909) 7월 5일 소학교령 대신 보통학교령을 반포하고 고등학교령이 신설되는 등
학제가 크게 개편됨에 따라 조선말 전국의 모든 향교와 마찬가지로 교육기능은 상실되고
문묘의 기능과 교화사업만 담당하게 되었다.
붉은 색칠을 한 홍살문이다.
향교와 세상을 구분하는 홍살문이다.
바깥의 사악한 무리로부터 향교를 지키기는 홍살문이다.
홍살문의 붉은 색은 신성한 공간으로 침입하려는 잡귀를 막기 위함이다.
홍살문이라는 단어에서 살이라는 글자는 화살 전(箭) 자의 음이 아닌 살이라는 뜻을 딴 글자이다.
홍살문은 붉은 화살이 꽂혀있는 문이다. 문의 위쪽을 보면 화살들뿐만 아니라 삼지창도 꽂혀있다.
삼지창에는 삼 태극이 붙어있다. 화살도 삼지창도 모두 악귀를 몰아내는 무기다.
청색 적색 황색의 삼색이 바람개비 모양을 이루고 있는 삼 태극은
천+지+인 3 요소가 어우러지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를 상징화한 것이다.
우리 나라 홍살문은 신라때부터 발생하여 고려에 들어와서 널리 퍼졌다.
특히 성종이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으면서 정려(홍살문) 또한 많이 건립이 되었다.
"붉은 색깔만 얼씬 거려도 이유 불문하고 도망부터 쳐라!"
붉은 색에 혼줄난 도깨비 대장이 전국 도깨비들에게 내린 긴급 명령이다.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라는 천하의 한량이 살았다.
처용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워서 나쁜 귀신들도 탐을 내었다.
하루는 서라벌 도깨비가 꾀를 내어 처용이 집에 없을 때
처용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처용의 아내에게 갔다.
아내는 처용인 줄만 알았다.
처용이 밤 늦게 집에 들어와보니 이불에 다리가 네 개가 있는 것이다.
처용은 힘만 센게 아니라 아주 현명했다.
그는 화를 내지 않고 방에서 나와 달을 보고 시를 지어 읊었다.
처용은 얼굴색이 붉은 아라비아 상인이었다.
밤새 술까지 마셨고 성질까지 꾹꾹 참고 있었으니
그 붉은 얼굴이 훨씬 더 붉게 되었다.
그 도깨비는 붉디붉은 처용의 얼굴을 보자 그만 질겁을 하고
처용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 사죄하며
다시는 처용 근처에 오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줄행랑첬다고 한다.
이후 신라세시 풍속은 동짓날 자기 집 대문입구에 처용 얼굴을
상징하는 붉은 팥죽을 칠하였다.
이런 설화를 바탕으로 홍살문에도 붉은 색을 칠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외삼문이다.
외삼문으로 오르는 계단은 가운데 신도로 신이 다니는 길이다.
오른 쪽 계단은 향교에 들어 갈 때 이용하는 곳이다. 우측 통행하라는 뜻이다.
왼쪽 계단은 향교에서 밖으로 나올 때 사용하는 곳이다.
문도 세개의 공간으로 되어있다.
가운데는 어간으로 신이 통과하는 공간이다.
오른 쪽 공간은 협간으로 입장할 때 왼쪽 협간은 나올 때 활용하는 문이다.
외삼문을 지나면 만나는 명륜당(名倫堂)이다.
높디 높은 기단 위에 건물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다.
명륜당은 공립 중학교인 향교에서 학생들이
공부와 인격연마 수련을 하는 강학공간이다.
명륜당은 한자로 풀이해보면
그 기능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밝을 明 인륜倫 집堂이다.
'인간의 윤리를 밝히는 집'이다.
향교의 중심 건물로 학생들이
진정한 선비가 되기 위해 부단히
학문을 연마하는 곳이다.
강당(講堂)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마주보는 건물을 짓고 각각 동재(東齋).서재(西齋)라고 불렀다.
동재에는 생원, 서재에는 진사를 수용했다. 후기에 당쟁이 심해지자 당색에 따라 동·서로 학생을 나누어
수용한 적도 있었다. 지방교육기관인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에도 동재·서재가 있었다.
동재는 양반자제가, 서재는 평민자제가 많이 기숙했다.
명륜당에서 내려다 본 외삼문과 바깥 정경이다.
내삼문을 지나면 대성전(大成殿)이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대성전이다.
학문을 크게 일으킨 성현을 모시는 향교의 제사 공간이다.
문묘 대성전은 공자 안자 자사 증자 맹자 등 중국의 5성(聖)과
정호 주희 등 송나라 2현(賢)의 위패를 모셨다.
설총 최치원 안유 정몽주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18현(賢)의
위패를 모셨다.
봄(음력2월)과 가을(음력8월) 초정일에 석전대제를 지내며,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삭망례를 지낸다.
하마비는 조선조 태종
13년(1413)에 종묘나
대궐 앞에서는
"대소인을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의미로 세운 비다.
공자를 모시는 향교 앞에서도 하마비를 세웠다 한다.
양천향교역 인근 마을의
옛지명이 '하마비마을'
이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강서구는 1997년 비를
복원해 놓았다.
외삼문으로 오르는 계단 좌측에는 역대 현감과 현령들의 선정비(善政碑)가 모여 있다.
이는 1988년 중수하면서 양천 현아 주변에 있던 것을 지방 유림들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