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원(李家源.1917.4.6∼2000.11.9)
한문학자ㆍ서예가.
경북 안동 출생. 호 연민(淵民), 안동(安東)의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글방 훈장이던 조부(祖父)로부터 한학의 기초를 닦음. 1956년 성균관
대학 재직 중 자유당의 부정에 노골적으로 항거하는 학자라는 이유로 총장이던 김창숙(金昌淑)과 함께 파면된 후 2년 동안 실직했다가 당시 연세대
총장 백락준(白樂濬) 박사의 초빙으로 연세대에서 다시 학문을 계속했다. 연세대 교수 정년퇴임(82), 국민훈장동백장,
춘강상(1997.춘강기념사업회) 등 수상.
이가원은
퇴계 이황(李滉) 의 14대 종손으로, 전통적 서당교육을 받아 이를 근대 학문에 접목시켜 당대 최고의 한학자로 꼽히던 인물이다. 한학과 관련한
수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특히 <연암소설연구> 와 <조선문학사> 는 역저로 꼽힌다. <연암소설연구>는 실학자
박지원의 문학세계를 가장 폭넓게 조명해 이 분야의 교과서로 꼽히며, 조선문학사는 한문학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문학사를 총정리한 방대한 저술이다.
1917년
추노지향(芻魯之鄕: 공자, 맹자의 고향)으로 불리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선생은 서당교육을 받은 뒤 명륜학교(성균관대 전신) 에 입학했다.
선생은 이미 20대에 위당 정인보(鄭寅普), 육당 최남선(崔南善), 벽초 홍명희(洪命熹) 등과 교유하며 청년 문장가로 이름을
알렸다.
55년부터
3년간 성균관대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58년 파면을 당한다. 유림 종장이던 심산 김창숙(金昌淑) 선생이 독재의 길을 걷고 있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게 하야를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을 당시 이를 적극 지지했기 때문이다.
야인생활을
하던 선생을 '모셔간' 곳은 선생이 20여년간 재직했던 연세대. 당시 부총장이던 외솔 최현배(崔鉉培) 선생이 그의 저서 <교주
춘향전> 을 읽은 뒤 재능에 감탄해 백낙준(白樂濬) 총장에게 적극 추천했고 백 총장도 이를 기꺼이 수락해 그를 영입했다.
연세대
교수 시절 그의 학문은 본격적으로 꽃을 피웠다. <연암소설연구> 등의 작품이 이때 탄생한 것이다. 83년 연세대에서 정년을 마친
뒤에는 단국대 석좌교수, 학술원회원 등을 지냈다.
선생은
이미 15년 전에 충북 중원에 묘자리를 봐두고 비문까지 새겨놓은 채 학문연구에 매진했다. 그만큼 학문에 대한 선생의 사랑은 이념을 비롯해 다른
어떤 것보다 한 차원 위였다. 95년엔 고령의 나이에 <조선문학사> 집필에 들어갔다가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생은 "<조선문학사>를 끝내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 며 삶에 강한 의지를 보이면서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
<조선문학사>를 완성했다.
선생은
그제서야 제자들에게 "이제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학력】
1941
명륜전문학교 졸업
1952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54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
1966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1969
대만중국문화대학교 대학교 철학박사
【경력】
1955
성균관대학교 문리대학 조교수
1957
성균관 전학(典學)
1958
연세대학교 대우교수
1964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교수(-1982)
1970
유도회(儒道會)총본부위원장
1971
심곡서원 원장
1975
한문학회 회장
1981
한문학연구회 회장
1981
도산서원 원장
1983
단국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
1983
미술대전 심사위원
1986
퇴계학연구원 원장(-1989)
1997
학술원 회원(한국한문학)
【저서】<삼국유사>(46.번역본)
<연암(燕巖)소설연구> <한국한문학사조연구> <한문학(韓文學)연구> <조선문학사>
【한문문집】<연연야사제문고(淵淵夜思齊文藁)>
<연민지문(淵民之文)> <통고당집(通故堂集)>
<옥류산장시화(玉溜山莊詩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