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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3장
복종하는 경건한 혀, 하늘의 지혜로 거룩하게 사는 경건한 삶
(찬송 시편 130편 – 악보는 맨 뒷장에)
2023-11-10, 금
맥락과 의미
1:26,27은 참된 경건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이 세 가지를 2, 3장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약한 사람을 돌보는 경건(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을 2장에서 자세히 가르쳤습니다.
3장에서는 경건한 언어(혀에 재갈 먹이는 것, 1-12절)와 세속적이지 않은 경건한 삶(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함, 13-18절)을 자세히 가르치며 격려합니다.
1. 경건한 언어(1-12절)
2. 세속적이지 않고 거룩한 지혜로 살아가는 경건한 삶(13-18절)
1. 경건한 언어(1-12절)
1절, 사람들은 가르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은 사람의 영생과 관련된 것이므로 가르치는 일을 잘못하면 하나님의 더 큰 심판이 있습니다.
가르치기를 좋아하고 선생이 되려는 헛된 야망을 가지지 맙시다.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말을 경건하고 바르게 합시다.
사람의 말은 네 가지 점에서 중요합니다.
1) 말은 모든 삶을 이끄는 지도자(CEO, 2-5a절)
우리는 다 언어 생활에서 실족하여 넘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2절, 실수는 실족을 말함). 하는 말에 넘어짐이 없으면 삶 전체가 온전하게 성숙합니다. 2절, 언어 생활이 바르면 온 몸, 곧 삶 전체에 재갈을 물립니다(참고- 1:26).
3절, 달리는 말에게 일을 시킬 때도, 입에 재갈을 물리고 굴레를 씌워서 주인이 움직이고 싶은 대로 말의 몸을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큰 배도 작은 키를 가지고서 움직입니다. 5절, 이처럼 혀도 몸의 작은 부분이지만 온 몸을 움직이는 자랑스러운 능력이 있습니다.
2) 혀는 불처럼 태워버리는 파괴적인 힘이 있다(5b-6절)
작은 불이 큰 숲을 태웁니다. 그처럼 혀는 자그맣지만 불의한 목적으로 사용하면, 온 삶을 불의하게 만듭니다. 지옥에서 나온 불과 같이 불의한 일을 행하게 하고, 그 결과 불심판을 당하게 합니다.
3) 사람은 동물은 길들이지만 자기 혀를 길들이는 것은 힘들어 함(7-8a절)
7절, “사람이라는 본성을 가진 존재”는 “짐승이라는 본성을 가진 존재”를 길들입니다. 그렇지만 자기의 본성을 길들이는 일에는 무능합니다. 자기 혀를 길들이는 일에는 무능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셔서 만물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아담과 그 후손은 새와 짐승과 벌레, 물고기를 연구하고 길들이고 지배해 왔습니다.
그러나 아담 때부터 자기 혀는 길들이지 못했습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을 듣고도, “동산 중앙의 나무 열매를 따먹으면 죽을까 하노라”고 말했습니다. 모호하고, 거짓되게 말하는 것에 혀를 사용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지만, 말에 실수도 많습니다. 악한 생각을 표현하고 악한 일을 계획하는 데 혀와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4)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람을 저주하는 언어 생활(8b-12절)
8절, 사람의 혀를 바로 길들이지 않으면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성도가 혀로서 악한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저주하는 것처럼 일관성이 없는 행동입니다. 같은 샘에서 단물과 쓴 물을 내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11절,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12절, 마음에 짠물처럼 악을 쌓은 사람은 단물과 같은 선행을 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써 죄용서 받고 거룩하게 된 성령적인 새로운 본성에서는 악한 말이 나올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의 한 부분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을 저주하는 악한 말을 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2. 세속적이지 않고 거룩한 지혜로 살아가는 경건한 삶(13-18절)
1) 지혜로운 생각과 말, 고백이 있으면 행함으로 나타남(13-14절)
13절, “너희 중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언어 생활의 경건을 말한 다음에, 이제 삶 전체의 경건을 말합니다. 참 지혜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의로운 삶은 단순히 의무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참 평화를 누리는 지혜로운 삶입니다. 1:4에서 고난 가운데 연단을 받아 온전한 삶을 누리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한 삶을 위해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내려 주시는(1:17) 지혜를 구하고, 그 지혜를 따라 인내하며 연단 받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지혜는 생각이나 말에서 시작하지만 손발을 통해 열매를 맺습니다.
13절, 지혜는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온유한” 삶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향해 겸손하고 순하기 때문에 사람을 향해서도 부드러운 사랑을 실천합니다.
14절, 지혜가 있다고 하면서, 자기를 나타내는 야망 때문으로 시기 질투한다면, 사실은 지혜가 없습니다. 바보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행하지 않습니다. 온유하지 않고 야망과 시기에 가득 차 있으면서 무엇이 된 줄로 알고 자랑하는 것은 거짓된 행동입니다.
2) 아래 세상으로부터 온 지혜와 위로부터 온 지혜(15-18절)
15절, 시기 질투하며 자기 꿈을 성취하는 사람에게 이 세상은 “지혜롭다”고 칭찬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을 “똑똑하다, 창의적이다, 혁신적이다”라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경쟁심과 시기로 남을 누르고 성취하는 이 세상적 지혜는 “혼란”을 낳습니다. 악합니다. 이것은 세상적이요, 정욕을 따르는 것이요 마귀를 따르는 것입니다.
16절, “위로부터 내려온”(15절) 지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결합니다. 그래서 성도와의 관계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평화롭고 관용을 베품니다. 가르칠 때 “잘 설득됩니다.”가혹하게 판단하지 않고 힘든 사람을 동정하며 긍휼이 있습니다(2:13). 서로에게 유익을 주는 선한 열매가 가득합니다.
“편견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서도 “의심하는” 자들과 같지 않습니다. 의심하며 두 마음을 품은 자는 개인적으로 “정함이 없이” 혼란스럽습니다. 그들은 공동체에서 자비로운 눈으로 남을 대하기보다 서로를 의심하며 공동체를 흔들고 무질서하게 합니다. 두 마음(1:6)을 품은 자들은 “정욕적”(3:15)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지혜를 삶으로 사는 성도는 의심하지 않기에 공동체 안에 평화를 이룹니다.
“편견”의 다른 뜻은 가난하고 부족한 성도를 차별하는 것입니다(2:4). 하늘로부터 온 성령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편견이 없고 서로 차별하지 않고 평화를 이룹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따라 사는 성도는 거짓이 없습니다. 위선이 없이 진실되게 삽니다.
18절, 이것이 성도의 복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둡니다.” 온유하며 화평을 이루는 성도에게 교회를 화평하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과 복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이러한 복을 선언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새 하늘과 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마태복음 5:5,6,7,9,10)
이렇게 사는 사람에 대해, 삼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재림의 날까지)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빌립보서 1:10,11) 하실 것입니다.
누가 가장 인생을 지혜롭고 똑똑하게 사는 사람입니까?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디모데후서 4:4-8).
이 의로운 열매와 상을 위해 평화를 이루는 말을 하고 평화를 위해 행동합시다.
믿고 복종할 일
우리 마음의 야망과 탐욕 때문에, 우리의 언어가 혼란스러워집니다. 마음의 악함과 약함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다시 우리 마음을 세탁합시다. 성령님을 의지하여 거룩하게 변화되어 갑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전에 어울리게 서로를 세우고 은혜를 끼치는 축복의 말을 합시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주님께 순종합시다. 그 때문에 항상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하게 섬깁시다. 나의 야망 때문에 가정과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맙시다.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평화를 만듭시다. 평화의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의의 열매가 많이 맺힙니다.
먹고 마시는 염려 때문에 서로 경쟁하고 무시하지 말고, 오직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합시다. 그렇게 살며 성실히 일하는 성도에게 주님께서 이 땅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십니다. 주신 것에 자족하며 우리의 온 관심을 의를 위해, 평화의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집중합시다. 이렇게 살기 원하고 각오하는 모든 성도에게 주께서 복주시기를 원합니다.
1. 오늘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2. 오늘 말씀에서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말씀에서 순종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굴레 씌움(2절)=재갈 물림(3절), 제어(3절)=운행(5절)
2절, 언어 생활이 바르면 온 몸, 곧 삶 전체를 굴레 쒸웁니다(칼린-아고게오) 1:26에서는 “재갈 먹인다”고 했습니다.
3절, 달리는 말의 입에 재갈(굴레, 칼리노스)을 물립니다. 그래서 제어합니다(메타아고). 4절, 큰 배도 작은 키를 가지고서 운행합니다(메타-아고).
<참고> 7절 사람과 짐승의 본성
7절, “사람이라는 본성(피시스)을 가진 존재”는 ”짐승이라는 본성(피시스)을 가진 존재”를 길들이지만, 자기의 본성을 길들이는 일에는 무능합니다.
<참고> 8절, 사람의 혀는 독(이소스)이 가득할 수 있음
독(이소스)은 로마서 3:13=시편 140:3,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야고보서 5:3, 탐욕으로 쌓은 재물에 생기는 “녹” 등에 쓰인 말과 같습니다.
<참고> 12절, 열매 맺음=물을 냄 = 행함(포이에오)
12절, 마음에 짠물처럼 악을 쌓은 사람은 단물과 같은 선행을 내지 못합니다. “열매 맺는 자”, “물을 낸다”는 다 사람의 행동을 나타내는 “행한다(포이에오)”는 말을 사용합니다.
<참고> 13절, 보이라
참 지혜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데이크니미). 2:18, 네 믿음을 (행함으로) “보이라”고 했습니다.
<참고> 정욕적(15절) 혼란(16절), 편견 없음(17절)=1:5-6
15-17절의 세상적 지혜와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가 다른 것은 앞에서 의심하는 기도와 의심하지 않는 기도가 차이 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세상적 지혜는 “정욕적이고”(쉽키케, 15) “혼란”(아-카타스타시아, 16절)스럽습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편견이 없습니다”(아-디아-크리시스).
1:5-6,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할 때는 “의심하지”(디아-크리노, 1:6)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의심없이 신뢰하며 기도하는 자들은 참 지혜를 받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향해 편견을 품지 않습니다(아-디아-크리시스, 3:17). 세상적으로 지혜로운 자들은 가난하고 부족한 성도를 차별하는 것입니다(2:4, 디아-크리노).
두 마음(디아-쉽코스, 1:6)을 품고 지혜를 구하는 자들은 “정욕적”(쉽키케, 3:15)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자세로 기도하는 교인은 “모든 일에 정함이 없습니다”(아-카타스타토스 1:8). 그런 사람은 공동체 안에 혼란(아-카타스타이아, 3:16)을 일으킵니다.
<참고> 17절, 양순
“양순”(유-페이토스)은 잘 설득된다는 뜻입니다. 유(잘), 페이토스(설득된다), 혹은 잘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참고> 요란 (아-카타스타시아, 3:16), 정함이 없음(아-카타스타토스, 1:8),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고난 받을 때 지혜를 구하면서도 두 마음을 품고 의심하는 자는 그 마음 속에 “정함이 없습니다”(아-카타스타토스, 1:8). 세상적인 야망 때문에 시기 질투하는 자는 공동체를 요란하게 합니다(아-카타스타시아, 3:16).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 가까울 때 세상에 서로 싸우는 전쟁과 함께 “요란”(눅 21:9)의 소문이 있어서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그런 요란함을 개인과 공동체 안에 낳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야망이 지배하면 서로 방언이나 영적 은사를 자랑하며 무질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지러움”(아-카타스타시아)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입니다(고린도전서 14:33). 고린도 교회는 심지어 영적인 은사에서도 야망에 사로잡혀서 서로 시기하면서 먼저 방언을 하려고 하여 예배에 어지러움이 있었습니다. 겸손은 예배를 질서 있고 평화롭게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다툼,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중상, 수군수군하는 것(뒷담화),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아-카타스타시아)”을 어서 버리라고 책망하며 권면했습니다(고린도후서 12:20). 사도 바울은 그런 “요란함”(아-카타스타시아, 고린도후서 6:5) 때문에 선교할 때 곳곳에서 여러 교회에서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 유튜브에서 “정영철 시편 130편”을 찾아 들으며 연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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