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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의 영화들 - 수취되지 않은 욕망의 전언들
‘질풍노도의 날들’이라는 비유가 그리 낯설지 않았던 80년대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장선우와 박광수의 영화가 잉태되었다. 그러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라는 화두로 무장해 한때 코리언 뉴웨이브의 기수로 칭해지기도 했던 두 영화작가의 행보는 급격히 서로 다른 길로 갈리워졌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의 진실을 영화적 담론으로 재현해낸다는 전제의 공유로 말하자면 그리 달라 보일 것도 없겠지만 장선우의 독설과 야유가 박광수의 냉정한 논조와는 사뭇 거리를 두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그들이 움 튀웠던 코리언 뉴웨이브라는 흐름이 지금, 이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라고 있는가이다.
이러한 질문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너절한 일상의 욕망을 세련된 영화적 화술에 담는 홍상수와 한국 현대사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길에 서 있는 이창동의 시선과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언론과 평단이 그려놓은 한국영화 지형도의 외곽에 김기덕이 있다.
최근의 한국영화가 규모의 면에서 급격한 팽창세를 타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게다가 중국과 이란 영화를 거쳐 한국영화로 이동하고 있는 아시아 영화에 대한 서구 평단의 관심어린 시선은 특정 영화에 몰리는 관객 동원의 기록적 성장과 더불어 우리 영화계를 고무시키고 있다.
그러나 당대의 사회사와 대중문화적 상황이 엇물리면서 빚어내는, 혹은 제작과 유통을 아우르는 산업의 구조가 규정하는 대중성이라는 것이 영화의 질을 담보하는 믿을 만한 기준이 될 수 있는가는 또다른 고민을 낳는다. 즉 가끔 대중영화의 외곽을 든든히 떠받치는 고집스러운 작가주의 영화의 맥이 채 뿌리 내리기도 전에 다수의 동의를 전면에 내세운 주류 영화들이 이땅을 점령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을 떨칠 수가 없다.
이러한 불안은 대만 뉴웨이브의 양대 지주인 양덕창의 <하나 그리고 둘>을 한없이 질투하게 한다. 물론 코리언 뉴웨이브의 주제의식이나 미학이 대만의 경우와 동일하게 반드시 자국의 역사적 진실을 찾으며 개화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각 사회의 고유한 상황은 그 상황이 배태시킨 모순들이 최고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외형의 문화생산물로 재현된다.
문제는 최근 만들어지고 있는 한국영화들이 대만의 작가영화와 얼마나 닮아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상황, 우리의 모순을 치열하게 해석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대중의 취향을 다급히 따라잡는 얄팍한 상업주의는 때로 화려한 수식어와 함께 잠깐의 시간을 속일 수는 있지만 오랜 시간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작가의 육성이 배어 있는 영화에는 힘이 있다. 때로 그것이 거칠고 가난하다 할지라도...
김기덕의 영화들은 거칠고 생경하지만 인간 내면에 감추어진 둔중한 그 무엇을 드러내 보이는 까닭에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어도 소수를 감동시키는 힘이 있다. 더욱이 중심 밖에서 영화 만들기를 시작한 그의 이력은 요즈음은 어지간해서 찾아보기 힘든 장인의 ‘뚝심’을 느끼게 하기에 일종의 신뢰를 불러일으킨다. 다시 말해 영화 제작과 유통을 둘러싼 구조라는 것이 철저히 제도의 산물이라고 할 때, 그 제도의 외곽에서 성장한 그의 영화 세계가 중심을 향해 조심스럽지만 날카로운 주먹을 날려왔다는 점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악어>와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 시작되어 관객과 평단을 혼란스럽게 만든 김기덕의 필모그래피는 <파란대문>과 <섬>에 와서 몇몇 지지자를 얻었고 <실제상황>을 거쳐 이제 <수취인 불명>으로 한층 튼실해졌다. 흥미로운 것은 주류 언론과 비평이 그의 영화들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고 있는 동안 ‘김기덕적인 것’에 대한 관객들의 인식은 다른 그 어떤 감독에 대해서보다 명료하게 형성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김기덕의 영화들이 지니는 태생적 특성들이 호/불호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강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화생산물의 수용이 대체로 문화 권력에 의해 조장되는 것이라고 할 때, 김기덕 영화에 대한 대중(잠시 크기의 개념을 유보하고)의 관심이 보기 드물게 자발적인 것이라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혹자는 김기덕 영화의 묘한 대중성을 최근의 새로운 문화적 코드인 ‘엽기’와의 접점에서 찾기도 하지만 네티즌의 반응을 살펴보면 나름대로 진지한 비판적 지지를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확실히 <수취인불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친구>의 기록적 관객 동원만큼이나 기억할만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김기덕적인 것’은 어느샌가 우리들 사이에 한국영화의 뚜렷한 어떤 경향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김기덕 영화를 특징있게 만드는 것은 이미지와 캐릭터이다. 물과 물고기, 파랑과 노랑이라는 색채로 시각화된 이미지들은 모호한 해석을 거부하며 명징한 상징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상징의 세계 속에 자신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바깥’에 존재하는 인물들이 있다. 이를테면 그의 영화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물의 이미지는 죽음이자 구원이며 흔들리는 삶의 여정에서 잠시 머무는 머묾의 터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것은 이미 데뷔작 <악어>에서 김기덕적인 기의를 확연히 드러낸다.
즉 한강에 투신한 사람들의 지갑을 털어 살아가는 주인공 용패에게 강은 일상화된 죽음의 공간이자 삶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절망과 고통을 삼키는 동시에 품어내는 물은 거칠고 난폭한 용패가 유일하게 인간적이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인간적이 된다는 말은 그가 위악을 걷어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이를테면 강 바닥에 그가 차려놓은 거실의 모습은 현실에서 박탈당함으로써 그를 위악으로 몰아넣었던 이상화된 가정의 유사 이미지이다. 용패는 꼬마가 띄워보내는 종이배의 종착점(희망)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지만 그의 무의식적 욕망의 세계는 여전히 사랑과 희망을 갈구한다. 물론 그것이 물의 산란으로 인한 불분명한 이미지로밖에 나타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도 물의 이미지는 반복된다.
세느 강변 어딘가에 정박된 한 척의 배는 청해의 유일한 거처이며 홍산과 함께 죽음 직전까지 가는 곳도 바다이고 가까스로 탈출한 뒤 결국 삶을 마감하는 뒷골목 역시 빗물이 하수구로 곳이다. 삶의 터이자 죽음의 공간인 물, 그것은 흔히 어머니 자궁 속 양수의 이미지와 겹쳐지는데 이러한 이미지의 내포적 확장은 <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주인공 희진은 저수지에 가두어진 물을 통해 생존하는가 하면 물길을 거쳐 새로운 삶을 찾아나서지만 스스로가 물을 품고 있는 자궁의 이미지로 변하면서 그토록 얻고 싶어하던 현식을 자기 안에 가두는 것이 그것이다. 희진이 자궁화되고 현식이 그 안에 갇히는 것은 영화적 내러티브의 맥락 상 죽음과 다시 결부되는 바, 김기덕이 말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보다는 자궁으로 돌아감, 즉 탄생 혹은 분리 이전(악어와 현정의 죽음, 청해와 홍산의 죽음을 포함해서)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퇴행에 가깝다.
최근작 <수취인불명>에서는 강 또는 바다의 이미지가 사라졌지만 대신 개를 잡는 공간에 고여 있는 웅덩이, 인민군 시체가 묻혀 있는 땅의 습기는 죽음을, 창국이 어머니를 씻기는 물은 정화(靜化)를 의미한다고 보여진다. 창국이 거꾸로 처박혀 죽는 축축한 논바닥 역시 생산과 소멸을 동시에 감당하는 대지와 물이 섞여 있다는 점에서 물의 상징성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는 비유이다.
이 영화에서도 역시 퇴행적 집착이 선연하게 드러나는데 창국의 시신을 거두어 다시 자신의 육체 속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아들을 먹는 어머니의 행위가 그것이다. 어머니와 아들의 이해가 불가능했던 현실은 먹고 먹히는 행위를 통해 조롱당하고 모자는 분리 이전의 상태로 회귀한다. 퇴행적 집착의 극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김기덕의 퇴행은 어쩌면 이상적 세계에 대한, 혹은 타인에게 소통되고자 하는 욕망의 다른 얼굴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위에서 언급한 네 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이 이상화하고 있는 세상은 위악으로 일그러져 있기는 하지만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세상과 그리 다르지 않으며 그들이 타인을 향해 던지는 폭력과 집착이 거친 외양에도 불구하고 갸날픈 소통의 실마리가 되는 까닭이다.
문제는 김기덕의 인물들을 극단적 상황으로 몰고간 현실이다. <악어>에는 아마도 용패의 어린 시절 모습일지도 모르는 꼬마가 등장한다. 보호도 위로도 받지 못한 꼬마는 아마도 용패로 자라날 것이고 용케 인생을 성찰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면 커피 자판기 속에서 죽어갔던 노인처럼 늙어갈 것이다. 사랑마저 도구가 된 자본주의적 현실의 피해자로 등장한 현정은 또 어떤가. 약혼자의 사주를 받은 깡패들로부터 윤간당하고 자살을 시도했던 그녀는 용패의 다른 모습인 기둥서방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파란대문>의 진아의 과거를 비추는 인물이다.
그러나 진아가 등장하는 <파란대문>은 앞의 영화들보다 알아듣기 쉬운 목소리로 사람들 사이의 소통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아마 이 영화에 대한 비평적 평가가 그런대로 우호적이었던 것은 서로를 미행하는 매혹적인 시퀀스에 의해 구축된 창녀 진아와 여대생 혜미 사이의 소통이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의미있게 읽혔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 기반이 아닌 존재 자체에서 소통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서로를 품어내는 두 여성 간의 유대는 새장여인숙이라는 주변적 공간과 철 지난 바다 풍경 탓에, 그리고 여름에 내리는 눈(雪)으로 인해 현실이 아닌 환타지의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매우 깊숙한 공감을 이끌어낸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물/바다는 진아가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재탄생되는 에너지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
<수취인불명>은 김기덕적인 인물들이 탄생하게 된 뿌리를 좀더 분명하게 제시한다. 70년대의 기지촌이 바로 그들의 거대한 자궁인 셈인데 그곳은 전쟁, 미군, 혼혈이라는 한국의 현대사의 모순이 빚어낸 상처에서 흘러나온 유혈이 낭자하는 공간이다. 흑인 혼혈아 창국은 자신을 잊었음에 분명한 옛 남편에게 매번 되돌아오는 편지를 띄우는 엄마를 증오하고 오빠와 화약총 놀이를 하다가 백태눈이 된 은옥은 반쪽으로 바라본 세상을 거부한다.
6.25 참전용사인 아버지를 둔 지흠은 과잉 남성성을 과시하는 아버지와 달리 나약하고 소심한 인물로 설정되는데 동네 깡패들에게 육체적,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그의 모습은 가파른 산업화의 물결을 거슬러온 한국사회의 그늘을 보여준다.
세 사람에서 생성되는 기묘한 우정은 세상으로부터 수취되지 못하는 욕망을 서로를 거울 삼아 들여다보는 관계의 산물이다. 관음과 초상화 그리기 등으로 표상되는 바라보기가 퇴행적인 자기폐쇄를 완전히 거두어내지는 못하지만 창국은 지흠을 보호하려 하고 지흠은 은옥을 사랑하며 은옥 또한 지흠에게서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류성은 현실적으로 별다른 위안을 주지 못하는데 은옥을 훔쳐보다가 연필로 눈을 찔리게 된 창국, 은옥을 강간한 동네 깡패들을 혼내주려다 자신의 눈을 다치고만 지흠이 은옥을 앞에 두고 시골길을 걸어오는 장면은 세 사람의 비극적 숙명에 관한 그로테스크한 시각적 유비이다.
화약총과 국궁의 대조라든가 전쟁 유공자인 은옥 아버지의 월북 소식, 한없이 악하기만 한 동네 깡패들 등 다듬어지지 못한 서사의 요소들이 상투적으로 느껴지면서도 <수취인불명>의 미덕은 김기덕의 영화가 견지해왔던 것, 바로 중심을 향한 야유이다. 현대사의 굴곡조차 그의 영화에서는 지적 담론으로 승화된다기보다 철저하게 고통으로 육화되고 절절한 생존의 문제와 연결된다.
절망의 한가운데 우연한 사랑 따위를 그려넣는 사탕발림을 피해가는 데서 관객은 불편을 느끼지만 철저하게 중심의 밖에 존재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김기덕의 인물이 주는 싸나토스적인 매혹을 피해갈 수 없을 것 같다.
김기덕적인 것에 대해 짧은 지면을 통해 풀어내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것은 아직 그가 자신의 분신인 영화의 캐릭터들처럼 길 위에서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가 존재하는 ‘중심의 바깥’을 바로 보기에 필자의 능력이 턱없이 모자란 까닭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순히 시각적 재현물인 영화를 언어로 다시 재현해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용감하게 편들 수 있는 자신감을 말한다.
그의 세계란 어쩌면 어느 한 지점에 자신을 고정시키고, 당파적으로 바라볼 때 더욱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좀더 너그러워진다면 김기덕 영화의 전언들, 즉 상대에게 늘 수취되지 못하는 욕망으로 고통받는 인물들의 절규를 물처럼 감싸안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욕망은 과잉에서 온 것이 아니라 결핍에서 온 것이므로 거칠지만 뜻밖에 아주 겸손한 것인지도 모르므로....
어쨌든 김기덕의 영화는 한국영화가 이제껏 간과해왔던 영역을 헤집고 있다는 데서 대중의 자발적 동의를 얻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장선우의 지적인 불온함도 아니며 박광수의 건조한 역사인식과는 더더욱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런가하면 90년대 후반 이후의 새로운 뉴웨이브로 함께 거론되는 홍상수의 권태로운 유혹이나 이창동의 슬프디 슬픈 돌아보기와도 확연히 다른 지점에 놓여 있다. 끊임없이 싸움을 걸어오는 그의 영화가 한국영화의 주제 의식과 표현 영역을 한뼘쯤 넓힌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제까지 문화권력의 담론에 포함되지 못했던 잔여들의 반영 또는 혁명! 그것은 낯설지만 개인적/사회적 차원에서 억눌려온 타자, 곧 우리들의 일부이므로 거부할 수만도 없다. 게다가 영화적 환타지 속에서 만나는 타자는 그리 위험하지 않기에 김기덕의 영화는 항상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