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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정왕후의 두 인생여정: ‘여걸’로의 삶과 ‘여인’으로의 삶 ▶
: 미달왕 중종은 첫 부인 신씨를 쫒아내고, 세 살 어린 계비 장경왕후 윤씨를 맞이하였으나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효혜공주와 왕자 인종을 남기신 채 산후병으로 돌아가시게 되자…
다시 보인다, 또 한 분의 왕비가 생기게 되면 왕비를 둘러싼 신구세력이 당근 맞부딪치게 된다. 중종이 27세에 벌써 세 번째 부인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조선의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름하여 대윤과 소윤이다.
중종은 본래 유약한 성격에 이복형 연산시절 숨죽이며 살다가 반정으로 왕의 자리를 얻었으니 약화된 왕권은 당연지사였고, 조광조의 등장으로 겨우 개혁정치를 시도하였으나 역시나 왕의 개혁의지부족으로 실패한 이후 집권 내내 대내외적으로 훈신들과 척신들의 싸움이 이어지면서 옥사가 난무하고, 변방의 야인들과 해안가 왜구들의 침입 역시 끊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장경왕후의 국상을 치르고, 2년 후 조선 역사상 가장 카리스마를 지닌 여장부로 파평 윤지임의 17세 따님을 세 번 째 국모로 맞이하게 되니 같은 한 핏줄 윤씨 집안에서 대윤과 소윤으로 나뉘어 권력을 향한 치열한 싸움을 벌였으니 그 내력을 살펴보자.
◇파평윤씨 가문의 경사는 결국 가문 내의 싸움으로.
▶판도공파의 윤승례는 시조 윤신달의 13세손으로
아들이 윤번(세조 정희왕후의 부친)이다.
세조의 국구 윤번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①제학공파(좌의정 윤사분) 파시조.
②부윤군파(예조판서 윤사윤)→
손자 윤여필(중종계비 장경왕후 부친),
윤임(后오라비): 대윤
③정정공파(우의정 윤사흔)→
증손 윤지임(중종2계비 문정왕후 부친),
윤원형(后동생): 소윤.즉 윤여필과 윤지임은 7촌 숙질간이고, 윤임과 윤지임은 8촌 형제간이다, 그러므로 두 왕비님사이도 장경왕후가 고모가 되고 문정왕후는 조카딸이 되는 것이었다.
▶소정공파의 윤승순 역시 시조의 13세손으로 아들이 윤곤(방원의 좌명공신, 이조판서)이다.
윤곤의 손자가 윤호(성종 계비 정현왕후 부친, 우의정)이다.
판도공파가 문정왕후 사망 후 몰락한 것과는 달리
소정공파의 후손들은 윤필상(성종 영의정), 윤증(소론 거두, 대학자) 등으로 이어지며 노성(논산, 연산)을 중심으로 번성하였다.
1517년(중종 12), 문정왕후가 왕비로 책봉되어 처음에 내리 네 공주만을 생산할 때까지는 별문제가 없다가, 1534년(중종 29) 아들
경원대군을 낳게되자 차기 왕권에 대한 알력이 두 집안의 알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세자(인종)측의 윤임과 김안로(세자 장인)를
중심으로하는 대윤과 신흥세력이 된 문정왕후측의 윤원형, 윤원로가 중심이 된 소윤과의 다툼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던 중, 1544년 11월에 중종이 승하하시자 장경왕후의 인종이 즉위하게되자 먼저 대윤이 득세하였으나 인종이 재위 겨우 9개월만 (1544/11월~ 1545/7/01일)에 승하하고 말았으니...
오호!! 세상 태어나서 엿새 만에 잃은 모친을 섬기지 못함이 가슴에 맺혀서 정현대비(성종의 계비)와 문정왕후(계모이자 외가쪽 10촌누이)에 더 극진하였고, 부친이 승하하시자 식음을 전폐한 채 곡(哭)이 그치지 않은 것이 다섯 달이었다고 전한다.
이렇게 효(孝)는 물론이요 어질고 학문을 즐겨 부왕이 못다하신 사림을 등용해 유학의 이상적인 정치를 꿈꿨던 인종은 지나친 孝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목숨을 단축시킨 결과가 되어버렸다고 실록은 전한다.
실제로 일설에 혹독한 계모 노릇을 한 문정왕후가 毒이 든 떡을 준 것인지는 확실한 근거가 없는 야사로 갑작스러운 인종의 죽음에 분노한 사림에서 퍼트린 소문일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 정설이다.
1545년 7월, 12살의 경원대군이 명종으로 즉위하자 이제껏 왕비가 되면서 부터 근 30여년을 언제나 마음 졸이며 살아왔던 문정왕후는 명종이 아직 어린 탓에 수렴청정에 들어가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소윤측은 요부 정난정을 통해 문정왕후를 움직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과 사림을 몰락시킨다.
즉 대윤이 인종이 위독할 때 경원대군이 아닌 계림군(윤임 외조카)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모함하여서 역모죄로 몰아서는 상대를 제거하였다. 이어 2년 뒤 ‘양재역 벽서사건(정미사화)’를 다시 일으키면서 대윤의 잔존세력은 물론 사림세력마저 철저히 제거하였다.
※이후 윤원형은 친형인 윤원로와 불화가 생기자 조카를 이용 탄핵하여 친형조차도 유배 보낸 후 사사시킨다.
※수렴청정(垂簾聽政): 즉 ‘발을 드리운 뒤에서 정치를 듣는다’ 국왕이 어릴 때 성인(20세)이 될 때까지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대신 하는 정치이다. 조선의 첫 수렴청정은 세조의 정희왕후 윤씨가 성종이 어린나이에 즉위하자 대왕대비로 7년간, 문정왕후 윤씨가 명종 즉위 후 8년간 하였는데 두 분 모두가 파평 윤문의 대모들이셨다.
※정난정(?~ 1565): 요녀의 상징, 윤원형의 첩실이었으나 1551년 적처를 쫒아내 독살하고 정경부인에 올랐다.
당시로는 가장 영향력있는 문정왕후는 물론 보우대사와도 매우 친밀하였다.
문정왕후 사망 후 황해 강음 유배지에서 사사될 위기에 처하자 윤원형과 함께 음독자살하였다.
(묘소: 파주 교하 당하리 산 4번지, 파평윤씨 선영 내 윤원형 묘소 옆에 있다.)
대권을 손에 쥔 왕후는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는 ‘조선의 여주(女主)’로의 삶을 시작한다.
왕후의 생각에 친척간은 물론 친형제끼리도 자기 세력 확장에만 급급한 가족들이며, 최측근 대신들도 모두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자 파벌이나 사사로운 이익과는 거리가 먼 학덕 높은 스님을 스승으로 모셔 자문을 구하는 것이 최선책이란 생각에 이르렀고,
이를 위해 재상 정만종을 통해 백담사에서 수도 중인 보우(普雨)스님을 측근으로 불러들이게 된다.
조선의 국시가 배불숭유정책이었건만, 본래 이태조 역시 개인적으로 불교를 숭상하여 회암사에서 생활하신 적도 있었고, 세조 역시 정희왕후를 통해 회암사를 중창시키는 등 조선 초기에 불교가 잠시 힘을 얻기도 하였으나 이후 성종, 연산 시절은 물론 중종조까지도 극심한 탄압을 받아왔었다. 개인적으로 불교의 법난을 안타깝게 여기던 왕비는 보우스님을 자문책으로 만나면서 불교를 중흥시키는 대불사를 중창하고, 명종 6년(1551)에는 도첩제(승려신분제)와 선교양종(선종: 보우, 봉은사 / 교종: 수진, 봉선사)을 부활시켰다.
명종 9년(1554), 승과를 부활시켜 서산대사, 사명대사 같은 우수한 승려들을 배출 시키고,
명종 18년(1563), 회암사의 대대적인 중창 및 왕후는 개인적으로 400여점의 불화제작을 발원하였다.
→ 당시 순회세자의 사망(1563亡, 순창원)과 아들 명종의 건강악화로 인해 국왕과 왕실의 쾌유와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문정왕후의 염원이 가득 깃든 불화제작이었다. (현재 경기박물관 등에 단지 6점만 보전)
이렇게 문정왕후는 남존여비사상의 가치관이 가득한 조선시대에서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남성 지배관료층을 호령하면서 아들의 왕권을 오로지한 대단한 정치가였다. 특히 지적인 관료들과의 정치대결에서도 밀리지않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해 나갔던 것은 왕후의 정치적능력이 남성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탁월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여, 왕후에 대해서 조선시대 내내 남성 양반네들에게는 매우 불쾌하고 불편한 존재였던 만큼 문정왕후가 승하하신 그 날짜의 명종실록에서 조차 아주 혹독한 평가를 사관들이 적고있다.
▶1565(명종 20년) 4월6일, 사시(巳時:9~11시)에 대왕대비가 창덕궁 소덕당에서 승하하다.
: 史臣은 논한다. 윤씨는 천성이 강한(剛狠:억세고 비뚤어지다)하고 문자를 알았다.
인종이 동궁 적에 윤씨가 그를 꺼리자…(내용이란 것들이)…
①대윤, 소윤을 만들었고, ②인종을 들들볶아 댔고, ③주상이 즉위할 때 모두가 근심한 것과 같이 화를 일으켜 사림을 모두 죽였다.
④불사를 숭봉해 창고를 고갈시키고, ⑤윤원형에게 지나친 권력을 쥐어주었고,
⑥장경왕후가 중종과 같이 있는 것이 밉고 싫어서 중종릉을 강남으로 이장시키고,
⑦주상을 지나치게 꾸짖고 호통을 쳐 대어 심열증을 얻게하였으니 윤씨는 사직의 죄인이라 할 만하다.
명종실록은 1568(선조 1년) 사림이 점차 주도권을 갖게된 시점으로 당시 홍섬(우의정)이 총괄하여 제작되었지만 한 마디로 남성관료들의 왕후에 대한 사고방식이 오롯이 담겨져 있다.
결국, 명종 20년(1565),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전국의 사림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보우를 처단하라는 상소가 기록에 232건으로 그 중에는 대유학자 율곡 선생의 상소문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명종은 모친의 유지를 포기하고 사림의 뜻을 받아들여 불교에 관한 모든 것을 다시 폐지시키고 말았으니, 불교는 다시 핍박을 받는 인고의 나락으로 깊이 떨어지고 말았다.
보우대사 역시 제주도로 유배되어 제주목사에 의해 타살되었고, 회암사도 몰려든 사림들의 손에 의해 불질러진 후 폐사되고 말았다.
여기까지는 정치 일선에서 조선의 사대부들과 맞짱 떠 전혀 밀리지 않았던 ‘여걸’ 문정왕후의 모습을 봐왔고, 이제는 ‘여인’으로의 한 지아비의 아내로서 윤씨 부인의 삶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중종의 첫 부인 단경왕후에 대해서는 전편에서 살펴보았고, 다음으로 계비 장경왕후 윤씨는…
장경왕후 윤씨나 아들(인종)이나 삶에 있어서는 모자가 모두 애처롭기만 하다.
장경왕후는 일찍 8세 때 모친을 여의었고, 이후 친이모인 월산대군부인 박씨 밑에서 자랐다.
중종 원년에 궁에 들어가 숙의에 봉해졌다가,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자 이듬해 왕비로 책봉되었다.
효혜공주를 낳은 후, 1515(중종 10년) 원자 경원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24세에 승하하시고 말았다.
왕비가 승하하자 초장은 대모산의 헌릉(태종, 원경왕후능침) 옆 우측 산줄기에 장사지냈으나, 1537(중종 32년) 왕비의 초장지를 잡은 정치적 라이벌 대윤세력을 모략하기 위한 술책으로 소윤의 김안로가 장경왕후의 광에 돌이 있어서 불길하다며 지금의 장소인 고양시 원당 서삼릉으로 이장시켰다.
1544(인종 원년) 중종이 승하하자 왕비릉의 우측 산줄기에 모시면서 정자각을 중앙으로 옮겨 동원이강의 형식으로 조성하면서 능호를 정릉(靖陵)으로 정했다.
1545(명종 원년) 인종이 사망한다. 장지는 인종의 유언대로 당시로서는 부왕과 모친이 같이 모셔져있는 원당 정릉(靖陵) 우측 산줄기에 ‘효릉(孝陵)’이란 능호로 문정왕후에 의해 장사지내졌다. 그런데, 왕후가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1562(명종 17년) 문정왕후는 중종의 능침만을 현 강남 삼성동의 선릉(성종, 정현왕후능침) 옆으로 천장하면서 자신의 유택을 왕의 곁에 두고자 하였던 것이다. 중종만 천장이 이루어지자 장경왕후의 능침은 홀로 남겨진 왕비릉이 되었다. 호칭도 다시 희릉(禧陵)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렇듯 문정왕후는 여인으로서는 자신의 부군 옆에 죽어서나마 다른 여인이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나보다. 결국 장경왕후는 사후가 더 파란만장해 버렸다.
첫 장지는 한강을 건너가서 태종의 헌릉 우측 산자락에 유택을 정하면서 ‘희릉’으로 불리다가, 중종이 승하하자 서삼릉으로 들어와서 중종의 능침과 동원이강형식으로 옆에 있으면서 ‘정릉’이라 불리웠다.
곧이어 아들 인종이 ‘효릉’으로 곁으로 들어오자 그 때 만큼은 남편과 아들까지 다행이도 모두를 옆에 두었는데, 30년도 못되어서
살아있는 문정왕후의 투기로 남편만을 강 건너로 빼앗겨 버렸다. 살아 짧은 생도 억울한데 죽어서도 계속 비통하다.
그러나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자일지라도 인간사 그렇게 만만하게 뜻대로만 이루어진다면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니겠소?
‘조선의 女主’에게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소.
보우대사와 상의해서 보토까지 해가면서 중종이 옮겨간 삼성동의 정릉(靖陵)터는 수렴의 흉당터로 지대가 낮아 여름이면 정자각부근까지 강물이 범람하여 정작 본인의 음택으로는 쓸 수가 없었다.
결국 문정왕후는 1565(명종 20년) 사망 후 정릉 옆으로 가지 못하고 ‘무후지지(無後之地)의 흉지’란 풍문에도 불구하고 왕후의 동생 윤원형이 끝까지 우겨대면서 현 장소를 고집하여 홀로 단릉으로 쓰게 되었는데, 그곳은 언제나 일년내 365일 피와 땀이 멈추지 않고 흐르는 곳으로 육군사관학교와 국가대표 훈련장인 태릉선수촌이 있는 불암산 남쪽자락 태릉이다.
그리고, 2년 후 1567(선조 원년) 6월 아들 명종이 외척들과 극성스러운 모후 탓에 제대로 선정을 펴보지도 못하고 모후의 뒤를 이어 경복궁에서 승하하시자, 모후의 태릉 북동향 1km 지점에 ‘강릉(康陵)’으로 유택을 마련해 들어왔니 이 분도 어미따라 오신게 되었다.
중종의 부인 중 아들을 가진 왕비들은 모두 자신의 자식과 지근에 유택을 함께 하게 되었지만 정작 본인이신 중종께서는 살아 세 분의 정부인이 계셨어도 죽은 후에는 홀로 강남에서 부왕과 모친의 선릉 곁에 남아 평생을 수발하시면 살고 계십니다요.
살아서는 세 부인과 창빈 안씨(덕흥대원군의 모친으로 선조의 할머니)외 8명의 후궁이 계셨었건만 시방은 독수공방이시니 이 나랏님死後 마눌님福은 엥간히 없으신 분입니다요. 허나 내가 볼 땐, 고거이가 조강지처 버린 罰입니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왕과 왕비가 배역을 바꾸었다면, 백성의 입장에서는 거저 등 따습고, 배 부르면 그거이가 왔따!! 아니겠습니까?? 대신들에게 절대로 만만하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뜻을 관철하였던 문정왕후가 처음부터 왕으로 태어났다면, 과연 얼마나 백성들을 사랑하시면서 훌륭한 정치를 펼치실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역사가 흘러갔다면, 과연 조선은 행복해 질 수 있었을까요??
♠Epilogue:: 파헤쳐진 왕가의 무덤(삼성동 선정릉)
: 세월이 흘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중종의 손자, 선조 25년에 일어난다.
선조의 강남 삼성동에 있는 증조부모의 선릉과 할배 중종의 정릉에 날벼락이 떨어진다.
침략한 왜군들이 세 분의 능을 모두 훼손한 것이다. 혹? 무슨 보물이라도 있을까 해서다. 섬나라 녀석들이.
세 곳(선릉은 동원이강형으로 왕릉과 왕비릉이 따로 조성되어 있다.)의 능이 모두 파헤쳐지고 시신이 있었던 재궁까지 모두 꺼내져서 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었다. 몽진 후 도성으로 돌아온 선조는 제일 먼저 왕릉수습에 나섰으나, 모든 것이 난감했다.
아무 것도 확인할 길이 없어 왕의 시신으로 추정되는 인마(人馬)의 재(탄화물)를 수습해 다시 매장하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두 부자 군왕님들 모두 한 차례씩 정식부인을 내치셨던 분들이다. 맞죠??
부왕 성종은 연산의 모친 폐비윤씨를, 아들 중종은 조강지처인 단경왕후 신씨를… 그랬다고! 기러니까...
▶1593(선조 26년) 9월9일, 이흥국이 선릉과 정릉을 봉심(奉審)한 일을 공초하다.
: 이홍국의 공초(供招)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는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의 군관(軍官)입니다. 4월 어느날 체찰사께서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이 왜적에게 화를 입고 발굴당했다는 기별을 듣고 접반사(接伴使)와 함께 만월대(滿月臺) 뒤에서 곡림(哭臨)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저를 불러 ‘네가 가서 봉심(奉審)하여야겠다.’ 하였으므로, 제가 박인(朴麟) 등 5명과 같이 15일 밤중에 정릉에 나아가 봉심하였는데 발굴당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이태성이 먼저 광중(壙中)에 들어갔더니 너절한 물건이 있다고 하여 그 후 신(臣)이 따라 들어가 보았더니 불에 타다 남은 재궁(梓宮)이 있는 곳에 시신 하나가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밤이라 어두워 어루만져 보았더니 점점 냄새가 났고, 그래서 즉시 가슴과 배 부위를 더듬어 보았더니만 오래 된 시체 같았습니다.
시체의 손을 만져보고 얼굴 위를 만져보니 뼈만 남았으므로 놀라고 두려워서 즉시 나왔습니다.
능 위에 굽이진 담장 가까운 곳에는 의복(衣服) 세 벌이 있었는데 반은 부패되었고 부서진 칠관(漆棺) 조각이 불에 타지 않은 채 남아 있었습니다. 또 선릉에 가보았더니 역시 발굴되었는데 즉시 군사들과 광중에 들어가 보았더니 타다 남은 나무 조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체찰사에게 자세히 보고하였습니다.… 이랬단다!!
- 了 -
첫댓글 왕을 둘러싼 정권다툼은 어느왕조에서건 치열했나봐요~
여인천하 라는 드라마의 배경이었던 문정왕후시절~
암튼 여인들의 정권욕도 대단했구요~~
이렇게 요즘 글올려주시니
문득문득 아는부분도 떠오르고 모르는부분은
알게되고~
넘 감사합니당~♥
"선릉과 정릉을 봉심하다"
그옛날 CCTV 도 없었으니 도굴 당했을것은 뻔한일~
그러니 봉심한일은 최고로 잘 한 일이겠지요.
잘 읽고 갑니다.
봉심이 모예요?
에효..무식한 경아^^
@violet 奉審(봉심): 받들 봉(奉), 살필 심(審) -> 윗사람의 명(命)에 의해 왕릉 또는 왕족의 묘를 살펴보는 일.
: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그대로 옮기다보니 한문이라도 어려운 글이 참 많네요~~~ ^L^.
@하나또하나 한자니께..ㅋㅋ..
심판할 때 쓰는 심'~이쥬?ㅎㅎ
역사실록에서까지 남존여비사상을 그리 드러내다니..어휴..밴뎅이속알머리들..ㅋ
유고를 숭배했다..불교를 숭배했다..
자고로 예나 지금이나 그넘의 정치 종교 다툼이 피로 얼룩진 역사를..동서고금 막론하고..ㅜㅜ
선정릉이 내집 정원처럼 보이던 곳에 오래 살았어도 중종과 당연히 왕후들 묘겠거니 했는디..군주 죽은 후엔 본인이 원하는 곳에 안치되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파헤쳐 옮겨다니시니..참 기구한 운명들이옵니다.그나마 장경왕후&아들인종.문정왕후&아들명종 들은 함께 누워있으니 행복할까나요?
조강지처 버린 죄..ㅎㅎ
오늘도 유익한 역사의 뒤안길 흥미롭게 읽고가옵니다.
날마다 새로운 역사책을 주시는 하나님~~~~우리 하나님......
저는 늘 옛날에 왕비열전을 들을때나 지금 이렇게 하나님의 글을보면서도 왕족들이 참 힘 들었겠다
특히나 여자들은요 그냥 평민이 젤로 행복한것같어요 ㅎㅎ
오늘도 좋은글 감사히 잘 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