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2일 치악산 둘레길 1코스 '운곡솔바람숲길' 일대 걷기운동 후기]
겨울 치악산의 아침, 오늘은 영하 12도, 조금 추운 날이다.
산에 오르기 전, 2개의 문장이 떠올랐다. 1993년에 돌아가신 성철 스님의 말씀이다.
하나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또 하나는 "불기자심(不欺自心)" 즉 "자기의 마음을 속이지 마라"이다.
오늘 겨울산에서, 그 뜻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와야겠다.
오랜만에 와보니, '운곡솔바람숲길'을 알리는 새로운 안내판이 서있다.
오늘 걷기운동에는 '번지펌프 워커슬론 헬시스틱'을 사용해보았다.
'번지펌프'는 걷기운동 할 때 사용하면, 건강에 더 도움이 되는 여러 기능이 가능하도록 설계된 '스틱'이다.
겨울 산은 묵직하고 깊이가 있다. 나무들은 봄을 맞기 위해 땅의 기운을 한껏 모으고 있는 중이다, 아주 조용하게.
'운곡솔바람숲길'을 두 바퀴 돌고, 오늘은 '운곡 원천석 선생의 무덤'에 가보았다. 그 무덤은 '운곡솔바람숲길' 안에 있다. 그 길의 이름이 '운곡솔바람숲길'인 이유이다.
무덤 앞 비석에 '고려국자진사원천석지묘' 즉 "고려의 국자진사인 원천석의 무덤"이라 쓰여있다.
이 무덤의 앞쪽에 그의 부인 '원씨'의 무덤이 있다. 원천석은 '원주원씨', 그의 부인은 '원성원씨'이다.
원천석 선생은 1330년에 개성에서 태어났고, 원주에서 생활하시다 돌아가셨다. '원주원씨'의 중시조(中始祖)이다.
'중시조'란 "몰락하거나 쇠퇴한 가문을 다시 일으킨 조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원주원씨'들은 그들의 가문을 다시 일으킨 '중시조'인 원천석의 사당을 무덤 주위에 잘 만들어 놓았다.
무덤의 북동쪽 석경사 부근에는 '원주원씨'의 시조(始祖)를 기리는 '시조단'도 설치해 놓았다.
시조단의 중앙에 있는 비석에 '원주원씨' 시조의 이름이 "경(鏡)"이었다고 기록했다.
시조단을 설치한 배경을 적은 '설단기'에 의하면, 이 시조가 643년에 당(唐)에서 고구려로 와서, '원주원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 시조가 고구려 좌명공신,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사실, 이런 기록은 문헌으로 전혀 증명할 수 없는 '거짓'이다. 상식적으로도 사실에 맞지 않는다. 사실이 아닌 것이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그 시절에는 우리나라의 각 성씨가 족보를 만들면서 자신들 성씨의 시조를 "중국에서 온 것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자신들 성씨나 가문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들의 뿌리를 중국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가 끔찍하던 시절이었다.
[참고 : 사대(事大)] *사대란 "작고 약한 나라가 크고 강한 나라를 섬김"을 말한다. 고려 중엽 이후 조선시대를 거치며 고대의 중국을 '중화'라 하고, 우리나라를 '소중화'로 하여, 중국을 숭배하며, 우리의 것보다 중국의 것을 소중히 여기던 시절이 오래되었다. 그 시대에는 각 성씨도 그 조상이 중국에서 온 것이라 자처하며, 자신들 가문의 우수성을 과장하려 하였다.
나는 평택 임씨(林氏)다. '평택임씨'의 족보에 그 시조는 당(唐)에서 온 '팔급(八及)'으로 기록되었다. 몇년전 나는 중국과 한국의 옛 문헌을 고증하여, '팔급(八及)' 이란 그 시조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밝혀냈다. '팔급(八及)'이란 인물은 중국에도 없었으며, 그냥 임씨의 시조를 중국인으로 꾸며서, 그 성씨가 중국에서 온 우수한 것임을 과장하려 했던 것이었다. 그 임씨 족보의 오류를 지적하는 글을 '임씨 종친회' 홈페이지에 올렸었다. 그 결과 나는 그곳에서 "조상을 욕되게 하는 죄"로 '강퇴' 당했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성씨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 이후이며, 각 성씨의 족보는 대부분 조선시대 중엽 이후에나 만들어졌으며, 당시의 시대 풍조인 사대(事大)에 의해 대부분 크게 왜곡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에는 과거에 잘못 형성된 인식들 중 아직 바꾸지 못한 것들이 많다. 위에서 얘기한 성씨의 기원에 관한 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 잘못을 바로잡으려면,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운곡솔바람숲길'에서 올려다 본 하늘이다.
역시 산은 산이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산에 와서, 다른 것이 아닌 산을 느끼는 마음을 가지면, 산에 있으면서 마치 다른 곳에 있듯 나를 속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不欺自心).
산은 산인 것처럼, 임씨의 시조를 중국인으로 속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살면서 자신을 속이면, 다른 사람도 속이게 되고, 산을 산으로 바로 보지 못하고, 자신과 세상이 누구인지 올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경계할 일이다.
[출처] https://band.us/band/87089746/post/3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