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송단자의 내용
이번 사건은 동학도들이 정부를 상대로 한 최초의 운동이다. 종전의 운동은 동학종단의 제도화와 수행, 대중적 공감대 확장에 주력해왔다. 이번 교조신원운동은 동학의 공인에 그치지 않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고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는 새로운 동학이념의 사회화운동이었다.
단자 내용은 교조신원과 오랑캐의 침입을 물리쳐야 한다는 반외세를 내세웠다. 1천여 명의 도인들이 의관을 정제하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참으로 엄숙하였을 것이다. 공주부민들은 모두 감탄했을 것이다. 의송단자는 다음과 같다.
동학도인 의송단자
충청감사에게 삼가 엎드리어 살펴주기를 아뢴다. 도덕이란 천지와 더불어 변치않는 법도이며 고금을 통해 모두 지켜야할 도의이다. 그러므로 요순(堯舜)우탕(禹湯)의 성군(聖君)들도 천명(天命)을 이어받아 임금에 등극하여 [도덕으로] 천하를 다스리고 만민을 교화하였다. 공자. 맹자. 안자. 증자도 법도를 세워서 사람을 교화하고 유도의 전통의 실마리가 되게 하여 후세에 전해졌다. 그러나 육조(六朝=남북조시대)와 오계[당이 무너지고 혼란기]의 시대로 내려오면서 성현이 나타나지 않아 대도(大道)의 덕화(德化)는 캄캄하게 아주 막혀버렸다.
송대에 이르러 덕화가 융성하여 천운이 순환하여 갔다 돌아오지 않음이 없는 [이치로] 정씨[정이천, 정명도] 두 선생이 이 세상에 태어나 대학(大學)의 심법으로 사람을 가르쳐 성인의 경서와 현인의 전서의 뜻을 다시 찬연히 세상에 밝히게 되어 염락[주돈이의 고향 염계와 정씨 형제의 고향 낙양]의 여러 어진이들이 마땅함을 따지고 학을 강하여 이 세상에 전해지게 하였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랴.
우리나라는 예악과 문물을 중국에 본받아 마을에서 현송(絃誦=거문고를 타며 시서를 읊음)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으며 상서(庠序=서당)의 풍습이 고을마다 무성하게 일어나고 벼슬아치의 제도와 예악을 통한 교화가 더할 나위 없이 천하의 으뜸이 되게 하였다. 모두가 선성과 성왕께서 권선징악과 출척(黜陟=공정한 인사)을 우선하는 다스림의 덕화에 연유한 것이다. 어진 정승과 큰 유학자들이 백성들이 학(學)하도록 북돋아 길러준 데서 비롯된 것이다.
요즘에 이르자 오랑캐 풍습이 어지럽게 뒤섞여서 성현의 학은 차차 쇠퇴해지고 해이해져서 삼강의 본분과 오륜의 질서가 있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여러 성조의 가르침으로 우리나라를 다시금 일월과 같이 밝히어 가는데 지난 경신년(1860) 4월 한울님의 천명이 있어 경주 귀미의 최선생 제우(濟愚)가 [무극한 대도]를 친히 받아 높은 성인의 학[성학]을 나라 안에 널리 펴게 되었다.
대저 우리 동학이란 도는 곧 유불선 세 가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유도인즉 유정유일(惟精惟一=본심의 바른 자리를 한결 같이 지킨다)하게 환히 깨닫도록 하는데 있으며, 불도인즉 정진(精進)일념(一念)하여 황연(晃然=밝다)한 경지에 이르러 문득 깨달아 마음을 다스리는 도로서 대동소이하다. 선도 역시 불도의 기화(氣化)지도로 수련 양생하여 고요히 습득하여 참됨을 지키려는데 있다. 이 셋을 합쳐 하나로 만들었으며 장점은 취하고 폐단이 되는 것은 버렸다.
불교로 말하면 저 무학이 이 나라를 창건한 국사였고, 서산(西山)과 사명(四溟)은 임진왜란 때 충신이었다. 그러므로 효제와 충신과 존심양성의 도리를 합하면 일리가 되고 흩어지면 만 가지로 되는 것이니 통합하여 하나로 돌아가 보면 이단으로 생각해야할 근거가 없다.
이 도에는 인의예지를 갖추지 않음이 없으므로 비록 우부(愚夫=어리석은 남자)우부(愚婦)라도 그 덕을 공경히 받들어 사람의 도리를 알게 하자는 것이니 훌륭한 일로서 누구나 천지를 공경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지난 갑자년(1864)에 성상[고종]이 등극하자 다스리고 가르침이 매우 뛰어나시어 법과 명령이 날로 새로워졌으며 사교(邪敎;서학)를 엄히 금하였다. 이때에 이방[서양]에서 이상한 학이 들어와 요사하고 괴이한 말을 만들어 두메산골에 묻혀사는 평민들에게까지 만연시켜 인간의 도리마저 끊게 하고 있다.
스승님은 개연히 대도가 손상되어 맥이 다해 가자 자신만 착해서는 불가하다 하여 옛 것을 이어받아 미래를 열어가는 뜻에서 문하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자리를 베풀고 강론하게 되었으니 타고난 천성을 지키도록 하여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 스승님은 사도(邪道)로 무고(誣告)되었으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고 조용히 의에 따라 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라 여기고 신자(臣子)의 직분으로 충성을 다하였다. 혹시 백이. 숙제를 탐욕스럽다 돌릴 수 있을지 모르나 어찌 우리 스승님을 삿된 가르침을 폈다고 의심하랴. 아! 벌써 30년이 되도록 세상에 제대로 들어내지 못했으니 이는 신원(伸寃)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비록 시골의 노둔한 백성이나 선왕께서 베푼 옷을 입고 선성의 글을 읽고 국왕의 땅에서 먹고 살면서 이 학[동학]에 뜻을 두고 사람으로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세워져 천지를 공경하고 임금에 충성하고 스승님과 어른을 높이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이웃을 도와주며 친구 사이에 신의를 세우고 부부의 직분을 지키도록 하여 자손의 도리를 제대로 다하고자 한다. 하늘을 이고 땅에 서있는 자라면 이를 버리고 무엇을 학하랴.
지금 서양 오랑캐의 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뒤섞였으며 왜놈 우두머리의 독수(毒手)가 다시 외진(外鎭)에서 날뛰니 도리에 벗어난 흉악한 짓이 임금님 수레 밑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래서 우리들은 절치부심 하는 것이다. 지금 왜나라 상인들은 각 항구를 통해 장사하여 얻은 이익을 독차지 하고 있으며 나라안의 전곡은 탕갈되어 백성들은 생계를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다. 요긴하고 목좋은 곳에서 관세시세와 산림과 천택(川澤)에서 나는 이득은 오로지 오랑캐에게 돌아가니 니 또한 우리들은 주먹을 치며 눈물을 흘리는 바이다.
도한 무뢰배들이 산골에 무리를 모아 백주 대도(大都)에서 사람을 해치고 물건을 탈취하기를 마치 자기 주머니에서 물건 찾는듯하고 있다. 이들을 귀화시키면 선량한 무리가 될 것이나 제지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 또한 저희들이 한심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저희들이 성심 수도하면서 밤낮으로 한울님에게 축원하는 것은 광제창생(廣濟蒼生)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대원뿐이니 어찌 털끝만치라도 그릇된 이치가 있으랴.
이제 순상 합하는 북관(北關;함경도)쪽을 걱정하고 남쪽 땅을 관찰하면서 인륜을 저버리고 도리를 어기는 무리들이 스스로 자취를 감추도록 힘쓰는 동시에 간사한 속임수로 부정을 저지르려는 생각을 스스로가 두렵게 여겨 도리어 순종케 하자는 이 도[동학]를 어찌하여 의심하여 저희들을 사류로 돌리려는가.
저희들은 성문(聖門)의 은혜를 입은 제자로서 항상 경외하면서 공납(公納)이나 사채를 잠시도 미루지 않았으며 전과를 뉘우치며 사람과 물건을 해치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 밤낮으로 얼음을 밟듯이 조심하며 글 읽는 자는 글을 읽고 밭가는 자는 밭을 갈고 베옷 입고 소식(蔬食)할 따름이다. 어찌 소인배들이 모함하는 대로 이 도가 백성을 해치는 것처럼 여기며 무고한 백성들이 엄동설한을 당하여 집을 떠나 사경을 헤매기에 이르러 남편과 아버지와 헤어져 길가에서 울부짖고 있으니 무슨 죄가 있어 이처럼 감당하기 어렵도록 만들고 있는가?
대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한다. 이 근본이 견고해야 나라가 평안하게 될 것이니 합하[충청감사]는 명찰하여 선정으로 무고한 백성들을 구휼하지 않으려는가? 이 모두는 저희들이 수도를 잘못하여 죄에 이르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엎드려 바라건대 자비를 베풀어 넓으신 덕으로 외읍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모두 방송(放送)하는 특별한 조처를 내려 주시고, 임금님에게 계달(啓達)하여 스승님을 신원하여 주기를 피눈물로 우러러 호소하며 큰 은인이신 관찰사 합하에게 엎드려 비는 바이다. 합하는 우리 대도를 드러나게 하여 주시고 무리들의 바램을 달래 주시어 하늘같은 은혜가 나라에 널리 퍼지게 되도록 천만번 간절히 빌어마지 않는다.
임진년 10월
이번 동학도들의 교조신원운동은 조용하던 공주부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충청감사 조병식도 사태의 심각함을 알고 종전의 태도를 바꾸어 신중하게 대처하였다. 동학의 의송단자는 단순히 교조신원운동을 넘어서 시국의 불안함을 걱정하고 있었다.
대충 요약하면 ①동학은 유불선 삼교를 통합한 도이므로 이단이 아니라고 한 것이며, ②오랑캐 무리가 들어와 전래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음을 지적하였고, ③왜인의 우두머리들이 여러 항구에 들어와 이득을 독차지하며, ④나라 안의 전곡(錢穀)을 반출하여 탕갈시켜 백성들의 생계가 어렵게 되어가고 있음을 환기시켰으며, ⑤요긴한 몫을 차지한 외국상인들은 관시세(關市稅)도 물지 않고 이득을 챙기고 있으며, ⑥산림과 천택에서 나는 이득까지도 독점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⑦도적의 무리가 대낮에 날뛰고 있다는 것도 지적하였다.
주목하는 것은 관리의 부정부패와 무능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교조신원운동을 전면에 내세웠기에 관리들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려는 전술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에 관리의 부패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모든 직책을 돈으로 사고 팔았으니 부정부패는 물론이고 백성들을 침탈하는 행위는 나라에서 허가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컨대 고종 11년(1874) 12월 전라도 암행어사가 올린 장계에 운봉(雲峰)현의 경우, 임채(任債;직임에 따른 가격)를 보면 이방이 2,400냥, 병방이 700냥, 좌수가 700냥, 별감이 100냥, 면임이 30냥이었다고 한다. 산골에서 이 정도면 곡창지대에서는 엄청난 가격이었을 것이다. 관직을 돈으로 사고판다는 것은 관료제도가 부패할대로 부패했음을 말해준다. 백성들은 정부. 관리란 침탈을 일삼는 기관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동학은 광제창생(廣濟蒼生)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정면으로 내걸었다. 보국안민이란 “잘못된 나라를 바로잡고 도와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고 인민들의 생활을 최소한도라도 골고루 보장하자는 말이다. 이것이 동학이 지향하는 일차적 사회운동의 과제였던 것이다.
21일 의송단자를 받은 충청감사는 하루만인 22일에 제사(題辭)를 동학도들에게 전해주었다. “동학을 금하고 금치 않을 권한은 내게 없다. 조정의 명령에 따를 뿐이다”라는 요지였다. 다만 “충청도내에서 억울하게 침탈되는 일 이 없도록 하겠으니 물러가라”는 것이다.
첫댓글 천여 명의 동학도들이 모여 일사분란하게 행동하며, 요구하는 내용은 교조신원과 외세를 물리치고, 보국안민, 광제창생을 해야 한다니, 충청감사도 힘으로 탄압할 수 없는 형편이 되어, 충청도내에서는 동학도들이 억울하게 침탈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노라고 타협안을 내 놓았네요. 힘과 힘의 대결을 피하면서 명분과 실리를 챙기려는 양쪽의 지략이 돋보입니다.
사태가 매우 긴박하면서도 진행이 흥미롭지요? 언젠가 드라마 '동학'을 할 날이 꼭 오리라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