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도깨비 영감님
도깨비 / 미역감기
마을 뒤쪽 산자락 끝 방죽(築防) 밑에 있는 송 영감네 집은 커다란 초가집인데 집 둘레는 복숭아나무, 자두나무, 감나무 등 갖가지 과일나무들이 빼곡히 심어져 있었습니다.
집 앞에는 제법 넓은 송 영감네 논이 펼쳐있었는데 방죽 덕분으로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송 영감네 논은 항상 물이 그득히 차 있고 벼가 싱싱하게 잘 자라서 마을 사람들이 부러워했습니다. (방죽/築防-작은 저수지)
논 아래쪽은 일본시대에 닦은 신작로(新作路)가 있어 우마차가 지나다니고 그 아래쪽 솔밭 밑에는 곳집이 있었습니다. 곳집은 사람이 죽으면 관을 넣어가는 상여(喪輿)와 각종 제구(祭具)를 보관하는 작은 헛간인데 아이들은 그 근처는 무서워서 잘 지나다니지도 못했습니다. 귀신이 그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것처럼 여겨졌거든요. 낮이면 그래도 무서운 마음을 억누르고 지나다니지만 해만 지면 아무도 그 근처를 얼씬거리지도 않았습니다. 학교 가는 길이 하필이면 논둑길을 지나 영감님 울타리 밑을 지나서 그 무서운 곳집을 바라보며 가야했습니다.
송 영감님은 다부진 체격에 송충이 같은 시커먼 눈썹, 사람을 노려보는 듯 한 조그만 눈은 쳐다보기도 무서웠습니다. 거기다 뻣뻣하고 시커먼 구레나룻이 온통 얼굴을 뒤덮었는데, 아이들이고 마을 사람 어른들에게고 무뚝뚝해서 말도 잘 붙이지 않았습니다. 간혹 아이들이 방죽 가에나 과일나무 밑에 얼씬거리기라도 하면 소리를 벽력같이 질러서 쫓아버렸는데 소리만 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쇠스랑이고, 괭이고, 지게작대기고 손에 든 것을 휘두르며 쫓아오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송 영감이라면 몸서리를 쳤습니다.
아이들은 학교 갈 때나 올 때 재잘거리며 떠들고 뜀박질을 하며 오다가 송 영감네 집 근처만 오면 모두들 숨을 죽이고 울타리 너머에, 혹은 논에 송 영감이 있는지 없는지 주위를 살피곤 했습니다. 아이들은 언제부터인가 송 영감을 송 도깨비라고 부르며 무서워했습니다.
미역 감기<목욕하기>
방학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장마가 곧 오려는지 날씨가 무척이나 더웠습니다. 남이와 나는 초등학교 4학년입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무척이나 지루합니다.
등줄기에 후줄그레 땀이 흐르고 터벅터벅 발밑에서는 먼지가 피어오릅니다. 미루나무 꼭대기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소리도 짜증이 납니다.
마을로 오자면 서지골을 지나 산자락 끝에 있는 송 도깨비 영감집 옆을 지나와야 합니다.
송도깨비 영감집 조금 위쪽에 조그만 방죽이 있습니다. 이런 무더운 날에 방죽에 들어가 물장구라도 치면 얼마나 시원할까요? 그러나 그 방죽에 들어가는 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여름에 방죽에서 목욕하다가 송도깨비한테 잡혀서 혼난 형들의 이야기는 물론, 겨울에도 몰래 방죽에서 얼음을 지치다가 송도깨비에게 혼난 이야기는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습니다. 송영감이 얼마나 무서우냐하면 아직 송 영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 아이들이 없을 정도니까요.
멀리서 송영감의 희끗한 옷자락이나 구렛나룻이 시꺼먼 얼굴모습이 조금이라도 힐끗 보이기만 하면 상급반 형들까지도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갑니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아이들이 ‘송도깨비’라고 불렀을까요?
그런데 그날은 날씨가 너무나 더웠고 마침 들판에는 축 늘어진 콩 이파리만 뜨거운 바람에 흐느적일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법 용기가 있는 남이가 먼저 말문을 꺼냈습니다.
“훈이야, 우리 송 도깨비 영감네 방죽에서 목욕하고 갈까?”
“뭐? 안돼, 들키면 어떡하려고 그래?”
“봐, 아무도 없잖아. 살그머니 들어가서 땀만 씻고 가잔 말이야. 굉장히 시원할 거야.”
“글쎄....”
나는 정말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그날은 너무나 더웠고, 시원한 물에의 유혹이 너무도 강했습니다.
“누가 있나 잘 봐.”
“괜찮아, 자 엎드려.”
우리 둘은 송 도깨비 영감집 반대쪽의 방죽 둑으로 살금살금 기어갔습니다. 야트막한 방죽 둑에는 억새풀이 어지럽게 자랐습니다.
남이와 나는 방죽 옆 소나무 밭에서 살그머니 옷을 벗었습니다. 맨 몸뚱이에 억새풀이 닿아 따끔거리는 것도 모르고 신경은 온통 둑 너머 송도깨비 영감 집으로만 쏠려 있습니다. 억새풀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시끄러운 매미소리 때문에 좀 안심이 되었습니다.
둑을 넘어가니 시뻘건 진흙바닥이 드러나 있고 가뭄으로 가운데 쪽에 불그스름한 흙물이 고여 있는 것이 보입니다. 진흙바닥을 미끄럼을 타며 물에 잠기니 뜨끈뜨끈한 물이 사타구니에, 등줄기에 간지럽습니다.
“야, 물소리 안 나게 살살 헤엄쳐!”
“너나 조용히 해.”
처음에는 겁이 나서 방죽 둑 만 쳐다보며 미적거렸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니 점점 배포가 커졌습니다. 시뻘건 진흙 언덕에 물을 뿌려놓고 미끄럼을 타기도 하였습니다.
엉덩이로 타다가, 엎드려서 배로 미끄러져 내려가기도 합니다. 온 몸이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어도 얼마나 시원하고, 기분이 좋은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놀았습니다.
“야, 이제 가자.”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충 진흙을 씻어내고 방죽에서 나왔습니다. 손으로 물기를 걷어내며 둑을 넘어와 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소나무 밑에 벗어 놓았던 옷가지는 물론 책보자기까지 감쪽같이 없어졌습니다. 둘이 사타구니를 감싸 쥐고 이 나무, 저 나무 밑을 아무리 둘러 봐도 도무지 꿩 구워 먹은 자리입니다.
큰 일 났습니다. 집으로 갈 수도 없고, 송 도깨비 집으로 가서 물어볼 수도 없고...
더구나 송 도깨비의 막내딸 옥이는 같은 반입니다. 이제 송 도깨비한테 들키는 걱정은 고사하고 혹시나 누구 눈에 띌세라 안절부절 입니다.
소나무 그늘에 쭈그리고 앉아 땅만 드려다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흥얼흥얼 콧노래 소리가 들렸습니다. 목을 빼고 나무그늘 사이로 내다보니 솔밭 저쪽 감자밭에 송 영감 막내아들인 석이 형이 밝은 햇빛 속에서 지게에 얹은 소쿠리에 감자를 주워 담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오라, 저 장난꾸러기 형의 짓이구나...’
남이와 나는 혹시 누가 있나 두리번거리며 사타구니를 감싸 쥔 채 석이 형한테 달려갔습니다.
“석이 형 짓이지? 빨리 옷 줘, 제발...”
그러나 석이형은 멀뚱한 눈으로 쳐다보며
“오라 그게 바로 네 녀석들 옷이었구나” 합니다.
“응, 잘못 했어, 우리 옷이야. 형, 어디다 감췄어? 빨리 줘”
남이와 나는 울상을 하고 석이 형 한테 애원을 하였습니다.
“아니야 이놈들아, 내가 감췄다는게 아니라 아까 우리 아버지가 웬 아이들 옷을 들고 가시길래 웬 옷인가 했더니....”
“뭐? 송도깨.. 아니, 아 참 형 아버지가?”
남이와 나는 얼굴이 흙빛이 되었습니다.
“형, 정말이야? 농담이지? 감췄으면 빨리 줘, 응? 형. 제발.”
“야 요놈들 봐라, 남의 말이 말 같지 않냐? 임마, 내가 왜 할 일 없이 너희들 옷을 감추냐?
너희들이 우리 아버지한테 가서 달라고 해. 남 일도 못하게 귀찮게 굴고 있어. 빨리 꺼져.”
정말 큰일 났습니다. 형의 얼굴을 보니 정말 형이 감추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형이 우리 대신 아버지한테 가서 옷을 찾아다 줄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방죽 아랫녘 논을 보니 송 도깨비 영감이 논에서 삽질을 하고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멀리서 그 모습만 보아도 소름이 끼쳤습니다.
“빨리 가봐, 이 녀석들아 우리 아버지는 좀 있다가 읍내에 가실거야.”
정말 큰일 났습니다. 옷도 안주고 읍내에 가 버리면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훈아, 할 수 없다. 가서 빌어 보자.”
남이가 침통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햇빛 속으로 걸어나갑니다. 나도 쭈그리고 앉아서 미적거리다가 일어나서 어깨를 늘어뜨리고 남이 뒤를 따랐습니다. 밝은 햇빛 속에 벌거숭이로 나서니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창피했습니다.
‘혹시 옥이가 보지나 않을까?’ ‘송 도깨비 영감이 저 삽으로 우리를 두들겨 패지나 않을까?’
송 도깨비 영감이 일하는 곳까지 가는 것이 얼마나 멀게 느껴졌던지.......
쭈빗쭈빗 다가가는 우리를 송 도깨비 영감이 의아한 눈으로 멀뚱히 쳐다보았습니다. 벌건 대낮에 알몸뚱이인 채 두 손으로는 사타구니를 감싸 쥐고 엉거주춤 다가가는 우리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을까요?
남이가 땅을 드려다 보며 꺼져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할...께요. 우리 옷.... ”
그리고는 벼락치는 소리를 기다리며 턱을 가슴에 처박고 곁눈질을 하는데 우리를 멀뚱히 쳐다보던 송 도깨비 영감은 송충이처럼 시커먼 눈썹을 씰룩하더니 웬 영문이냐는 듯이
“이런 얼빠진 녀석들....”
하고는 다시 삽질을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속았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돌려 우리가 온 곳을 돌아다보니 석이 형이 솔밭 가에 나와서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리고 웃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우리는 돌아서자마자 죽을힘을 다해 뛰었습니다.
‘저 장난꾸러기 석이 형을 죽여 버리고 말꺼야....’
뒤에서 송도깨비 영감이 삽을 휘두르며 쫓아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석이 형 있는 데로 숨도 쉬지 않고 뛰어오면서 보니, 석이 형은 손가락으로 소나무 위를 가리키며 도망을 갑니다.
소나무 위를 쳐다보니 소나무 저 위쪽 가지에 우리 옷과 책보자기가 바람결에 나풀거리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분통이 터지고, 창피하던지...
그런데 소나무 아래쪽에는 가지도 없습니다. 나무 오르는 데야 원숭이보다 자신 있지만, 벌거숭이니 오를 재간이 없습니다. 그래도 빨리 옷을 입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무턱대고 나무를 안고 기어올랐습니다.
아! 그 따끔거리던 뱃가죽과 발바닥!
나무에서 내려와 보니 뱃가죽이 온통 벗겨져서 새빨간 핏자국이 났습니다. 어떻게 하면 석이 형한테 이 원수를 갚을까?
우리 둘은 복수를 다짐하며 궁리만 하다가 그해 여름은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