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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여, 춤추지 말라
<장자(莊子)>는 '북명유어 기명위곤
(北冥有魚 其名爲鯤)'으로 시작된다.
동양사상의 한 축을 감당하고 있는 이 고전은,
대충 '북명에 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을 곤이라 한다'는 말로 장을 열고 있다.
'북명'은 상상 속의 큰 바다이고
'곤'은 물고기 알 혹은 금방 부화한
아주 작은 새끼고기를 가리키는 말이나,
장자는 여기서 엄청나게 큰 물고기의
이름으로 쓰고 있다.
더 나아가면,
'곤은(그 길이가) 몇 천 리인지 모른다.
변하여 새가 되면 붕(鵬)이라 한다'로 이어져,
'그 붕이라는 새도 크기가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한번 떨쳐 날면
그 날개가 하늘을 가리는 구름과 같다.
날개를 한 번 쳐 3천 리를 솟아올라
9만 리를 날아
남명(南冥: 천지)으로 간다'고 한다.
이 나무 가지에서 저 나무 가지로
바쁘게 옮겨다니던 참새와 뱁새가
이 이야기를 듣고는 짹짹거렸다.
"그래서 뭐하는데?"
진짜로, 그래서 뭘할까? 궁금해 죽겠는데,
장자도 뭘 어떻게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단, 그 뒤를 이어
몇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기는 했다.
몇십 리 길을 나서는 사람은
하루치 양식인 세끼만으로 충분하다.
몇백 리 길을 나서는 사람은
며칠 전부터 차비를 차려야 한다.
더 나아가 몇천 리 길을 떠나는 사람은
몇 달 전부터 준비를 해야 하는 법이다.
이어 말하기를,
하루살이는 그믐과 초승을 모르며
매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하는 법이라고 했다.
하루살이에게 그믐과 초승,
매미에게 봄과 가을은 어떤 의미일까.
몰라도 하루나 한 철 정도 먹고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는 건 분명한 듯하다.
혜자(惠子)는
<장자> 곳곳에 등장하여
장자의 스파링파트너 역할을
충직하게 하는 친구다.
양(梁)나라 재상을 역임했으며,
명가(名家)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하루는 이 혜자가
평소 버릇대로 장자에게 시비를 걸었다.
"위왕한테 박씨를 하나 얻어
이놈을 심어 박을 얻긴 했는데,
너무 커서 쓸데가 없네.
속을 파 물을 넣으니 다섯 섬이나 들어가
들 수가 없고,
잘라 표주박을 만들었더니
그 역시 너무 커 물독에 들어가지도 않네.
그래서 부숴버렸지."
장자가 하도 큰 것만 이야기하니
비꼬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장자가 대답했다.
"송나라에 조상 대대로
실을 세탁해 먹고사는 사람이 있었네.
직업이 직업인 만큼
손이 트지 않는 비방(秘方)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안 어떤 사람이
백금을 줄 테니 그걸 자기에게 팔라고 했다네.
그만한 돈이면
살림살이가 확 피겠다 싶어
얼씨구나 팔아버렸다네.
그 비방을 산 사람은
월나라와 전쟁 중이던 오나라로 가서
오왕에게 헌책하여 장군이 된 다음,
한겨울 월나라 군대를
늪지대로 끌어들여 크게 이겼네.
그 손이 안 트는 비방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물론이지.
그는 그 공으로
오왕으로부터 영지를 받아 제후가 되었다네.
같은 걸 가지고
누구는 살림살이에 보태고
누구는 제후가 되었네.
자네는 어찌
그 큰 표주박을 배 삼아
대하나 장강에 띄워볼 생각은 못하는가?"
간단한 되받아치기 한 방에 묵사발이 된 혜자가 다시 집적거렸다.
"우리 동네에 크기만 크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가죽나무 한 그루가 있네. 구불구불하고 옹이투성이라
어떤 목수도 눈여겨보지 않네.
자네 말도 겉만 번드르르할 뿐
어디 써먹을 데나 있나.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자네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지.
아니 그러한가?"
장자가 웃었다.
"자네 살쾡이 알지?
살쾡이는 몸을 숨기고 있다가
덮쳐 한 방에 먹이 사냥을 하네.
재빠르고 영악하지.
하지만 그게 화근이 되어
덫에 치이거나 그물에 걸리기도 한다네.
살쾡이에 비해
태우(邰牛: 큰 소)는 덩치만
하늘을 가릴 만한 뿐
생쥐 하나 잡을 능력도 없다네.
그냥 생긴 그대로 있을 뿐이네.
덫이나 그물 걱정은 하지도 않지.
자네는 어찌하여
그 큰 가죽나무를
무하유지향(无何有之鄕: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는 뜻. 장자가 지어낸 말로,
뒤에 이상향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에 심어두고
그 그늘을 즐길 생각은 못하는가.
아무 소용에 닿지 않아,
있다 없다 귀찮게 구는 사람이 없으니 그 얼마나 편하겠는가?"
바다를 가슴 깊이 느껴본 사람은
바다가 왜 이렇게
넓은가 탄식한 적이 있을 것이다.
바다는 왜 이토록 넓은 걸까.
이렇게 넓어서 어쩌자는 건가?
작은 몸뚱이를 가진 인간에게는
백 길의 넓이도 모자라지 않고
열 길의 깊이도 감당이 안 되는데,
바다는 어찌하여 만 길로도 잴 수 없고
천 길로도 그 깊이를 다할 수 없는 걸까.
한 잔의 물을 오목한 데 부으면,
작은 씨앗 한 톨이야
충분히 띄우지만
그 물보다 부피가 큰 건 뛰울 수가 없다.
뜨기 전에 바닥에 닿아버릴테니 말이다.
따라서
바다가 그토록 넓은 까닭은,
그래야만 띄울 수 있는 그 무엇 때문이다.
그런 바다에 고래가 살고 있다.
고래는 지구상 최대의 동물이다.
몸길이 30여 미터에
200톤 가까이 나가는 것도 있다.
이 정도면 장자가 이야기한
고 북명의 물고기 곤에는 미치지 못하나
현존하는 것 중에서는
가장 그에 가깝다 할 수 있다.
고래는 수만 킬로미터의 대해를 누비고,
수천 킬로미터 밖까지 가 닿는
자기들의 언어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수심 수천 미터를 치고 내려가
사냥을 하기도 한다.
그런 고래의 언어는
물의 표면장력에 의존하여
수면에 떠다니며
가끔 바람에 날려오는 풀씨 한 알이나
뽀로로 올라오는 공기 한 방울에도
혼비백산하는
소금쟁이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이야기다.
고래와 소금쟁이는
실체와 이름을 가진 같은 동물 개체이나
그 몸무게는 수억 배의 차이가 있다.
억이라는 수치는
어지간한 것으로 감당하겠다고
나설 만한 것이 아니다.
그런 고래를
춤추게 하고자 하는 세상이 있다.
그 세상 사람들은
고래를 가둬두고 춤을 추게 한다.
춤이란 원래
스스로의 신명이
몸짓으로 발현되는 것인데,
그 춤은 그게 아니다.
사람에 의해 수족관에 갇혀 춤을 추는 고래는
보통 범고래다.
범고래는 고래 가운데 비교적
큰 편에 속하는 종으로,
탄력 있는 몸에 날카로운 이빨과
강한 턱근육으로 주로 바다의 포유류를
사냥하는 해양 생태계 최고의 포식자다.
한 범고래 연구가에 의하면
범고래가 구사하는
음파 신호의 정보량은
2천만 가지라고 한다.
참고로 성경의 정보량은
약 4백만 가지다.
범고래는 멋지고 우뚝한
등지느러미를 달고 있다.
등지느러미는 방향타이자
전진의 깃발처럼 보이기도 한다.
등지느러미는 우뚝해야 제격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사육되는
범고래의 등지느러미는 한쪽으로 굽어 있다.
좁은 수족관에서
항상 한쪽 방향으로만 빙빙 돌기 때문에
생기는 환경에 의한 장애현상이다.
크게 떨쳐 치고 나갈 공간을 가지지 못해 등지느러미가
축 늘어진 범고래는
고깔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무대에 오른 어릿광대같이 보이기도 한다.
고래 가운데 춤을 가르칠 수 있는 건
같은 이름이 들어가는 돌고래가 있지만,
돌고래는 고래와는 촌수가 먼
다른 종자이므로 제외하고
범고래가 거의 유일한 모양이다.
춤을 추게 만들려면
조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조련이 가능하다는 건,
신체구조상의 이유도 있지만
지능이 높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능이 어느 정도 되니
조련이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범고래를 조련시키는 비법은
다름 아닌 칭찬이라고 한다.
잘한다고 칭찬해주는 것이
비법이라는 이야기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힘을
가졌다는 것이다.
고래를 가두어놓고
춤을 추게 하는 목적은
훈육이나 교육과는 크게 다르다.
고래가 아니라 그 춤을 구경하는
사람이 중심이다.
그래서 고래를
훈육이나 교육한다고 하지 않고
조련 또는 훈련시킨다고 한다.
잘하게 만드는 건 같으나
목적은 천양지차다.
사람이나 고래나
그 존재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할 때
춤을 추는 것이
고래에게 행복한 일은 아니다.
고래에게
고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닌
춤을 추게 하는 것이 칭찬이라면,
그리하여 그에서 발생하는
이득을 취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칭찬은 범죄에 해당하는
사기에 다름 아니다.
조련사는 칭찬이라는 기법으로
고래를 춤추게 하여
이득을 취하는 것이다.
고래가 춤을 춤으로써 입는 피해는,
육체적으로는 등지느러미가 굽는
장애를 얻고
정신적으로는 대양을 잃고
속박과 업압에 시달린다.
이에 반해 얻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먹이니 비린내 나는
고기 몇 마리에 불과하다.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먹이는
존재로 하여금
먹기 위하여 살게 만든다.
고래여,
칭찬에 현혹되지 말라.
그 칭찬은 너의 몸을 병들게 하고
너의 자유를 빼앗는다.
너의 몸은 위대하며
너의 자유는 대양의 넓이만큼 가없다.
고래가 춤을 춤으로써
고래는 바다를 잃고
사람은 고래가 주유하는 바다를 잃는다.
고래가 없는 바다는
그만큼 좁아진 바다다.
모든 어린이는 고래다.
정신과 영혼이 깨끗하고 자유로우므로
고래가 아닐 수 없다.
이 고래를 춤추게 하지 못해
안달하는 세상이 있다.
칭찬이란 무엇인가.
칭찬을 인수분해하면
'인정+보상'으로 나뉜다.
잘하는 것을 안다(인정),
잘하니 잘해주겠다(보상)이다.
이 둘을 다시 묶으면
잘(한다+해주겠다)가 된다.
그 반대는 못하는 것을 알고,
못하므로 벌을 준다가 된다.
못(한다+해주겠다)가 된다.
칭찬의 반대말이
반드시 질책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 치고
칭찬과 질책의 차이점은 '잘'과 '못'이다.
이 둘은 정반대인 듯 하지만,
한 단계 나아가면
곧 둘의 공통점이 나타난다.
'앞으로 잘하라'는 것이다.
칭찬의 99퍼센트와
질책의 90퍼센트는 교육에 발을 담그고 있다.
교육의 목적은
'잘'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부모와 선생은
자녀와 학생에게 칭찬과 질책을 통하여
'잘'하라고,
그리하여 '잘'하는 인간이 되라고 한다.
'잘'하면 누구에게 좋은가,
칭찬이나 질책을 받는 쪽이다.
그것이 훈육 내지 교육의 본질이다.
교육과 훈육은
기성세대의 임무이자 권리다.
미래의 세상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놓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중대한 문제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수없이 많은 오류가 예비되어 있다.
우선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누구를 위해서인가 하는 문제다.
고래를 조련하는 것과
교육하는 것은 다르다고 했지만
그 경계를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렵다.
자식이나 학생을 가르칠 때
부모 또는 선생은
그 가르침이 피교육자의
장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긍정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장래를 위하여'가 되지만,
'위한다'는 애매한 말을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자기 입맛에 맞도록'이 된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두 번째로 자식의 장래를 위하여
가르치고자 하는 그 세상은
부모들이 살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흔 살 부모가 열 살 자식에게
스무 살 때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칠 때,
그 자식이 스무 살에 사는 세상은
부모가 스무 살로
살아야 하는 세상이 아니다.
자식이 스무 살에 사는 세상에서는,
그렇게 가르친 부모는
쉰이 되어 스무 살을 살고 있는
자식을 지켜보아야 할 뿐이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세상에,
고래조차 춤추게 할 수 있다는
칭찬으로 미래의 주역인 자녀를,
혹은 학생을 교육하겠다고 한다.
그 결과가
고래가 춤을 추는 것과 같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사람들은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한다고 하면서
'인간이 어떠하기 때문에••••••••' 하는
수많은 전제를 들이대고 있다.
이러한 전제 없이
칭찬의 유용성과 같은 논의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어떠하다는 전제는
매우 폭력적이다.
'인간은 사회적이다'라는 말은
비사회적인 인격에 대한 폭력이고
'인간은 이성적이다'라는 말은
비이성적인 면에 대한 폭력이다.
'사회적'이고 '이성적'이라는 전제는
좁은 우리다.
좁은 우리에 가둬놓겠다는 것이다.
일방적인 감금은 부장한 폭력이다.
옛날 TV광고 가운데
돌잔치에서 돌잡이하는 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돈을 잡아라,
실을 잡아라, 연필을 잡아라,
청진기를 잡아라 하고 안달하는데
아이는 "내 맘대로 잡으면 안돼?" 한다.
그 한 마디에 사람들은
머쓱한 얼굴로
천상천하 최고의 복음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내 마음대로? 생후 딱 1년, 365일 된
아이 마음대로?
돈이며 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연필과 청진기는
또 어떻게 쓰이는 건지
알지도 못하는데?
이 장면에서 무엇이 문제일까.
주변 사람들이 안달을 하는 세태가 문제일까
아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더 큰 문제일까.
건강과 부와 명예와 권력을 잡아
오래오래 잘 살면 행복한 걸까.
왜 기성세대는
부와 건강과 명예와 권력을 통해서만
행복에 이르는
이 좁은 세상에 아이를
가두어놓으려 하는 걸까.
보다 넓은 세상을 잡으면 안 되는 걸까.
광고는 세태를 대변하는 것이라는데,
또 다른 좁은 세상을 이야기하는 광고가 있다.
'내 아이는 특별하다.'
아마도 유아용품 광고인 듯한데,
그래서 특별하게 좋은,
특별하게 고급인 제품을
사용하라는 것일 터이다.
내 아이가 특별하면?
그건 볼 것도 따질 것도 없다.
불행한 사람이다.
단 한 사람만 살 수 있는
풍요의 행성과
모든 사람이 같이 살 수 있는
결핍의 행성이 있다고 할 때
사람은 어느 쪽에 살아야 할까.
특별한 사람은 풍요의 행성에 살면 된다.
아니, 그 풍요의 행성에 사는 것
자체가 특별하므로 그냥 살면 된다.
혼자.
인간의 행복은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나온다.
인간적이지 않은 데서
행복을 찾으려 하는 건
아가미로 호흡하는 물고기가
뭍에서 사는 것과 같다.
물고기가 특별 장치의 도움을 받아
뭍에서 공기를 호흡하며 살 수는 있다.
그게 특별한 거 아닌가.
내 아이는
특별한 장치를 달고 있으니 특별하다.
세상은 특별하면 특별할수록 좁아진다.
좁다는 말 자체가 특별하다는 의미다.
평범해야 넓어지는 게 세상이다.
넓다는 말과 평범이라는 말은
동의어다.
내 아이는 특별하다는 말은
'특별히 귀하고 소중하다'는 말일 터이다.
그만큼
귀하고 소중하므로 잘 키워야 한다는
말로 알아들어야 한다.
귀하고 소중하므로,
평범하게 자라야 한다.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고래여,
네가 춤을 추면 세상은 그만큼 좁아진다.
인간의 잣대에 구애받지 말고
그냥 무하유의 너른 대양을 주유하라.
바다가 너르지 않으면
언젠가 누군가가 만들게 될
큰 배를 뛰울 수 없다.
고래여, 춤추지 말라.
■ '북명에 고기가 있으니•••••••'
시작하는 <장자>의 제1장은
'소요유(逍遙遊)'다.
'소요유'라는 말은 세 글자 모두에
'거닐다', '놀다'라는 의미가 있다.
한가하고 느긋하게 노닌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한 권리와 의무가 없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본능적으로
지향하는 자유의 진면목이다.
자유란
'진짜로 큰 것'을 볼 수 있는 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