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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쟝켈레1959앙리베16L07A
앙리 벩송(Henri Bergson, 1959)
쟝겔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 1903-1985), PUF, 증보판 1959(초 1931), P. 300.
제6장 개념들의 무와 정신의 충만 Le néant des concepts et le plein de l'esprit 200
제1절 제작작업과 유기체작업: 데미우르고스의 예단(선입견),
Fabrication et Organisation: Le préjugé démiurgique 201
제2절 가능적인 것에 대하여 - Du possible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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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개념들의 무와 정신의 충만 Le néant des concepts et le plein de l'esprit 200
엘레아의 이방인이 테아이테토스에게,
사실상, 나의 친구여, 이 모든 사물을 서로 서로 따로 나누는
광기(la manie 강박관념)은 그 자체로 불합리하며,
뮤즈들에게 그리고 철학에게 낯선 정신을 예고한다.
- 플라톤, 소피스트(Le sophiste, Σοφιστής), 259 d-e
무질서와 무의 관념들의 비판은 벩송주의의 열쇠이다. 벩송은 이 문제에 관해 전념하면서 찬탄할 만한 내용을 몇 쪽으로 전개했다. 그 내용은 아마도 철학자가 썼던 것들 중에서 가장 혼란하게 하는 것들 가운데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영속적으로 이 비판을 암시해 왔는데, 모든 벩송의 사색은 이 비판을 예견하게 하고 또 속을 드러내 보인다. 우리가 말했듯이, 생명은 궁극성(la finalité)을 초월한다. 왜냐하면 인력은 충력과 심정적으로 동등하며, 진화운동의 예견불가능성을 폐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은 뒤에서 또 일종의 유기체적 원인에 의해서 밀려나간다. 자유작동은 전체적인 창조이며, 전체적인 천재성인데, 그럼에도 그 자유작동은 자기의 근원에서 어떤 의도적[지향적] 상태를 지닌다. 그 상태는 자유작동의 방향을 잡아주고 또 그것에게 영감을 준다. 결국 예지작용(l'intellection)은 좋은 탐구, 긴장, 발명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지작용은 자기를 앞서 나가는 “역동적 도식”을 가정한다. 이미 우리는 알아맞혔다. 영혼의 사물들의 법칙이 한 마디로 선현존이라고. 그리고 말하자면 정신은 정신에 앞서있다고. 왜, 그것들의 결과들에 예상참여하는 원인들의 초월을 싫어하고, 또 그것들의 결론들을 선판단하는 주제들의 실체적 우선성을 싫어하는, 정신적 생명은 항상 선현존을 요구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 생명이 혁신적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설적 사상의 경제적 메카니즘에도 불구하고 적대적으로 남아있는가? (49RMH)
제1절 제작작업과 유기체작업: 데미우르고스의 예단(선입견),
- Fabrication et Organisation: Le préjugé démiurgique 201
제작하는 사고(思考)는, (겉보기에)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그리고 부분에서 전체로 가면서, 조작하기 위하여 빈 것(le vide)을 필요로 한다. 빈 것은 자연적 환경이며, 따라서 그 사고는 무(無)의 불가능한 가능성을 암암리에 가정한다. 무가 있었다고 하는 거기에서, 제작하는 사고는 어떤 것을 시작한다. 그 사고는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만들고, 요소들을 가지고 총체성들을 구성한다. 자연 보존의 법칙이 그 사고에게 이론적으로 모든 창조적 덕목을 부정한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실상 눈으로 보는 경우에 있어서 제작작업은 부피의 증가이며, 그것은 빈 장소들을 채우는 것이다. 운동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록에 있어서, 제작작업은 증가와 축소의 종류에 속한다. 그러한 것은, 벩송이 그것을 잘 보았듯이, 실천적 고민들(des préoccupations)에, 그리고 특히나 노동과 산출액의 스칼라량의 표상에 기인한다: 즉 석수장이들은 작업하면 더 많이 하면 할수록, 집은 점점 더 높아진다. 베끼는 자가 글을 더 많이 써나갈수록, 복사량은 점점 더 길어진다. 제작하는 작업은 생산의 확대가, 양적으로 또 비례적인 공간적으로 행위의 진보에 있어서, 유일한 작업이다. 그리스 철학의 대부분은 조각가와 건축가의 관념에 관하여, 대리석, 화강암, 나무 같은 투박한 재료를 조금씩 초벌로 깎아서, 그 재료에게 점점 더 규정된 현존을 부여하는 형식이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이 희극은 신(dieu)이, 즉 탁자 또는 양푼이가 될 것인가?” 기술자와 예술가의 사유는 비결정적인 것에 대한 데미우르고스의 정교한 작업에 관하여 기꺼이 집중된다. 그 사유는 “걸작”의 광경을, 또는 인간적 근면에 의해서 혼돈(le chaos, 무질서)으로부터 점진적으로 추출된, 고유한 의미에서, 저작의 광경을 스스로 즐긴다. 휠레(Ὕλη), 즉 물질은 기원에서 초벌로 깎여지지 않은 나무 등걸이 아닌가? 세상에서 본능적으로 장인(匠人), 기능인, 예술인의 정신에게 가장 많은 관심 갖는다는 것, 그것은 존재의 최소로부터 존재의 최대로, 아페이론(ἄπειρον, 무한정자)에서 페페라스메논(πεπερασμένων, 한정자)로, 혼돈에서 질서(le cosmos)로 이행이다. 중성적 지지점도 없고 질도 없는 거의 무(無)가 있었던 거기에서, 우리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현존의 모든 술어들을 갖춘, 완전한 질서의 탄생에 참여한다. 헤시오도스(Hésiode, Ἡσίοδος, 8세기경)에게서 뉙스(Nyx, Νύξ)와 에레보스(Érèbe, Ἔρεϐος)는 에테르(Éther, Αἰθήρ)와 헤메라(Héméra, Ἡμέρα)를 생성하는데, 다시 말하면 비결정적인 밤으로부터 결정된 것들의 위대한 날이 나온다. 혼돈은 지구(la Terre)[(Gaïa, Γαῖα]보다 더 오래되었고, 지구는 대양(l'Ocean)[Océanos, Ὠκεανός)보다, 대양은 하늘(le Ciel)[(Ouranos, Οὐρανός)보다 더 오래 되었다. 이리하여 헤시오도스의 계보학은 비형태적인 성운으로부터 가장 빛나고 가장 가소성 있는 존재들로 나갈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창조를 제작작업처럼 표상하게 될 것이다. 또한 소위 말하는 창조적 제작작업은 특별히 명석한 측면에서도 그리고 단순성의 측면에서도 변형작업(transformation)의 관념보다 우월할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자연 보존법칙은 자발적 사유의 보존으로써가 아니라 과학적 반성의 요청으로써 나타났었다. 온우연(le Hasard)은 온원인(Cause)의 관념보다 훨씬 더 신화적이고 신학적이다. 왜냐하면 원인성의 원리는, 라슐리에(Lachelier 1832-1918)와 메이에르손(Meyerson, 1859-1933)이 그렇게 보았듯이, 선현존의 원리이기 때문이고, 선현존은 보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여진다는 것, 그것은 출현들과 소멸들, 새로움들, 파국들이다. 우선 물질의 영구성, 즉 자연적 변형들의 연속성은 하나의 드라마로써 세계의 광경을 고려하는데 익숙한 정신에게 충격을 준다. 그 드라마에서 우발사고들(les accidents)이 퍼져있고 또 거기에서 변덕스런 의지들이 영속적으로 사물들을 만들고 해체한다. 그러나 창조주의자의 생각[관념]은 형이상학으로 또 신학으로 은신하게 된다. 이런 형식 하에서 그 생각은 자발적인 생성작업들에게 또는 영속적 운동들에게 신념[신앙]보다 더 잘 저항했다. 왜냐하면 그 생각은 효과적으로 초경험적인 진실한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쇼펜하우어가 감명적인 용어로 말했듯이, 현존한다는 데 스스로 놀라는 유일한 존재이다. 이 때문에 그러한 것은 바로 토대적인 형이상학의 필요이다. 근본적[철저한] 우연성(la contingence)은 과학에 의해 추적된 이차적 우연성들이 잃어버린 것을 수집한다. 우연들(les hasards) 중에 첫째 우연은 분명히 현존일반[현존자]의 우연이며, 그리고 만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날들과 어떤 질서로 신이 세계를 제작하였는지를 그 첫째 우연에 대해 더 이상 자문하지 않는다하더라도, 사람들은, 우리에게 점진적인 생성작용에 참여하게 할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빈 것을 실행하면서, 적어도 온존재(l'Etre)의 불가사의를 밝히고자 희망한다. 이리하여 정신은, 행하는 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만큼이나, “대체(la substitution)”하려는 것을 창조로든 또는 무화(無化)과정으로이든 전환하려고 한다. 또는 만일 사람들이 새로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식들 선호한다면, “변질(l'altération)”은 정신에게서 증가와 축소보다 더 피곤할 것이고, 생성과 붕괴보다 더 뉘앙스가 있을 것이다. 무로부터 출발하는 또는 무에 귀착하는 운동들만이 척도로서 측정할 수 있고, 개념으로 베껴 쓸 수 있다. 다음을 제시해보자: 제작적 경험주의(le génétisme)는, 만일 이것이 진실로 온무(le Rien)로부터 출발한다면, 결코 무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상 이것은, 자기의 무 안에서 어떤 것을 남몰래 밀어 넣으면서 만이 어떤 것에만 도달하기 때문이다. 내가 무얼 말하지? 시작의 비-존재에서, 그것은(il, 비존재, 무) 정확하게 생겨나는 모든 것을 이미 가두어 놓았었다. 이 악순환은 데미우르고스 철학에서 거대한 순회의 속임수가 아닌가?
1. 시론에서 강도성(l'intensité)의 용어 비판은 이미 이점에서 매우 분명하다. 기계주의의 상식은, 스스로 “강(도)화되는” 고통이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그리고 작은 양에서 더 많은 양으로 실재적으로 이행한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고통은 공간속에서 부풀어갈 것이고 또는 압축되리라. 반대로 심리학적 분석은 우리 감각들이 양으로가 변형되는 것이 아니라 질로 변형된다. 우리의 감각은 크기를 바꾸지 않고서 조바꿈을 한다. 제작적 착각이 근본적으로 동질적인 인상들의 “강도화”를 다수로 - 항상 한정된 다수화로 - 해소하는 거기에서(왜냐하면, 이 인상들은 오직 등급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고, 말하자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질적 충만의 철학은 강도화를 연속적 운동으로 취급한다. 이 운동과정에서 동일한 감각이 차례차례로 무한히 다른 형식들을 스스로 구체화된다. 달리 말하면, 증가와 축소와 같은 양적 운동들은 불연속이자 동시에 획일적(uniforme)이다. 질적 운동들은 말하자면 변동(la mutation) 또는 변질(l'altération)은 이질적인 연속성에 유연하고 역동적인 통일성을 부과한다. 선입견들, 즉 그 이론들은 검은 색이 마치 색깔이 없는 것처럼, 또는 최소한의 빛인 것처럼 생각한다고 우리에게 익숙해 있었다. 스펙트럼의 다양한 색깔들은 이 최소 빛으로부터 규칙적인 증가에 의해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무매개적 자료들의 현전[출석]에 있는 순진한 의식에서는 검은 색은 다른 색깔들과 마찬가지로 한 색깔이다. 그 현존에 대한 그 색깔의 주장들은 실증적이라고 말하는 색깔들의 주장들과 동등하게 심리학적으로 토대가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색깔들이 아름다운 직선을 따라서 단계들로 되어 있기를 전력을 다하여 바란다. 이 단계들의 연속적인 등급화들은 어느 정도로는 색깔 없는 유일한 감각의 확대를 리듬으로 만들 것이다. 검다와 희다는 이 점차세게(ce crescendo)의 양끝, 즉 이 극성의 두 극단이리라. 벩송은 검은 색과 흰색의 마니교주의[이분법분할]에 인상주의의 수천가지 뉘앙스들을, 여러 색조들과 성질들로 된 여러 색깔의 팔레트를 대립시킨다. 마치 등급상승들과 등급하강들의 양적인 철학이 그것을 바란 대로, 검은 색은 최소한의 흰색이 아니며, 극성의 이원론적이고 드라마틱한 체계들의, 그것을 원하는 대로, 검은 색은 [깊은] 밤[어둠]의 안티테제도 아니다.
데미우르고스의 선입견은, 마치 근육의 노력을 최소한의 부피에서 그리고 말하자면 압력의 상태로 의식하는 선현존하는 실체적인 어떤 힘의 분사[방사]처럼, 생각하는 이론들의 바탕(le fond, 뒷배경)을 만든다. 그러나 특히 무의 관념의 비판은 물질과 기억의 이원론적인 모든 증가를, 볼 수 없을 정도이며 암암리에, 활성화 한다. 왜 관념론은 지각과 추억을 혼동 하는가? 왜 관념론은 부피(l'etendu)와 비연장(l'inextensif) 사이에, 운동기억과 순수기억 사이에 철저한 구분을 잘못 인식하는가? 왜인가? 왜냐하면 관념론은, 마치 기술적인 모든 사유처럼, 제작작업의 불합리한 조증(躁症)에 무의식적으로 복종하기 때문이 아니라면 말이다. 외연적 지각은 비부피적인 감각들의 커감에 따라서 조금씩 구성되어야 한다. 아주 동일하게, 점진적인 부풀음과 연속적인 팽창에 의해서 색깔의 부재[없음]는 조금씩 색채 있는 인상이 될 것이며, 또는 좋게 말하자면, 마치 본능이 점진적으로 우발적 변이들이 제작되는 것과 같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배운 과목은 연속적 강독들에 의해 생성된 일종의 혼합된 이미지이기를 원한다. 연속적 강독들은 여러 번 반복되면서 조금씩 어떤 운동 습관을 만들어 갈 것이니깐. 이리하여 완전한 습관과 강독들 각각 - 이 강독들이 구성으로 들어가게 되고 - 사이에 전체와 부분들의 또는 많은 것과 적은 것의 단순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각 강독은 그 강독 안에 이미 완전 한 습관을 표상하고 있다는 것을 누가 보지 못하는가? 추억은 인위적 학습의 결과로 나오는 것이기는 커녕, 직관 속에서 단번에 주어진다. 추억은 스스로 “배우는” 것이 아니다. 마치 유기체는, 모나드들의 방식에서 마치 순수 추억이 단번에 그리고 전체적으로 침입하듯이, 작게 태어나지만 완전하게[가득하게] 태어난다. 마찬가지로 의미는 [한 문장 또는 한 발언 안에서] 각 단어에서 완전하게 재생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곡선 방정식은 곡선의 각 무한소 조각에서도 완전하게 그림[선분]을 그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제작하는 광증은 완고하다. 사람들은 표상으로부터 감각까지, 이미지로부터 관념까지 느낄 수 없을 정도의 변이의 음계가 있다고 소위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주의(l'attention)가 이론들 속에서 자극의 단순한 커감[증가]에서 결과로 나오는 것과 같이, 마찬가지로 감화(l'affection)는 강도가 축소하면서 [부피가] 늘어나게 될 것이고, 지각은 스스로를 강화하면서 애정적(affective, 감화적)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견되지 못한 경험은 고통 속에서 긍정적인, 독창적인, 능동적인 어떤 것을 우리에게 폭로하는데, 표상의 양상을 결코 폭로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비슷하게도, 추억의 대립에 의한 실재적인 것의 지각이 또는 초보적인 감각의 대립에 의한 지성의 해석이 독창적인 만큼이나, 주의는 독창적인 “태도”로서, 또한 그러한 종류에서 그 만큼 “연역불가능한” 태도로서 나타난다. 사람들은 데미우르고스의 선입견에다가, 벩송은 이런 용어들로 이것을 행하지 않을 지라도, 틀림없이 우리가 이미 앞서서 “소형[장난감] 이론”이라 불렀던 것을 결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상과 주체 사이에, 큰 직선을 긋고서, 그리고 사람들은 자극이 표상이 되는 순간까지 자극의 직선적인 길을 따라가는 데 만족을 얻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계열이 자극에 의해 시작하여 표상에 의해 끝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순간이 있는데, 그 순간에, 그러한 것이 일어났을 때, 정확하게 말할 수 없을 지라도, 후자[표상]가 전자[자극]로 대체되었다. 이렇게 엘레아학파의 소피즘들의 미해결에 어울릴 만한, 메가라 학자들의 연쇄추리(le sorite)가 아주 자연스럽게 쫓겨났다. 그리고 동원되고, 응급 수리되어, 천정이 벗겨져버린 변동(la mutation, 교체이동)은 시동을 걸고 시작하여 그 끝에 이른다.
창조적 진화에서 몇몇 중요한 선들은 이 비판의 의미를 분명하게 끌어낸다. 제작적 착각은, 살아있는 신체들의, 자유로운 행위들의, 또는 영혼의 상태들의, 한 부분만이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이것들의 완전한 실현화가 “일종의 은총”이라는, 이러한 선입견[편견]에 본질적으로 근거한다. 그러한 것은 정확하게 다음을 의미한다: 생명의 사물들은 증가와 축소의 범주 바깥에 있다는 것이고, 이 사물들은 더 많이와 더 적게를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변양들”(modification) 만이 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주목에 따르면, 그것은 동일하게도, 왜 자연적 파괴들이 이것들의 증폭에 의해 정신을 무서워하게 하는가 하는 것이다. 제작작업의 추론적 절차들이 부지런히 힘써 커감[노동 증가]에 따라 우리들을 익숙하게 했다. 이 커가는 과정에서 사물들은 차례차례로 가능한 모든 부피들을 통과한다. 그리고 우리는 심정적으로 거대한 파국들을 상세히 설명한다. 마치 우리가 존재들의 출현을 설명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 생명은 붕괴하지도 않고 생장하지도 않는다. 정신의 충만 안에서 어느 부분에서도 지성은 결함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 결함 속에 지성은 그것의 생성을 서술하기 위하여 슬며시 끼어 들 수 있을 것이다. 정신적 세계는 모든 부분에서 두께가 있고, 마찬가지로 추억의 회로들 각각에서 기억은, 벩송에 따르면, 항상 완전하게 현재하고 있다. 비동등성들은 순수하게 질적이며, 밀도의 볼 수 있는 두께가 아니라, 중앙의 밀[집]도에만 관심을 갖는다. 질병이 이따금 흠집 낼 수 없는 충만에서 틈[구멍]들을 만든다고 사람들은 말할 것인가? 그러한 것을 말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질병의 축소, 이 축소가 있다고 할지라도, 의식 상태들의 수(數)보다도 오히려 무게(le poids)에 감화[영향]을 입힌다. 실어증의 연구가 우리에게 그것을 증명했다. “생의 주의”에서 또는 감각-운동 기능들의 생동성(la vitalité)에서 타격을 입은 것은 의식 전체라는 것이다. 추억들은 그것들의 바닥짐을 상실하고, “실재적인 것의 의미(방향)”이 기울고(굴절되고), 거기에는 모든 기억의 근본적인 약화가 있다. 역동적 균형과 사물 속에 정신의 정당한 개입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심정적 건강의 가장 특징적인 표시들이다. 이 건강이 기울 때, 따라서 우리의 모든 상태들은 다소 타격을 입는다. 병리적인 것은 정상적인 것의 어떤 “최소한의 약화된 것”임을 표상한다고 심지어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것을 제시한 것이 벩송주의의 독창성이다: 즉 환각, 정신착란(le délire), 고정된 관념과 같은 혼란들은 부재들 또는 부정들이라기보다 오히려 “현전들”이라고 반대로 제시하는 것이다. 무르그와 모나코프는, 고전적 신경병리학, 즉 “위치화 이론가들”의 신경병리학이 신경 혼란을 마치 결함의 단순한 현상들인 것처럼, 또 “퇴보들”의 현상인 것처럼 취급하였다는 것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이 신경 병리학이 이 질환들에게 부여한 명칭들은, 결함 있는 이라는 접두사를 붙여서(실어증aphasie, 실독증alexie, 실서증agraphie...)[운동불능증(ataxia)], 부정성을 표현하였다. 그럼에도 어떻게 순수하게 파괴된 손상이 긍정적 징후들의 그런 꼬리[행렬]들을 자기 뒤에 끌고 다닐 수 있다고 인정하는가? 치매(癡呆 la démence)의 논리가 있는데[현존하는데], 이는 마치 꿈의 논리, 상상의 논리, 희극의 논리가 현존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 모든 의사(擬似)-지적인 논리들은, 결함 또는 희박화에 의해서가 전혀 아니라, 반대로 한탄스럽게도 그것들의 풍성함에 의해서, 정상 논리와 다르다. 꿈과 각성시 중에서 가장 확산적이고 가장 풍부한 것은 확실하게도 꿈이다. 꿈은 어떤 의미에서는 보다 “자연적(본성적)”일 것이고, 각성시는 마치 거짓 재인식의 현상들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일상에서 단지 재난있는[불행한] 생동성의 수축일 뿐, 정신의 불면증을 항상 속일 수 있는 준비가 된 정신착란적인 힘들의 진압(la répression, 억압)일 뿐이다. 이렇게 병리적 성질(la morbidité, 발병률)의 긍정적 특성을 주장하면서, 벩송은 근대 생물학뿐만 아니라 셸링과 바더(Baader)의 몇 가지 의학적 관점들을 재결합시켰다. 생명의 병리학적 또는 기형학적 표출들은 운동불능적(ataxique) 순서를, 순서의 혼동 또는 염증(une inflamation)을 표상하는 것이지 희박화된 순서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다. 체온(la Temperatur)이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스스로 높아지기도 하고, 저온(la Distemperatur)이 되기도 한다. 병든 의식은 최소한의 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구속 없는 또는 고삐 풀린 의식이다. 그 의식은 질병상태에서도 건강상태에서도 무(無) 가까이 있지 않다. 그것의 생동성(sa vitalité)은 탈이 나긴 했지만, 감퇴[감소]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설명했던 것인데, 우리 편에서 보면, 우리가 유기체들의 자급자족(l'autarcie)에 대해 말했을 때이다. 유기체적 이라는 모든 것은 완전하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완벽하다(complet). 라이프니츠가 말했듯이, 만일 우리가 기계(une machine)를 조립할 줄 안다면, 이 기계는 진실한 부분적인 부분들을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다(심지어 여기에서 예지성의 달무리가 단순하고 순수한 요소를 둘러싸고 있을지라도). 그러나 우리는 한 유기체의 “절반”도, “4분의 1”도, “천분의 일”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항상 유기체성 전체는 거기에 현재적이고, 섬유질들과 세포들의 무한소에서도 우리들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결코 어떠한 양적인 감소도 없다. 이 감소가 두 가지 “분열들”(fractions, 분수들) 사이에 우리를 미끄러져 들어가도록, 또 생명이 점으로부터 제작되었던 그 점을 파악하도록, 우리에게 허락한다. 이리하여 개인들이 나오고, 이리하여 최소한의 심정적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라이프니츠의 정식들을 새로이 이용하기 위하여)다음과 같이 기꺼이 말하곤 했다. 즉, 우리의 다양한 내적 상태들의 “관점”(le "point de vue")이 동등하게 너비(etendue, 부피)가 있다고, 그리고 오히려 변이들은, 인격의 총체가 그 변이들 속에서 표현되어 발견되는 다소 심층적 방식 안에서, 즉 감동들의 부피 안에서가 아니라 우리들 감동들의 정신적 무게 안에서 있다고.
강도성에 대한 벩송의 비판은, 무에 대한 사고(思考)가 그 사고의 단순한 무라고 우리에게 이미 증명하였다. 더 많은 것과 더 적은 것이 있는 거기에서 제로(0, 영零)는 동등하게 가능하다. 그런데 완전히 추상적인 허구에 의해서, 그리고 모순적 불합리에 의해서, 우리는 영을 하나의 수(數)처럼, 즉 마치 수들 중에서 가장 작은 수인 것처럼 또한 어쩌면 수들의 근원인 것처럼 간주한다. 따라서 어린애들은 4 x 1은 4이기 때문에, 4 x 0도 어떤 것이지만 그러나 매우 적은 어떤 것이라고 종종 믿는다. 이들은 영(0)이 양 또는 크기의 순서에서 이질적인 것인 만큼이나 무(le néant)라는 것도 어떤 것의 이질적인 것으로 본다. 무가치(la nullité 무효능성)과 한 단위의 가장 보잘 것 없는 분수(fraction, 부분) 사이에는, 숫자들의 규칙적인 계속과 우리 정신의 제작적 본능이 우리를 초대하여 뛰어넘도록 하는 형이상학적 심연이 있다. 우리의 모든 오류들은 온무(le Rien)를 기저로서 삼도록 하는 유혹에 근거하며, 그리고 아무것도 없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현존이라고 하는, 온무가 무한소의 극한이라고 하는, 희박화 되기에 강요되어 있는 이 현전들이 끝내는 부재들이 된다고 하는, 이 불합리한 관념[생각]을 선전제로 삼는다. 그러나 지각이 추억들을 가지고 제작되는 것이 아니듯이, 운동은 운동체들(κινήματα)로, 지속은 순간들로, 행동은 정지들로 제작되지 않듯이, 정신자체는 정신성의 원자들로, 즉 정신의 부재들로 제작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예지작용의 연구에서 먼저 증명했던 것이다. (49RNA)
2. 지적 노력에 대한 벩송의 이론은 무로부터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사유[사고]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충만에 대한 죄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사유는 실증성과 의미화의 선천성(a priori) 안에서만 숨 쉰다. 정신적 선전제 없이는 해석도 없고 사유 일반도 없다. 예를 들어 이것은 끌로드 베르나르가 이미 관찰했던 것인데, 그가 실험적 귀납의 이상성을 강조했을 때이다. “마치 신체의 자연적 걸음걸이[진행]에서 인간이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놓으면서 나아갈 수 있는 것과 같이, 마찬가지로 정신의 자연적 진행에서 인간은 한 관념을 다른 관념 앞에다 놓으면서 나아갈 수 있다. 다른 용어들로 말하고자 한다면, 신체에서처럼 정신에서도 항상 첫째 지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체의 지지점, 그것은 신체가 감각을 지니게 한 지면(le sol)이다. 정신의 지지점, 그것은 알려진 것, 다시 말하면, 정신이 의식하게 한 진리 또는 원리이다. 인간은 알려진 것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가는 방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 이 첫째 지지점, - 생리학자의 “선천적(a priori) 관념” - 이것은 이미 약간은 역동적 도식인데, 이 도식은 묵음(黙音)의 기호들에게 의미를 준다. 그리고 이렇게 감각들과 감동들은 모든 제작적 종합에 저항할 뿐만 아니라, 개념들처럼 추상적 반성의 산물들 자체는, 즉 사유의 이런 “불가분할 가능성들”은 또한 의미와 (성)질의 풍부한 총체성들이다. 그리고 모든 근대 인식형이상학(la gnoséologie)은 사유일반 속에서 관계를 보도록 우리에게 초대한다. 이 관계는 충만성 자체에 의해서만 존속할 뿐이다. 개념은 “본질(une entite) 또는 류(un genre)”가 아니다. 고블로(Edmond Goblot, 1858-1935)가 말했듯이, 개념은 무한히 많은 판단들 속에서 잠재적으로 속성이다. 그런데 “순수 속성”은 현존하지 않는다. 모든 속성은 어떤 진술의 부분을 이룬다. 그 진술은 속성화되어 있고, 또한 그 진술의 역할은 주어에게 속성을 속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형용사들은 순수 술어들의 전형을 표상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형용사들의 순수성은 엄격히 말하면 문법적이고 형태적이다. 형용사들은, 실사들이 그것들의 본질에 참여하기 위해서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형용사들은 존재들에게 성질을 부여하기 위하여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취급된 형용사들은 존재들로 있는 것은 아니다. 형용사들은 추상적 일반성들이며, 존재는 항상 특별한 주어이다. 진솔하게 사유된 모든 속성, 다시 말하면 단순한 형식적 파라다임이 아닌 모든 속성은, 즉 소리 나는 견본은 규정된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형용사에 관하여] 그런 관계로 이러저러한 연관이 내재하기 조차 않는 절대적 현존을 사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절대적 개념은 진리도 거짓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무차별적인 것, 즉 나의 정신과 관계없는 것이다. 그것은 멈춘[허공에 매달린] 사유이다. 브로샤르(Victor Brochard, 1848-1907)는 오류와 판단을 통합하는 연대성을 밝혔고, 벩송은 자기편에서 부정에 대한 정신적 충만성을 강조하였다. 이들의 분석들은 일종의 멜로디 관념이 항상 반성적 사유의 내부에서 순환하고 있다는 것을, 우선 존재들이 희박화되어 가는 것같이 우리에게 보이는 결함있는 관계들의 내부에서 더욱 특별하게 순환하고 있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부정하는 작동 속에서도 그리고 거짓 믿음 속에도 마찬가지이다. 몽테뉴에 따르면, 마치 언어가 “긍정명제들로 완전히 형성되어”있듯이, 마찬가지로 벩송에 따르면, 사유는 긍정하면서 만이 사유한다. 사유가 긍정하든 사유가 부정하든 간에 그 사유는 긍정 주장으로 강요 되어있다. 정신은 결코 총체적으로 그(정신) 자신에 현재하고 있기보다, 정신이 부정할 때도 정신이 스스로 속을 때도, 빈 것[무상한 것]이 그(정신) 속에서 스스로 이루어질 수 있는 거기에서 더 많이 현재하고 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테아이테토스에게 말한다: 무를 진술하는 자는 아무 것도 진술하지 않는다: Ὁ ἄρα μὴ ὂν δοξάζων οὐδὲν δοξάζει. 소피스트편에서 엘레아의 낯선 이가 말한다: 비존재를 말하는 자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무는 엄격히 말하자면 말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ἀδιανόητόν τε καὶ ἄῤῥητον καὶ ἄφθεγκτον καὶ ἄλογον. 사람들은 무를 정의하지도 이름을 붙이지도 못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마치 플라톤이 비존재가 이것을 논의한다고 주장하는 어떤 자들 누구에게나 외통수에 몰리게 하는 모순들을 고발하였듯이, 그처럼 벩송은 전체를 폐기한다는 생각은 모순과 순환논증의 오류를 함축하고 있다고 줄기차게 반복해서 말했다. “왜냐하면 이런 조작 작업은 이런 조작을 효과 있도록 해주는 조건 자체를 파괴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관찰자는 관찰 그자체에 의해서, 그가 부재를 관찰하려고 시도하는 조건들을 도입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독일의 낭만주의자인 카루스(Carus, 1789-1869)에게서 동일한 용어들로 표현된 동일한 생각(관념)을 발견할 것이다. 그 관념이란 긍정적 무란 각(角)을 지닌 원의 관념만큼이나 부조리한(absurd, Unding) 관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소피스트편의 언어를 말하기 위하여, 부정은 이타성[여집합]을 표현하는 것이지 무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비존재를 말할 때, 우리는 존재의 반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말할 뿐이다(Ὁπόταν τὸ μὴ ὂν λέγωμεν, ... οὐκ ἐναντίον τι λέγομεν τοῦ ὄντος ἀλλ' ἕτερον μόνον).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있어서, 혼돈(le Chaos)에서 시작하는데, 그 혼돈은 무(Néant)라기보다 오히려 틈(Béant)이다. 「창세기」에서 우주론적 창조의 6일간을 앞서 있는 심연(l'abîme)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의 숨결은 어두운 물들[대양] 위에 떠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만은 무화될 수 없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영구적으로 모순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그것의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49SKC)
3) 제작적 논리는 진리와 거짓 사이에 이상적으로 중성인 개념들을 가지고 사고(思考)를 세우는 것이며, 자유 행동(l'action libre)을 무차별적(indifférents) 상태들과 더불어 구축한다고 소위 주장한다. 사람들은 여기서 영(un zéro)을 가지고 결심으로 작동한다. 마치 조금 전에 영을 가지고 사고하듯이 말이다. 비결정주의자들은 신학자들이 창조주에게 자리를 마련해주는 빈 자리와 유사한 일종의 정신적인 빈 것 속에서 숙고하는 인격을 상상한다. 이때에 신학자들은 근본적 우연(la Contingence)을 설명하는데 전력을 다한다. 우선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서 처럼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고 나서 자아(le moi)가 왔다, [그리고] 어떤 것이 건설된다. - 동기들이, 운동체들이 행동에 이르렀다. 주저하는 의지는 내적 삶의 무(無) 속에서, 그리고 공기로 된 일종의 종(cloche)[공 모양] 속에서 결단하여 한마디 발언하면서, 진실로 글자 그대로 창조적일 될 것이다. 따라서 그 의지는 모든 영향으로부터도 모든 상황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처럼, 인격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적이라고 가정되었을 것이다. 그 의지는 내가 표현했던 모든 것을, 나에게 속한 모든 것을, 나에게 소중하거나 또는 싫어하는 모든 것을, 나의 모든 과거와 나의 존재 이유를, 무시할 것이고, 결국에는 나 자신도 무시할 것이다. 그 의지는 무차별적이 될 것이다. 따라서 무차별적 비결정론은 깨끗하게 지위를 차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막과 침묵과 고독, 그리고 모든 선현존을 총체적으로 망각한 현재, 그리고 모든 공현존으로부터 완전히 텅 빈 암흑(le noir), 그리고 추상적 무차별(adiaphorie, [ἀδιαφορία, indifférence]), 그리고 이상적인 순수 순진무구, 이런 것들은 오직 절대적인 자유의 훈련만을 검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허구가 단지 부조리할 뿐만 아니라, 모순 그자체이라는 것을 누가 보지 못하는가? 만일 양자택일의 두 가지가 차이나는 선호도의 양화작업에 의해 이미 불평등하지 않다면, 사람들이 해석해야할 수수께끼의 의미를 선가정하기를 거부할 때, 마치 그 예지작용을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결단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결단하는 심사숙고(le fiat)는, 즉 선택의 모험은 이것들의 역동적 활동성 속에서 이런 이유로만 가능할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들[숙고와 모험]을 준비하는 무차별의 주저는 이미 그 바탕에서는 성질[자격]이 부여되어 있고 방향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주저하는 의지는 이 성질부여[자격화]를 자아 자체로부터, 총체적으로 선현존하는 자아로부터, 거기에서 축적된 경험들, 경향들, 필요들, 감동들의 모든 중심이 되는 자아로부터, 간직하고 있다. 그 대가로 의지는 극단적인 자유의 보상이라는 풀 수 없는 또 마비된 의지 결핍증을 극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극단적 예속이 아니라면, 극단적인 자유란 무엇인가? 무차별의 가설은 자아가 어느 정도로 자기의 고유한 행동에 선현존할 수 있다는 이런 관념에 근거한다. 비인간적인 기권(une abstention) 속에 갇혀 있는 그 원함[의지]은 운수[운명]가 자기에게 제시한 대안들의 이중화작업에 구경꾼으로써 참석할 것이다. 그 의지는 말하자면 동일한 순간에 두 번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개별적이고 현실적인 경험 전체를 해결하는 조건에서만 두 번 산다. 과거와 미래는 또한 (또는 이미) 질적이 된 현재로부터 온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나는 혼자 자아에 속한다. 만일 내가 가능적인 환영[유령]이 아니라 나의 실재적 현재에 상의한다면, 내가 원하는 순간에, 내가 매 순간마다 유일한 것만을 원하는 것 같이 보인다. 각 순간마다 선호(une préférence, 선호도)는, 이 선호도가 미묘하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주저행위들에 대해 명백한 혼란에 방향을 정한다. 사람들은 [실]행해 봐야 소용이 없으며, 그것은 논쟁거리인데, 사람들은 여전히 부분으로 있다. 헛되이 사람들은 무차별적 재량으로 이상적 불편부당성(l'impartialité, 공평성)에 접촉하고 있다고 믿는다. 거기에[접촉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우리들은 우리의 무차별에 의해서 2등급에 속하는 일종의 선호도를, 즉 지수(指數) 차원의 선호도를 표현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스스로 문득 깨닫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선호도를 무화시키는 순간에 사유 전체를 재발견한다. 그것은 내가 항상 거기에 있다는 것이고, 선택하고 또 선언하는 것은 자아이다. 공상같은 평정[공평]에 도달하기 위하여, 나는 나 자신을, 자아를, 나의 과거를 제거하는 것이 정당하게 필요할 것이다. 자아는 현존하기 위하여 현재의 동향(la conjoncture, 정세)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 자아 덕분에, 의지적 작동은 우아한 조각일 뿐만 아니라 심하게 설사(泄瀉, drastique)하는 해결책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스스로 우리의 작동들보다 더 오래되고, 훨씬 더 존경할 만하다[존엄하다]. 이것이 전적으로 우리의 존엄성이다. 사람들은, 라이프니츠가 말한 대로, 터무니없이(sans rime ni raison) 결단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유들의 부재도 또한 하나의 이유이며, 이유들 없이도 작동하는 쾌락은 이미 작동하는 이유이다. 또는 슐레겔(Friedrich von Schlegel, 1772-1829)이 썼듯이, 선택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 그 자체로 선택이다. 이것은 파스칼과 더불어 다시 말하는 경우에, 자아와 더불어 있지 않는 자들은 자아에 반대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반대와 찬성 사이에 중성적인 제로(0)는 없다. 이것은 마치 선과 악 사이에 중간 지대가, 즉 매개적 왕국이, 이도 저도 아닌 나라일 것인 완충국(un État-tampon)이 없는 것과 같다. 모든 사람들은 [이미 어느 쪽인가] 참여되어 있고, 모든 사람은 내기를 걸고 있으며, 그 딜레마를 밝혔다고 믿는 자들조차도 이미 은연중에 내기를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해안 기슭에 남아있기를 선택했던 자들은, 그 자신들의 마음에 맞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모험을 위하여 배를 탔다. 각자는 그러한 것을 알고 있고, 포기론자들도 또한 그 자신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투표하잖아! 무차별의 불가능성을 고발하는 라메네(Lamennais, 1782-1854)와 불편부당성에 소송을 제기하는 레옹 카르사빈(Léon Karsavine, 1882-1952)은, 각각이 그들의 방식에 따라, 백지(la table rase)의 비판을 비장한[병리적] 철학의 의미에서 방향을 잡았다. 가스통 그루아(Gaston Grua. 1903-1955)에 의해 출판 된 편지에서 이것을 말한 자가 또한 라이프니즈이다. 우리는 우리의 취향에 따라서, - 그것이 변덕 또는 반대 정신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것이 우리 자유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 우리가 잘 발견할 무엇을 원한다. 메논편의 정식들은, 이 정식들에 따르면 착한 것을 바라는 것(βούλεσθαι τά ἀγαθά)은 말하자면 간단히 바램(βούλεσθαι)이라는 중복법인데, 모든 자유로운 결단의 우선적인 충만을 낙관적인 언어로 표현한다. 사람들이 다소 비밀스럽게 “더 좋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어느 누군가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비존재이다. 뷔리당(Jean Buridan, 1292-1363)의 난문제는 엘레아 학자의 난문제들과 꼭 마찬가지로, 무로부터(ex nihilos) 자유 작동을 제작하는 데 있다. 물론 마치 제논이 투창을 운동불가능성이라 단죄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소피스트들은 굶어서 죽을 수 있는 자유재량을 단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창은 그것의 표적에 날아가 맞게 되고, 아킬레스는 일등으로 도착하며, 인간들은 그들의 동기들의 이론적 동등성(l'isosthenie)[ἰσοσθένεια]에도 불구하고 배고파서 먹는다. 만일 숙고는 변증법적 순수 논쟁이 되기는커녕, 예언이 아니라면, 이 성공들은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숙고는 선택을 예견하고 예상하며, 이 선택을 선판단한다. 따라서 그 선택은 엄격히 말하자면 깊이를 잴 수 없는 동인들이 아니며, 무차별적 대안들도 아니다. 라이프니츠의 도덕주의에서 지성성은 “거의 아무것에도 믿음이 없는” 현자의 보편적 관용을 정당화하였다. 반대로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보편적 질적 충만은, 묵시록(Apocalyse)의 예를 들어 미지근한 것들과 중성적인 것들을 토해내는 정열적 극단주의를 정당화 할 것이다.
실재적으로는 질서만 있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항상 나의 과거의 무한한 충만 안에서, 중성적인 숙고의 평형[균형]을 단절하는 그 무엇인가를, 모든 것이 나에게 동등한 거기에서 편들게 하는 그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라이프니츠가 관찰하였듯이, “무질서”로 되어 점들 사이에서, 이들 집단의 불일치와 우연함(la fortuité)이 어떤 것일지라도, 사람들은 항상 곡선을 그을 수 있고, 질서를 발견할 수 있고, 다소 복잡한 방정식을 발견할 수 있다. 마치 잠재적 규칙성을 강조할 어떤 도형의 리듬 또는 정식처럼 말이다. 별들의 먼지[군집]에서, 천문학자는 성운들을 그렸다. 비결정적인 변덕들의 혼돈에서, 우리들은 무차별의 무정부상태 하에서 관심도 받고 방향도 정해진 의식을 우리에게 폭로하는 정신적 성운들(des constellations)을 동등하게 분간해낸다. 야생적인 자연은, 볼 줄 아는 자들에게 깊이 있고 생명적인 질서의 광경을, 즉 영국 정원식 “아름다운 무질서”의 광경을 제공하지 않는가? 예를 들어 영국식 정원은 “아름다운 무질서”의 초기의 스타일이었고, 깊이 있고 생명적인 질서에서 “프랑스식” 공원은 “성운들”을 가지고 고전적 건축의 대칭을 그려낼(dessiner) 것이다. 오르스(Eugenio d'Ors, 1881-1954)는 어떻게 바로크가 괴상함(기상천외)과 사육제와 역설론에도 불구하고, 법칙에 복종하는 지를 분명하게 제시했다. 이 법칙은 엉뚱하지만(excentrique, 상궤를 벗어난), 그것도 법칙이다! 바로크는 병리적 현상이 아니다. 그런데 바로크는 정상적 질병이다. 겉으로는 가장 재량있는 우리의 [의식적] 작동은 문법학자가 예외들(des exceptions)이라 부르는 것에 조금은 닮았다. 예외는 정의상 규칙을 부정한다. 그러나 또한 간접적으로 예외는 규칙에 상과 벌을 제가 한다. 왜냐하면 예외는 필연적 체계와 연관해서만 “예외적인” 자기의 가치를 갖는다. 예외는 지성적인 친자관계[상하계통]의 연결에 의해 필연적 체계에 연결된다. 반항적인 예외들과 더불어, 우리의 문법들은, 원초적 체계의 내부에서,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2차적 지대의 체계를 나타나게 하는 “성운들”을 그린다. 이리하여 정신적 삶은 그 자신의 정합성의 노예이다. 그리고 마치 우리들의 이성이 우연[운수]를 위치화 시키려는 작동 자체에서, 그 이성이 그 작동의 잠재적 지성성을 암시하는 것처럼, 이처럼 비결정론자들은 절대적인 무차별을 생각할 수 있다. 비결정론자는 이성에게 이 절대적 무차별을 곧바로 상대적 정합성으로 회복하게 하며, 그러고 나서 이들은 절대적 무차별의 멍에[속박]를 약화시키고자 헛되이 시도한다. 쇼펜하우어가 낙관적 교육자들을 비판하면서 말했듯이, 인간은 “도덕적 제로”가 아니다. 인간은 심리적 제로도 더 이상 아니다. 인간의 자유는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창조되는 착각적인 빈 것[무]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 자유는 반대로 충만과 연속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유는 실체적이고 재량적인 창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는 새로움이다. 왜냐하면 자유가 살아왔던 경험들에서 길어 올리는데, 그 살아왔던 경험들이 수적으로 무한히 많은 것처럼, 자유가 상상하는 조합들은, 또 자유가 풀어내는 아라비아식 문양들은 근본적으로 예견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장 천재적인 음악가는 합의 상으로, 음정들, 특별 편성들, 음표들, 자기 앞에 잘 현존하는 소리재료를 이용한다. 항상 새롭게 될 그 무엇, 그것은 음악가가 이 요소들 사이에 도입하는 질서이다. 데카르트가 <제1성찰>에서 관찰하듯이, “왜냐하면 진실로 화가들이 야릇하고 예외적인 도형들에 의해 사이렌들(des sirènes)과 사티로스(des satyres)를 [괴물들을] 재현하기에 매우 인위적으로 연구할 때일지라도, 화가들은 도형들에게 전적으로 형태들과 본성들을 매번 부여할 수는 없으나, 오직 다양한 동물의 사지들의 어떠한 혼합과 구성을 만든다...” 사실상, 벩송의 창조는 무로부터 창조도 아니고 옛 요소들의 기계적 재배열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순적이게도 혁신적인 연속화 또는 창조적 진화이며, 연속적인 발명의 내재성이며, 선현존의 수없이 많은 충만한 것들 가운데서 항상 시작하는 즉흥성이다. 정신적 조합들의 “대년”(grande année)도 없듯이 음악적 조합들도 없다. 그리고 이 정신적 조합들을 다 써버릴 수 없을 정도로 무궁무진하게 성운들로 환원할 가능성 자체는 그것들의 부패할 수 없는 청춘을 증거 한다. - 더군다나 온우연(le Hasard)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질서를 넘어서 무질서의 절대적 한계인 한에서, 이번에는 인간화되었고, 목적론화 되었고, 마땅히 지성적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상관적으로, 비극적 잘못을 총합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온절망(le Désespoir)은 이번에는 희망을 재생시킨다. 마치 부조리가 생성의 긍정성 속에서 무한히 정상화 되었듯이, 마찬가지로 불행은 미래주의의 치료행위의 잠재력에 의해 소화[조절]되고 형태 변형된다. 따라서 벩송의 영웅은 낙관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라이프니츠의 현자처럼, 오히려 우선 그리고 특히나 즐긴다. (49SK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