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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과학축전 기행
<첫째 날>
첫 번째 해외여행이라는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출발하는 여행길, 아니 여행길이라는 생각보다는 해외 봉사활동이라는 생각 쪽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친구와 함께 가족들과의 짧은 인사를 뒤로하고 학생 회관 앞으로 향했다. 10시 반! 국제관광버스는 정확히 기다리고 있었고, 두 분을 제외한 우리일행이 각자 준비한 빵빵한 여행가방을 싣고 스물 네 명의 대학생 PAS팀과 합세하기 위하여 전북대학교로 향했다. 예전의 모교와는 달리 삭막하고 왠지 친근함이 없어져버린 대학교, 세월 탓일까, 그저 지나는 학생들, 그리고 여기저기 가득 주차된 차들이 대학풍경의 모두인 것처럼 느껴진다. 여름의 풍성한 녹색이 없어서였을까. 제 1 과학관 앞엔 수십 개의 상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중압감이 더해왔다. 현지에서 과학시연(exhibition)할 물품이 저리 많을까 싶었지만 팀장교수님이 준비한 컴퓨터와 필리핀 관계자들에게 줄 선물꾸러미가 많은 부피를 차지했다라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3,000원 하는 구내 교직원 식당메뉴로 점심을 해결하고 관광버스와 급조된 트럭에 박스를 야무지게 싣고 12:50분, 인천공항으로 출발!
인천공항은 역시 컸다. 2001년 여름, 미국으로 1년 동안 교환교수로 가시는 A교수님 배웅 차 왔을 때 이미 느꼈던 사실이었지만 비좁았던 김포공항에 비하면 우리의 국력만큼이나 커졌다. 인천공항 3층 G-H부스 사이, 개인 가방과 박스들을 산더미처럼 Cart에 싣고 공항 안으로 들어가 마치 이민이나 가는 사람들처럼, 공항에 도착한 4시부터 비행기가 출발한 9시 25분까지 5시간 25분을 죽치고 기다려야 했다. 출발시간이 가까워오면서 국제공항답게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었고, 서성대는 외국인들의 모습, 환송하려는 인파들이 요란하게 늘어났다. 동료들도 달러 및 페소로 환전하는데 분주하고, 일본에서 금방 가족들과 귀국한 후 헤어지고 다시 필리핀으로 향한다며 급히 식당을 찾는 동료, 현지에서 인체에 미치는 알콜의 영향을 밤샘 연구(?)한다고 소주 여러 병을 챙기는 열성동료, 탑승구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 면세점을 기웃거리며 상술에 넘어가는 동료들, 나도 그 안에 합류하며 기다리는 다섯 시간 반은 그리 길지만도 않았다.
난생처음 타보는 큰 국제선, 예정보다 다소 늦어 9시 25분에 이륙한 마닐라행 PR469편, 여권이름 YI HANYUN, seat No 47K, 다행이 오른쪽 날개가 보이는 창 쪽에 자리를 배정받게 된 걸 알로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잡았다. 아쉽게 동료들과 떨어져, 비행하는 내내 맹숭맹숭하게 옆자리에서 안색이 좋지 않게 앉아있는 아가씨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을 뿐이다. 젊은 청년목사를 단장으로 여러 명의 신도들이 한 달간 선교활동을 간다는 열성파 교인임을 알고는 대화를 멈추었다. 10시가 넘어서 배급된 기내식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마닐라로 가는 4시간 여 동안 검은 하늘의 상현달만 감상해야했다. 운도 없지, 국내선 탈 때도 항상 야간비행이었는데....... 그러나 우리나라와는 달이 상현달이 아래로 둥근 형상임을 보고는 잠시나마 솔깃해졌다. 인천 - 마닐라까지 2,625km, 고도 9,100km, 대기온도 영하 45도..........모니터에 나타나는 비행기 밖 상황이 여간 재미난 게 아니었다.
현지시각 11시53분, 한국시각 12시 53분. 현지온도 26도! 하-, 3시간 반만에 겨울에서 여름으로 상황변화를 경험하다니, 넓은 지구를 실감했다. 단지 화장실 한 번 가느라 일어선 것 말고는 꼭 묶여있었을 뿐인데, 마닐라란다. 인천에 비하면 시골 공항 같은 마닐라, 단 한 벌 준비한 외투는 가방 속에 구겨 넣고, 이번 기회에 장만한 바퀴 달린 가방을 멋지게 끌고, 입국수속을 밟는데 한 시간 남짓 투자해야 했다. 짜증스럽다는 듯 박스를 경계하는 공항직원들, 늦은 시각 자기 나라를 찾은 이방인들을 쓸쓸히 쳐다보며 나무의자에 몸을 뻗고 쳐다보는 눈빛이 그리 신선하지만은 않았다. 겨울나라에서 날아와 벌써 등이 젖도록 큰 Cart에 사십 여 개 박스를 싣고 공항 밖으로 나왔을 때 내가 가장 싫어하는 초여름을 느껴야했다. 마닐라 공항 출구엔 콜택시를 불러주는 아가씨들 대 여섯 명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국인들을 반겼다.
한국의 다른 지역에서 왔다는 PAS(pacific asia society)회원들도 비숫한 짐을 꾸리고 기다리는데, 그들은 비행기를 다시 한 시간 타고, 또 내려서 버스를 타고 시간 남짓 간다니 무척 심란해 보였다.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각, 한국에서였으면 두 시가 넘은 시각, 현지에서 투입된 버스에 몸을 싣고 숙소로 향했다. 가이드가 인사를 했고 비몽사몽 필리핀 기초과정을 학습시켜주었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CALTEX주유소, 몇 몇 술집을 지나, 요란한 밤거리로 인사하는 마닐라 밤거리로 접어들자, 특색있게 장식된 가로등이 신선해 보였고 별 모양의 촌스런 장식이 시선을 끌었다. BAYVIEW 호텔! 첨 듣는 스타벅스라는 커피샵을 거느린 그 호텔에 모든 짐을 풀고, 방을 배정받아 침대에 누운 시각은 새벽 세 시가 넘은, 새벽 단잠에 몰입했을 시간이었다. 룸메이트가 단짝인 친구여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모닝콜시간 5시란다. 미쵸! 마닐라만 옆에 위치한 호텔, bayview park hotel 510호실, 화투하면 딱 맞을 담요에, 촌스럽게 알록달록한 이불로 어수룩하게 세팅된 필리핀 호텔 침대에 몸을 맡기고, 그렇게 1박2일을 훌쩍 보내야했다.
<둘째 날>
1월 10일 아침, 눈감기가 무섭게 울리는 전화벨소리. 다섯 시, 어김없이 모닝콜은 울렸고, 기특하게 두 번이나 더 울려주었다. 예쁜 아가씨의 영어 생전화인 줄 알고 짧은 영어로 대꾸했는데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녹음테이프 속 음성임을 알고는 혼자 피식 웃어야만 했다. 늦은 새벽 세수만 하고 잠을 청한 터라 짭짤한 마닐라 물로 간단한 샤워를 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에 1이라는 숫자대신 "G"라는 표시가 있는걸 보니 이 나라 국민들은 숫자 1을 꺼리나보다. "G"는 Ground란다. 물론 13도 없었다. 그리고 꼭대기 층은 "D"라고 표시되어있었는데 귀국하는 날까지 알아내지 못했다. 식당은 로비 옆에 아담한 공간으로 차려져 있었고, 뷔페식으로 차려졌지만 메뉴는 예상한 그대로였다. 지난 밤이 부실해서 버글거리지만 반가운 밥을 듬뿍 퍼담고 다음 칸 메뉴들을 본 순간 아찔하게 후회했다. 밍밍한 계란감자범벅, 돼지고기튀김, 소시지, 묽은 우유, 빵, 치즈, 느끼한 닭죽, 그리고 콘프레이크! 이미 담은 밥을 어찌 해결할까 고민했지만 어쩌랴! 퍽퍽 꾸역꾸역 넣고 삼켜야했다. 남은 날이 걱정스러워졌다. 양념된장에 청양고추라도 몇 개 담아올걸.
6시 30분, 호텔 옆에 대기한 외국인용 관광버스(KIA가 생산한 자랑스런 국산)에 몸을 싣고 마닐라초등학교방문일정을 밟았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노숙자로 보이는 여인네가 저만치서 담배를 구해 피우며 맨발로 지나간다. 그리고 옆을 태연히 나무바퀴 달린 손수레를 끌고 지나는 사내. 어제 밤에 보았던 아름다운 진주모양 박힌 별 모양 가로등은 눈속임이었나보다. 여기저기 딩구는 마닐라 항 옆의 쓰레기들, 노숙자들이 그대로 놓고 간 박스들, 시커먼 매연을 뿜으며 두두두 달리는 오토바이를 개조한 오토바이자동차, 자전거 자동차, 2차 세계 대전 종료 후 미군들이 놓고 간 지프를 개조했다는 지프니, 궁색한 버스들, "AIRCON"이라고 쓰여진 흰 택시들. 그야말로 교통지옥이 따로 없었다. 담배를 피워대며 남루한 차림으로 운전하는 운전사들에게서 후진국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전해왔다. 경유차라서인지 소리도 요란했지만 도로 옆 건물 색이 모두 시커멓게 변색된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무채색의 벽들.
아-! 저런 곳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쓰레기가 넘치는 도로, 난생 처음 보는 판자집!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그 공간에 십 여명이 살 고 있단다. 웃옷을 벗은 채로 담배를 뻑뻑 피우는 사내들, 때 낀 옷을 그대로 입은 채 며칠 씻기지도 않았을 아이에게 젖은 물린 심란한 아이엄마! 갑자기 드라마에서 보았던 피난민 시절의 부산 판자촌이 떠올랐다. 우리도 저리 보였을까? 이쪽으로 길잡이 한 기사가 필리핀인가가 의심스러웠다. 여기저기 갈겨쓴 벽의 낙서들이 비웃지 말라 외치는 듯도 했다.
얼마를 왔을까, 8시 반. 초등학교에 들르기 전 Bulacan주 Malolos에 있는 Barasoain교회, "Barasoain church"를 예정에 없이 들렀다. 현장학습을 나온듯 한 십 여 명의 학생들이 성당 벽에 붙어 뭔가를 수첩에 빼곡히 적으며, 갑자기 나타난 외국인들 모습에 신기해했다. 이곳은 1898년 필리핀 제헌의회가 열렸던 곳이며, 327년간의 스페인통치에서 벗어나 임시정부를 출범한 장소라고 소개하고, 고풍스럽지만 아기자기 시청각장치까지 잘 차려진 전시관으로 안내해주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가이드 대신 팀장교수님의 진지한 통역을 섞은 설명을 듣고 아픈 필리핀의 과거와 깊은 상처가 담긴 곳임을 알 수 있었다. 필리핀의 국모라 소개한 알록달록한 석고상의 이름은 기억할 수 없지만, 유래 없이 2차례의 여성 대통령을 앞세운 필리핀의 국민정서가 조금씩 다가왔다.
9 시 12분, 군 입대 후 훈련소를 떠나던 날 처음 받아보았던 팡파르를 외국 땅에 와서 받게 될 줄이야! Bulacan주지사와 팀장교수님과의 친분으로 "Province of bulacan" 정문 앞에 도열한 군악대의 팡파르와 사탕목걸이를 받고 의기양양하게 접견실로 안내를 받았다. 익숙한 솜씨로 쓴 환영 플랑카드가 본관에 전시되고 잘 포장된 선물꾸러미까지 어리둥절하게 했다. 필리핀의 소개와 생활, 문화를 통역으로 듣게 되었고, 주지사가 여자라는 사실과 주지사와 대통령 사진이 나란히 접견실 정면 대형 액자에 걸려있는 모습에서 필리핀 여인들의 높은 위상을 느낄 수 있었다. 나오는 길, 건물내부 배치가 참으로 정갈하다는 생각을 했다. 진한 갈색으로 번질거리는 나무마루바닥, 작지만 시민들에게 안방처럼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거실처럼 꾸며진 사무실, 깔끔한 정원.....그 건물을 빠져나올 때까지는 적어도 빈민촌의 필리핀은 생각나지 않았다. 꽃미남처럼 꾸민 키 작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은 "Hiyas NG bulacan convention center". 약속이라도 한 듯 멋진 간식과 다과를 준비해놓고 있어서 다시 한 번 놀랐고, 우리나라 대학 구내식당처럼 꾸며졌지만, 귀빈을 모시는 고품격장소라 느껴졌다. 스물이 갓 넘어 뵈는 꽃미남 직원이 내가 들고 있는 디지털카메라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듯 했다. SONY마크가 왜 그리 커 보이던지! 지우고 올걸! 드디어 긴장하듯 초등학교로 가는 길, 걸어서 5분 거리라 했지만 전시해야할 물건이 많아 차로 이동하기로 했다. 주지사가 대기시킨 경찰 두 명이 길을 호위하고 가는 2차선 도로가 왠지 좁아 보이고, 양옆으로 도열한 우리나라 70년대식 건물과 간판 또한 낮아 보였다. 학교 앞에 도착해 처음 눈에 들어오는 건 "단물비닐주머니"를 파는 손바닥만한 문방구였다.
Memorial elementary school! 학교정문 앞부터 수많은 학생들이 도열하여 "Welcome!"을 연호하고 대문짝만한 환영플래카드가 학교건물에 떡 하니 붙어 있었다. 교장선생님인 듯 한 분의 안내를 받아 다목적교실로 보이는 실내로 향하는 도중, 유리 없는 낮은 창문 틈으로 호기심 어린 눈빛을 던지는 작은 아이들의 작은 소란과, 부럽게 쳐다보는 제복 입은 교사들의 눈길이 느껴졌다. 실내에 차려진 작은 무대, 초등학교답게 반짝이 색지로 환영의 뜻을 전하고, 키다리 철제 선풍기가 냉기를 전해주었지만 적어도 내게만은 이미 후끈 달아오른 필리핀의 낮 기온을 식히기엔 턱없이 부족한 듯 했다. 연신 머리카락으로 떨어지는 땀을 닦아내는 동안, 학교소개 팜플렛과 함께 작은 양동이에 담겨진 음료수가 제공되었다. 이어서 보여지는 작은 무대! "MABUHAY! =환영합니다"로 시작하는 여교장선생님의 인사말씀에 이어 선보인 남녀교사들의 자연스럽고 능숙한 전통 춤이 우리들의 큰 탄성을 이끌어냈다. 아, 우리 것은 무엇인가? 입장이 바뀌면 저럴 수 있을까 생각하니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앞줄 가운데 앉은 두 선생님에게만 예쁜 여 선생님들의 민속춤 끝에 아카시아 꽃처럼 생긴 필리핀 국화목걸이가 선사되는 것을 보고 부러움만 남긴 채 과학축제현장으로 향했다. 운동장으로 향하는 길 음료수 페트병으로 만든 벽걸이 화분을 보고 PAS회원들이 감탄했다. 일행을 따라오는 코흘리개 꼬마들의 이국적이고 오래 묵은 듯 한 체취와 시선들!
운동장이 없었다. 아니 테니스장만할까? 겨우 책상 십 여 개 붙이고 일제히 몰려든 54개 반 학생들의 호기심을 몸으로 떠밀며 견뎌내야 했다. 아수라장! 처음 본 듯한 외국인이 보여주는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 만화경, 벽대고 돌이, 마그네틱바, 레이져, 떠오르는 양탄자, 요술저금통...........공간이 작아 친구가 가져간 물로켓은 전시되지 못했지만 보여주었으면 큰 사고가 날 뻔했다. 며칠 뒤 과학고에서 전시되었을 때의 환호와 관심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학교가 무너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맡은 코너는 풍선공예! 몇 해 전 레크레이션 연수에서 받은 고작 몇 시간의 지식으로 이리 환영을 받을 줄이야. 여행 떠나기 전 동료교사의 도움으로 영문까지 준비해 외우고 연습한 장문의 설명은 사용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일제히 몰려든 학생들의 "FOR ME!"라는 말에 학생들과 합세해준 친구까지 헉헉대며 만들기에 급급했다. 질서를 종용하는 현지교사도 없고 아수라장이 된 학생들을 향해 "One line, please!"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동네아저씨까지 몰려들어 자기 딸 몫으로 하나만 만들어달라며 내미는 손! 여선생님들마저 학생 줄을 무시하고 "한 개 더!"를 애원하는 데에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폭죽을 가져왔더라면 큰 난리가 났을 뻔했다. 학생들이 준비해온 태권도 시범이며, 부채춤공연시간에 쫓겨 "중지"방송을 하는 팀장교수님의 수차례 방송이 나오기까지 주기율표 박힌 검정 티가 흥건하게 젖을 때까지 빠르게 손을 놀려야했다. 점심시간과 겹친 공연! 야외공연무대처럼 꾸며진 시멘트 무대 위에서 한국의 태권도와 부채춤이 공연되었지만, 사 오십 명의 어린 관객들만 관심을 보였을 뿐, 이리저리 과학축제에서 시연해준 한국선생님과 대학생들의 싸인을 받으려는 어린 학생들의 관심이 더욱 커 보였다. 12시 40분! 초등학교에서의 공연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러 다시 "Hiyas NG bulacan convention center"로 움직이는 동안 그 아수라장속에서 자기 몫의 풍선을 애원하며 손 내밀던 키 작은 여자아이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같은 장소에서 간식과 점심을 해결했다. 점심은 닭고기 튀김 양식! "다만시드"라는 잡채 비숫한 간식도 별미였지만 닭다리 튀김은 우리 것과는 사뭇 달랐다. 콜라와 닭고기, 필리핀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란다. 점심식사가 끝난 후 즉석에서 펼쳐진 작은무대, 대학생들의 "바위처럼"이라는 노래에 맞춘 율동에, 식당 직원과 학교 직원의 전통 춤! 그들은 언제든 준비되었다는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유연하고 능숙한 전통 춤에 다시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13:30분, 근처에 있는 교육청을 방문했다."Department of education Region III Division of Bulacan Malolos" 교육청직원들의 80-90%는 여성인 듯 보였다. 역시 교육장도 여자! 필리핀은 여성의 천국인 듯 보였다. 그들은 조그만 바나나젤리상자 선물도 잊지 않고 모두에게 챙겨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필리핀인들은 선물 주고받는데 익숙해 있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줄 작지만 기념할 수 있는 선물을 챙기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한글 로고 적힌 값 싼 연필이라도 많이 사올걸 이라는 생각을 과학고에 가서 다시 하게 되었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벽장에 진열된 트로피와 계단에 진열된 예쁜 장식품들이 우리의 교육청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교육청 바로 옆에 "Bulacan state university"가 있었다. 이곳은 병설중고등학교가 함께 있는 듯 했다. 흰 남방에 국방색 바지 차림의 남학생과, 자주색치마에 흰 브라우스 차림의 여학생들, 그리고 사복 차림의 대학생들이 섞여있었다. 역시 준비된 듯 악대가 환영을 해주었고 자그마한 무대에 초대되었다. 자그마한 의식이 있은 뒤 팀장교수님의 답례연설이 있었다. 12년 전 주례를 서주시기도 한 은사님이어서 만은 아니었다. 그간 필리핀에서 쌓아온 공적들이 하나 둘 나타나는 것 같아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웠다. 당당하게 한국을 소개했고, PAS팀과 과교연(전북과학교사연합회) 교사들을 소개했다. 이어지는 무대! 필리핀 고등학생들이 태권도 시범을 보여주었다. 동아리라는데 제법이었다. 덩치 큰 녀석의 옆차기 나무판 격파는 일품이었다. 이를 어쩌나! 한국대학생들은 격파술까지 선보인 갑작스런 필리핀고등학생들의 무대에 주눅이 드는 듯 했다. 선배들의 말을 듣고, 품세 시범만 준비했다는데..........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이곳까지 와서 망신을 당하나보구나 잔뜩 긴장을 했다. 그러나 역시 한국인이었다. 대학생 중 유단자(3단)라는 신체 건강한 남학생 세 명은 연습도 안한 채 즉석에서 "이단 돌려차기" 격파로 응수했고, 그들은 무릎을 꿇었으며 우리는 "대-한민국!" 박수로 분위기를 압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도 유명한 “대~~한~민국!”박수를 전혀 모르는 듯 어리둥절해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필리핀공영방송에선 월드컵 중계가 전혀 되지 않았다 한다. 이어 보여준 생활한복 차림의 부채춤과 "붉은악마"복장의 에어로빅 춤은 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듯 했다. 역시 그들도 기념품을 챙겼고, 우리 측에서도 준비해간 간단한 답례품을 전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준비했다는 구내식당의 간식은 아침 간식으로 먹었던 필리핀식 잡채여서 모두들 거의 남긴 채 돌아왔지만, 내 양심은 남김을 허락하지 않았다. 느끼한 맛을 느낄 틈 없이 삼켜대는 모습을 본 친한 선배 왈, "이선생은 역시 달라!" "고저, 한 사람이라도 맛있게 먹고 갔구나 하면 되었지요 머!"
보람찬 하루였다.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느꼈다는 안내원은 이런 가이드는 처음이라고 뿌듯해했다. 15시 40분! 호텔로 향하는 길에 오늘 경험을 자화자찬했다. 이곳 학교의 교육과정을 소개해주었다. 초등학교 6년, 고등학교 4년(중등3년+고등1년), 사회진출, 전문대(2년) 또는 일반대학진학. 우리나라에서의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4년으로 압축했다. 그런 까닭에 전문학교를 졸업해도 갓 20살이니 사회진출이 빠른 나라였다. 일반대학은 科마다 학년제가 다르다 했다. 우리나라의 의대처럼. 호텔로 돌아오는 길, 무척 혼잡하고 무질서한 도로가 이 나라의 교통문화를 대변해주었다. 폐차가 없으며, 차량개조가 가능하고, 무단 횡단이 무방하며, 속도위반 단속이 없으나, 무단 주차 및 안전벨트 미착용은 용서하지 않는단다.
5시 30분 호텔 도착! 간식과 점심을 세 차례나 먹은 탓에 저녁식사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학생들과 따로 식사를 해결하기로 결정하고 8시에 근처 韓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만사형통! 짜투리 시간, 이미 호텔에서 동료들과 소주 몇 잔으로 피로를 푼 후여서, 외국에서 먹는 된장찌개는 꿀맛이었다. 된장찌개 200페소, 소주 200페소(4달러), 반찬은 오뎅,오이지,김치,무김치,생채,멸치볶음,두부장조림! 어제 비행기 기내식부터 아침, 점심에 간식까지 느끼한 양식이었던 터라 숟가락 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 11:00시까지 몇 잔 술의 끝을 보고 묵직한 몸을 정리했다.
<셋째 날>
Tagaytay시에 위치한 Taal 화산(Volcano)을 관광하기로 한 3일 째의 일정이 밝았다.
모닝콜은 7시, 서둘러 챙겼는데도 느끼한 아침이었지만 제법 익숙해진 듯, 커피까지 챙기고 보니 버스에 오를 때 팀장 교수님이 벌금명목으로 1달러씩 챙겼다. 8시 20분 출발! 마닐라 시내를 관통하는 듯 했다. 분주히 움직이는 무쏘만한 지프니(Jeepney)속에는 양 옆으로 긴 의자만이 있을 뿐인데, 무릎을 맞대고 서로 마주보는 것이 어색한 듯 약간 비튼 자세로 꼭 낀 자세가 익숙한 듯 보였으며, 조금 헐렁해 보이는 지프니 안에서는 이방인들에게 손 흔들어주는 여유까지 보여주었다. 배기통이 양옆으로 펼쳐져 있어 시커먼 매연이 두 배로 뿜어져 나오는 듯 보였다. 웃통을 벗은 채 접시에 올린 아침식사를 맨 손으로 주섬주섬 먹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도 보였다. 어제 아침 지프니와 승용차의 작은 접촉 사고를 목격했을 때, 안내원은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라고 했다.
메트로 마닐라(metro manila)는 자연항을 끼고 있는 조그만 부족 마을로 시작하여 지금은 행정, 경제 상업, 교육의 중심지인 거대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4개의 도시와 13개의 자치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6백30 평방킬로미터의 지역을 포함하는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는 곧 이 나라의 주요 관문이란다. 메트로 마닐라에는 과거와 현재가 절묘하게 공존하는데, 오랜 전통과 현대적인 매력들, 수백 년 된 건물과 번쩍이는 고층빌딩, 기묘한 상가와 현대적인 가게들, 장엄한 박물관, 디스코텍, 술집 등등, 스페인 식민통치세력들은 1571년 필리핀의 수도를 세부에서 마닐라로 옮겼단다.
서울 시내처럼 고가도로도 보였다. 고가도로 밑을 통과할 때의 특유의 자동차 소음이 번잡한 도시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었다. 쓰레기가 여기저기 ELD구는 마닐라 도시, 간혹 유니폼도 없이 빗자루로 도로변을 청소하는 사람이 보였지만 손이 부족할 듯싶었다. 도로변 아파트로 보이는 건물이 보였는데 창문이 모두 박살 나 있었다. 사람이 살 곳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경비로 보이는 사람이 허름한 건물을 지키고 있었다. 가끔 골목길에 아침이 밝은 줄도 모르고 노숙하는 사내들이 보였다.
철길이 보였다. 마닐라에도 기차가 다니나 보다 했다. 그런데 철길에 무슨 쓰레기가 이리 많을까? 그리고 철길 옆으로 죽 늘어선 빈민촌들, 어제 본 마닐라항 옆으로 도열해 있는 빈민촌과 흡사했다. 아니, 더 비참했다. 누더기처럼 다닥다닥 이어놓은 판잣집, 세탁소처럼 빨래를 널어놓았지만 그리 깨끗해 보이지 않는 시내의 먼지를 죄다 뒤집어쓰는 빨래들. 철길 가운데서 세수하는 남정네, 겨우 몸 하나 빠질듯한 문 밖으로 멍하니 밖을 응시하는 속 옷 차림의 사내! 그 뒤로 높이 솟은 빌딩 숲들이 필리핀인들의 심한 빈부의 차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듯 했다. 철길 따라 펼쳐진 3-4km의 판자촌이 그렇게 슬퍼 보일 수 없었다.
농촌풍경이 펼쳐졌다. 추수가 있은 후의 모습인가 했더니 방금 파랗게 모심은 곳도 보였다. 이럴 수가! 안내원이 설명했다. 이곳은 3-4모작이 가능하단다. 한 들판에서 모내기하는 모습, 추수하는 모습, 다 자란 벼의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단다. 그런데 이곳 추수의 모습에는 이앙기를 볼 수 없단다. 그냥 벼이삭만 자르기 때문이란다. 호텔에서 먹어본 쌀은 우리 것과 달랐다. 끈기가 없이 따로 노는 밥알들, 그냥 훅 불면 저만치 날아갈 듯싶은 그런 버걱거리는 쌀이었다. 이른바 알락미라고 부르는데 필리핀 쌀의 80%를 차지한단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쌀이 연간 태국의 700만 톤에 이어 500만 톤이라는 사실을 듣고 새삼 놀라웠다. 또한 저런 쌀들이 우리나라에 수입된다 한들 먹기나 할까 생각하니 수입개방 우려하는 우리 농민들에게 안심하라 위로하고도 싶어졌다.
안내원이 마이크를 놓지 않고 계속 읊어대는 통에 필리핀의 역사를 간단히 메모했다.
[본래 필리핀의 역사는 약 13세기경에 친족, 부족 국가의 형태로 사람들이 살기 시작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현재의 필리핀이 세계 지도상에 나타나게 된 것은 포르투갈의 마젤란이 이 섬들을 발견하고 나서부터이다. 마젤란은 지금의 세부지방 맥탄 섬에서 원주민들과의 전쟁 중 사망하게 된다. 이후 포루투갈과 스페인의 전쟁 중에 스페인에 정복당하게 되고, 이 때 스페인이 정복한 부분의 영토가 나중에 독립하면서 필리핀이라는 나라가 되었다. 즉 지금의 영토를 확정해 준 것은 스페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스페인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약 330년간 필리핀을 지배하면서 이 나라에 천주교를 전파하기 시작했고 이 전파과정에서 일부 지방에서 회교도와의 전쟁이 치열하였다. 필리핀은 지속적으로 독립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 과정에서 최초의 아시아 민족주의자로 일컬어지는 호세 리잘(의사, 작가)이 등장하게 된다. 리잘은 인도의 간디, 우리나라의 김구선생과 같은 존재이며 지금도 리살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이 붙은 리살 대학과 리살 공원 등이 있단다.
결국 필리핀은 1898년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다. 이 시대는 필리핀 국민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국립 박물관에 진열된 대부분의 그림들은 스페인 사람이 예수의 동상을 건네주는 것을 감격스럽게 받거나, 스페인 장군을 따라 전쟁터에 나가는 필리핀인, 스페인 귀족의 시중을 드는 필리핀 노예들의 모습 등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필리핀 역사인지 스페인 역사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필리핀은 독립을 선포하였지만 스페인은 필리핀 국민들도 모르게 이 나라를 미국에 2천만 달러에 양도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필리핀 국민은 다시 미국을 상대로 새로운 독립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약 6년간 계속되었고 1905년에야 끝났다. 이후 1935년이 되어서야 헌법을 갖춘 완벽한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이 정부도 오래가지 않았고 1941년에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이 때 필리핀도 한국과 같이 2차 세계대전의 희생양이 되었다. 일본에 저항하던 필리핀과 미국 연합군대는 결국 항복을 선언하고, 산악 지대로 들어가서 4년 동안 게릴라전을 벌였다. 결국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했던 1945년 미국 군이 필리핀을 해방하였다. 그리고 1946년 7월 4일, 마침내 미국 성조기는 내려지고 필리핀은 진정한 독립을 획득하였고 그것이 지금의 필리핀이다.]
09:00시 남부고속도로상의 휴게실에서 물과 쵸콜릿을 샀다. 필리핀에서 처음 해보는 화폐거래였다. 필리핀인들은 초콜릿 선물을 대단히 좋아한다 했다. 초콜릿과 콜라를 좋아하는 민족. 1년 평균 개인당 456잔의 콜라를 먹는단다. 우리나라 오랜지족처럼 호기를 부리는 젊은이들은 비싼 스타벅스커피(한화로 한잔에 1,500원)먹는 것을 대단한 것으로 여긴다 했다. 이멜다 여사 이후 진한커피를 즐겨 마신다는 필리핀. 이멜다 여사는 진주와 생머리를 유행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단다. 차안에서 나눠먹는 초콜릿 맛은 그리 달지 않았지만 물맛은 우리 것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나도 어느새 한국 토종이 되어 있었나 보다.
안내원이 또다시 마이크를 들고 필리핀 남성들의 슬픔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스페인은 전략적으로 통치기간동안 여자만 교육시켰다고 한다. 남자를 거세하듯 운동장을 없애 계획적으로 체력을 약화시켜 저항세력이 클 수 없도록 하였다니 스페인 놈들도 일본 놈 못지않은 악랄한 기질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운동장 없는 초등학교와 대학교의 모습을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필리핀청년들은 농구를 대단히 좋아한다 했다. 여기 저기 널려있는 길거리 농구장들. 그들은 그 공간에 만족해야했을까. 지금이라도 운동장을 넓혀 뻥 뚫린 학교를 세울 생각을 하지 못하는 필리핀의 정서가 이해되지 않았다.
허허벌판이 펼쳐지고 지평선만 보이더니 낮은 산들이 보이기 시작 했다. 산이 보이지 않았던 필리핀. 곳곳에 야자나무가 산, 파인애플로 뒤덮인 산들도 보였다. 야자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고급저택들에 눈길을 주는 동안은 빈민촌의 판잣집은 떠오르지 않았다. 옥수수를 파는 사람들. 집 마당에 커피를 말린 평온한 광경! 적어도 이곳만은 풍족해 보였다. 지프니와 오토바이자동차가 많아지는 것으로 보아 목적지에 다 온 듯 했다.
10:00시. 관광비가 30달러인 탓에 학생들과 관광코스를 달리해야했다. 처음으로 타보는 지프니! 앞서간 차에서 연락이 왔다고 건네주는 사진사의 핸드폰소리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소음이 컸다. 비교적 넓은 공간 화산활동 후 움푹 꺼진 곳에 생긴 넓은 호수! 백두산 천지보다 훨씬 넓은 칼데라호! 그곳을 오르내리려면 지프니밖에 없단다. 이곳 Taal 화산지형은 복수화산이었다. 칼데라호안에 또다시 솟아오른 칼데라호! 30 분가량을 3대의 4-5인용 모터보트에 나눠 타고 바다같은 호수를 달렸다. 병풍처럼 둘러싼 칼데라지형에 입이 쩍 벌어졌다. 지프니를 타고 내려오던 산에는 온통 야자수였다. 두 명의 현지인들이 호수의 물살을 가르며 저 멀리 말발굽 같은 새끼분화구를 향해 달렸다.
조랑말들이 보였다. 아니 심란하게 생긴 원주민들이 조랑말을 타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돈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른다. 호수를 건너기전 “더워 더워”하며 밀짚모자를 팔던 5-7 살배기 꼬마들의 호객행위가 그랬고 화산꼭대기까지 마부역할을 하며 팁을 요구하는 모습들이 그랬다. 임산부에서부터 꼬마에 노인들까지 마부는 돈이 필요해서 순서를 기다리는 듯 했다. 남루한 차림과 그들의 눈빛이 이를 대변해 주었다. 흰말과 수염을 깎지 않은 까맣게 그을린 피부의 마부가 나를 선택해주었다. 처음 타보는 조랑말. 냄새가 역겨워 신혼여행 때도 마차만 탔을 뿐인데, 떠밀리 듯 말위에 올라타고 먼지를 풀풀 풍기며 마부의 손놀림에 내 몸을 맡겼다.
알아듣지 못하는 따깔로그어는 시끄러웠다. 앞서가는 딸 같아 보이는 여인네와 주고받는 대화는 무척 뿌듯해보였다. 빨간 모자로 얼굴을 가렸지만 자외선이 장난이 아니었다. 밀짚모자가 그리웠다. “더워 더워”의 의미를 빨리 파악했어야 했는데.......말 한필에 10,000페소, 하루 한 번 왕복하며 마부역할을 한다는 마부의 말을 간단한 영어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걸어가는 관광객들도 보였지만 제법 먼 길을 마부는 내내 걸어서 길잡이를 했다. 내 체중을 이겨내는 조랑말이 불쌍했다.
꼭대기! 안내원의 말처럼 콜라를 팔고 있었다. “마부 힘들어~!”하면서 물과 세트로 2달러를 받아갔다. 제법 시원한 물이었지만 한 병으로 더위를 가시기에는 강렬한 태양이었다. 사진을 찍고 유황냄새 가득한 Taal화산을 구경했다. 아내와 가족이랑 같이 왔으면.......... 멋진 광경이었다. 칼데라호 안에 솟은 작은 칼데라호! 배타고 건너던 호수가 한 눈에 들어왔고, 헉헉거리며 나를 태우고 왔던 조랑말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3-4곳에서 수증기가 솟고 있었다. 활화산!
내려오는 길, 마부의 다 닳은 슬리퍼가 쓸쓸해 보였다. 2달러의 팁으로는 양이 차질 않는지 표정이 밝지만은 않아 보였다. 돌아갈 배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온 5-6살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change!"하며 10원 동전을 내민다. 1달러랑 바꾸자는 뜻이었다. 돌아가는 뱃길은 파도가 제법 높았지만 물살이 상쾌했다.
13:23분, 다시 지프니를 타고 학생들이 있는 곳에서 합류하여, 지역 별미라고 하는 "Bulalo"라는 식당에서 필리핀식 뼈다구탕 내지는 감자탕을 먹었다. 적은 양의 고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국물에 필리핀 고추가 든 양념을 넣어 말아먹는 밥맛이 더 일품이었다. 우리 일행 뒤로 20 여 명 가량의 꼬마 손님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 아이들이었다. 3개월 어학연수코스로 지난 11월에 왔다고 하는데 반가운 기분보다는 씁쓸한 기분이었다. 선생님의 눈으로 보아서였을까? 우리 어학교육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 것일까? 아님 진정 우리가 잘살게 된 때문일까?
호텔로 돌아오는 길, 전망대처럼 꾸며진 곳에서 다시 한 번 Taal 화산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 곳에는 제법 많은 필리핀 관광객도 보였다. 단체사진을 찍고 펼쳐진 커다란 경관을 부럽게 쳐다보았다. 낭떠러지 근처에 푸르게 솟은 갈대가 자꾸 눈길을 끌었지만 일행의 흐름에 아쉬움만 남기고 발길을 돌렸다.
하늘에 갈대를 채워 찍으면 멋지게 나올텐데................
여기 저기 뒹구는 휴지들이 커다란 입간판에 “Keep Tagaytay Clean & Green!"이라는 문구를 무색케 했다.
15:20분, 과일판매상들이 줄지어진 곳에서 과일 쇼핑을 했다. 3$를 주고 몽키바나나 한보따리를 샀다. 이곳에서는 큰 바나나는 짐승들 사료로나 준다니, 그 동안 먹었던 바나나가 후회스러웠다. 룸메이트 친구는 필리핀에서 무시당하는 남자들이 바나나(?)크기로도 무시당한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망고 1킬로에 1달러, 파인애플 2개에 40페소! 파인애플이 정말 달고 맛있었다.
몇 몇 동료들이 버스 내에 설치된 노래방 기계를 틀고 노래 부르며 취침한 사이 마닐라 시내에 접어든 시각이 16:30분! 조랑말 체취 베인 옷을 갈아입고, 샤워하고 해찰하다가.....6시 30분에 돼지고기 낙지(요즘 한국에서 돈쭈 돈쭈로 선보인)요리를 맵고 맛나게 먹은 뒤 피로를 푼답시고 모두들 “足道: 발맛사지”행사에 참가했다. 30불! 그런데 효과는 크지 않았다.
<넷째 날>
지프니는 마닐라뿐 아니라 필리핀 곳곳의 주요교통 수단이다. 차비 4폐소(piso), 우리돈 100원.
부저도 없이 두드리면 서는 지프니. 하루에 1달러를 못 쓰는 빈민들이 많단다. 이혼할 필요도 없이 7년만 떨어져 살면 자연 이혼이 된다는 웃지못할 나라. 10%인구가 90%의 부를 축적하고 있다는 이해할 수 없는 나라. 1주일 3번 청소와 빨래를 하러 오는 파트타임 파출부 한 달 임금이 5만원인 나라. 지프니 앞에 달린 새며 짐승들 숫자가 아내의 수를 상징한다면서도 캐톨릭 신자가 운전사인 재미있는 나라.
1월 12일, 마닐라 4일 째, 어제와 비슷한 시각에 출발하여 다시 남부고속도로를 타고 휴게실을 거쳐 130km, 2시간 반 거리를 달려왔다. 오는 동안 안내군은 필리핀의 썩은 정치얘기를 들려준다. 우리의 정치문화와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빈부의 차에 허덕이면서도 천문학적인 재산을 빼돌리고도 축출당한 마르코스 대통령을 지금도 존경한다는 우매한 필리핀 국민들, 회교도와 카톨릭 신자간의 유혈전쟁, 현 여자대통령을 증오하고,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옥살이 하는 “살찐 돼지”를 뽑아줄 것이라는 바보 같은 필리핀 국민들.
10시 42분, 드디어 말로만 듣던 팍상한(Pagsanjan)폭포에 도착했다. 산이 드문 필리핀에서 화산과 폭포를 경험하는 것은 퍽 다행스런 행운이라 생각했다. 이름만큼 “상하지 않은” 4.2킬로미터의 환상의 계곡! 안내군은 이미 여행비에 90$가 지불되었지만, 방석과 조끼를 빌리는 명목으로 10$씩을 더 요구했다. 그러나 팁까지 포함된 가격이니 팀은 주지 않아도 되며, 보트맨이 불쌍해 보이면 닭다리하나 사주시면 된다며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어제는 말이 불쌍했지만, 오늘은 사람이 불쌍하다는 말도 덧붙여주었다.
공원은 깨끗했다. 새로 지은 건물인지 정원수도 깔끔하고, 앞으로 펼쳐진 계곡과 야자수도 옅게 낀 구름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연출했다. 사진도 찍고, 갖고 온 짐을 개인 소지함에 열쇠로 보관하고, 사진을 찍어야 하니 카메라며, 지갑이며, 꼭 필요한 물건들은 비닐로 꼭꼭 접고 팁으로 줄 2달러만 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경비복을 한 현지 안내원이 구명조끼를 건내 주는데 헝겊으로 되어있어 영 어설펐다. 큰 책만 한 깔판을 주며 배를 탈 때 깔고 앉으라 한다. 100미터 폭 되는 계곡물이 10여 미터 발아래로 펼쳐지고 먼저 출발하는 다른 팀 관광객들이 모터보트의 지휘를 받아 목적지로 출발하고 있었다.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몸무게의 균형을 맞추어 파트너를 정해주는데, 화학과 후배 녀석이 대뜸 나를 선택한다. 20년 후배! 몇 마디 나눈 얘기에 부담이 없어 보였나? 일행의 출발 사진을 찍고 나도 배에 올랐다. 기우뚱 균형을 잡자 두 사람의 보트맨이 앞뒤에서 인사도 없이 길잡이를 하기 시작했다. 계곡 물이 왜 이리 흙탕물일까? 그리 보니 마닐라의 하천 물은 모두 구정물이었다. 그리고 그 구정물이 흐르는 곳엔 쓰레기가 수북했고 그 위에 빈민촌들이 옹기종기 자리를 잡았다. 아마 배설물을 바로 처리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적어도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이리 흙탕물인데는 무슨 연유가 있는 듯 했다. 화산지형? 결론을 얻지 못하고 카누만한 배를 타고 손가락에 와 닿는 차가운 물을 느끼며 끌려갔다. 100여 미터를 노를 저어 갔을까, 앞 보트맨이 원두막처럼 생긴 곳에서 정좌한 채 잠자리채를 뻗은 한 감시원에게 뭔가를 그 안에 던지듯 내민다. 통행세인가? 100달러의 관광비 중 이들 보트맨이 받는 금액이 얼마나 될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이런! 노를 저어 갈 수 있는 곳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암초처럼 생긴 계곡의 바위가 등장하자 날렵한 몸짓으로 배에서 뛰어내려 가슴팍까지 닿은 계곡물을 거슬러 배를 끌고 밀고 한다. 바위틈새를 지날 때는 뉴톤의 3법칙을 활용한다. 뒷발로 바위를 밀며 다시 올라타고, 다시 날면서 끌고, 뒤 보트맨은 배로 스민 물을 열심히 퍼내고, 가끔씩 균형을 잃은 내 자세를 교정하느라 “헤이” 톡톡 보트 끝을 두드린다. 교차되어 내려가는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 댄다. 하나같이 한국인이다. 그런데 왜 반가운 생각이 들지 않는 걸까? 계곡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생전 보지 못한 일엽초가 계곡 절벽에 붙어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듯 뿌리는 가느다란 폭포수가 수정알갱이 뿌리듯 환영해주었다. 무지개! 100여 미터 깎아지른 절벽이 좁다랗게 그려놓은 하늘에서 작은 무지개를 보았다. 분위기 좋게 옛날 “타잔”영화가 떠오르는데 마침 지나는 보트맨이 “아~~~아~~”를 외쳐 깜짝 놀랐다. 그들은 신이 나있었다. 다시 펼쳐지는 평평한 계곡, 다시 노를 저어 가는 곳, 보트맨의 갈색 근육질이 경륜을 말해주는 듯싶었다. 등산길이 있을 리 없다는 판단을 했다. 외길 계곡뿐. 다시 계곡 바위가 나타났다. 날렵한 타잔들, 발바닥이 두툼해 보였다. 보트맨이 연신 땀을 훔치면서도 담배까지 피워대자 후배가 싫어하는 듯 보였다. 계곡에는 그들이 설치해놓은 철재 기둥이 가로로 바위틈새에 찔려져 있었다. 바퀴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인간의 지혜를 심어놓았다. 드르륵 덜컹! 첨벙첨벙! 영차! 퍽퍽(물 푸는 소리), 처억처억-(노젛는 소리), 타악!(뒷발로 바위 미는 소리)...... 보트맨이 불쌍해보였다 싶을 때 중간 휴식처로 보이는 곳에 도착을 했다. 그곳에도 폭포가 있었다. 사진을 찍는 동료들 사이를 비집고 닭다리와 콜라를 내미는 현지인들이 불쑥 앞을 가로 막는다. “사공 힘들어!, 사공 배고파!” 그 어렵다는 한국말을 익숙하게 만든 한국인들이 얄미워졌다. 그러나 정말 불쌍한 보트맨을 위로한답시고 3달러를 페소로 지불했더니 앞 보트맨이 고맙다며 인사를 꾸벅 했다. 팁으로 준비한 2달러로 모자라 비닐로 싼 지갑을 꺼내들자 후배가 안절부절 마지막에 팁으로 1달러만 주라했다. 바위 뒤로 가서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이, 보트맨들은 어른 주먹만 한 닭다리와 콜라를 어느새 먹어치웠는지 우리를 다시 배에 태워 다시 길잡이를 했다. 그 때 후배가 묻는다. “선생님, 닭고기를 벌써 먹었을까요? 체했겠네!” “ 글쎄..........”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들은 먹지 않았다. 다시 닭과 콜라를 넘겨주고 사례로 달러를 받은 뒤 그들은 입을 닦는 시늉을 하며 우리를 태운 것이었다. 가엾고 영악한 보트맨! 갈수록 계곡은 험해지고 그들은 힘들어 했다. 하산하는 관광객 중엔 서양인들도 눈에 띄었다. 그 뒤로 지나오며 손 흔드는 한국인이 “옷 모두 젖어요~~~~~~~~!”라며 경고해주었다. 뒤 따르는 후배와 동료들이 물장구치며 장난을 쳐왔다. 드르륵 덜컹! 첨벙첨벙! 영차-, 퍽퍽, 처억처억-, 타악!......
목적지는 장엄했다. 우르릉! 꺄악! 비명소리와 환상적이라는 소리가 뒤범벅되었다. 쏟아지는 폭포수 앞에서 물보라를 맞으며 그들은 셔터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곳에서도 닭다리를 팔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속지 않았다. 먼저 온 동료들이 카메라를 맡기고 뗏목을 타라 충고 했지만 비닐로 여러 겹 싼 후 조끼에 칭칭 감아 묶고 물속에 반은 가라앉은 뗏목으로 갈아타자, 균형이 틀어졌는지 나랑 같이 탔던 후배가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어설픈 구명조끼도 그 땐 제몫을 했다. 어푸어푸하며 손을 잡고 다시 자신만만하게 뗏목에 올랐다. 10여 명 남짓 되는 우리 동료들을 안전 줄을 길잡이 삼아 현지인 둘이서 신나듯 집채 만 한 폭포수 밑으로 끌고(?)갔다. 40여 미터 떨어진 팍상한 폭포수가 무너져 내렸다. 우르릉 쏟는 폭포수 안으로 진입하자 모두 고개를 들지를 못한다. “뗏목맨”은 언제 배웠는지 뗏목을 이리저리 흔들어대며 “대-한민국”을 외쳐대고, 그 와중에서도 바보같이 “한번 더!!, 팁줘요, 팁줘요”를 외쳐댔다. 고개도 못 드는 데 팁을 어찌 주니 이 새머리야!!!! 물알갱이의 충격이 이리 센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외쳐대는 비명소리를 무시하고 2분여를 머무른 다음 다시 뗏목을 원위치로 저어갔다. 비닐로 몸을 두른 사람도 이제 더 이상 비닐이 필요 없고, 신발을 찾는 사람도 있었다. 상류 물임에도 물은 구정물이었다. 아! 이리 세차게 떨어지는 폭포수가 바닥을 휘저어 이리 되었나 보구나 하고 결론을 내렸다. 환상과 긴장 속 10분이었다. 뗏목을 내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비닐에 쌓인 카메라를 점검한 후 몇 차례의 셔터를 누른 후에야 보트맨이 우리를 찾고 있음을 알았다.
내려오는 길, 지난여름 강원도에서 래프팅하고 온 후 너무 좋았다고 자랑하셨던 동료교사선생님이 생각났다. 여길 왔으면 기절했을 터인데...........100여 미터 깎아지른 절벽이 만들어낸 절묘한 계곡의 보트 래프팅! 모두들 신나라 했다. 저절로 타잔 소리가 나왔다. 구정물도 이젠 장난스런 계곡물일 뿐이었다. 되돌아 오는길은 아쉬움만큼이나 빨랐다. 올라가는 금발머리 외국인 가족이 부러워 보였다. 처억처억- 하아하야! 타아-아아아아-아아! 이야호! 노 젓는 몸동작이 흥겹고 발차기가 노련해 보였다.
돌아온 출발점엔 조그만 샤워장이 있었다. 샤워로 몸을 정비하고 근처 식당에서 먹는 늦은 점심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이미 필리핀이라도 된 듯 닭다리를 두어 개씩 집어삼킨다. 그래도 어설프지만 김치 맛이 최고였다. 13:50분 숙소로 출발! 안내군은 필리핀을 먹여 살리는 세 가지 요소로 “진주, 코코넛, 그리고 해외근로자”를 꼽아주었다. 민비가 진주화장품을 처음 사용했다는 사실과 진주는 우유로 닦으면 잘 닦인다는 친절한 충고도 해주었지만, 옵션으로 책정된 100달러중 수 달러만 보트맨에게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는 보트맨이 더욱 불쌍해졌다. 나머지는 관리비란다. 안내군비도 만만치 않았을 터인데......... 14:00시 공동묘지를 소개해주었다. 필리핀 공동묘지의 일부는 에어컨 시설이 있는 것도 있단다. 이곳은 매장문화가 없고 화장 후 납골당에 모신단다. Los banos 시를 경유, Calamba시를 빠져 나오니 마닐라톨게이트에 “Feel the glow of Christmas"광고판이 크게 반긴다. 이 곳 필리핀사람들의 최고 명절은 성탄절이란다.
16:00시 호세 리잘 파크로 향했다. 필리핀의 독립영웅. 참배와 묵념을 인도하고 일요일이라서인지 한가로이 쉬는 많은 시민들과 섞여 일대를 둘러보았다. 리잘은 위대했고 영웅스러워 보였지만 그 공원의 흰 조각상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었고 남자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소녀를 떠받들고, 남자를 짓누르는 동상! 그대 남자들이여 필리핀을 망쳤노라! 정신 똑바로 차리라! 대다수의 공무원이 여자이고 여인 천국인 필리핀을 더욱 이해할 수 있었다. 불쌍한 사내들..............무서운 스페인! 월드컵에서 승부차기로 이긴 스페인을 생각하니 속이 다 시원했다.
Fort santiago, 옛 스페인 왕궁유적지란다. 세계대전의 흔적이 남아있고, 호세 리잘의 처형 시 끌려간 발자국을 브론즈로 땅바닥에 수 십 미터를 조각해 붙여놓았다. 포탄을 맞아 날아간 스페인 집권당시의 극장건물을 보존한 필리핀. 리잘 박물관이 그 안에 있고 한글로 번역한 리잘의 사랑 깊은 애국시도 벽에 진열되어 있었다. 시간이 있었으면 적어왔을 터인데.....................뒤로 흐르는 마닐라의 한강정도 되어 보이는 이름 모를 강! 역시 흙탕물이었다. 높은 건물에서는 속이 다 들여다보일 법한 산티아고 성! 저들은 수백 명을 수장했다는 지하 감옥을 보고 무엇을 회상할까? 성벽을 타고 빠져 나오는 길, 다정하게 애인 무릎에 누워 사랑을 교감하는 연인은 피를 거꾸로 솟게 했던 치욕의 역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굵고 크게 솟은 망고나무가 비웃듯 서있었다.
<다섯째 날>
아침부터 부산했다. 둘째 날 초등학교 때와는 긴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필리핀 부유층 자녀들이 모였다는 “Makati science high school"을 방문하여 과학시연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모닝콜이 다섯 시라고 했음에도 동료들끼리 호텔에서 천연 파인애플액을 가미한 소주파티 후 잠든 터라 몽롱한 아침 이었다. 어김없는 모닝콜 3번, 이젠 대꾸도 않고 끊었더니, 룸메이트, 전 선생이 세 번째 것은 진짜라고 귀띔을 해준다. 진즉 말하지~.
6시 43분 출발! 케손시티에 있는 마카티 과학고까지 가는 길도 판자촌이 보이는 철길 옆을 지나야 했다. 서둘러 출발한 이유를 물었더니 국기게양식에 참가한단다. 왠 국기게양식? 국기게양식은 6-7시 쯤일텐데? 필리핀에 많이 익숙해졌다. 시내가 친근해지고 여유만 있다면 자유로운 쇼핑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교육청 앞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교육청을 방문했다. 대뜸 2층으로 안내하더니 아침부터 토스트에 음료를 제공해주었다. 아침식사를 하고 온 터라 다들 먼 산만 쳐다보는데 부교육장인듯 한 여자분과 참모들을 소개했다. 8시! 이곳은 월요일 조회를 국기 게양식으로 치른단다. “Flagraise ceremony"! Jesus로 시작한 기도로 시작하더니 장엄하고 빠른 템포로 필리핀국가가 울린다. 미리 마련한 의자에 앉았던 우리 일행이 기립하고 교육청 직원들은 그 좌우로 도열했다. 제복 입은 자의 손놀림이 빠르게 국기를 봉우리까지 올린다. 우리와는 사뭇 달랐다. 아- 자랑스럽게도 필리핀 교육청에서 우리 태극기가 올랐고 K선생님은 천천히 태극기를 올리고 국악으로 연주되는 애국가를 따라 우리는 뜨겁게 애국가를 불렀다. 천천히 올리는 우리의 모습이 그들도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따깔로그어로 진행되는 터라 짐작으로 알 수밖에 없었다. 남직원이 무슨 맹세를 낭송하고, 또 다른 남직원은 영어로 ”Thought for the week"를 낭송해주었다. “실패는 네가 실패했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그것은 네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는 뜻이니라...........” 엄숙했고 경건했다. 마지막으로 "Director IV"로 소개된 중년 여사의 메시지가 연설되었다. 마치 노래하듯 읊어대는 연설, 그녀는 조크를 섞어가며 팀장 교수를 소개했고, 교수님도 그들과의 친분을 담보로 우리 교사팀이 교사 간 교류를 희망한다는 말도 전해주었다. 힘찬 박수로 선생님들과 학생들을 소개하고 모두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의식 후 다시 연회장으로 안내된 우리에겐 성찬이 마련되었다. 푸짐한 열대 과일! 아침부터 포식한 후 방금 전에 메시지를 전달했던 분이 테잎 노래방을 틀고 한국과 필리핀 대표의 노래대결(?)이 이어졌다. 팀장교수님은 아침이슬을 부르며 한국의 군부정권에 대한“democracy"를 상기시켜 주었다.
09:00시 드디어 근처에 위치한 “Makati science high school"로 향했다. 한국 같았으면 외곽이나 큰 운동장을 끼고 있어야할 학교가 시장 속에 파묻혀 있었다. 정문도 어느 중소기업 철제문 같았고 학교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나, 그 안엔 중고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농구골대만 서있고, 오른 쪽 교실 한 칸만한 공간에 의자와 방금 전 수업을 받았는지 물리학 책자들이 놓여있었다. ”Physics"라 적혀있었는데 초등학교에서 본 노트처럼 교과서의 재질이 우리나라 60년대를 연상하는 흑백교과서였다. 그런데 물리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음악 체육이 다 들어 있는 듯 보였다. 학교 관계자들과의 면담 끝에 2층의 소강당쯤으로 안내되었다. 초등학교와는 달리 정장을 차려입은 남녀학생이 커플로 사회를 보는데 몸집으로 보아 잘사는 집 아이들 같았고 목소리도 또랑또랑 했다. 필리핀에서는 아직도 뚱뚱한 사람이 잘살아 보이는 듯 했다. 오래간만에 남자교장선생님을 보게 되어 의아스럽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학교신문과 학교소개 팜플릿을 제공하고는 합창단의 반주로 필리핀 국가를 부르며 간단한 국민의례를 했다. 물론 국가보다 앞선 것은 하느님을 향한 기도였다. 남자 사회자가 지난 12월 한국을 방문했던 소감을 영어로 발표하는데 경주 불국사 운운하며 몹시 추어 고생했음을 회고했고, 눈부신 한국의 발전상을 부러워했다. 이어서 어느 대회에 참가하여 소개했던 연극 두 편을 이어서 보여준다. 영어로 해도 헛갈릴 판에 따깔로그어로 보여준 연극은 무언극 보는 듯 했다. 하지만 그들은 진지했고 최선을 다했다.
연극을 끝으로 학교를 둘러보고 아이들과 대화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우리 나라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한 무리 여학생들에게 중학교 과학선생님이며 화학을 가르친다 했더니 놀라워했다. 담임선생님도 화학전공이라는 것이다. 옆을 지나던 한국대학생을 가리키며 고등학생이냐고 물어 대학생이라고 했더니 놀라는 듯 했다. 마침 학생이 갖고 있던 사탕을 내밀자 기념품인양 반갑게 받아들어 내게 있는 한국물건을 더듬다가 천원 지폐를 한 학생에게 건내 주었다. 물론 50페소 상당이라는 말도 덧붙여 주었더니 밝게 웃어주었다. 사진을 찍고 이메일로 보내주리라 약속했다.
물리실을 공개했다. 그들 나름대로 잘 차려놓았지만 몹시 어설펐다. 그들의 작품발표인 듯 학생 스스로 발표를 했다. 산소발생장치, 불꽃반응세트, 세포모형, 파동발생장치, 도난방지장치....... 아직은 어설픈 초자기구와 실험세트들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들 교실엔 15인치 모니터에 CD롬이 자꾸 다운되는 컴퓨터 한 대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업을 듣는다 했다. 텔레비젼도 작고.......아! 우리나라 학교 창고엔 31인치 TV도 고철 취급받는 판에.......PAS팀이 한 대당 만원에 구입한 펜티엄 컴퓨터도 학교에서 폐기물처리장에 넘긴 것을 중간에 양호한 것만 골라 20여 대를 갖고 왔다는데 그들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하니 IT 선진국 반열에 든 한국이 자랑스러웠다.
점심은 5층 본관 건물 중 2층 복도에 뷔페식으로 차려진 곳에서 조촐하지만 성의있게 제공받았다. 닭고기에 밥과 샐러드! 그리고 음료. 우리나라 보리텐 비슷한 음료를 택했는데 맛에 향이 그윽했다.
12시 30분, 콘크리트 운동장(?)에 책상이 배치되고, 어제 저녁 룸메이트와 맘먹고 만든 물로켓을 중앙에 배치시키고, 준비한 과학시연자료를 설치했다. 역시 과학고 학생답게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오픈닝처럼 카운트를 하며 쏘아올려진 물 로켓은 그들의 탄성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우려했던 사고 없이 아주 높이 올라 멋지게 낙하산가지 펼쳐져 4-5차례의 함성을 더 들어야했다. 풍선을 요구하는 “소녀팬”들에 둘러싸여 우리 팀은 정신없이 꽃과 강아지, 그리고 용사의 검을 만들어댔다. 1시간 여 동안 보여준 시범시연은 대성공인 듯 보였다. 탱탱볼과 풍선의 종료를 재촉하는 팀장의 방송을 듣고 1시 40분쯤에야 풍선이 바닥을 보였다는 핑계로 책상을 정리해야할 지경이었다.
이어진 학생들의 태권도 시범, 이제는 송판에 폭약까지 설치해 음향효과를 더했고 ,능숙해진 부채춤에, 붉은 악마 복장의 월드컵 송과 에어로빅은 훌륭한 찬사를 받았으며 2시 52분, 태국에서 학생방문이 이어질 계획이었던 학교 일정에 맞추느라 서둘러 차에 올라야 했다.
보람찬 하루 SM쇼핑센터로 안내되어 한 시간의 쇼핑시간을 얻었지만 시간에 쫒겨 두 딸아이 선물밖에 고르지 못하고 총총 호텔로 향해야했다.
<마지막 날>
마닐라의 마지막 밤은 자정을 넘기면서까지 자축을 했다. 필리핀 택시기사들은 길도 잘 모르고 거스름돈 남겨주는 것을 모르는 듯 했다. 한국택시기사들도 외국인을 태우고 목적지를 앞에 두고 빙빙 돌아갔을까? 그리고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에게 거스름돈 대신 “땡큐”를 외쳤을까?
5박 6일이 훌쩍 지났다. 아니 현지에서만은 한 달보다 더 긴 듯 했다. 가족들이 보고 싶고 한국이 그리웠다고 해야 맞을 것 같았다. 한국의 김치가 그립고 한국의 깨끗한 산이 그리웠다. 8시 30분에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한 후 차에 올라타는데 열쇠고리를 파는 잡상인들이 벌떼처럼 아우성이었다. 진주구슬 2개에 만원! 가죽 열쇠고리 60개에 만원! 안내군은 면세점과 작은 쇼핑센터를 안내해주었는데 다양한 물건이 보이질 않아 다들 실속 쇼핑만 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아쉬운 마닐라! 혼자 왔더라면 꼭 골목과 가까이서 판잣집을 구경해보고 싶었는데.......그리고 오토바이 자동차도 타고 싶었는데.....
14:20 분 인천발 PR 468기, 12시가 채 못되어 공항에 도착을 하고, 필리핀의 또 다른 섬으로 봉사활동을 떠나는 대학생들과 아쉬운 작별을 해야 했다. 팍상한 폭포에서 배를 같이 탔던 후배에게 손을 흔들어 필승을 기원해 주었다. 아직도 2주일 일정이 남았단다. 공항은 오던 날과 달리 꽤 커 보였다. 수속을 밟고 1번 GATE에서 기다리는 1시간 반 동안 못다 한 쇼핑들을 하느라 분주했다. 아! 화장실에서 문열어주고 팁을 요구하는 청년은 필리핀의 마지막 인상이었다.
좌석번호 37F, 이런, 중간에 콕 박혀 있어야 했다. 창가가 아니어서 서운했지만 동료 셋과 한 줄을 잡았다. 신문보고, 음료 마시고, 기내식 먹고, 신문보고, 영화보고, 졸다가 왼쪽 날개위로 펼쳐지는 일몰을 보았다. 아! 일몰이 두 번이로군! 이곳이 성층권이니 구름 아래로 한 번, 바다 밑으로 한 번! 하-! 신기했다. 넘실대는 구름 속으로 떨어지는 해! 물속으로 떨어지는 해. 한 번도 경험 못한 일몰을 먼 자리서 신문 훔쳐보듯 눈 동냥하는데 꼬마 녀석 둘이 문을 닫아버린다. 아쉬움.
착륙 24분전, 대기온도 -44도, 8,100미터 고도, 현재 군산-대전 상공!
착륙 18분전, 대기온도 -23도, 4831미터 고도!
아! 인천공항! 역시 한국의 냄새는 신선하고 야경은 마닐라보다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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