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는 전기면도기로 면도를 합니다. 어떤 사람들처럼 털이 많지 않기 때문에 면도하는 일이 복잡하지 않습니다. 전기면도기를 켜서 그저 잠시 턱과 코밑을 두어 번씩 밀었다 당겼다는 하면 하루 동안은 누가 보더라도 거부감을 주지 않고 지내는데 별 지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얼굴에 복잡하게 털이 많이 나지 않은 것도 감사할 일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늘 그렇게 전기면도기로 얼굴 정리를 하다가도 목욕을 하는 날에는 칼을 들기도 합니다. 평소에 칼을 들고 면도를 하지 않는 이유는 우선 전기면도기로도 간단하면서도 깔끔하게 얼굴청소를 할 수 있다는 것이며 또 다른 이유는 칼을 얼굴에 대는 일이 여간 번거롭지 않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목욕탕에서는 역시 칼이 제격입니다. 목욕을 하는 동안 몸에 붙어있던 부스러기도 말끔하게 털어 내지만 턱에 붙어있던 털도 평소의 전기면도기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깔끔하게 밀어내는 칼 면도는 정말 면도의 멋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칼 면도의 장점은 무엇보다 매끈매끈하게 밀어내므로 턱의 감촉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칼로 턱을 밀고 그 매끈매끈한 얼굴을 하고 있는 턱을 스킨로션으로 마무리를 하고 나면 기분까지 상쾌해지는 맛을 볼 수 있습니다.
목욕을 하면서 여유를 부리며 칼을 들었습니다. 예리한 칼날이 얼굴에서 턱으로, 턱에서 다시 얼굴로, 또 목으로 몇 차례 왕복했습니다. 오른 손으로는 칼을 들고 왼손으로는 비누거품으로 얼굴의 감촉을 느끼면서... 그런데 오른 손이 말을 잘 듣지 않기로 작정했는지 잘 난 얼굴에 상처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턱에도 하나, 목에도 하나, 그리고 입술에까지 피 맛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목욕을 하고 나서 조용히 묵상했습니다. 묵상의 주제는 '손이 말을 잘 안 들으면'이었습니다. 만일 말입니다. 정말 손이 말을 안 듣기로 작정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손이 술을 잔뜩 마시고 정신이 반쯤 훼까닥 해버린 상태로 마구잡이로 나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손이 이렇게 나간다고 한번 같이 상상해 보십시오.
「야, 머리야. 니는 대장이냐. 뭐시 항상 이것 해라, 저것 해라 카면서 명령만 하노. 정말 기분이 나쁘데이. 맨 꼭대기에 앉아서 맨날 이래라 저래라 고만 캐라. 이제 니 명령 들어주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도 마 질린다 안 카나. 니는 시킬 일이 왜 그렇게 많으냐 말이야. 그리고 뭐 시킬 것 있으면 좀 신사적인 것을 시키면 안 돼나. 니 한번 생각해봐라. '코딱까리 후벼라' 이게 뭐고. 그것뿐이냐? '발가락 사이에 낀 때 좀 닦아라' '항문 좀 닦아라' 그리고 나는 뭐 입 시중들어주는 종이니? 맛있는 거는 죄다 입이 먹어치우는데 왜 시중은 나만 들어야 하냐? 그래 입이 어쨌느니 하는 시비를 걸었으니 혀 한번 대보자고. 니 입 좀 봐라. 지는 먹는 것은 혼자 다 먹으면서 쪼깨 기분이 나쁘면 별 희한한 소리 다 하더라. 입 한번 삐죽거리면 마 누구도 감당할 수가 없는기라. 그 잘난 입에 자갈을 먹일 수 있나, 자물쇠를 채울 수 있나. 벌려진 입이라고 막갈 때는 무슨 대책이 없는기라. 눈도 기분 나쁘면 꼴불견이더라. 단추구멍 같은 눈을 하고 한번 째려보면 와~ 온몸에 쌀 얼음이 언다 말이다. 코도 봐라 냄새는 지 혼자 맡아내면서 맛있는 거는 기가 막히게 골라서 입에 갔다 넣으라고 시키는데 내보고 시킨다 아이가. 만일 내가 기분 나쁘다고 좀 삐죽이기라도 하면 그 잘난 코가 어떻게 하는지 아냐? 내 한번 해볼까? '흥, 흥' 그라던가, 아이면 '힝, 힝' 그라던가. 아무튼 희한하지도 않은기라. 제발 고만들 해라이...
오늘 말이야, 정말 막가기로 하면 나도 할 수 있다는 거를 좀 보여주고 싶었는데 내 아킬레스는 마음이 약한 것이란 말이야. 오늘 면도칼을 들고 한번 모진 마음 먹어보려고 했는데 마음이 약해서 그만 쪼깨 하다 말았는기라. 입술에 약간 기스 났다고 아이고 그 잘난 입이 얼매나 아프다고, 피가 난다며 난리 법석을 떠는지 내 마음이 약해져서 고만 했다 말이다. 눈, 코, 입, 머리... 너희들 잘 들어라. 너희들 말이야 손 잘 만난 줄 알거라 말이다. 성질 고약한 손 만났다면 너희들도 고생 많이 했을거다 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