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포 사천 이야기 37
사천 세종대왕 태실지와 단종 태실지
사천 곤명면 은사리에는 외세에 짓밟힌 슬픈 흔적, 잊지말라고 이야기하는 사천 세종대왕 태실지와 단종 태실지가 있습니다.
태실이 아니고 태실지(胎室址)입니다. 태실은 없고 태실이 있었던 흔적, 터만 있다는 것 입니다.
조선왕실에서는 왕자나 공주의 태를 묻기 위해 태실도감을 설치하여 태를 봉안할 명당을 물색하고 안태사를 보내어 태를 안치했습니다. 특히 다음 왕위를 이어갈 왕자나 왕세손의 태는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습니다.
왕자의 태를 묻은 태실은 태봉(胎封)이라고도 불리며, 태를 묻은 산을 태봉(胎峰)이라고 합니다. 전국에는 태실 또는 태봉이라고 불리는 곳이 40여 개소가 있다고 합니다.
세종임금이 왕위에 오르던 해인 1418년에 전국에서 가장 좋은 길지라 하여 곤명현 소곡산에 자신의 태를 안치하였습니다. 이듬해인 1419년에 곤명현을 이웃의 남해현과 합하여 곤남군(昆南郡)이라는 큰 고을로 승격시켰습니다. 이는 세종태실이 갖는 의미를 알게 해줍니다.
'세종·단종 태실 수개 및 표석 수립 의궤' 에 의하면 정유재란 때에 왜구들이 세종대왕 태실을 크게 훼손하였으며, 선조 때에 대대적인 수리를 하고 영조 10년에는 태실비(胎室碑)를 세웠다 합니다.
1929년 조선의 태실이 모두 길지(吉地)에 있다는 사실을 안 일제는 이미 망한 조선왕조의 정기를 완전히 끊기 위해서인지 태실의 소유권자인 조선왕실을 위협하여 전국에 산재한 태실에 안치된 태항아리를 경기도 양주로 옮기게 하고, 태실을 훼손하고 그 땅을 민간에 팔아버렸습니다.
사천 세종대왕 태실도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고, 부서진 석물들은 계곡에 버려지거나 땅에 묻혀버렸습니다. 현재 세종대왕, 단종의 태실터에는 개인의 무덤이 들어섰으며, 영조 때 세운 비석과 주변에 흩어진 석조물로 이곳이 세종대왕의 태실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슬프게도 태실비와 태실 석재 일부가 한데 모아져 비바람을 맞고 있습니다. 단종의 태실터는 더욱 초라합니다.
깊숙한 곳에서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방법이 있다면 되돌려 놓고 싶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가슴 아프고 억울한 이 일을 없었던 일로 취급할 수도 없고 무시할 수도 묻어둘 수도 없는 겁니다.
이제 와서 왕의 태실지에 무덤을 쓴 사람이나 그 후손들에게 무덤을 옮기고 원상복구하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며 또 그렇게 해 주지도 않을 겁니다.
남아 있는 유물이나 유적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관리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태실지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고 느낄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천 곤명면 은사리 세종대왕과 단종의 태실지는 외세에 짓밟힌 슬픈 흔적입니다. 잊지 말라고 절대로 잊지 말라고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2022.9.29.
김상옥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