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아비담심론 제10권
11. 택품(擇品)①[3], 마음의 차별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의 단계에서 차별이 생기는 내용]
지금부터 그 차별이 생기는 내용을 설명하겠다.
번뇌는 삼계에 통하는데
견도에서 끊는 경우 두 가지며
두 가지 끊음에는 고 세 종류이니
모두가 견도(見道) 전에 행해진다.
만약 번뇌가 삼계와 연계된 것이라면 도를 밝히는 단계에서 끊게 되는 것은 곧 다섯 가지 견해(五見)30)와 의심이 그것이다. 이 견도(見道)의 전행(前行)은 두 종류의 번뇌다.
[다섯 가지 견해와 의심은 결정코 견도의 위치에 이르기 전에 끊어지는데, 애착과 오만과 무명은 견과 함께 소멸한다.
사실은 아직 다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표현은 이미 다했다고 하며 모두가 견도를 따라 명칭을 받으며, 이름하여 전행(前行)이라 한다.
아래에 나오는 수도의 단계에서는 견도의 단계를 기다리지 않는 까닭에 수도의 전행이 된다].
번뇌에 따라서는 혹은 견도의 단계에서 끊으며 혹은 견도와 수도로써 끊는다.
어떤 것이 견도에서 끊는 번뇌인가?
만약 번뇌가 비상비비상처와 연계된 번뇌일 경우에는 수신행과 수법행의 간단없는 인식[無間忍] 작용으로 끊게 된다.
그 비상비비상처에 연계된 번뇌란 그 경지가 일정한 까닭에 이렇게 말하며,
수신행과 수법행은 사람이 정해져 있는 까닭에 이렇게 말한다.
간단없는 인식작용은 대치가 정해져 있는 까닭에 이렇게 말하며,
끊는다는 것은 객관적인 작용[所作]이 정해져 있는 까닭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무엇이 견도와 수도의 단계에서 끊는 번뇌인가?
이는 여덟 가지 경지이면서 만약에 범부의 경우라면 수도의 단계에서 끊고 성인의 경우라면 견도의 단계에서 끊게 된다.
【문】왜 범부가 끊는 번뇌는 오로지 수도의 단계에서 끊는다고 하는가?
【답】범부는 부분적으로 번뇌를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견도에서 번뇌를 끊고 이와 같이 수도의 단계에서 번뇌를 끊게 된다.
또한 범부는 한 가지 도로 아홉 가지 경지의 번뇌를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삼계에 깔린 다섯 종류31)가 애착과 오만과 무명이라면 이 견도의 전행은 세 종류이니,
혹은 견도에서도 끊게 되고 혹은 수도에서도 끊으며 혹은 견도와 수도로써 끊게 된다.
그러나 만약 그 번뇌가 비상비비상처와 연계되면선 수신행과 수법행의 간단없는 인식작용으로 끊게 된다면 이것은 견도로 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아홉 경지이면서 유학의 견적(見迹)이 수도로 끊어진다면 이는 수도로 끊는 번뇌이다. 나머지 여덟 경지는 범부일 경우 수도로 끊고 성인이라면 견도로 끊는다.
가령 욕계의 번뇌의
다섯 행(行)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 수행에 제한이 있기 때문에
수도(修道)의 전행(前行)이라 설한다.
만약 욕계의 다섯 행이라면 그 수도의 전행에는 두 종류가 있다. 혹은 수도에서 끊는 것이고 혹은 견도ㆍ수도에서 끊는 것이다.
만약 유학의 견적의 수도로 끊는다면 이는 수도로 끊는 것이다. 나머지는 만약 범부가 끊는다면 수도에서 끊는 것이고,
만약 성인이 끊는다면 견도에서 끊는 것이다. 그것은 결정코 앞에서 끊는 까닭에 전행이라고 말한다.
【문】앞에서 연(緣)을 설했는데, 이 모든 연은 언제 작사(作事)하는가?
【답】
차제연의 소작(所作)은
그 법이 생길 때라고 설한다.
연연(緣緣)의 소작업은
그 법이 소멸할 때라고 설한다.
‘차제연의 소작은 그 법이 생길 때라고 설한다’라고 했는데, 생할 때란 곧 미래를 말한다.
전개됨과 함께하는 까닭에 마땅히 전개될 때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 법이 생할 때 차제연은 작업을 하는 것이다.
처(處)를 준다는 뜻인 까닭에 차제연이라 부른다. 그 법이 생함은 곧 처를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색과 일체의 불상응행 역시 처를 얻어 생한다면 마땅히 차제연이라 설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 일에 관해서는 행품(行品)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연연의 소작업은 그 법이 소멸할 때라고 설한다’라고 했는데 법이 소멸할 때 연연은 작업을 짓는다.
법이 소멸할 때는 현재를 말한 것으로 능히 경계를 섭수하는 까닭이니, 과거ㆍ미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 가지 인의 소작업(所作業)은
이른바 그 법이 생길 때이며
두 가지 인의 소작(所作)은
소멸할 때라고 말함을 알아햐 한다.
‘세 가지 인의 소작업은 법이 생길 때이다’라고 했는데, 법이 생길 때는 세 가지 인으로 업을 짓게 된다.
이른바 자분인(自分因)과 일체변인(一切遍因)과 보인(報因)이 그것이다.
자기만이 지닌 인의 힘 때문에 법이 생겨나며 비서로 닮은 법이 이어진다.
그런 까닭에 법이 생길 때는 자분인이 업을 짓게 되고
일체변인과 보인은 수순해서 생법을 건립하는 까닭에 그 법이 생할 때 업을 짓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총체적으로 말한 까닭에 법이 생길 때는 세 가지 인이 업을 짓는다고 한 것이다.
처음 생긴 무루심(無漏心)을 제외하고 그밖의 선과 보를 제외한 나머지 불은몰무기(不隱沒無記)에는 자분인이 업을 짓는다.
오염된 업일 경우에는 자분인과 일체변인이 업을 짓는다.
업보에는 자분인ㆍ보인가 업을 짓는다.
‘두 가지 인의 소작은 소멸할 때라고 말함을 알아야 한다’라고 했는데, 유연법(有緣法)이 멸할 때는 상응인과 공상인이 업을 짓는다. 업이 같은 까닭이며 일과(一果)인 까닭이다.
불상응법에는 공상인이 있으니, 무연인 까닭이다.
증상연은 모든 시기에 장애를 받지 아니하고 머물기 때문에 여기서는 말하지 아니한 것이다.
또 설명을 기다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작인(所作因)도 역시 이와 같다.
[중생들의 평등한 마음]
【문】어떻게 모든 중생에게 평등한 마음이 일어나고 평등한 마음으로 머물고 평등한 마음이 소멸하는 것인가?
이것을 묻는 이유는 중생에 따라 그 몸이 혹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데, 몸이 큰 사람은 마음도 크고 몸이 작은 사람은 마음도 작은가? 아니면 일체가 동등한가?
또한 중생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그침은 느리고 빠른 것이 같지 않은데, 느리게 가는 사람은 마음도 느리고 빠르게 가는 사람은 마음도 빠르게 움직이는 것인가? 아니면 모두가 동등한가?
또한 중생에 따라 혹은 마음이 안정되어 지각하는 바가 산과 같은 경우가 있으며,
혹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움직이는 것이 마치 날리는 먼지와 같은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고요한 사람은 마음도 느리며 움직이는 사람은 마음도 빠른가? 아니면 모두가 동등한가?
【답】
모든 중생들의 마음이
일어나고 머물고 소멸함은 동등하니
탐욕 등의 상응과
불상응 역시 그러하다.
‘모든 중생들의 마음이 일어나고 머물고 소멸함은 동등하다’라고 했는데
모든 중생들의 마음은 평등하게 일어나고 평등하게 머물고 평등하게 소멸하니 때에 따라 다소(多少)가 없다. 왜냐 하면 찰나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크고 작음이 없으니 색이 아니기 때문이다. 4대(大)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몸은 크고 작은 차별이 있다. 몸이 가벼운 사람은 빠르고 몸이 무거운 사람은 느리다.
그러나 마음은 다양하게 전개되는 까닭에 각(覺) 역시 회오리처럼 움직이니 마음이 한 대상에 멈추게 되면 생각이 편안하고 고요해진다.
‘탐욕 등과 상응하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역시 그렇다’라고 한 것은
만약 마음에 탐욕이 있을 경우나 탐욕이 없을 경우 그 일체의 마음은 함께 일어나고 함께 머물고 함께 소멸하니, 찰나적이기 때문이다.
탐심은 부작업(不作業)인 까닭에 나타나는 것이 무겁고
무탐심은 작업(作業)인 까닭에 나타나는 마음이 가볍다.
나아가 유해탈ㆍ무해탈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아야 하는 것이다.
유탐ㆍ무탐은 계품(界品)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문】이미 유심분(有心分)의 일체 중생심이 함께 일어나고 함께 머물고 함께 소멸함을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무심분(無心分)은 어떠한가? 그것은 동등한 것인가?
이른바 무상정(無想定)ㆍ멸진정(滅盡定)에 든다면 이 마음은 멸하고 나머지 중생심이 일어난다. 또한 정에서 깨어나면 이 마음은 생하고 다른 중생심은 멸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평등하겠는가?
【답】이에 유심(有心)을 설함은 그러하며, 무심(無心)도 또한 마찬가지임을 알아야 한다.
이른바 무상삼매(無想三昧)나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간다면 그에게 나머지 중생심이 일어나며, 이 최초의 삼매의[初正受]의 찰나 역시 일어난다.
정으로부터 깨어날 때는 나머지 중생심은 멸하고 그 뒤에 삼매도 역시 소멸한다.
만약 정에 머물고 있을 때는 나머지 중생심 역시 일어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 이 삼매 역시 일어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
다시 어떤 이는 말하기를
“모든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같다고 할 수는 없으니, 혹은 마음이 일어나기만 하고 소멸하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는데, 이 관계는 사구(四句) 논리로 설명된다.
첫 번째는 무상ㆍ멸진삼매에서 일어나는 경우이다.
두 번째는 삼매에 들어갔을 때이며,
세 번째는 유심자(有心者)이며,
네 번째는 삼매에 머물 때이다.
여기에 작고 큰 구별은 없나니, 마음은 형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마음이 일어나고 멸하는 일을 설명했으니,
지금부터 마음의 내용을 광설하겠다.
욕계 안에 네 가지가 있으며
색ㆍ무색계에는 각기 세 가지이다.
또한 학(學)ㆍ무학의 마음이니
이 차제생(次第生)을 설명해야 하리라.
‘욕계 안의 네 가지가 있으며 색ㆍ무색계에 각기 세 가지이다.
또한 학ㆍ무학의 마음이다’라고 한 것은 열두 가지의 마음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즉 욕계에 연계된 선심ㆍ불선심ㆍ은몰무기심ㆍ불은몰무기심과 색계ㆍ무색계에 연계된 선심ㆍ은몰무기심ㆍ불은몰무기심 및 학심(學心)ㆍ무학심이 그것이다.
[열두 가지 마음]
【문】열두 가지 마음은 어떻게 세워지는가?
【답】연계되고 연계되지 아니함과 계와 종류에 따라 세워진다.
연계되고 연계되지 아니한 측면에서 두 가지 마음이 세워지는데,
연계된 마음은 계의 종류로 나누어 구별하면 열 가지 마음이 세워지고,
연계되지 아니한 마음은 종류로 구별하면 두 가지 마음이 세워진다.
그런 까닭에 열두 가지 마음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 차제생(次第生)을 설명해야 하리라’라고 한 것은 이 모든 마음이 하나하나 차례로 생겨남을 지금부터 마땅히 설명하겠다는 것이다..
욕계의 선(善)은 아홉 가지를 낳고
또한 여덟 가지를 따라 일어난다.
두 가지 오염은 네 가지를 일으키며
또한 열 가지 마음을 따라 생겨난다.
‘욕계의 선(善)은 아홉 가지를 낳는다’라고 한 것은
욕계의 선심이 차례로 아홉 가지 마음을 일으킴을 말한 것이다.
욕계에는 네 가지 마음이 있으며, 독자 적인 경지인 까닭이다.
색계에는 선심(善心)이 있으니, 곧 처음 방편으로 삼매에 들었을 때 그것이 수순하는 까닭이다.
이는 총체적으로 말한 것으로 색계의 모든 마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미래선(未來禪)에 해당되지 다른 마음은 아니다”라고 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미래선 및 초선에 해당한다”고 하거나 “중간선에 해당된다”고 하기도 한다.
구사(瞿沙) 존자는 말하기를
“제2선에 이르기까지도 여기에 해당된다. 가령 초월삼매의 경우 처음 초선을 좇아 일어나 제2선과 및 그에 부수된 경지를 뛰어넘어 제3선의 경지가 눈앞에 나타나듯이, 그 또한 이와 같다”라고 하였다.
색계에서는 오염심이니, 이른바 목숨을 받을 때에 해당한다.
하나의 선심으로써 목숨이 끝나면 또 다른 오염심이 상속되어 생겨나는 것이다.
무색계의 오염심 역시 이와 같다.
또한 학ㆍ무학의 마음이니, 그 역시 수순하는 까닭이다.
색계와 무색계의 불은몰무기심은 차례로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이 스스로의 경지를 결박하기 때문이다. 무색계의 선심도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데, 지극히 그 상(相)이 멀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여덟 가지를 따라 일어난다’고 한 것은 욕계의 선심도 여덟 가지 마음을 따라 차례로 생함을 말한 것이다.
욕계에는 네 가지 경지가 있으니 스스로의 경지인 까닭이다.
색계에는 선심및 오염심이 있다.
선심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오염심은 이른바 초선의 경지에서 번뇌에 시달림을 말한다. 곧 욕계의 선심에 방호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학ㆍ무학의 마음을 좇아 일어나 욕계의 선심이 눈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두 가지 오염된 것은 네 가지를 낳는다’라고 한 것은 욕계의 불선심 및 은몰무기심은 차례로 자기 경지의 네 가지 마음을 낳음을 말한 것이다.
높은 경지에서는 그렇지 않으니,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또한 열 가지 마음 따라 생견난다’라고 한 것은 그 욕계의 두 가지 오염심은 열 가지 마음을 좇아 차례로 생겨남을 말한 것이다.
자기 세계의 네 가지와 색계ㆍ무색계의 여섯 가지이니, 이른바 목숨을 받을 때이다.
무기의 다음으로 일곱을 낳고
또한 다섯 가지를 따라 생겨난다.
색계의 선(善)은 열한 가지이니
역시 아홉 마음을 좇아 생겨난다.
‘무기 다음으로 일곱을 낳는다’라고 한 것은 욕계의 불은몰무기심이 차례로 일곱 가지 마음을 일으킴을 말한 것이다.
자기 경계의 넷과 색계의 선(善), 말하자면 변화심이 차례로 생하는 것과 목숨을 받을 때의 불은몰무기심 및 무색계에서의 은몰무기심이 그것이다.
‘또한 다섯 가지를 좇아 생겨난다’라고 한 것은 욕계의 불은몰무기심은 다섯 가지 마음 따라 차례로 생겨남을 말한 것이다.
즉 자기 경계의 넷과 색계의 선심 다음으로 생겨나는 변화심이 그것이다.
‘색계의 선(善)은 열한 가지이다’라고 한 것은 색계의 선심이 차례로 열한 가지 마음을 낳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무색계의 불은몰무기심은 제외된다.
‘아홉 마음을 좇아 생겨난다’라고 했는데 색계의 선심은 아홉 가지 마음 을 따라 차례로 생겨난다.
그러나 욕계의 두 가지 오염심과 무색계의 불은몰 무기심은 제외된다.
색계의 오염심은 여섯이며
여덟 마음을 좇아 일어난다.
무기 다음으로 여섯을 낳으니
셋을 좇아 차례로 생겨난다.
‘색계의 오염심은 여섯이다’라고 한 것은 색계의 은몰무기심에 이어서 차례로 여섯 가지 마음을 낳음을 말한 것이다.
자기 경계의 셋과 욕계에 속하는 셋이 그것이다.
그러나 욕계의 불은몰무기심은 여기서 제외된다.
‘여덟 마음을 좇아 일어난다’라고 했는데 색계의 은몰무기심은 여덟 가지 마음을 따라 차례로 생긴다.
그러나 욕계의 두 가지 오염심과 두 가지 번뇌심은 제외된다.
‘무기 다음으로 여섯을 낳는다’라고 했는데 색계의 불은몰무기심에 이어서 차례로 여섯 가지 마음이 생겨남을 말한 것이다.
자기 경계의 셋과 욕계의 두 가지 오염심과 무색계의 오염심이 그것이다.
‘셋을 좇아 차례로 생겨난다’라고 한 것은 자기 경계의 세 가지 마음을 따라 차례로 생기는 것을 말한 것이다.
무색의 선(善)은 아홉을 낳고
또한 여섯 마음을 좇아 일어난다.
오염심은 일곱을 낳으니
그 역시 일곱을 좇아 생겨난다.
‘무색의 선(善)은 아홉을 낳는다’라고 했는데 무색계의 선심에 이어서 차례로 아홉 가지 마음을 낳는다.
그러나 욕계의 선심과 불은몰무기심 및 색계의 불은몰무기심은 제외된다.
‘또한 여섯 마음을 좇아 일어난다’라고 한 것은 무색계의 선심 역시 여섯 가지 마음을 좇아 차례로 생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자기 경계의 셋과 색계의 선심 및 두 가지 무루심이 그것이다.
‘오염심은 일곱을 낳는다’라고 했는데 무색계의 은몰심에 이어서 차례로일곱 가지 마음이 생겨난다.
자기 경계의 셋과 욕ㆍ색계의 선심과 오염심 및 욕계의 두 오염심이 그것이다.
‘그 역시 일곱을 좇아 생겨난다’라고 했는데, 무색계의 은몰무기심 역시 일곱 가지 마음 따라 차례로 생겨난다.
자기 경계의 셋과 욕ㆍ색계의 선심 및 불은몰무기심이 그것이다.
무기심은 여섯을 낳고
또한 셋을 좇아 일어난다.
학심은 다섯을 낳고
또한 네 마음을 좇아 일어난다.
‘무기심은 여섯을 낳는다’라고 한 것은 무색계의 불은몰무기심이 차례로 여섯 가지 마음을 낳음을 말한 것이다.
자기 경계의 셋과 아랫 세계의 오염된 세 가지가 그것이다.
‘또한 셋을 좇아 일어난다’라고 한 것은 무색계의 불은몰무기심은 자기 경계의 세 가지 마음을 좇아 차례로 생겨남을 말한 것이다. 다른 과보의 범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학심은 다섯 가지를 일으킨다’라고 했는데 학(學)의 마음에 이어서 차례로 다섯 가지 마음이 생겨난다. 즉 두 가지 무루심(無漏心)과 삼계의 선심이 그것이다.
이는 오염된 마음은 아니니, 본질이 서로 틀리기 때문이다.
또한 불은몰무기심도 아니니, 본질이 빠르고 민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네 마음을 좇아 일어난다’라고 한 것은 학심도 역시 네 가지 마음을 따라 차례로 생겨남을 말한 것이다.
곧 학심 및 삼계의 선심이 그것이다. 무학심은 이에 해당되지 않으니, 이는 원인이 되는 까닭이다.
또한 나머지도 해당하지 않으니, 이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무학의 마음은 넷을 낳고
또한 다섯 마음을 좇아 생겨난다.
이미 열두 마음을 설명했으니
마땅히 스무 가지 마음을 설명하겠다.
‘무학의 마음은 넷을 낳는다’라고 한 것은 무학심에 이어서 차례로 네 가지 마음이 생겨남을 말한 것이다. 즉 무학심과 삼계의 선심이 그것이다.
학심은 해당되지 않으니, 이는 과보인 까닭이다.32)
또한 다른 마음도 여기에 해당되지 않으니, 이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또한 다섯 마음을 좇아 생겨난다’라고 했는데, 무학심은 다섯 가지 마음을 따라 차례로 생긴다.
즉 두 무루심(無漏心) 및 삼계의 선심이 그것이다.
‘이미 열두 가지 마음을 설명했으니 마땅히 스무 가지 마음 설명하겠다’라고 한 것은 이미 열두 가지 마음이 차례로 생기는 내용은 설명하였다는 것이다.
[스무 가지 마음]
이와 같은 열두 가지 마음을 다시 나누어 구별하면 스무 가지 마음이 되는데, 이제 마땅히 그것을 설명하겠다.
두 가지 선심과 두 가지 오염심과
업보로 생한 마음과 위의로 생한 마음과
공교심 및 여러 선정의 과보심이니
욕계 안에는 여덟 가지 마음이 있다.
욕계에는 여덟 가지 마음이 있다.
즉 방편에서 생기는 선심과, 태어나면서 얻은 선심과, 불선심 및 은몰무기심과,
불은몰무기의 네 종류이니, 이른바 보생ㆍ위의ㆍ공교ㆍ변화심이 그것이다.
불선과 공교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색계에 존재하고
선정의 과보와 위의를 떠난
나머지 넷은 무색계에 존재한다.
‘불선과 공교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색계에 존재하고’라고 한 것은 색계에는 여섯 가지 마음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곧, 불선심 및 공교심을 제외하니, 나머지는 앞의 설명과 같다.
‘선정의 과보와 위의를 떠난 나머지 넷은 무색계에 존재한다’라고 한 것은 무색계에는 네 가지 마음이 있음을 말한 것으로, 위의심과 변화심을 제외한다. 일에 얽힌 업이 없기 때문이다.
불선을 제외하니, 뉘우침 없고 부끄러움 없는 마음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무색계에서는 위의심이 제외되니, 가고 오는 일이 그 세계에 해당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변화심을 제외하니, 각지(覺支)에 속하는 선(禪)이 무색계에는 해당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학과 무학의 마음
이것이 스무 가지 마음이며
그 마음 차례로 생기는 일은
각기 내용 따라 설명된다.
‘학과 무학의 마음 이것이 스무 가지 마음이다’라고 했는데, 학ㆍ무학의 마음 및 앞에서 말한 열여덟 종류의 마음을 스무 가지로 삼는 것이다.
연계된 마음과 연계되지 아니한 마음과 세계와 종류로 나누어 구별한 것으로,
이 차별에 대해서는 앞에서 총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선심과 불은몰무기심을 여기서도 그 종류로써 분별하였다.
[마음이 전전해서 차례로 생기는 과정]
‘그 마음 차례로 생기는 일은 각기 내용 따라 설명된다’라고 했는데,
이 마음이 전전해서 차례로 생기는 과정을 지금부터 설명하겠다.
욕계의 방편은 열을 낳고
또한 여덟 마음을 좇아 일어난다.
생득(生得) 다음으로 아홉을 낳고
열한 가지를 좇아 생겨난다.
‘욕계의 방편은 열을 낳는다’라고 했는데 욕계에서 방편으로 얻는 선심은 차례로 열 가지 마음을 일으킨다. 먼저 자기경계의 일곱 마음으로, 변화심을 제외한다.
그것은 선정에 이어서 차례로 생하는 까닭이다. 또한 색계의 방편선 심 및 학ㆍ무학심이 그것이다.
‘여덟 마음을 좇아 일어난다’라고 했는데 그 욕계에서 방편으로 얻는 선심은 여덟 가지 마음 따라 차례로 생긴다.
즉 자기 경계의 두 가지 선심과 두 가지 오염심 및 색계의 방편으로 얻는 선심과 오염심 및 학ㆍ무학의 마음이 그것이다.
‘생득(生得) 다음으로 아홉을 낳는다’라고 했는데 욕계에서 태어나면서 얻는 선심은 차례로 아홉 가지 마음을 일으킨다.
즉 변화심을 제외한 자기 경계의 일곱과 색계와 무색계의 오염심이 그것이다.
‘열한 가지를 좇아 생겨난다’라고 했는데 욕계에 태어나면서 얻는 선심은 열한 가지 마음 따라 차례로 생긴다.
곧, 앞에서 설명했듯이 자기 경계의 일곱과 색계에서 방편으로 얻는 선심과 오염심, 그리고 학ㆍ무학의 마음이 그것이다.
두 가지 오염심은 일곱을 낳고
또한 열 넷을 좇아 일어난다.
보생과 위의는 여덟이니
이 역시 일곱을 좇아 생겨난다.
‘두 가지 오염심은 일곱을 낳는다’라고 했는데 욕계의 불선 및 은몰무기심이은 차례로 자기경계의 일곱 마음을 낳는다.
변화심을 제외한다.
‘또한 열 넷을 좇아 일어난다’라고 했는데 이 두 가지 오염된 마음은 열네 가지의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생긴다.
곧, 자기경계에 있어서 변화심을 제외한 일곱과 색계에 있어서 방편선심 및 변화심을 제외한 네 종류 및 무색계에 있어서 방편선심을 제외한 셋이 그것이다.
‘보생과 위의는 여덟이다’라고 했는데 욕계에서 과보로 생기거나 위의에서 생기는 마음은 차례로 여덟 가지 마음을 일으킨다.
곧 자기 경계에 있어서방편선심 및 변화심을 제외한 여섯과 색ㆍ무색계의 오염심이 그것이다.
‘이 역시 일곱을 좇아 생겨난다’라고 한 것은 이 욕계의 과보로 생기는 마음과 위의심도 역시 자기경계에 있어서 방편선심 및 변화심을 제외한 일곱 가지 마음을 좇아 차례로 생겨남을 말한 것이다.
공교심(工巧心)은 여섯을 낳고
또한 일곱을 좇아 일어난다.
변화심은 둘을 낳으니
역시 둘을 좇아 생겨난다.
‘공교심이 여섯을 낳는다’라고 한 것은 욕계에서 공교심은 차례로 자기 경계의 여섯 마음을 낳음을 말한 것이다.
방편선심과 변화심을 제외한다.
‘또한 일곱을 좇아 일어난다’라고 한 것은 그 역시 자기경계의 일곱 마음을 좇아 차례로 생겨남을 말한 것이다.
‘변화심은 둘을 낳는다’라고 했는데 욕계의 변화로 얻는 마음은 차례로 두 가지 마음을 일으킨다. 즉 욕계의 변화심 및 색계에서 방편선심이 그것이다.
‘곧 둘을 좇아 생겨난다’라고 한 것은 역시 이 두 마음 따라 차례로 생기는 것을 말한 것이다.
색계의 방편은 열둘이니
이 역시 열 가지를 좇아 일어난다.
생득(生得) 다음에는 여덟을 낳으니
또한 다섯 마음을 좇아 생겨난다.
‘색계의 방편은 열둘이다’라고 했는데, 색계에서 방편으로 얻는 선한 마음은 차례로 열두 가지 마음을 일으킨다.
자기경계에 속하는 여섯 가지와 욕계에서의 방편선심ㆍ생득선심ㆍ변화심의 셋과 무색계의 방편선심 및 학ㆍ무학의 마음이 그것이다.
‘이 역시 열 가지를 좇아 일어난다’라고 한 것은 색계에서 방편으로 얻는 선심도 열 가지 마음 따라 차례로 일어남을 말한 것이다.
곧, 자기경계에 있어서 위의 및 보생을 제외한 넷과 욕계에 있어서 방편선심 및 변화심을 제외한 둘과 학ㆍ무학의 마음이 그것이다.
‘생득 다음에는 여덟을 낳는다’라고 했는데 색계의 생득선심은 차례로 여덟 가지 마음을 일으킨다.
곧, 자기경계에 있어서 변화심을 제외한 둘과 무색계에 있어서 변화심을 제외한 다섯과 욕계의 두 오염심33)과 무색계의 오염심이 그것이다.
‘또한 다섯 마음을 좇아 생겨난다’라고 한 것은 색계에 태어나면서 얻는 선심은 색계의 다섯 가지 마음 따라 차례로 생기는 것을 말한 것이다.
변화심을 제외한다.
색계의 오염심은 아홉을 낳고
또한 열한 가지를 좇아 일어난다.
위의심은 일곱을 낳고
다섯을 좇아 차례로 생겨난다.
‘색계의 오염심은 아홉을 낳는다’라고 했는데 색계의 오염된 마음은 차례로 아홉 가지 마음을 일으킨다.
곧, 자기 경계에 있어서 변화심을 제외한 다섯과 욕계에 있어서 넷이니, 두 가지 선심과 두 가지 오염심이 그것이다.
‘또한 열한 가지를 좇아 일어난다’라고 했는데 색계의 오염심은 열한 가지 마음 따라 차례로 생긴다.
곧, 변화심을 제외한 자기경계의 다섯 가지와 욕계에서의 생득선ㆍ위의ㆍ보생의 셋과 무색계에 있어서 방편심을 제외한 셋이 그것이다.
‘위의심은 일곱을 낳는다’라고 했는데 색계에서 위의심은 차례로 일곱 가지 마음을 일으킨다.
곧, 자기경계에 있어서 방편심 및 변화심을 제외한 넷과 욕계의 두 오염심과 무색계의 오염심이 그것이다.
‘다섯을 좇아 차례로 생긴다’라고 한 것은 색계에서의 위의심은 자기경계의 다섯 가지 마음을 좇아 차례로 생기는 것을 말한 것이다.
색계에서 과보로 생기는 마음은
또한 위의심을 설함과 같음을 알아야 하며.
그 모든 선정의 과보는
욕계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색계에서 과보로 생기는 마음은 또한 위의심을 설함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라고 했는데,
색계에서 업보로 생기는 마음은 차례로 일곱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또한 다섯 가지 마음 따라 일어나는 것이 위의심과 같이 설명된다.
‘그 모든 선정의 과보는 욕계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라고 했는데, 색계에서 변화로 얻는 마음은 차례로 두 가지 마음을 일으킨다.
즉 색계의 선심과 변화로 얻는 마음이 그것으로, 이것은 두 마음을 좇아 차례로 생겨난다.
무색의 처음은 일곱을 낳고
이것 역시 여섯을 좇아 생겨난다.
생득(生得)도 또한 일곱을 낳으니
넷을 좇아 일어남을 알아야 한다.
‘무색의 처음은 일곱을 낳는다’라고 했는데, 무색계에서 방편으로 얻는 선심은 차례로 일곱 가지 마음을 일으킨다.
즉 자기경계의 넷과 색계의 방편선심 및 학ㆍ무학의 마음이 그것이다.
‘이것 역시 여섯을 좇아 생겨난다’라고 했는데. 무색계에서 방편으로 얻는 선심은 여섯 가지 마음 따라 차례로 생긴다.
즉 자기경계에 있어서 업보로 생기는 마음을 제외한 셋과 색계에서 방편으로 얻는 선심 및 학ㆍ무학의 마음이 그것이다.
‘생득도 또한 일곱을 낳는다’라고 했는데, 무색계에 태어나면서 얻는 선심도 차례로 일곱 가지 마음을 낳음을 말한 것이다.
즉 자기경계의 넷과 아랫 세계에 속하는 세 가지 오염심이 그것이다.
‘넷을 좇아 일어남을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자기경계의 네 가지 마음 을 따라 차례로 생겨남을 말한 것이다.
오염심은 여덟 가지 마음을 낳고
이는 열 가지 마음 따라 일어나며
과보로 얻는 마음은 여섯을 낳으니
이것 역시 넷을 좇아 생겨난다.
‘오염심은 여덟 가지 마음을 낳는다’라고 했는데, 무색계의 오염된 마음은 차례로 여덟 가지 마음을 일으킨다.
곧, 자기경계의 넷과 욕계의 두 가지 오염과 색계의 방편선심 및 오염심이 그것이다.
‘이는 열 가지 마음 따라 일어난다’라고 한 것은 무색계의 오염된 마음은 열 가지 마음 따라 차례로 생기는 것을 말한 것이다.
곧, 자기 경계의 넷과 욕계ㆍ색계에 있어서의 각각의 생득선ㆍ위의ㆍ보생의 셋이 그것이다.
‘과보로 얻는 마음은 여섯을 낳는다’라고 한 것은 무색계에서 과보로 생기는 마음은 차례로 여섯 가지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곧, 자기경계에 있어서 방편선심을 제외한 셋과 아래 경지의 세 가지 오염심이 그것이다.
‘이것 역시 넷을 좇아 생겨난다’라고 한 것은 그 업보로 얻는 마음도 무색계의 네 가지 마음 따라 차례로 생겨남을 말한 것이다.
학심(學心) 다음으로 여섯을 낳고
넷을 좇아 차례로 생겨난다.
무학심은 다섯을 낳으니
이 역시 다섯을 좇아 생겨난다.
‘학심(學心) 다음으로 여섯을 낳는다’라고 했는데 학의 경지에서는 차례로 여섯 가지 마음이 생긴다.
즉 삼계에서 방편으로 얻는 선심과 욕계에 태어나면서 얻는 선심과
[욕계에서 태어나면서 얻는 마음은 강하고 예리하나 다른 두 세계에서 얻는 것은 약하고 둔하다]
학ㆍ무학의 마음이 그것이다.
‘넷을 좇아 차례로 생겨난다’라고 했는데 학의 경지에서 생기는 마음은 네 가지 마음 따라 차례로 생긴다.
즉 삼계에서 방편으로 얻는 선심과 학의 경지에서 얻는 마음이 그것이다.
‘무학심은 다섯을 낳는다’라고 했는데 무학의 경지에서는 차례로 다섯 가지 마음이 생긴다.
즉 삼계에서 방편으로 얻는 선심과 욕계에서 태어나면서 얻는 선심 및 무학의 경지의 마음이 그것이다.
‘이 역시 다섯을 좇아 생겨난다’라고 한 것은 이 마음도 또한 삼계에서 방편으로 얻는 선심과 학ㆍ무학의 마음을 말한 것이다.
【문】왜 방편으로 얻는 선심은 차례로 위의심ㆍ공교심ㆍ과보로 생기는 마음을 낳는데, 이 여러 마음은 어째서 차례로 방편선심을 생겨나지 않게 하는가?
【답】위의 또는 공교심은 스스로 원해서 만드는 마음인 까닭이다.
보생심은 약하고 뒤지는 마음인 까닭이며, 작용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위의심은 원해서 위의를 익히기 때문에 차례로 방편선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나오는 마음은 부동의 방편인 까닭에 방편선심이 차례로 위의를 낳는 것이다.
공교심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
과보로 생기는 마음은 약하고 뒤지고 자체로 작용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또한 본업(本業)으로 심어진 바이기 때문이니, 그런 까닭에 그 마음에 들어간 사람은 그 마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흔들리지 아니하는 방편인 까닭에 방편으로 얻는 선심을 좇아 차례로 생겨나는 것이다.
만약 “오염된 마음은 즐겁게 경계에 집착하게 되고 또 뒤지고 약한 마음이기 때문에 응당히 오염된 마음의 경계를 따라서 차례로 방편으로 얻는 선심이 생겨날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경계가 다르지 않은 까닭이고 허물을 보는 까닭이며 약하고 뒤진 마음이 아닌 까닭이다.
그런 까닭에 그 경계에 대해서 허물과 악이 전개되면 곧 그것은 공덕을 일으킨다. 그런 까닭에 그 경계는 다르지 않다.
그 행에 있어서 번뇌에 시달려 싫어지고 그 경계에서 긴긴 밤 습번뇌를 일으킴을 관찰하는 까닭에 염오심은 약하고 뒤진 마음이 아니다.
때문에 그것도 응당 차례로 방편선심을 일으켜야 하는 욕계에서 태어나면서 얻는 선심은 비록 빠르고 민첩한 마음이기는 하지만 방편으로 얻는 마음이 아니다.
빠르고 민첩한 것이기 때문에 그 색계의 방편선심 및 학ㆍ무학심을 따라 차례로 생겨나지는 않는다.
방편으로 얻는 마음이 아닌 까닭에 차례로 그 여러 마음을 낳을 수 없는 것이다.
색계에서 태어나면서 얻는 선심은 빠르고 민첩한 마음도 아니고 또한 방편으로 얻는 마음도 아니다.
빠르고 민첩한 마음이 아닌 까닭에 학ㆍ무학의 마음이나 무색계에서 방편으로 얻는 선심을 따라 차례로 생기지 않는다.
또한 방편으로 얻는 마음이 아닌 까닭에 차례로 그 여러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무색계 역시 이와 같다.
색계의 염오심은 차례로 욕계에서 태어나면서 얻는 선심을 일으킨다. 빠르고 민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색계의 염오심은 차례로 색계에서 태어나면서 얻는 선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빠르고 민첩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