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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18권
5. 변업품(辯業品)①
5.1. 업(業)[1]
1) 업론 총설
① 업의 본질과 종류
여기서 악업을 짓고도 힐난을 회피하려는 어떤 부류의 논자[隨順造惡怯難論者]들은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앞에서 진술한 바와 같은 내외의 온갖 현상[事]들의 다양한 차별은 업(業)을 원인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세간을 현견(現見)하건대, 과실이나 돌[石] 등 사물의 여러 다양한 차별에는 달리 원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하나의 종자로부터 다수의 과실이 생겨나기도 할뿐더러 종자가 선행하는 일이 없었음에도 돌 등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1)
바로 이러한 그들의 주장을 대치하기 위해 [유부의] 종의를 세워 말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세간 차별은 업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사(思)와 ‘사’의 소작(所作)이 바로 그것이니
‘사’는 바로 의업(意業)이며
‘사’의 소작이란 말하자면 신업과 어업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결정코 유정의 정업(淨業)과 부정업(不淨業)으로 말미암아 내외의 온갖 현상[事]은 여러 가지 종류로서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그러함을 알게 된 것인가?
업의 작용을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간에서 바로 관찰하건대,
좋거나[愛] 좋지 않은[非愛] 결과상의 차별은 결정코 업의 작용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
농부들이 심고 수확하는 등의 부지런한 정업(正業, 농사일)에 의해 참으로 애호할 만한 결과가 생겨나며,
어리석은 온갖 이들이 도둑질 등의 업을 행함으로써 바로 죽거나 속박되는 등의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과 같다.
또한 처음 모태에 처하여서는 현재의 원인에 의하지 않고서도 즐거움과 괴로움이 존재하는 경우를 관찰할 수 있거니와, 현재는 요컨대 업이 선행하여야 비로소 능히 좋거나 좋지 않은 결과를 견인하여 획득하는 것임을 이미 관찰하였으니, 이전의 즐거움과 괴로움에는 필시 업이 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내외의 온갖 현상의 여러 다양한 차별들은 원인 없이 자연적으로(저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간의] 차별이 업에 의한 것이라면, 그러한 업의 본질[體]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심소(心所)인 사(思)와 ‘사’의 소작(所作)이다.
그래서 계경에서도 설하기를,
“두 가지 종류의 업이 있으니,
첫째는 사업(思業)이며, 둘째는 사이업(思已業)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2)
여기서 사이업이란 이를테면 사(思)의 소작(所作)을 말하니,3) 이는 바로 ‘사’에 의해 등기(等起)된 것이라는 뜻이다.
즉 ‘사’는 바로 의업(意業)이고, ‘사’의 소작은 바로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으로,
바로 이와 같은 두 업을 세존께서는 계경 중에서 신업과 어업과 의업의 세 가지로 설하였던 것이니, 이와 같은 세 업은 그 순서에 따라 소의(所依)ㆍ자성(自性)ㆍ등기(等起)에 근거하여 건립된 것이다.4)
여기서 의업의 자성에 대해서는 이미 논설하였다.
즉 그것은 바로 ‘사(思)’이니, ‘사’에 대해서는 앞(본론 제5권)에서 분별한 바와 같다.
② 신업과 어업의 자성
그렇다면 신업과 어업의 자성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러한 신ㆍ어의 두 업은
다 같이 표(表)ㆍ무표(無表)를 자성으로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와 같이 설한 온갖 업 중에서 신업과 어업은 다 같이 표업과 무표업을 자성으로 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5)
그래서 본론(本論)에서도 말하기를,
“무엇을 일러 신업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소의신에 존재하는 표업과 무표업이다.
무엇을 일러 어업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언어상에 존재하는 표업과 무표업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6)
그렇다면 다시 어떠한 연유에서 오로지 신ㆍ어업만이 표업과 무표업을 자성으로 하고, 의업은 그렇지 않은 것인가?
의업 중에는 그러한 특성[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능히 [외부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표업’이라 이름한 것이니, 자신의 마음을 [외부로] 나타내어 다른 이로 하여금 알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思)에는 이러한 일이 없기 때문에 표업이라 이름하지 않은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다만
‘신ㆍ어의 두 업은 능히 표업이 될 수 있지만, 의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 것일 뿐이다.
나아가 의업은 [외부로] 나타나는 일[表]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는] 무표업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즉 ‘무표’라는 명칭은 [‘표’와] 서로 유사함을 부정하는 말이기 때문에 이는 바로 표업의 종류이다.7) 그렇지만 능히 [외부로] 나타나지 않기에 ‘무표’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순정리론』 중에서 별도로 해석한 것에는 이치가 결여되었으니, 상속의 소의(所依)가 되는 마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8)
2) 신(身)ㆍ어(語)의 표업
[그렇다면] 신체적 언어적 행동[動]을 표업이라 한 것인가?9)
그렇지 않다.
어째서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신표업은 개별적인 신체의 형태[形]로 인정될 뿐
‘행동’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니, 유위법은
유찰나(有刹那)로서 멸진하기 때문이며
마땅히 원인 없이 멸무(滅無)하기 때문이다.
[원인이 있다면] 생인은 멸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결정코 [소멸의 객관적] 원인은 존재하지 않으니
땅 등[과 화합하더라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10)
또한 요별되는 상(相)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다른 것(현색)에 근거하지 않고서도 상을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상위인(相違因)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가] 멸하더라도 [다른 하나는] 멸하지 않기 때문에
별도의 극미가 존재한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색처는] 두 가지 감관에 의해 취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긴 것 등)은 결정코 의식의 경계이기 때문에
견고함(堅:촉경) 등을 분별하고 나서
비로소 ‘길다’는 등의 지식이 생겨나며
한 면으로 다수의 촉이 생겨날 때
긴 것 등이 존재함을 추리하여 알 수 있으며
다수의 촉취(觸聚) 중에
결정코 긴 것 등이 존재하기 때문에
[불의 경우도] 동일하기 때문에, [현색에도] 동일한 허물이 적용되기 때문에
[신표업은 개별적인 신체의 형태를 본질로 한다고 인정하며]
어표업은 말소리[言聲]를 본질로 한다고 인정한다.11)
신표업은 개별적인 ‘신체의 형태[形]’로 인정될 뿐
‘행동’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니
모든 유위법은
유찰나(有刹那)로서 멸진하기 때문이며
마땅히 원인 없이 멸무(滅無)하기 때문으로,
[원인이 있다면] 생인은 능히 멸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형태’ 역시 실유가 아니니
[그럴 경우 색처는] 두 근이 취해야 하기 때문이며
[형색]극미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표업은 ‘말소리[言聲]’를 본질로 한다고 인정한다.
① 신표업(身表業)
논하여 말하겠다.
모발(毛髮) 등의 [색]취(色聚)를 총칭하여 ‘신(身,즉 몸)’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신’ 중에 마음에 의해 일어난 4대종의 결과인 형색(形色)의 차별이 존재하여 능히 마음을 표시(表示)하는(나타내는) 경우, 이를 일컬어 ‘신표(身表)’라고 한다.
그리고 사(思) 자체가 비록 찰나에 멸할지라도 그것을 의업으로 설정하여도 이치에 어긋남이 없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신체상의 형태[身形]를 설정하여 ‘신업’이라 하였다.
즉 현색(顯色)이나 대종 등을 신표업으로 설정하지 않는 것은, 표[업]은 3성(性)과 통하지만 이러한 법들은 모두 오로지 무기성(無記性)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현색 등은 작자(作者) 즉 행위자의 욕락(欲樂)에 따라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2)
또한 [이러한 법들은] 마음을 떠나서도 역시 생겨날 수 있기 때문으로, 표업은 반드시 마음에 근거하여야 비로소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대종 등이 한 찰나의 마음[一心]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면, [대종] 자체에 차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능생]법(즉 마음)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찰나의 마음에 의해 생겨난 것에 차별이 있다고 해서 [한 찰나의 마음] 자체에도 차별성이 성취된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신ㆍ어의 두 업에 선과 불선이 존재함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계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염오한 안(眼)과 이(耳)에 의해 알려진 온갖 법이 존재한다”고 말한 바와 같으니,
“저 구수(具壽)에게는 청정한 ‘안’과 ‘이’에 의해 알려진 온갖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라고 설한 것 역시 이와 같은 경우이다.
다시 4대종 등이 오로지 무기성이라고 함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역시 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혹 어떤 종류의 몸[身]은 10년 동안 머무는 경우가 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한 바와 같으며,
“심(心)ㆍ의(意)ㆍ식(識)은 [찰나찰나에 걸쳐] 다른 것이 소멸하고 다른 것이 생겨난다”고 설한 바와 같다.13)
따라서 대종 등은 오로지 무기성인 것이다.
①-1 정량부(正量部)의 행동설(行動說) 비판
비록 제행(諸行)의 법이 인과 무간(無間)으로 다른 방소에 생겨날 때 세속(世俗)에 근거하여 ‘행동’이라 말하고, 역시 또한 ‘표업’이라 이름할지라도,14) 신표업은 필시 승의[의 법]이다. 즉 일체의 행은 실로 행동(行動)을 갖지 않으니, 유위법은 유찰나(有刹那) 즉 찰나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제행 자체는 다른 방소로 전지(轉至)하지 않으며 바로 소멸하는 것으로, 유위법은 이러한 처소에서 생겨나자마자 바로 이러한 처소에서 환멸(還滅)하여 [과거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앞서 ‘유위법은 유찰나(有刹那)이기 때문에 제행은 실로 행동(行動)을 갖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찰나란 무엇을 말한 것인가?
이를테면 극소의 시간[時]으로, 이는 더 이상 전후(前後)로 분석(分析)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시간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유위제법의]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분위(分位,상태)가 동일하지 않은 것으로,15) 이에 따라 자꾸자꾸(찰나찰나) 제행의 차별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하니, 여기서는 극소인 제행의 분위를 일컬어 ‘찰나’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와 같이 ‘시간의 극소[極促]를 일컬어 찰나라고 이름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여기서 찰나는 다만 제법이 작용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그것은 오로지 현재이다. 즉 현재법은 [찰나의] 분량만큼 머물기 때문에 ‘유찰나’라고 이름한 것으로, 마치 [월자(月子, 여인들의 머리에 드리우는 가발)를 쓴 이를 일컬어] ‘유월자’라고 하는 것과 같다.
혹은 능히 괴멸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찰나’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는 바로 능히 원인이 되어 제법을 멸한다는 뜻이다. 즉 무상(無常)의 상(相,유위 4상 중 멸상)은 능히 제법을 멸하니, 이러한 상과 구행(俱行)하는 법을 ‘유찰나’라고 이름하였다.16)
다시 ‘모든 유위법은 다 찰나에 소멸하여 필시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모든 유위법은 [생겨난] 이후 반드시 멸진[盡]하기 때문이다.17)
그런데 현재 존재하는 법의 소멸은 객관의 원인[客因]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18) [소멸이] 이미 객관의 원인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생겨나자마자 바로 소멸한다.
만약 [법이] 생겨나는 순간[初位] 바로 소멸하지 않는다면, 다음 순간에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으로, 다음 순간의 법과 처음 생겨나는 순간의 법은 [소멸의] 주체적 원인[主因, 즉 滅相]이 동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겨난] 이후에 멸진하는 것을 이미 관찰하였으니, 그 이전에도 찰나찰나에 걸쳐 소멸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으니, [객관적인 소멸의 원인을] 세간에서 바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세간에서 바로 관찰하건대 땔감 등이 먼저 존재하며, 그 후에 그것이 불이라고 하는 객관의 원인과 화합할 때, 바로 멸무(滅無)에 이르러 다시는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인식수단[量]도 결정코 현량(現量,직접지각)을 뛰어넘지 못한다. (다시 말해 현량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 따라서 제법의 소멸은 다 객관의 원인을 근거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어찌 요령소리나 등불의 경우와 같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그러한 요령소리나 등불은 비록 손이나 바람을 떠나서도 (다시 말해 손이나 바람이라는 객관의 원인에 근거하지 않고서도) 찰나찰나에 걸쳐 주체적인 원인으로 말미암아 소멸하며, 손이나 바람과 화합하여 그 밖의 다른 법(후 찰나의 소리와 등불)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게 될 때 그 후의 소리와 등불은 존재하지 않아 다시는 취할 수 없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땔감 등도 주체적인 소멸의 원인(즉 멸상)에 의해 찰나찰나 소멸하는 것으로, 그 후 불과의 화합도 바로 소멸한 상태여서 달리 [소멸의] 원인이 되지 못하지만, 후 찰나의 그것(땔감 등)을 [더 이상] 생겨나지 않게 함으로써 다시는 취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19)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소멸의] 뜻은 비량(比量,추리)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지 현량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비량에 [의해 성취된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생(生)’과 마찬가지로 [객관의] 원인이 없이 [멸하여] 없어지기[無] 때문이다.20)
즉 유위법으로서 주객의 두 원인에 근거하지 않고 생을 획득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으니, 이를테면 갈랄람(羯剌藍)ㆍ싹ㆍ담장ㆍ식(識) 따위는 반드시 정혈(精血)ㆍ물ㆍ흙ㆍ근(根) 등의 외적인 자조(資助)를 조건[緣]으로 하며, 그런 연후에 비로소 생겨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객관의 원인(예컨대 불)을 근거로 하여 땔감 등이 소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유위법은 마땅히 그것이 생겨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객관의 원인에 근거한 연후에 비로소 소멸될 수 있다고 해야 한다.
그렇지만 세간을 현견하건대, 지각[覺]이나 불꽃, 음성은 객관의 원인에 근거하지 않고서 주체적 원인에 의해 소멸한다.
따라서 일체 유위행의 소멸은 다 객관의 원인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모든 유위법은 생겨나자마자 바로 소멸하는 것으로, 소멸의 원인(즉 멸상)과 항상 화합하고 있기 때문에 찰나멸의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만약 땔감 등의 소멸이 불과의 화합을 원인으로 삼는다고 한다면, 숙변(熟變)이 생겨나는 중에서도 하(下)ㆍ중(中)ㆍ상(上)이 있을 것이므로 응당 마땅히 생기의 원인이 바로 소멸의 원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21)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를테면 불과 화합함으로 말미암아 땔감 등에 숙변이 생겨나게 되었을 경우, 중숙(中熟)이 생겨날 때 하숙(下熟)은 소멸하고, 상숙(上熟)이 생겨날 때 중숙이 소멸할 것이며, 그럴 경우 생기의 원인이 마땅히 소멸의 원인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치상 그것(이를테면 하숙, 즉 황색의 멸)에 의하여 이것(중숙, 갈색의 생)이 있다거나, 혹은 다시 그것에 의해 이러한 법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등불의 생(生)은 정지되어 머무는 것[停住]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허물이 없다고 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등불 자체[體類]도 [이와] 다르지 않아 결정적인 이치도 없이 능히 생과 멸의 두 종류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설령 불꽃이 차별되어 생겨나는 중에 능생(能生)의 원인과 능멸(能滅)의 원인이 다르다는 사실을 헤아려 볼 수 있을지라도 땅[地]ㆍ물[水]ㆍ초(醋)ㆍ눈[雪]ㆍ해[日]와 화합하여 능히 땔감 등에 숙변을 낳게 하는 중에서는 어떻게 생ㆍ멸의 원인이 다르다는 사실을 계탁(計度)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제법의 소멸은 객관의 원인[客因]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제법은 다만 주체적인 원인[主因, 제법에 수반되는 멸상]으로 말미암아 소멸될 뿐이다.22)
이상과 같은 이치에 따라 찰나멸의 논증은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소의신에는 결정코 행동(行動)이 존재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①-2 경주(경량부)의 형색 가유론 비판
현색 이외 형색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23)
형색과 현색은 요별되는 상(相)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형색이 바로 현색을 본질로 하는 것이라면, [양자] 사이에는 요별되는 상의 차별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길다’와 ‘희다’는 두 가지 요별되는 상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현색 이외 형색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바로 보건대, 어떤 촉(觸)이 존재하여 동일한 감관에 의해 파악되더라도 요별되는 상이 다르기 때문에 그 자체에 차별이 있는 것으로, 이를테면 견고함[堅]과 차가움[冷], 혹은 따뜻함[煖]과 견고함의 경우가 그러하다.24)
이와 마찬가지로 ‘길다’와 ‘희다’는 요별이 비록 동일한 감관에 의해 파악될지라도 요별되는 상이 다르기 때문에 그 자체는 마땅히 차별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현색과 형색은 각기 그 체성이 다른 것이다.
또한 온갖 형색 자체는 필시 현색이 아니니, 현색에 근거하지 않고서도 능히 형색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다른 현색에 근거하지 않고서도 그 밖의 다른 현색의 지각이 생겨나는데, 이 두 가지 현색을 서로 비교하여 보면 각기 그 체성이 다르다. 그리고 이미 형색의 지각은 현색에 근거하지 않고 생겨나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현색과 형색은 결정코 별도의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25)
또한 상위인(相違因)이 다르기 때문에 그 자체 본질상의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다.26)
이것과 저것은 상위하는 두 가지 원인의 차별이 있으니, 여기서 ‘상위’란 필시 함께 하지 않는 것[不並]을 말하는 것으로, 상위는 바로 [불생의] 원인이다. 즉 [형색과 현색의] 두 법은 이러한 상위인이 다르기 때문에 법 자체도 마땅히 달라야 하는 것이다.
세간을 현견하건대 상위인이 다르면 법 자체도 다른 것으로, 이를테면 심(心)ㆍ수(受) 등은 동일한 종류의 법과 필시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다.27)
비록 현색과 형색이 동일한 [색]취(色聚)에 함께 존재할지라도 형색과 현색은 [각기] 괴멸하기도 하고 존재하기도 하는 경우를 관찰하기 때문에 상위인에 차별이 있으면 그 자체 본질상에도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상위인에 차별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각기] 존재하기도 하고 괴멸하기도 하는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형색과 현색은 체성이 다르다는 사실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심(心)ㆍ수(受) 등은 비록 차별되는 상위인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서로가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될 때 비로소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평등하게 존재하거나 괴멸한다.28)
또한 형색과 현색은 [하나가] 멸하더라도 [다른 하나는] 멸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가지 법 자체는 본질이 다르다는 이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세간을 현견하건대, 명칭은 다르지만 그 본질이 동일한 것으로서 하나가 멸하였음에도 다른 하나가 멸하지 않는 경우는 결정코 존재하지 않으니, 예컨대 화계(火界)를 역시 또한 따뜻함[煖]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화계가 멸하였음에도 따뜻함이 멸하지 않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현색과 형색은 동일한 색취이지만 하나가 멸하더라도 다른 하나는 멸하지 않는 경우가 있음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형색과 현색은 결정코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형색에는 현색극미와 같은 별도의 극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실유가 아니다”라고 한다면,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
즉 형색의 극미도 현색극미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실유가 아닌 것이 아니다. 예컨대 온갖 현색의 각각의 극미는 결코 단독으로 일어나는 일이 없다. 설혹 단독으로 일어나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에 안근에 의해 획득되지 않으며, 적집될 때 비로소 안근이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결정코 현색극미가 존재함을 아는 것이다.
형색극미도 역시 마땅히 이와 같다고 해야 하는데 어찌 유독 [이에 대해서만] 실유의 극미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유대색(有對色)이 적집된 모든 곳에서는 결정코 극미가 존재하여 획득될 수 있으니, 이미 취색이 차별되어 생겨난 것 중에서는, 마치 현색의 지각[顯覺]이 생겨나듯이 형색의 지각[形覺]이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능히 길이 등을 성취하는 종자와 같은 형색의 극미가 결정코 마땅히 별도로 존재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현색의 극미가 바로 길이 등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니, 가유[假,즉 형색]의 소의(즉 현색)가 괴멸하면 가유도 필시 괴멸해야 하기 때문이니, 가유는 실유를 자신의 본질[自體]로 삼기 때문이다.
만약 현색의 극미가 거친 현색이나 형색을 성취하는 것이라면, 동일한 취색 중에 존재하는 현색이 괴멸할 때, 형색도 역시 괴멸하고 말 것이니, 온갖 현색과 마찬가지로 소의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현색이 괴멸하더라도 형색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임을 관찰하였었다.
따라서 현색과 형색의 소의는 각기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으로, 소의가 이미 다르다면 그 자체의 본질[體]이 다르다는 이치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경주(經主)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힐난하여 말하였다.
“만약 개별적인 존재로서 형색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하나의 색은 두 가지 감관[根]에 의해 파악되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색취(色聚)에 존재하는 길이[長] 등의 차별은 안근이 보고 신근이 감촉하여야 능히 알 수 있게 된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형색이 실재한다면, 하나의 색이] 두 가지 감관에 의해 파악되는 허물을 범하게 되니, 이치상으로 색처는 두 가지 감관에 의해 파악되는 일이 없다.
그렇지만 촉(觸)에 근거하여 길이 등의 상(相)을 취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현색에 근거하여서도 능히 형색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29)
그러나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긴 것’ 등의 온갖 가유의 형색이 두 가지 감관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라고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으로, 그러한 ‘긴 것’ 등의 모든 가유의 법은 결정코 의식의 소연의 경계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가유는 오로지 의식의 소연의 경계가 될 뿐으로, 앞에서 이미 설한 바와 같다.
그리고 능히 긴 것 등을 성취하는, 종자와 같은 극미가 이와 같이 두루 퍼져있는 것을 설하여 [긴 것 등의] 형색이라 하였으니, 이는 바로 무분별인 안식에 의해 파악되는 것으로, 신근이 능히 이와 같은 형색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근에 근거하여 견고함이나 축축함 등을 요별하듯이, 길고 짧음 등을 요별하는 것은 이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즉 어두움 속에서도 견고함이나 축축함 등은 요별되지만, 바로 그러한 [어두운] 상태나 차후(次後)의 순간에는 길고 짧음 등의 상을 능히 요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먼저 견고함 등의 상을 분별하고 난 다음에 비로소 ‘긴 것’ 등이라는 비량에 의한 지식[比智]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길이 등의 형색은 신근의 경계가 아니다.
즉 한 방면으로 다수의 촉이 생겨나는 경우, 신근에 근거하여 이러한 촉을 분별하고 나서 비로소 능히 이와 같은 [긴] 모양으로 차별되는 형색을 추리 계탁[比度]하여 알게 되지만, 이는 촉과 함께 현행[俱行]한 안식에 의해 견인된 의식의 경계대상[意識所受]으로, 마치 불의 색을 보거나 꽃의 향기를 맡으면서 이와 함께 현행한 불의 감촉(즉 뜨거움)과 꽃의 색(예컨대 붉은 색)을 능히 기억하는 것과 같다.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다시 이와 같이 말하였다.
“존재하는 온갖 형태의 두 가지 법(이를테면 불과 연기, 혹은 꽃과 향기)은 결정코 서로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한 가지를 취함에 따라 그 밖의 다른 한 가지도 기억할 수 있지만, 촉과 형색은 결정코 서로 분리되지 않는 경우가 없는데 어떻게 촉을 취함에 따라 능히 형색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인가?”30)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지금 바로 보더라도 세간의 모든 촉취(觸聚) 중에 형색이 존재한다는 것은 결정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형색이 비록 촉에 결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한 방면으로 다수의 촉이 생겨나면 거기에는 결정코 ‘길다’는 형색[長色]이 존재하며, 일체의 처소에 두루 원만하게 생겨나면 거기에는 결정코 ‘둥글다’는 형색[圓色]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밖의 형색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등의 방식으로 상응하는 바에 따라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인용한 동유(同喩)는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것과 그것은 경우가 동일하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형색이 촉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따뜻함의 촉은 색에, 흰색은 향에 결정코 존재하지 않으니, 마땅히 그러한 불의 색이나 꽃의 향기에 의해 바로 불의 촉(따뜻함)과 꽃의 색을 능히 바로 기억[念]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형색은 현색과 다르며, 별도의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뜻을 능히 부정하거나 배척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현색의 경우에도 형색과 동일한 허물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눈이나 목구멍으로도 역시 연기(12현색의 하나)의 촉을 획득하며, 혹은 어느 때 코로써 그러한 연기의 냄새를 맡으면 이에 따라 연기 중의 현색을 요별하기도 하니, 역시 마땅히 현색도 두 감관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므로 실유의 존재가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것으로, 이는 곧 신근에 의해 온갖 촉을 요별하고 나서 ‘길다’는 등의 상을 안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신표는 바로 별도로 존재하는 형색으로, 그것이 실유라는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② 어표업(語表業)
어표업이란 무엇인가?
[어표업이란] 이를테면 말소리[言聲]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 소리를 떠나 능히 [업을] 나타낼 수 있는 별도의 말[語]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31)
그리고 [말소리는] 몸[身]이나 뜻[意]의 경우처럼 업을 떠나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어업이라는 명칭은 그 자체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기 때문이다.32)
이와 같이 두 가지 표업의 상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3) 무표업(無表業)
① 무표업의 실유 논증
무표업(無表業)의 상(相)에 대해서는 초품(初品)에서 이미 분별하였다.33) 결정코 마땅히 모든 무표색은 바로 실유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세 가지 색과 무루색과 [복업의] 증장을 설하고 있으며
스스로 짓지 않아도 [업도를 성취하는] 따위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계경에서
“색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즉 이 세 가지를 처(處)로 삼아 일체의 색을 포섭하는 것이니,
첫 번째의 색은 유견유대(有見有對)이며,
두 번째의 색은 무견유대(無見有對)이며,
세 번째의 색은 무견무대(無見無對)이다”라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34)
그럴 때 무표색을 제외하고 다시 그 어떤 법을 설하여 이 중의 세 번째인 무견무대색이라고 할 것인가?
이에 따라 무표색이 실유라는 이치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계경 중에서 무루색이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계경에서 설하기를,
“무루법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과거ㆍ미래ㆍ현재에 존재하는 온갖 색(色)에 대해 애에(愛恚, 탐욕과 진에를 말함)를 일으키지 않고, 내지는 식(識)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한 것을 말하니, 이것을 일러 무루법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35)
그럴 때 무표색을 제외하고서 어떠한 법을 일컬어 이 경 중에서 설한 온갖 무루색(즉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색)이라고 할 것인가?
즉 부처님께서는 경에서 열 가지 유색계(有色界, 5근과 5경)를 한결같이 유루성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무표색이 실유라는 이치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 ‘복업(福業)의 증장이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청정한 믿음을 지닌 선남자(善男子), 혹은 선여인(善女人)으로서 유의(有依)의 일곱 가지 복업의 일을 성취한 자이면, 걸어 다니거나, 혹은 머물러 있거나, 혹은 자고 있거나, 혹은 깨어있거나 항상 상속하여 복업이 점차로 증가하며, 복업이 계속하여 일어나게 된다. 무의(無依)의 복업의 일을 성취한 자도 역시 그러하다.”36)
그럴 때 무표업을 배제한다면, 그러한 마음과는 다른 마음(즉 염오심이나 무기심)이 일어나거나 혹은 무심일 때 어떠한 법에 근거하여 복업이 증장한다고 설할 것인가?
그렇다면 무의(無依) 즉 출세간의 복 중에는 이미 표업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 무표업이 존재한다고 하겠는가?
누가 이러한 [무의의] 복 중에 표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던가?
이치상으로도 응당 마땅히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떤 처소나 어떤 지방에 지금 바로 여래나 그의 제자가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환희심을 낳기 때문이다.
즉 ‘복이 항상 증장한다’고 함은, 그에게 필시 마땅히 증상의 신심(信心)이 존재하여 멀리서도 그곳을 향해 공경하며 예배 찬탄하여 복의 표업과 복의 무표를 일으켜 스스로를 장엄하여 친히 받들어 뵙기를 희망하기 때문으로, [바로 이러한] 무표에 근거하여 ‘복은 항상 증장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또한 스스로는 업을 짓지 않았지만 다만 다른 이를 보내어 짓게 하였을 경우, 만약 무표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교사자는] 마땅히 업도(業道)를 성취하지 않게 될 것이니,
남을 보내는 표업(즉 교사의 어표업)은 그러한 업도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이며,
이러한 업은 짓고자 하는 업[所作]을 능히 바로 지을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다른 이로 하여금] 짓고자 하는 업을 짓게 하더라도 이것의 성질은 [그것(어표업)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37)
그런데 일찍이 표업(어표)과 능히 그것을 일으킨 사(思)를 가행(加行)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후 교사자가 비록 선심을 일으켜 다수의 시간에 걸쳐 상속하였을지라도 불선이 상속에 획득되어 생겨나고, 심부름꾼이 해야 할 일을 성취하였을 때 [그것의] 세력 공능[力能]이 이와 같은 종류(불선)의 대종과 소조색을 인기하여 낳는 것으로, 이러한 소조색이 생겨나면 이것이 바로 근본업도(根本業道)이다.
즉 그러한 선행된 표업(어표)과 능히 그것을 일으킨 사(思)가 현재였을 때 원인이 되어 능히 지금의 [업도라는] 소조색을 취하여 등류과로 삼은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 바로 무표색을 일으킬 때 그것은 과거에 존재하며 능히 지금의 결과를 낳았으니, 오로지 그같이 먼저 일어난 사업(思業)은 좋지 않은 결과를 견인(牽引)하는 원인이 될 뿐이며, 그 후에 생겨난 업도가 능히 이를 도와 원만하게 하는 것[助滿]이 되어 인기된 결과로 하여금 결정적으로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무표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일은 마땅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만약 무표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8도지(道支)도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정려에 들 때에는 말 등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38)
이에 따라 무표색이 실유라는 이치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39)
② 무표의 이명(異名)―附 무표색이 업인 이유
이러한 ‘무표’라는 명칭은 무엇에 근거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원리(遠離)에 근거한 것이다.
즉 원리ㆍ비작(非作)ㆍ비조(非造)ㆍ무표는 하나의 실체를 다르게 이름한 것이다.
오로지 [악계 등의] 조작을 막기 때문에 ‘무표’라고 이름한 것이 아니라 [밖으로 표시되지 않기 때문에 ‘무표’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를테면 세간에서 [바라문이 아닌 이를] ‘비(非) 바라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세간에서는 다 같이 [그것들이] 별도의 하나의 사실[一類]에 근거한 것이라고 알고 있으니, 업을 원인으로 삼았기 때문으로, [그림 그리는 것을] 채화업(彩畵業)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즉 이러한 무표색 역시 업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니, 표업에 의해, 사업에 의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무표가 다 이러한 두 가지 힘에 의해 낳아지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40)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오로지 욕계에 계속(繫屬)되어 존재하는 무표 만이 강력한 두 원인에 의해 생겨날 수 있다. 즉 욕계의 사업은 등무간으로 인기[等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표와 어표업을 떠나서는 무표업을 발동시키는 공능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정려와 함께 일어나는 사업은 정려의 힘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에 표업과 관계하지 않고서도 무표업을 발동시키는 뛰어난 공능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무표[색]이 비록 조작의 상[作相, 즉 업)을 갖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조작(즉 사업과 신ㆍ어표업)을 원인으로 하기 때문에 역시 ‘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4) 업과 대종
① 표업의 대종과 무표업의 대종
무표업과 표업은 다 같이 소조색이다.41)
[그렇다면 무표업은] 그것의 소의가 된 [표업의] 대종과는 다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동일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것(무표업)의 능조(能造)의 대종은
표업의 소의(즉 대종)와는 다른 것이다.42)
논하여 말하겠다.
무표업과 표업은 비록 구생(俱生)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능히 그 생인(生因)이 되는 대종은 각기 다르니, 거칠고[麤] 미세한[細] 이러한 두 가지 결과는 필시 그 원인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며, 생인의 화합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43)
② 무표업과 대종의 전후관계
일체의 소조색은 대개 그것의 생인이 되는 대종과 구생한다.
그러나 현재ㆍ미래의 소조색 중의 일부는 역시 또한 과거[의 대종]을 원인으로 삼기도 한다.
여기서 ‘일부’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계의 후 찰나의 무표는
과거 대종에 근거하여 생겨난다.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것으로서 첫 찰나[初念] 이후에 존재하는 무표는 과거의 대종으로부터 생겨난다.
이를테면 욕계에 계속되는 첫 찰나의 무표는 능조(能造)의 대종과 동시에 생겨나지만, 이러한 대종은 생겨난 다음 능히 일체의 미래 자상속(自相續)의 무표의 생인이 된다.
즉 이것은 첫 찰나의 무표와 함께 소멸하였지만, 제2찰나 등의 무표가 생겨날 때 그 모두는 다 앞의 과거대종에 의해 지어진 것이니, 이러한 과거의 대종은 후후(後後) 찰나의 무표의 소의(所依)가 되어 능히 그것을 인발(引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후 찰나의 무표와 구기(俱起)하는 소의신 중의 대종(즉 現身의 대종)은 다만 능히 의지(依止)가 될 뿐으로,44) 만약 이러한 [현신의] 대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표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앞서 생겨났거나 함께 생겨난 두 가지 4대종(즉 과거의 대종과 현신의 대종)은 후 찰나의 온갖 무표에 대해 전인(轉因)이 되고, 수전인(隨轉因)이 되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바퀴가 손에 의해, 땅에 의지하여 굴러가는 것과 같다.
즉 여기서 손은 능히 [수레를] 인발(引發)하는 것이고, 땅은 다만 의지(依止)가 되는 것으로, 앞서 생겨난 [과거의] 대종과 함께 생겨난 [현신의] 대종의 경우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45)
③ 표업과 대종의 계지(繫地)관계
대종은 5지(地,욕계와 4정려지)와 통하며, 신ㆍ어업도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면 어떤 지의 신ㆍ어업은 어떠한 지의 대종소조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루업은 자지(自地)에 근거하며
무루업은 생겨나는 처(處)에 따른다.
논하여 말하겠다.
신ㆍ어의 두 업은 간략히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유루이며, 둘째는 무루이다.
만약 유루업의 경우라면 5지에 계속(繫屬)되는데, 욕계에 계속되는 신ㆍ어의 두 업은 오로지 욕계에 계속되는 대종소조이며, 나아가 제4정려에 계속되는 신ㆍ어의 두 업은 오로지 바로 그러한 지의 대종소조이다.
그러나 만약 무루업의 경우라면, 마땅히 5지의 소의신에 근거하여 이러한 [무루업]을 낳은 지(地)의 [대종]에 따라 생기 현전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즉 [무루업이] 바로 이러한 지의 대종소조라고 한 까닭은,
무루법은 계(界)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필시 대종이면서 무루인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무루업은 소의신의 힘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이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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