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않을 수도 Otherwise / 제인 케니언
나는 튼튼한 두 다리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시리얼과
부드러운 우유,
완전히 무르익은
복숭아를 먹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언덕 위 자작나무 숲으로
개를 데리고 나갔다.
오전 내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했다.
한낮에 내 짝과 함께
드러누웠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은제 촛대 놓인
식탁에서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벽에 그림이 걸린
방에서 딱 오늘 같은
또 다른 날을 계획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언젠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손혜숙 옮김)
斷想: 빛나는 개별성(the luminous particular)으로서의 시
제인 케니언(Jane Kenyon, 1947~1995)은 미국 뉴잉글랜드 북부에 위치한 뉴햄프셔주의 계관시인이다. 미시간 대학 재학시 시인이자 교수인 도널드 홀(Donald Hall)과 결혼해 47세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뉴잉글랜드 지방 특유의 자연과 진실을 포착한 그녀의 시는 거개 이글 폰드 농장(Eagle Pond Farm, 뉴햄프셔주 윌모트 소재)을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돈의 유서깊은 이 농장에서 부부는 고락을 같이하고 시를 쓰며 생을 마감한다. 명료함과 부드러운 유머, 차분하고 예각적인 관찰, 그리고 정신적-신체적 질병과 관련하여 자신의 삶을 이해하려는 감동적인 투쟁은, 하나의 경이로움이다. 시집으로는『방에서 방으로』(1978),『조용한 시간의 배』(1986),『저녁이 오게 하라』(1990),『콘스턴스』(1993)가 있으며, 인용시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자신이 마지막으로 엮은 시집『Otherwise: New and Selected Poems』의 표제시에 속한다. 그녀는 우울증과 백혈병의 고통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으며, 일상과 자연이 주는 기쁨을 투명한 언어로 그려낸다.
딱히 새로울 것 없는 일상과, 인간의 유한함을 담담하게 기술한 이 시는 투병 중에 쓰여진다. 무미(無味)의 미(味)다. 모든 일은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일상의 발견이다. 잠자리에서 튼튼한 두 다리로 아침에 일어나는 일, 아침 식사로 간단히 시리얼과 우유와 잘 익은 복숭아를 먹는 일, 식후에 개를 데리고 자작나무 숲으로 산책을 나서는 일, 오전 내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한낮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지내는 일, 은촛대를 밝히며 먹는 저녁, 그림이 걸린 침실에서 내일을 꿈꾸며 잠자리에 드는 일은 정말이지,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인가! 허나 마지막 구절(“언젠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에 와서는 가정이 현실화되는 것으로, 죽음이 건네는 말로서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뜻하지 않은 질병으로 길지 않은 생(47세)을 마감해야 헸던 그녀에게 이 시는 평이하지 않은, 울음 뒤의 울림이며, 하나의 유언과도 같다. 우리는 매일의 일상을 살면서 지금 이 순간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살기 일쑤다. 지난 코로나 시절을 한번 떠올려 보라.
우리가 느끼는 계절의 변화, 소소하고 영영한 인간사, 일상의 시간과 이야기들이 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 칼 라너에게 가고, 걷고, 앉고, 보고, 먹고, 자는 우리의 일상(日常)은 그야말로 신의 축복이고 은총이다. 온 하늘을 담고 있는 물방울이 그렇듯, 작은 것은 가이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다. 걷는다는 것은 궁극의 것이자 본연의 것으로 우리를 향해 마주 오고 있다. 우리를 찾고 있다. 앉는다는 것은 인간 실존과 그 완성의 한 측면을 말한다. 모든 움직임은 귀향의 한 표현이며, 눈은 몸의 등불이다. 눈이 단순하면 온몸도 밝을 것이라는 마태의 복음. 웃음은 하나의 신비. 그런가하면, 먹는 것보다 신비로운 일은 아마 없을 터. 죽은 것이 산 것으로 화함이리라. 존재하는 사물의 본성은 유지한 채 더 고차적이고 포괄적인 다른 현실 안으로 포섭되는 진리가 먹는 것에 있다. 잠은 삶의 깊은 바탕. 그림을 그릴 때 흰 바탕을 먼저 마련한 후 그림을 그리는‘회사후소(繪事後素)’가 그런 것처럼.
평범한 하루가 기적 같은 선물임을 안다. 평생 우울증과 싸워온 그녀는 먼저 암 투병을 하던 남편 돈을 케어하던 중 정작 본인이 시한부 삶을 살게 되면서 (일)상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된다. 노자『도덕경』1장에 나오는‘상도(常道)’에서 일상의 상(常)이 곧 도(道)라면, 이는 영원성이나 항상성을 유지하기보다 ‘끊임없는 변화의 지속성’ 을 의미한다. 이 변화의 불변성, 사이 존재로서 현(玄)은 온갖 묘함으로 들어가는 문(“衆妙之門”)이다. 후렴구(“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의 반복과 리듬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나 메시지로서, 인간과 삶의 시비(是非)와 영원한 운동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의 특이점은 무엇보다 ‘빛나는 개별성(the luminous particular) ’ 에 있다. 극히 사적이며 친밀한 영역에 뿌리내리고 있는 이미지와 표현, 사상으로서 그것은 존재와 진리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환히 비춰주는 방식이다. 거대 서사나 보편적인 법칙에 자칫 묻히기 쉬운, 구체적이고 고유한 대상의 본질적인 가치를 드러낸다. 한 발자국 앞이 무한이란 말처럼, 인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실재의 숨은 깊이를 드러내게 마련이다. 추상화된 이론이나 일반적인 개념-표상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워 보다 구체적인 하나의 존재가 요긴할 때가 있다. 이러한 개별성을 깊이있게 바라보고 경험할 때 개체 안에 담긴 우주적 진리와 실재의 빛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눈앞에 있는 한 사람의 눈물이 인간 존재의 본질을 더 강렬하게 깨닫게 하고, 세월의 흔적이 묻은 낡은 물건 하나가 존재의 깊이를 증명하는 것처럼. 단 하나의 특별한 순간은 삶의 진리를 환히 밝혀 준다. 하여 일상과 주변의 사물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숨겨진 경이로움과 진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이 시는 행복이란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서 행복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 삶의 모든 순간을 음미하며, 자신이 택한 일을 할 수 있었던 데서 비롯되는 충족감이다. 그런 점에서 질병과 죽음을 목전에 둔 시인이 발견한 일상이란 얼마나 귀하고 영성에 가까운 것인가. 우울한 그림자는 사라지고 영적 존재감이 발현되는 순간이다. 헛간 틈새로 비치는 햇살과 해질녘의 풍경, 귀뚜라미 울음소리와 별이 뜨는 자연과 일상을 노래한 제인. 저녁이 오게 하라며 죽음을 평온하게 받아들인 케니언의 힘과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
늦은 오후 햇살이/ 헛간 틈새로 비쳐들게 하고,/ 해가 기울어 가면, 건초 더미 위로 오르게 하라.// 귀뚜라미가 울게 하라/ 여인이 뜨개질하려 할 때./ 저녁이 오게 하라.// 긴 풀잎 사이에 팽개쳐 둔 호미에/ 이슬이 맺히게 하라. 별들이 뜨게 하고,/ 달은 그 은빛 뿔을 드러내게 하라.// 여우가 모래 깔린 자기 굴로 돌아가게 하라./ 바람이 잦아들게 하라. 헛간 안이 어두워지게 하라./ 저녁이 오게 하라.// 도랑에 버려진 병에, 귀리죽의 국자에,/ 허파의 바람에/ 저녁이 오게 하라.// 오게 하라, 그것이 원하는 대로, 그리고/ 두려워 마라. 신은 우리를 위안 없이/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러니 저녁이 오게 하라. (제인 케니언,「저녁이 오게 하라 Let evening come」)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