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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29권
변연기품⑨
3.8. 명색(名色)에 대하여
1) 총설
이미 무명에 대해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명색(名色)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하지만, 색에 대해서는 이미 분별하였다.1)
‘명(名,nāma)’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명(名)이란 무색의 4온(蘊)이다.
名無色四蘊
논하여 말하겠다.
부처님께서는 무색의 4온을 설하여 ‘명’이라고 이름하였다.
어째서 ‘명’이라고 이름한 것인가?
능히 나타내어 부르는 것[表召]이기 때문이니, [‘명’이라 함은] 능히 여러 가지의 소연(所緣)을 나타내어 부르는 것을 말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명’은 마땅히 무색의 법을 모두 포섭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니, 불상응행법은 소연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나타내어 부르는 것’은 오로지 무색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색’의 명칭을 해석하여 말한 것에 어떠한 허물도 없는 것과 같다. 즉 부처님께서는 “변애(變礙)하기 때문에 ‘색’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는데, 과거ㆍ미래의 색이나 무표색, 온갖 극미는 비록 변애하는 일이 없을지라도 색이라 이름할 수 있으니,2) 무색온 중에는 변애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애하는 것을 색이라고 말한 것은 지극히 잘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색온 중에는 [소연을] 나타내어 부르는 작용이 있다고 할 수 있으니, [그러한 작용은] 색 중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으로, 이치상으로도 역시 어긋남이 없다. 따라서 불상응행법이 ‘명’에 포섭된다고 해도 과실이 없는 것이다.3)
또한 [무색의 4온은] 미세하기 때문으로, 그러한 각각의 의미에 대해 이치에 따라 ‘명’을 설정하여 그것의 명칭으로 나타낸 것이다.4) 그렇다고 무표색 등도 역시 ‘명’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그것의 소의(所依,즉 표업)는 현량(現量)에 의해 획득되기 때문이다.
또한 일체의 [3]계(界)ㆍ[9]지(地)ㆍ[5]취(趣)ㆍ[4]생(生)에서 능히 두루 추구[趣求]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다.5) 그리고 무루의 무색도 ‘명’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니, [무루가] 비록 이것(‘명’)에 의해 드러나고 밝혀지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설하는 자의 정의(情意)에 따라 [무색의 4온을] 전체적으로 ‘명’이라 설하였는데, 더 이상 번거롭게 따져 힐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1) 무색의 4온이 바로 ‘명(名)’이라는 상좌설 비판
[이에 대한] 상좌(上座)의 생각은 이러하다.
“[무색의 4온은] 그들 유정의 상속을 순성(順成)시키기 때문에 ‘명’이라 설한 것이니, 이는 바로 능히 원인이 되어 그들 [유정]을 순성시킨다는 뜻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색법 역시 마땅히 ‘명’이라 해야 할 것이니, 이 역시 능히 원인이 되어 그들 [유정]을 순성시키기 때문으로, 부처님께서도 “지(地) 등은 유정신(身)을 성취한다”고 말하였으며, 경에서는 “사부(士夫)는 바로 6계(界)이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어떠한 경에서도 “오로지 무색온만이 유정신을 성취한다”고 설한 적이 없지만, “색 등이 일어남에 따라 유정이 상속한다”고 설한 경우는 있기 때문에 ‘명’에 관한 그의 해석은 의지하거나 근거로 삼을 수 없는 것이다.
어찌 부처님께서 이러한 가타(伽他)의 말을 설하였다고 하지 않겠는가?
‘명(名,명칭)은 능히 일체법을 반영하니
‘명’을 벗어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명’이라는 하나의 법에
모든 법이 자재하게 수행(隨行)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러한 [가타]를 인용한 것은 무엇을 증명하기 위함인가?6) 그 게송은 오로지 무색법만이 유정의 상속을 능히 성취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한 것인가, 무색법은 능히 유색법을 인기함으로써 유정의 상속을 능히 성취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한 것인가?
만약 ‘일체의 유정의 상속은 모두 무색법을 원인으로 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무심정(無心定)에 든 모든 이는 단지 유색법만으로 상속하기 때문이다. 무심의 유정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성립시켰거니와 그들은 득(得) 등을 [상속을] 능히 성취하는 원인으로 삼는 일이 없다.7) 또한 각각의 유정이나 3계의 제온은 단일한 상속을 성취하기 때문에 온갖 색법 역시 바로 일체 유정이 상속하는 근거가 되니,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마땅히 짓지 않고서도 [색법을] 획득해야 하며, 혹은 짓고서도 상실하게 되어 크나큰 과실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어떤 한 유정이 상속하는 온갖 상태에 색이 두루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무색법도 역시 동일하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마땅히 살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이 가타의 뜻이 수(受) 등의 4온을 일컬어 ‘명’이라 말하였다고 해야 할 것인가, ‘소’나 ‘색’ 등의 언의(言依)처럼8) 능전(能詮,대상의 의미를 능히 드러내는 말)의 온갖 차별적인 상(相)을 ‘명’이라 말하였다고 해야 할 것인가? 즉 여기서는 오로지 그러한 능전으로서의 색과 비색의 ‘명(즉 불상응행법으로서의 名)’을 말한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으로, 오로지 이러한 [‘명’의] 힘만이 능히 일체법을 반영하니, 어떠한 법도 ‘명’에 의해 그 의미가 드러나지[所詮] 않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와는 다른 뜻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앞의 가타의 뜻이 ‘수’ 등 4온을 일컬어 ‘명’이라 말하였다고 한다면), 어떠한 ‘명’이 능히 일체법을 반영할 것이며, 또한 12처를 일체법이라 이름하는데, ‘수’ 등이 어찌 12처를 반영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12처는] 다 ‘수’ 등의 소연이 된다”고 말한다면, 여기서의 ‘명’은 오로지 의식(意識)과 그 상응법(즉 심소)에 근거하는 것일 뿐이다. 만약 “그 밖의 법도 바로 ‘명’의 종류이기 때문에 이 같은 허물이 없다”고 한다면, 마땅히 이 게송을 인용하여 ‘명’이 원인이 되어 유정의 상속을 순성(順成)시킨다는 사실을 논증해서는 안 된다. 즉 만약 오로지 의식과 그 상응품만이 바로 이 가타에서 설한 ‘명’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이 가타를] 인용하여 [‘명’이 유정의 상속의] 원인이 된다는 뜻을 논증해서는 안 될 것이니, 5식신(識身)과 그 상응품도 역시 유정의 상속을 순성시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명’이 무색의 4온이라면] 어떻게 “‘명’을 벗어나는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명’ 중에는 다수의 온을 시설하는 것으로, 색도 이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색 중에도 다수의 계(界)와 다수의 처(處)를 시설하는 것으로 ‘명’도 어찌 이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9) 만약 “‘명’은 무색유와 통한다”고 말한다면, [‘명’과] 통하지 않는 모든 법은 마땅히 ‘명’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명’과] 통하지 않는 것(즉 색온)은 [유정의 상속과] 통하는 종류이기에 이러한 허물은 없다”고 말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앞서 “마땅히 [이 게송을] 인용하여 [‘명’이 원인이 되어 유정의 상속을 순성시킨다는 사실을] 논증해서는 안 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명’과] 통하지 않는 것(즉 색온) 역시 통하는 것(무색온)과 동등하게 유정의 상속을 성취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주장한 ‘명’(즉 무색의 4온으로서의 ‘명’)을 제외하고 다른 어떤 법이 있기에 [가타에서] “그러한 제법이 자재하게 수행(隨行)한다”고 설할 수 있었던 것인가? 만약 “이러한 ‘명’에 색이 수행한다(따라 현행한다)”고 말한다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지극히 상식적[極成]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명’과 ‘색’은 서로에 근거하여 전전(展轉)한다고 인정하였으면서 어떻게 다만 ‘색이 명에 수반되어 일어난다[隨轉]’고 말하는 것인가? 만약 “‘명’은 색에 두루 [존재]하지만, 색은 ‘명’에 능히 두루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무정물[非情]에는 [‘명’(즉 무색의 4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듯이 무심(無心)의 유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명’과 ‘색’ 이외 어떤 법이 존재하여 그것이 ‘명’에 수반되어 일어나는 것도 역시 아니니, 경에서 “알려지는 법[所知法]에는 모두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명’과 ‘색’이 바로 그것으로, 그 밖의 제3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가타에서는 ‘명이라는 하나의 법’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치상 마땅히 4온을 하나[의 법(즉 ‘명’)]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설혹 색에 대해 하나의 법이라는 말을 설하는 것은 인정할지라도 결정적으로 거기에 수행하는 법이 존재하는 경우를 보지 못하였으니, [어떤 법] 자체는 그 자체에 수반되어 현행[隨行]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명’은 오로지 능히 관념을 드러내는 것[詮想,즉 명칭으로서의 ‘명’]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이같이 해석할 것 같으면, 수고로움을 빌리지 않고서도 이러한 가타의 뜻을 모두 분명하게 해석할 수 있으니, 그것을 인용하여 ‘[무색의] 4온을 일컬어 명이라 하며, 그것이 유정신(身)을 순성시킨다’는 사실을 논증하려는 것은 결정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상좌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힐난의 말을 가설(假設)하였다.
“만약 명색이라는 말이 5온을 모두 포섭하는 것이라면, 세존께서 ‘식은 명색에 근거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식’에는 마땅히 두 가지가 있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능의(能依)와 소의(所依)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는] 스스로 해석하여 말하기를, “이러한 힐난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이미 ‘명’ 중에서 식을 [별도로] 분별하였기 때문이다.10) 즉 이미 식을 언급하여 능의라고 설하였으니, 이에 준하여 식의 소의로서 다만 그 밖의 명색을 취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지금 그의 힐난을 살펴보건대, 이치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니, 등무간연에 근거[依]하는 식은 결정코 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11) 그럼에도 저 상좌는 식과 명색이 동시에 서로의 근거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이치를 인정하지 않았으니, 그의 종의에서는 동시인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어떻게 식은 두 가지(명색)와 구생하는 일이 없다고 하면서도 끝내 식(후식 즉 능의)에는 다시 식(전식, 즉 소의)에 근거하는 뜻이 없다고 하는 것인가? 또한 설혹 동시에 함께 생겨나 서로의 근거가 되는 경우가 있다고 인정할지라도, 단지 식만이 수(受) 등의 소의가 될 수 있으며, 수 등은 식에 대해 소의가 될 수 없는데, 어떻게 ‘식의 소의로서 그 밖의 명색을 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그의 문답은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2) ‘식’과 명색의 상호 연기에 관한 해석
지금 여기서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부처님께서 『성유경(城喩經)』과 『대연기경(大緣起經)』에서 “식과 명색은 서로를 반연한다”고 설한 뜻은 전후(前後)에 근거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구생(俱生)에 근거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12)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함은 [구생일 뿐만 아니라] 역시 또한 전후에 근거한 것이고, ‘명색을 연하여 식이 있다’고 함은 오로지 구생에 근거한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식이 모태에 들어갔기 때문에 갈랄람(羯剌藍)과 화합하여 유정신을 성취하는 것으로, 따라서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함은 [구생일 뿐만 아니라] 역시 또한 전후로 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명색이 화합하고 나서 다시 다른 식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며, 식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명색을 연으로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오로지 구생에 근거하여 ‘명색을 연하여 식이 있다’고 한 것이니, 식(識)의 지분[支]은 오로지 하나이기 때문이며, 또한 일 찰나이기 때문이다. 즉 차제(次第)로 연기의 지분을 설하는 중에 식지(識支)는 다만 하나일 뿐이며, 이는 오로지 일 찰나[念]일 뿐인데, 어떻게 ‘식과 명색은 결정코 전후에 근거하여 서로에 대해 연이 된다고 설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계경에서 ‘갈대의 다발[蘆束]과 같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두 단의 갈대 다발을 공지(空地)에 세워둘 경우 [서로에] 의지하니, 만약 어느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것도 역시 따라 넘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수(具壽)여, 두 가지의 법은 서로에 의지하니, 이를테면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는 것이며, 아울러 명색을 연하여 식이 있는 것이다.”
만약 구기(俱起)하여 전전(展轉)한다는 사실을 떠나 [전후로서] 연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갈대 다발의 비유와 어떻게 서로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를테면 식의 단계에서는 명색의 단계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고, 명색의 단계에서는 식의 단계가 이미 소멸하였으니, 결정코 갈대의 다발처럼 서로가 서로의 근거가 된다는 뜻은 없는 것이다. 하물며 과거와 미래[법]를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자가 [어떻게] ‘그것(갈대 다발)이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즉 [전후라고 할 경우] 둘 중 어느 하나가 존재할 때 다른 하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無]과 존재하는 것[有], 혹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전전하며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의지한다는 뜻이 있을 수 없으며, 오로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만이 서로에 대해 의지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식과 명색이] 서로 의지하는 것은 결정코 전후[의 관계]이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성교(聖敎) 밖의 주장으로, 불법(佛法)의 종의가 아니다.
또한 계경에서는 ‘무명과 작의는 구시(俱時)에 일어나 전전하며 연이 된다’고 설하였으니, 이를테면 “무명은 비리작의에 의해 [생겨난 것이며], 아울러 비리작의는 치(癡)로부터 생겨난 것이다”고 설하고 있으며, 나아가 “이 두 가지는 구시에 일어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계경에서는 “안(眼)과 색을 연으로 하여 치(癡)에 의해 생겨난 염탁(染濁)의 작의를 낳으니, 이 중에 ‘치’란 바로 무명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였던 것으로, ‘이 중에’라고 말한 뜻은 바로 ‘이러한 작의가 생겨날 때’를 나타낸다. 혹은 바로 언급한 바와 같은 ‘연이 화합한 상태’를 [나타낸 것으로], 함께 계속(繫屬)되어 연이 되는 법[同屬緣法]은 전후로서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두 가지가 구시에 일어나는데 어떠한 장애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등불[燈]과 밝음[明]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면서 인과의 뜻을 갖는 것과 같으니, 앞서 구유인(俱有因)을 사택하면서 이점에 대해 이미 모두 분별하였다.13) 이렇듯 원인과 결과의 구기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이다. 그럼에도 어떤 이는 [이에 대해] 해명하여 말하기를 “등불과 밝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다시 말해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등불과 밝음은 촉(觸)과 량(量)과 색처(色處)로서 그 작용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즉 세간에서는 오로지 불꽃[焰]을 설하여 등불이라 하였기 때문으로, ‘불꽃과 불빛[光]의 등불이 능히 사물을 태운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아급마(阿笈摩)』에서는 설하기를 “밝음은 등불에 근거한 것으로, 마치 해와 달의 빛이나 밝음이 일륜(日輪)과 월륜(月輪)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한 대지가 수륜(水輪)에 근거하는 것과 같으니,14) 수륜과 대지는 구생하여야 비로소 근거가 된다는 뜻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등불과 밝음이 다른 것이라 함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極成]로서, 인과로서 구생한다는 뜻은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다. 밝음이 비록 자신의 대종에 근거하여 생겨나는 것이라 할지라도 생겨날 때 등불을 떠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등불을 떠나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만약 “밝음과 등불은 동일한 원인에 의해 생겨난 것이니, 등불의 원인이 바로 밝음의 원인이기 때문이다”고 한다면,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양자는] 차별적인 것이기 때문으로, 하나의 화합으로부터 한 가지가 아닌[非一] [두 가지의] 결과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역시 한 가지가 아닌 [두 가지의] 결과가 하나의 화합으로부터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어찌 한번의 타격으로 불꽃과 소리가 구기(俱起)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어찌 하나의 화합으로부터 한 가지가 아닌 [두 가지의] 결과가 생겨나는 경우가 없다고 하겠는가?
이 역시 이치상 그렇지 않으니, [불꽃과 소리는] 근거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며, 또한 자류(自類)의 원인에서 각기 별도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그의 해명은 다만 허언일 뿐이며, 따라서 등불과 밝음은 원인 자체가 각기 다른 것이다.
만약 식과 명색이 전전하며 [서로의] 연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경에서는 대개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말한 것인가?
서로에 대해 연[緣性]이 된다고 하는 이치는 비록 [두 가지 모두에] 통할지라도, [이 같은 사실은] 식의 작용이 강성함을 나타내니, 그렇기 때문에 한쪽에 치우쳐 설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식의 작용이 강성하다’고 함은, 이를테면 식이 소의가 된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니, 수(受) 등은 마음을 소의로 삼아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아가 식이 정혈(精血)을 지니고, 갈랄람을 성취하며, 유정신을 성취하는 것도 그 작용이 수승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왕과 신하 등이 비록 서로에 의지할지라도 왕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은 왕이 가장 수승하기 때문으로,15) 식과 명색의 경우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12지연기에서]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함은 전생연(前生緣)에도 근거하여 설한 것이지만, ‘[식과 명색이] 전전하며 [서로의] 연이 된다’고 함은 오로지 구기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다. 즉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함은 전후와 구기 모두와 통하지만,16) ‘명색을 연하여 식이 있다’고 함은 오로지 구기[에 근거하여 설한] 경우이니, 결생(結生)의 식은 차별적인 상태[別位]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결생식은 찰나성임) 또한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함은 분위(分位)의 명색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지만, ‘[식과 명색이] 전전하며 [서로의] 연이 된다’고 함은 찰나(刹那)의 명색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다.17)
(1) 명색과 결생식에 관한 라마의 이설 비판
[이에 대해] 대덕 라마(邏摩)는 자의에 따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 중유로부터 생유로 이어질 때라면 중유의 명색이 연이 되어 무간 찰나에 결생류(結生類)의 식(識)을 인기하는데, 중유의 명색이 멸하면 식만이 홀로 생겨나 존재하니, 이것이 바야흐로 능히 생유의 명색을 인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推尋]은 결정코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그가 말한 ‘중유의 명색이 연이 되어 무간 찰나에 결생류의 식을 인기한다’고 함은 중유의 식도 역시 능히 연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다만 중유의 식을 제외한 나머지의 ‘명’만이 [연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18) 만약 중유의 식도 역시 능히 연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치에서 중유의 최후찰나의 심ㆍ심소와 색이 연이 되었음에도 다만 후 [찰나에] 식(결생식)만을 인기하여 생겨나게 하고, 심소와 색은 생겨나게 하지 않는 것인가? 만약 식을 제외한 나머지의 ‘명’만이 연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이치에서 구생(俱生)의 식은 연[緣性]이 되지 않는 것인가?
만약 그러한 상태(즉 중유의 명색이 연이 되는 찰나의 상태)에서는 식이 구생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마땅히 결생의 식은 소의가 없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마땅히 [그러한 상태의] 심소도 [결생 시의] 심소에 근거가 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다시 어떤 연유에서 그러한 상태에서 심소는 다만 이류(異類)인 식에 대해서는 생인이 되면서 동류(同類)인 심소는 능히 인기하여 낳지 못하는 것인가?
[또한] 모든 색에 대해 아직 이탐(離貪)을 획득하지 못하였다면, 식은 색에 근거하지 않고서는 잠시라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중유의 색도 결정코 능히 연이 되어 속생(續生) 시의 마음과 구기하는 색을 견인한다고 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이러한 상태에서는 식만이 홀로 생겨나 존재한다는 것인가?
만약 ‘이때 비록 색이 일어나는 일이 있을지라도 단지 식만을 설한 것일 뿐이다’고 한다면, 그럴 경우 마땅히 이러한 상태에서는 심소도 역시 존재하지만 단지 마음만을 설한 것일 뿐이라고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다시 “중유의 명색이 멸하면 식만이 홀로 생겨나 존재하니, 이것이 바야흐로 능히 생유의 명색을 인기한다”고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마땅히 이러한 식만이 홀로 존재하는 상태는 중유도 아니고 생유도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중유는 이미 소멸하였기 때문이며, 생유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유가 소멸한 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존재[有]의 상태는 생유도 아니다. 따라서 그가 말한바는 자신의 생각을 벗어난[出自] 그릇된 주장인 것이다.
또한 심ㆍ심소의 전후생론(前後生論)에 있어 전후로 하여 일어난다는 사실을 어떻게 계탁해야 할 것인가? 안식과 무간에 안촉에 의해 생겨난 수[眼觸所生受] 등이 생겨날 때, 그것은 그 밖의 다른 식과 동시[俱時]에 일어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수’ 등만이 홀로 일어난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그 밖의 다른 식이 ‘수’ 등과 구생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의식이 생겨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수’ 등의] 경계대상을 반연하여서 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와 달리 그 밖의 다른 식의 다른 경계대상을 반연하여 생겨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바야흐로 [심ㆍ심소의 전후생론의 경우] 의식이 생겨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수’ 등의] 경계대상을 반연하여서가 아니니, 안촉에 의해 생겨난 ‘수’ 등은 이미 안근에 근거한 것으로, 이러한 의식의 경계대상과는 시간을 달리하기 때문이다.19) 즉 안근에 근거하여 생겨난 ‘수’ 등은 과거[의 경계대상]을 그것의 소연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역시 안촉에 의해 생겨난 ‘수’ 등도 의(意)와 법(法)을 연으로 하여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계경에서] “‘의’와 ‘법’을 연으로 하여 의식이 생겨난다”는 등으로 설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의’와 ‘법’을 연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바로 안촉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역시 그 밖의 다른 식의 다른 경계대상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근거하는 경계대상이 다름에도 동시에 생겨날 수 있다고 한다면, 마땅히 일시에 일체의 경계대상을 획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온갖 식[에 근거함이] 없이 ‘수’ 등이 홀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후 [찰나의] 식도 소의가 없이 생겨나야 하지만, 의식(意識)의 흐름이 끊어지고 나서도 다시 속생한다는 사실은 하계(욕계)에 일찍이 없었던 일일뿐더러 그 역시 전혀 인정하지 않았으니, 그의 종의에서는 멸진정 등에 들더라도 식은 간단(間斷) 없이 상속하는 것이라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다.20)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그가 설한 “중유의 최후 [찰나의] 마음이나 명색과 무간에 식만이 홀로 생겨나 존재하며, 그 후 [이것이] 바야흐로 생유의 명색을 인기한다”는 말은 다만 허언일 뿐이니, 정리(正理)와 성교(聖敎)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2) 명색과 결생식에 관한 상좌의 이설 비판
상좌(上座)는 이에 대한 힐난의 말을 [다음과 같이] 가설하였다.
“경에서는 마땅히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명색은] 전전력(展轉力)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스스로 해석하여 [이 같이] 말하였다.
“이러한 힐난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이러한 경설은] 생겨나고[生] 머무는[住] 연에 차별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식은 능히 명색의 생연이 되는 것이니, 식이 탁태(託胎)함으로 말미암아 그것(명색)이 생겨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명색)은 생겨난 이후 식이 머무는 근거가 되고, 전전하며 [서로] 연이 되어 안주할 수 있게 하니, 그래서 [경에서는] 다시 ‘식은 명색을 연으로 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좌의 해석] 역시 옳지 않으니, 정리와 성교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부처님께서 아직 대보리(大菩提)를 얻지 못하였을 때, 식의 생연을 추구하여 바로 명색임을 알았으니, 계경에서 “보살은 노사의 생연을 추구(尋求)하고 내지 명색의 생연을 추구하여 그것의 연이 순서대로 ‘생’ 내지 ‘식’임을 알았으며, 식의 생연을 추구하여 그것은 바로 명색임을 알았다”고 설한 바와 같다.21) 만약 그러한 명색이 식의 생연이 아니라면,22) 보살에게 알려진 것은 전도된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가 설한 “그것(명색)은 생겨난 이후 식이 머무는 근거가 되며, 전전하며 [서로] 연이 되어 안주할 수 있게 하니, 그래서 [경에서는] 다시 ‘식은 명색을 연으로 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고 함은, 말만 그럴 듯 할 뿐 이치가 없다. 즉 여기서 “‘식’은 명색을 연으로 한다”고 설하였지만, 이러한 [식은] 명색을 낳는데 연이 된 식인데, 어떻게 [명색이 생겨난] 이후 그것(명색)은 바야흐로 식이 [머무는]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그 경에서는 다만 “식이 명색에 근거하여 머문다”고만 말하였을 뿐이다. 그래서 계경에서도 설하기를 “[부처님께서] 아난타(阿難陀)에게 말하였다. ‘식은 명색에 의지하지 않고 머물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하였던 것이다.23) 즉 이 경에서는 ‘명색이 식에 의지하여 머문다’고는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전전(展轉)하며 [서로 연이 된다]고 하겠는가?
또한 그대는 식과 명색의 구생을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전전하며 [서로] 연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앞에서 설하였듯이 과거ㆍ미래[법]를 부정하는 종의에서는 [식과 명색] 둘 중 어느 하나가 존재할 때 다른 하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無]과 존재하는 것[有], 혹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전전하며 서로에 대해 의지한다는 뜻이 있을 수 없으며, 오로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만이 서로에 대해 의지할 수 있을 것인데, 어떻게 구생하여 서로에 의지한다는 뜻이 있다는 것인가? 왜냐하면 만약 둘 중 어느 하나가 결여되면 (다시 말해 둘 중 어느 하나가 이미 과거로 낙사하였거나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경우) 다른 하나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저 『대연기경』에서 [연기의] 존재지분[有支]을 차제(次第) 인과로 설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역시 오로지 열두 가지 존재지분을 설한 것도 아니니, 그는 “명색이 촉의 연이 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며,24) “살펴 추구함[尋求] 등은 획득 등의 연이 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25) 그렇지만 부처님께서는 거기서 아난타를 위해 매우 심오[甚深]한 연기의 이치를 현시(顯示)하였으며, 따라서 그 경의 뜻은 소의와 소연에 근거하여 다만 ‘식은 명색에 근거하여 머문다’고 설한 것일 뿐이다. 즉 의식은 오로지 의(意)에 근거하여 그것을 소의로 삼고, 법을 소연으로 삼아 안주할 수 있으며, 안(眼) 등의 5식은 안 등을 소의로 삼고 색 등을 소연으로 삼아 안주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의식의 소의는 오로지 한 가지이지만, 소연은 두 가지 모두와 통하며, 5식의 경우는 이와 반대이다.26) [이 가운데] 오로지 의식[의 소의]을 제외한 소의는 반드시 [생기하는] 시간을 달리하지만, 그 밖의 소의와 소연에는 구생(俱生)의 이치가 있으니, 존재지분의 모든 상태는 다 이러한 뜻과 통한다. 그러나 상좌의 종의를 살펴보건대, 식과 명색은 서로에 대해 연이 된다고 말하지만, 이치상으로는 필시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27)
그런데 계경에서 설하기를 “내가 연기를 관찰해 보건대 식에 이르면 바로 돌이키니, 이를 초과한 다른 것(무명ㆍ행)에 대해서는 마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28)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보살이 그 때 연기를 역(逆)으로 관찰함에 모든 지분은 전전하며 그에 따르는 바의 생연이 되어 앞서 관찰한 9지(支)의 생연은 각기 달랐지만, 최후로 관찰한 식지(識支)의 경우는 다른 별도의 생연을 갖지 않았다.29) 그래서 “식에 이르면 바로 돌이켜 [이를 초과한] 다른 것에 대해서는 [마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결생식(結生識)에는 두 가지 생연이 있으니, 첫째는 전생연(前生緣)이며, 둘째는 구기연(俱起緣)이다. 그리고 식(識)과 생(生), 행(行)과 유(有)에는 의미상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에 먼저 생지(生支)의 생연을 관찰하여 ‘유’라 하였고, 식의 전생연이 ‘행’임을 이미 관찰하였던 것이지만, 지금 여기서는 명색이 구생연이 된다고 관찰하였기 때문에 “식에 이르면 바로 돌이켜 [이를 초과한 다른 것에 대해서는] 마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 것으로, 이미 식의 두 가지 생연을 모두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금세(今世)의 결생하는 단계의 식이 전생(前生)과 구기(俱起)의 두 가지 연의 힘으로부터 생겨난 것임을 관찰하였으므로, 이에 준하여 그 밖의 지분도 상응하는 바대로 모두 그러함을 알아야 하니, 각각의 찰나[念]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각기 두 가지 연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오로지 식지(識支)에 대해서만 두 가지 연을 모두 드러내었는데, 어떻게 명색이 식의 구기연이 된다고 관찰하게 되었던 것인가?
이러한 [명색] 중에 식이 머물면서 집착[住著]하기 때문으로, 이를테면 경에서 “식은 식을 제외한 그 밖의 명색에 머문다”고 설한 바와 같으니, 앞에서 [식이] 머물면서 집착하는 것이 바로 식주(識住)의 뜻이라고 해석하였다.30) 그래서 계경에서는 “희애(喜愛)는 식을 윤택하게 하는 것으로, [4]온 중에서 증장 광대하게 한다”고 설하였으며, 『대연기경』에서도 역시 이와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식은 명색에 의지하지 않고 머물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31) 이는 식이 함께 생겨난 명색 중에 머물면서 집착한다는 사실을 설한 것으로, 바로 식의 구생연을 나타낸 것이니, 그래서 [명색을] 4식주(識住)로 설하게 된 것이다.32)
그렇기 때문에 보살은 식에 이르러 바로 돌아섰던 것[至識便還]이다.
나아가 비록 노사지(老死支)가 바로 명색 등이고,33) 앞서 노사는 ‘생’을 연으로 삼는다고 관찰하였으며, 이미 식지(識支)를 연하여 명색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밝혔을지라도, 노사(즉 명색 내지 수)가 다 식을 연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즉 ‘식을 연으로 삼아서는 결정코 오로지 명색을 낳을 뿐이기 때문에 ‘명색은 식을 연으로 삼는다’고 다시 관찰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이 같이 설하였다.
“저 보살은 생을 싫어하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다시 헤아려 ‘생(즉 識)’을 관찰하였다. 즉 보살의 마음은 유전문(流轉門)을 싫어하고 두려워하였으므로 온갖 유전의 지분[支]을 두루 관찰하지 않았지만,34) 온갖 유전의 지분은 모두 다 ‘생’을 근본으로 하기에 다시금 ‘생’을 관찰하였으며, 그래서 ‘이미 두루 알았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무명과 행(行)의 지분은 바로 애ㆍ취와 유(有)로서, 이미 ‘애’ 등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여기서] 거듭하여 관찰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보살은 환멸문(還滅門)에 대해서는 흔모(欣慕)하였기 때문에 열두 갈래의 존재의 지분을 두루 관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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