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한분 : 황종섭대종회장(24세) 촬영한분 :황일석(25세)
◈위 글 경자는 문민공 신제 휘 주세붕선생 께서 인의공 휘 사겸(10세)에게 준 글자 이다.
◈문민공 신제 휘 주세붕선생 시(詩)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내가 듣건데 만가지 선(善)은 공경하는 가운데 있고
착하지 않은것은 모두 불경을 쫓아 싹트는것이다.
자네를 백년에오직 글 한자(字) 즉 경(敬)자 를 주니
마땅히 천사(千駟) 즉 벼슬 하는것이 본래 좋은것이 아니고
가벼운것임을 알아야 한다.
경암공 사실(敬庵公 事實)
공의 휘는 사겸(士謙)이니 사직공의 아들이다.
가정 1527년 정해에 나셔서 재질이 특수하고 어려서부터 가정교육을 익히시고
가관(加冠)한뒤에 신제(愼齊)주(周)선생 에게 학문을 닦으러 갔더니 선생이 특히
장허 하시고 시를 지어 주시되 내 들어니 만가지 착한것은 공경에 난다더라.
옳지 못한것도 불경에서 싹트나니 자네의 백년에 한글자 주노라.
일천수례도 오히려 가벼움을 알아두게 공이 정성것 받아서 돌아와
벽위에 경암이라 써 붙이고 조석으로 살펴 종신토록 복응할 자료를 삼으니라.
성생이 또 편지를 하시되 그대가 힘써서 읽는다니 들어서 심히 기쁘다.
마땅히절절 근면하여 잠시라도 해이하지 마라.
만일 내일로 미루고 나가지 아니하면 내일은 또 내일이 있는지라.
나의 백발은 내일따라 오나니 통탄하고 후회한들 어찌 하리요.
이 말로 자제들에 고 하여 담담히 먹는것을 알게 하라.
옛사람 배우는 길이 다 담담한 가운데서 흘러 나왔으니 나시 참조해 보게 그 친절이 수수하심이
이러하여 문학 덕행으로 태학관에 추천되에 통례원 인의를 지내시고 유계사에 배향 하였다.
사진제공한분 : 황종섭대종회장(24세) 촬영한분 :황일석(25세)
통례원 인의 경암공 묘갈명
황씨의 관은 창원이니 남쪽땅의 큰 씨족이다.
나 일찍 그 선대를 위하여 그 사당의 글을 쓰고 그 묘비에 글을 새기고 그 유집에 서문을 써서
청한바를 사양하지 아니함은 서로 사귄 신의로써 이다.
이제 증석,성실군이 집안 원로의 명으로 그 선조 통례원 인의 경암공의 행장을 받들고 나에게 와서
천명(阡銘)을 청 하거늘 내 노병으로 사양함이 실상이지만 청 하기를 더 부지런히 하거늘
또한 가히 사양치 못한지라.
이제 그 장을 읽으매 공 의 대가 이미 삼백년인데 그 사행 이력을 온전히 상고할수 없으나
오직 사문에서 준 시와 왕복 서찰에 의하여 공의 존재를 알수 있다.
공은 신제 주선생의 질서라 처가에 왕래하여 선생의 권애를 특별히 받았으며 선생이 시로써
증 하여 말씀 하시기를
내가듣건데 만가지선은 공경하는 가운대 있고 착하지 않은것은 모두 불경을 쫓아 싹트는것이다.
자네를 백년에 오직 글한자 즉 경(敬)자를 주니 마땅히 마땅히 벼슬하는것이
본래 좋은것이 아니고 가벼운것을 알아야 한다.
또 글로써 말씀 하시되 만일 내일이 있다하면 문득 진보를 얻지 못할것이니 내일또 내일이면
나의 백발이 쌓일터 이니 내일 얻을것이 후회한들 미치지 못하리라.
칠원에 군지가 있으며 공을 인물편에 기재하고 후손 항제(恒齊) 휘 효창(孝昌)에 이르러 묘문에
쓰기를 호학불권(好學不倦)은 성현이 법한지라 행실이 사방에 나타나니
이름이 구궐(임금이 있는곳) 에 이르더라.농고 휘 학이 공의 상향문을 찬 하야 가로되
일찍 현사를 얻으니 경자부(敬字符)가 있는지라 한 고을이 본받고 백세의 모범이라.
경(敬)자로써 모든것을 구하니 일대의 추중임을 가히 알수 있노라.
공의 휘는 사겸이요 경암은 그 표효(表號)다.중종(1522년)정해에 나셔서 태학(太學)의 추천으로
통례원 인의가 되고 선조15년(1582년 에 돌아 가시니 칠원현 칠서 대치의 유천이 그 장지다.
황씨는 고려때 회산부원군(檜山府院君) 휘 석기(石奇)가 상조이니 그뒤에 휘 원옹(元雍) 이
있어 성균관직강(直講) 이니 이분이 공의 오세조 이다.
공의 조부 휘 석건(碩健)은 현령이니 청백리로 이름이 나타나고 처음 칠원 유동에 살았으며 돌아가신
아버지 휘 완(琬)은 사직(司直)이니 부모에 지극히 효성이 있었고 여묘 하였으며
어머니는 김해배씨 정곡 세적의 딸이요 배는 상주 주(周)씨 이니 공과 같이합부 하였다.
세 아들 중에
장남 여지는 무인으로 첨정이니 임진란에 순절하여 선무훈에 기록되고
둘째아들 여탄은 학행이 있으나 또한 임란에 졸 하니 다 같이 후사가 없으며
세째아들 여식은 예빈시참봉 이다.
예빈시참봉의 아들 하나 원록(元錄)은 판결사(判決事)다.
내가 생각컨데 경의 글 한자가 성학(聖學)의 상하를 통하고 종시(終始)를 이루었다.
그 당시 주선생의 문하에서 경서를 잡고 공부한 자 많지 않다고 할수 없는데 특별히
이 묘결(妙訣) 을 공에게 주고 시(詩)로써 노력하라 격려하고 서찰로써 그 뜻을 베푸니
이 어찌 그것에 그치리요 대략 우(右)와 같이 쓰고 명(銘)에 이르되 거룩하다
황씨는 유학(儒學)의 이름난 별족이다.
한 사당 팔현에 공이 그 한분이니 일찍 신문에 올라 경전(敬詮)을 얻어 듣고 이 일로
호(號)를 거니 성망이 울연 하도다.
태학이 천거함에 왕작(爵)을 받았나 세상이 멀다 하지마라.
군지(郡誌)가 어제 같이 소연하다.
내가 비석에 글을 쓰니 오는 백세를 밝게 하리라.
----성산 이기윤 근찬 (星山 李基允 謹撰)----
이기윤 : 1891년(고종 28)∼1971년.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가‧서예가. 자는 집중(執中)이고, 호는 극암(克菴)이다.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출신지는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이다.
사진제공한분 : 황종섭대종회장(24세) 촬영한분 :황일석(25세)
경암공 내외 묘지
공인은 상주 주씨니 고조는 증직 사복시정 상빈이요 고조비는 숙인 영양 김씨니
절도사 유서의 딸이요 증조는 증직 병조참의 장손이요 증조비는 숙인 안동권씨니
목사우의 딸이요 조부는 증직 이조참판 문보요 조모는 정부인 창원 황씨니 부호군 근중의
딸이요 아버지는 수의부위 세곤이니 호조참판 주세붕의 형이요 어머니는 단인 밀양박씨니
증직 승정원 도승지 한주의 딸이라.
삼남일녀를 낳으시니맏은 조요 차는 개(愷)요 끝은 단이라.
자씨가 정덕12년 정축사월 신해에 나셧서 장성하여 통례원 인의 황사겸에게 출가하시니
천성이 정숙하여 제사받들기에 정성을 다하고 가족들의 불평하는 말이 없으며 비복을
무마하고 인리에 융화하니 가도가 가장 윤택하여 종족이 일컬었다.
선조14년 신사 시월 계묘에 별세하시니 향년 65세요 그해 시월 갑인에 칠원 대티의 동쪽
기슭에 장례하였다.
아들 셋이 있으니 여지,여탄,여식,이다.
-----친정동생 조산대부 영천군수겸 춘추관 편수관 단 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