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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원여행기 중 1월 14일 하루 여행기입니다.
학교에 여름방학 자가연수 결과물로 제출하며
여기에도 올려봅니다.
사진은 '중국중원사진' 메뉴판을 보시길 바랍니다.
분량이 많고 아직 정제되지 않은 글이라서
부끄럽고도 미안합니다.
2014년 1월 14일
대묘참관(岱廟參觀)
아침을 먹고 차는 오늘도 여덟 시에 출발한다. 짐을 들고 호텔을 나서는데 로비 입구의 좌우 벽의 꾸밈이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른쪽 벽면에는 윤기 나는 까만색 돌판 위에 수백 개의 황금색 벽돌 문양들을 촘촘하게 붙여 놓았다. 중국 역사 유적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벽돌의 문양을 모아 놓았다.
맞은편의 호텔 안내 아가씨들 등 뒤에 10미터는 넘어 보이는 높이의 벽은 역시 유리알처럼 윤기 나고 칠흑같이 까만 오석 위에 금색의 달필의 초서로 성당(盛唐)의 시인, 두보(712~770)의 시, <망악(望嶽)>을 새겨 놓았다. 정말 눈부시게 아름답고 웅장하다. 다시 한 번 한자의 예술성과 중국의 심오하고 광막한 문화 전통에 감탄한다. 오늘 내가 오를 태산을 두보도 스물아홉 살에 바라보고 또 올랐다. 사람들이 시성(詩聖), 시사(詩史)라고 부르는 두보의 시 한 편이 억만금에 값하는 훌륭한 관광 자원이 됨은 물론이다.
望嶽 동악(東嶽)을 바라보며
垈宗夫如何 대종(태산)은 그 모습이 어떠한가?
齊魯靑未了 제나라 노나라에 푸른 기운 끝이 없어라.
造化鍾神秀 신령하고 빼어난 자연의 기운 모아 이루어졌으니,
陰陽割昏曉 산은 앞뒤로 아침저녁을 갈라놓네.
蕩胸生層雲 뭉게뭉게 층층이 이는 구름 가슴을 시원하게 하고,
決眦入歸鳥 눈을 부릅뜨니 새들이 날아든다.
會當凌絶頂 절정에 꼭 올라서,
一覽衆山小 뭇 산들이 작은 것을 한 눈에 굽어보리라.
차창 밖 경치가 부우옇게 낀 안개에 묻혀 있다. 공기 중의 미세먼지가 아침 안개와 섞여서 스모그처럼 시야를 가린다. 태안시청도 희미하고 그 뒤의 태산 줄기도 실루엣만 드러낸다.
버스가 선 곳은 벽돌로 쌓은 높은 성문 앞이었다. 정양문(正陽門) 위의 누각에 대묘(岱廟)라는 웅장하고 힘찬 황금색 글씨의 예서체 편액이 붙어 있다. 산악을 뜻하는 대(岱) 중에 마루가 되는 산악이 태산(泰山)이다. 그래서 태산을 중국 오악 중에서 홀로 존귀하다는 뜻으로, 사람들은 태산을 ‘오악독존(五嶽獨尊)’이라고 부른다. 대묘는 곧 태산의 신을 모신 사당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여기에서 제사를 지내고 태산에 올라 봉선의식을 행하였다.
계씨가 태산에서 여제를 지내었다. 공자께서 염유에게 일러 말씀하시었다: “너는 그것을 막을 길이 없었느냐?” 염유가 이에 대답하여 말하였다: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아~ 슬프도다! 일찍이 태산의 하느님이 임방만도 못하다는 말인가!”
(季氏旅於泰山, 子爲冉有曰: “女弗能救與?” 子曰: “不能.” 子曰: “嗚呼! 曾謂泰山不如林放乎?”)
<<논어>> <팔일>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5년 전에 김용옥 교수가 번역한 방대한 분량의 <<논어>>를 밑줄 치며 흥미롭게 읽었다. 이 대목을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친분이 두터운 청하중학교 박창원 교장 선생님의 자료 번역 요청을 받았다. 정규욱이 1890년에 쓴 내연산 산신당인 백계당 계의 취지문인 <백계당숭봉수계서문>이었다. 이 글에서 ‘然先聖曰 泰山不如林放乎’라는 글귀가 나오지 않는가! 우리겨레에게도 공자님은 성인이었고 <<논어>>는 제일의 고전이었다. 보내온 다른 분의 기존 번역문은 이 구절을 오역하고 있었다.
서세동점, 식민지배, 전쟁과 분단이라는 20세기 우리 역사의 격랑 속에서 전통은 단절되고, 공자는 푸대접을 받고, 한문 고전은 케케묵은 책으로 치부된 결과일 것이다. 한글 전용 어문 교육정책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까막눈이 되고 존재의 뿌리인 전통문화와 한문문명권에서 소외되었던가!
오늘 아침에 태산신의 사당에 발걸음이 이렇게 이르게 될 줄은 몰랐다. 공자님 시대 이전부터 태산은 중국인의 존재의 자궁과도 같은 시원의 산이다. 역대 천자의 정통성은 모두 태산신에게서 나왔다. 우리나라에도 단군사당을 짓고 개천절에 대통령이 참배하면 좋겠다.
이층의 누각 지붕 아래에 용과 구름, 학 등이 새겨진 패방의 네 기둥 밑에는 돌사자가 있다. 정양문 안으로 들어가자 너른 마당에는 귀하다는 백송이 신도 좌우로 심어져 있고, 그 바깥으로는 늙은 측백나무들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너른 뜰 곳곳에 서 있다. 전체가 황제가 거주하는 궁궐처럼 되어 있다. 오른쪽 담장 아래로 가니 크고 작은 비석들이 곳곳에 서 있다. 그 중에는 귀부의 높이만 2미터가 되는 거대한 것도 있다. 황제가 봉선의식을 행하며 기념으로 세운 비석일 것이다. ‘登泰觀海(태산에 올라 바다를 본다)’, ‘簣爲山(한 소쿠리의 흙을 모아 태산을 이룬다.)’이 있고, ‘第一山’의 ‘第一’ 두 자는 미법산수화법을 창안한 북송의 서화가 미불이 쓴 것인데, 이 두 글자는 이번 여행에서 여러 번 보았다. 7년 전에 갔던 아미산 만년사에도 있었다.
동쪽 작은 문으로 들어가니 수령이 이천 년은 된다는 측백나무 두 그루가 있다. 푸른 잎이 나 있지만 둥치는 몇 아름이 넘고 껍질이 벗겨지고 속은 파였지만 기나긴 세월 동안 풍상을 견디어 온 나무는 고풍스러워서 성자를 닮았다. 돌난간을 두르고 국가에서도 나무를 국가의 보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그 앞에는 유해율(劉海栗)이 쓴 ‘漢栢’이라고 쓴 큰 비석이 서 있고, 옆에는 웅필의 ‘觀海’, ‘漢柏凌寒’이라고 쓴 비석, 나무를 그림으로 새긴 비석까지 서 있다. 사마천도 이 나무를 보았는지 모르겠다.
한백 북쪽의 동어좌(東御座)라고 쓰인 편액이 걸린 작은 문 안으로 들어갔다. 아담한 건물이 있고 뜰이 나온다. 그런데 뜰에 벽돌로 사방을 보호하고 유리판을 비면에 붙여 놓은 현존 중국 최고의 비석이 있다. 진시황이 태산에 올라 봉선을 할 때 수행했던 경(卿) 이사(李斯)가 쓴 비의 비편이다. 문자 통일 이후에 쓴 소전체(小篆體) 글씨이다. 이 소전체는 이사 자신이 만든 것이며, 태산에서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2200년 전, 고조선 시대의 비석을 오늘 내가 볼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모두 10자도 되지 않는다. 그 중에 내가 읽을 수 있는 글자는 3번이나 나오는 ‘臣’자 밖에 없다.
초나라에서 자라고 제나라의 직하학궁으로 가서 순자에게 법가사상을 배운 냉혹한 현실주의자가 이사이다. 진라에 가서 여불위의 식객이 되었다가 재상이 되어 6국을 정복하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의 책사로서 분서갱유와 문자통일을 주도한 인물이다. <<사기>> <진시황본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진시황 28년에 노나라의 유생들과 상의하여 진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을 새기고, 봉선과 산천에 대한 망제의 일을 의논하였다. 그리고 태산에 올라서 비석을 세우고, 토단을 쌓아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마치고 산을 내려오던 중 비바람을 만나서 나무 아래서 잠시 피하였다. 이 일로 그 나무를 오대부로 봉하였다. 이어서 양보산에 올라 땅에 제사를 지내고 비석을 세워 글을 새겼다.
그런데, 뜰에는 나의 눈길을 끄는 꽃이 한겨울 찬 날씨에 꽃망울을 한창 터트리고 있다. 언뜻 보면 영락없는 개나리꽃이다. 가까이로 다가서니 향긋하고 진한 냄새가 코끝에 묻어왔다. 여행 오기 한 주일 전에 기청산식물원의 아촌 선생님이 카카오스토리에 올린 랍매(臘梅) 사진을 보며 난생 처음 알게 된 꽃이다. 한겨울 엄동설한에 피어나는 이 신비로운 꽃을 보러 식물원에 찾아가고도 싶었다. 그런데, 중국에 와서 태산신의 뜰에서 랍매의 꽃향기를 맡을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방으로의 여행은 모험과 새로움과 발견의 연속인가 보다. 여행은 타성에 젖은 나의 감성을 깨어나게 하고, 가슴속의 온갖 시름들을 내 몰고, 무디어지는 지성을 날 서게 하며, 게으르고 나른한 몸을 긴장시키고 활기를 불어 넣는 최고의 명상임에 분명하다.
돌아나와 ‘천하귀인’이라고 쓴 편액이 걸린 큰 문을 들어섰다. 태산은 동악이니, 오상의 인에 해당하고,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동악의 인덕(생명을 키우는 덕성)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대묘의 중정(中庭)이다. 역시 마당에는 편백나무 노거수들이 숲을 이룬다. 대전 마당의 섬돌 아래에는 중국의 보물로 지정된 노백이 서 있다. 두보가 제갈량의 사당을 방문하고 지은 시, <노백행>에 나오는 그런 편백이다. 그 아래의 수석은 사람들이 상서로운 기운을 얻고 싶어 만진 자국이 반질반질하다. 역시나 우리의 여자 선생님들도 주위를 빙글 빙글 돌며 즐겁게 돌을 만진다.
돌계단 위에 올라가니 역시나 돌로 바닥이 깔린 마당에 큰 쇠 향로가 놓여 있고, 붉은 칠을 한 9칸 기둥에 주황색의 이층 기와지붕을 한 웅장한 궁전 건물이 서 있다. 공묘, 대성전과 자금성의 태화전과 함께 중국의 3대 건축물에 들어간다고 한다. 송천황전(宋天貺殿)이라고 쓴 붉은 편액이 지붕 사이에 세로로 달려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금빛 휘황한 목조 감실 안에 면류관을 쓰고 천자의 홀을 두 손으로 잡은 금빛 태산신의 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 앞에는 ‘동악태산지신’이라는 위패가 있고 조화를 꽂은 화병과 제물이 차려진 붉은 바탕에 금 빛 용을 그린 경상 모양의 제상이 놓여 있다. 감실 위에는 두 마리 황금빛 용 조각이 마주하고, 그 위의 천정에는 청 나라 황제가 쓴 것으로 보이는 청색 바탕에 금물로 쓴 ‘配天作鎭(배천작진-하늘과 짝 지워지고 대지를 거느린다.)’ 편액이 걸렸다. 출입문 위에는 황금빛이 찬란한 용들이 테두리를 두르고 청색의 바탕에 금물로 쓴 ‘岱封錫福(대봉석복-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큰 복을 내린다.)’이라는 청나라 옹정제의 편액이 걸려 있다. 또 그 옆에는 붉은 글씨로 쓴 ‘大德日生’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바닥에는 높이가 일 미터는 되어 보이는 큼직큼직한 놋쇠 제기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 옆엔 비단에 수를 화려하게 놓은 번, 일산이 있고 도끼, 칼 같은 병기들이 나열되어 있다.
신상 좌우의 높이 솟은 기둥 사이로 보이는 높고 넓은 삼면 벽에는 ‘泰山神啓蹕回鑾圖’가 그려져 있다. 신상 왼쪽 편의 동벽에는 태산신이 천하를 순행(巡幸)하는 장면이고, 서벽에는 태산신이 대묘로 돌아오는 모습을 그렸다. 생생한 표정의 홀을 든 문신들, 칼을 집고 투구에 황금 갑옷을 입은 무신들, 붉은 색 산호 가지의 화분을 진 사자와 향로를 등에 실은 코끼리, 갑옷을 입고 화살을 차고 말을 탄 무장들,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리는 악공들, 가마를 탄 왕자, 4개의 바퀴가 있고 쨍그랑쨍그랑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금방울이 달린 수레의 비단 장막 안에 면류관을 쓰고 천자홀을 쥐고 앉은 태산신, 일산과 깃발을 든 수많은 궁중의 시종들, 돌다리, 나무와 산, 누각과 정자, 화려한 저택이 늘어 서있는 도심의 길거리, 황제들이 깃발을 휘날리며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태산으로 봉선을 하러 오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북송 진종(眞宗, 997~1022) 황제가 봉선의식을 올리기 위하여 태산으로 행차하는 장관을 모델로 한 송나라 때의 웅장한 벽화이다. 우리나라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수원으로 한강에 배다리를 놓고 행차한 정조의 거둥 행렬을 그린 의궤의 그림과 닮았지만 규모와 그려진 시기가 우리를 압도한다. 설명문에는 그림의 길이가 62미터이고 높이가 3.3미터이며, 등장하는 다양한 표정의 인물들이 697명이라고 한다. 참으로 놀라운 문화유산이다. 대묘는 세계 자연 및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본전을 돌아 뒤쪽으로 가니 마당에는 측백나무 노거수들이 그늘을 이루고 잎이 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큰 은행나무가 서 있다. 그 꼭대기에 네댓 개의 까치집들을 이고 있다.
전각으로 들어가니 태산신의 부인이 모셔져 있다. 황제들이 살던 자금성은 물론이고 이번 여행에서 가 본 모든 사당들에는 남신이 모셔진 본전 뒤에는 그 부인을 모신 전각이 있었다. 태극의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만물을 생성한다는 우주관이 중국 문화의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사당의 처마 아래 출입문 위에는 청색 바탕에 화려한 테두리를 두른 ‘권여조화(權與造化)’라고 쓴 금빛 글씨에 건륭황제의 어새가 새겨진 큰 편액이 걸려 있다. ‘東嶽淑明之神’이라는 글자가 보이는 위패가 있고 역시 그 앞에도 분홍색의 작약꽃과 제물이 올려져 있는 제상이 있다. 좌우에는 두 명의 시녀들이 부채를 들고 서 있다. 시녀들 뒤의 벽에는 흑백으로 음양이 어울려 있는 태극 문양이 선명하게 수놓인 비단 당번(幢番)이 6장 걸려 있다. 분홍색 두 장에는 ‘大淑大明’(큰 맑음 큰 밝음), ‘大慈大悲’(큰 사랑 큰 연민), 노랑색 두 장에는 ‘普天共仰(천하가 함께 우러름)’, ‘與聖同明(성인과 같은 밝음)’, 주홍색 두 장에는 ‘至孝至慈(지극한 효도와 지극한 자애)’, ‘廣靈慈惠(넓은 신령 자애로운 은혜)’라고 글자를 수놓았다. 동벽 밑에는 편종, 서벽 아래에는 편경이 놓여 있었다. 편종은 연주를 시작할 때 두드린 금성이고 편경은 연주를 마무리할 때 친 옥진이다. 역대의 황제들이 행차하여 금성옥진의 장엄한 제례를 태산신 부부에게 올리고, 천하의 만민들에게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큰 복을 내려주기를 빌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니 후원이 있다. 대나무가 심어져 있고 수석과 분재 화분들이 좌우의 정원에 나열되어 있었다. 후문을 빠져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버스에 올랐다. 태안시내의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위로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가지가 뻗어 있다. 차가 왕래하기에 불편하지만 여름이 오면 뜨거운 햇빛을 가려주는 넓은 그늘을 이룰 것이다.
태산등정(泰山登頂)
태산으로 가는 길목에는 돌을 다듬어 수석으로 만들어 파는 집이 자주 눈에 띈다. 로타리에는 검푸른 바위를 세워 놓았는데, 최근에 부근에서 발견된 옥돌이라고 하였다. 박 단장님이 시조 한 머리를 읊는다. 시조창 열두 곡을 다 배운 나는 반가웠다. 곡조를 비슷하게 잘 읊는다. 누구나가 다 아는 양사언의 시조이다. 포항에서 버스 타고 인천항으로 올 때부터 천재적인 언어유희 감각을 가진 단장님이 이번에도 멋진 유머로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케이블카 타고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만, 사람이 제 아니 타고 산만 높다 하더라!”
태산 입구의 터미널에서 텔레비전 영상으로 태산의 전체 모습을 보았다. 입장권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니 케이블카가 있는 곳까지 가는 셔틀 버스를 탔다. 산 속으로 들어가는 계곡은 이름이 채석계(彩石溪)이다. 그리 아름답지는 않지만 바위 봉우리 속에 흐르는 계곡인데, 창밖으로 작은 사당도 보이고 절도 있지만 겨울이라 그런지 물은 말랐다. 사방이 암봉으로 둘러싸인 산중에 있는 도화원삭도(桃花源索道) 마당에 내려 다시 삭도(케이블카)를 탔다. 6명이 타는 케이블카를 타고 암봉 사이로 가파르게 난 골짜기 위로 올랐다. 아래를 내다보니 희미하지만 구불구불한 오솔길이 보이고, 산중턱에 암자도 있다. 폭포가 얼어 있고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나뭇가지들마다 상고대가 피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나뭇가지마다 안개와 서리가 얼어서 산호 숲을 이루고 있다. 이층 식당과 찻집이 어깨를 붙이고 50미터는 넘게 길 양쪽에 늘어 서있는 길거리를 지나자 남천문(南天門)과 만나는 마당이 나온다. 왕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정상까지 다녀오는 시간은 한 시간이 주어졌다. 천가(天街)라고 쓰인 석방을 지나자 김이 술술 나는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길가에 있다.
운무에 휩싸인 길을 가니 다시 ‘中昇’이라 새겨진 석문이 나온다. 산 아래쪽은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안개에 묻혀있다. 상고대가 가지마다 피어서 태산의 풍경이 더욱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눈앞에 그야말로 신선과 선녀, 산신들이 살고 있는 신선경을 펼쳐 놓는다. 천하제일의 명산인 태산은 정말로 알뜰하고 조촐한 모습으로 해동의 속객을 맞이해 준다. 우리들은 모두가 천상의 길거리를 걷는 신선, 선녀들이었다. 백운공예라는 단청이 곱게 칠해진 가게를 지나자 정상 아래로 햇빛이 들고 상고대 숲이 은세계를 이룬 풍경 속에는 공자님 사당이 멀리 바라보이고, 그 위의 정상 부근에는 호텔이 있다. 호텔 이름이 재미있다. ‘신식빈관(神息賓館)’, 신들이 쉬어가는 여관이다. 수백 계단을 올라 서신문(西神門)이라고 새겨진 홍예문을 들어서니 벽하사 중문 앞이다. 남쪽으로 난 홍예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래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일 미터는 될 붉은 색 굵은 향에 불을 붙여 향로에 꽂으며 향을 바친다. 그 위의 바위 밑에는 만대첨앙(萬代瞻仰)이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진 분향대가 보인다. 계단 위의 벽하사 중문을 들어서니 붉은 칠을 한 건물들로 에워싸인 작은 마당이 있다. 그 가운데에는 붉은 헝겊이 다닥다닥 묶여져 있는 철망으로 둘러싸인 비석과 집 모양의 향로가 있다. 사당에는 태산의 여신인 성모(聖母), 벽하원군(碧霞元君)의 상을 모시고 있다. 사람들이 그 앞에 놓인 둥근 방석에 꿇어 앉아 절을 하며 소원을 빌고 있다. 사원 앞마당에 서있는 상투를 틀고 검은색 도복을 입은 젊은 도사에게 다가가 같이 사진을 찍자고 부탁하였더니,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사무실로 들어 가버린다.
벽하사 동문을 지나서 다시 계단을 올랐다. 길가의 상고대 핀 수풀 속에는 콩알처럼 작고 빨간 열매를 따 먹는 참새 떼가 종알종알 지저귀며 나뭇가지를 옮겨 다닌다. 오르막 입구에는 신비롭게도 성수정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고 돌난간으로 보호한 샘이 보였다. 다가가서 속을 내려다보니 물은 말랐고 바닥에는 지폐가 뿌려져 있다.
계단을 조금 더 올라가니 바닥에 돌을 다듬어 벽돌처럼 깔아 놓은 큰 마당이 있고 그 북쪽 테두리에는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대관봉(大觀峰) 비석 바위 병풍이 쳐져 있다. 오른쪽에는 당 현종이 여기 태산 꼭대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하고, 그 일을 천고에 길이 남기고자 직접 지은 비문을 새긴 비석, 천하대관비가 장관이다. 두 마리의 용이 머리를 장식하고 그 아래에 '天下大觀 紀泰山銘'이라는 제목 아래에 ‘朕宅位十有四載顧惟不德’으로 시작하여 大唐 開元 십사 년 구월 십이 일이라는 날짜가 끝에 새겨져 있는 모두 일천여덟 금빛 찬란한 글자가 새겨져 있는 웅장한 마애비(磨崖碑)다. 그 서쪽에는 ‘壁立萬仞’, ‘天地同攸’, ‘彌高’, ‘星辰可摘’, ‘置身霄漢’, ‘巖巖’, ‘呼吸尊 宇宙崇’, ‘五岳之尊’, ‘與國同安’, ‘雲峰’, ‘與國咸寧 體乾潤物’ 같은 대자 문구가 새겨져 있고 붉은 칠을 하였다. ‘靑壁丹崖’ 네 글자는 청색으로 칠했고, 작은 글씨로 시나 문장을 적은 곳도 있다.
태산은 중국인에게 우리 겨레의 백두산과도 같다. 성스러운 하늘 호수, 천지가 있는 백두산에 법륜 스님 따라 두 번이나 올랐다.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나 마치 천상의 화원과도 같았던 서쪽 비탈로 올랐을 때는 운무가 자욱하여 천지를 끝내 보지 못하고 하릴없이 북중국경비의 경계를 넘어서 나의 다른 반쪽 땅, 북한 땅을 밟고 나왔다. 굉음을 내며 쏟아지는 웅장한 장백폭포가 있는 북쪽 가파른 계단으로 다시금 올라서 거대한 하늘 호수, 너무나도 장엄하고 성스러운 천지를 보고, 바지를 걷고 물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하였다. 중국과 한국이 땅을 맞대고 살아온 문명의 역사가 적어도 이천 년은 된다. 중국 문명의 언저리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에게도 태산은 누구나가 오르고 싶은 성스러운 산악이다.
대관봉 마당에서 다시 옥황정 사당이 있는 태산의 정상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계단 좌우에는 허연 바위가 가득하고 바위마다 붉은 칠을 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五嶽獨尊’, ‘登高壯觀天地間’, ‘仰觀俯察’, ‘擎天捙日’, ‘昻頭天外’, ‘登峯造極’, ‘奇觀’, ‘孔登巖’, ‘果然’ 같은 문구들 옆에는 특이하게도 ‘萬法唯識’이라고 하는 현장법사가 전한 유식불교인 법상종의 글귀가 눈에 띈다. 이 산에는 공자님이 올라 천하를 굽어보았고 공자묘가 있다. 태산 성모신을 모신 벽하사와 옥황상제를 모신 옥황정 같은 도교사원이 있다. 유불도 삼교의 문화유산이 이 산에는 공존하는 것이다. 위로는 진시황이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이사가 쓴 비가 남아 있고 아래로는 중화민국 시대의 관리와 오늘 중화인민공화국 시대의 지도자들이 남긴 기념 문구가 새겨져 있다. 벼랑 끝에 서서 바라보자니 구름이 뭉게뭉게 오르고 그 위로 백색 바위 봉우리가 성자의 얼굴처럼 솟아 있다.
바위 아래에 작은 글씨로 새겨놓은 시를 읽어본다. 1927년에 중화민국의 한 장군이 추석에 올라 남긴 것이다. 그 거친 기상이 진시황을 닮았다.
眼底乾坤小 눈 아래 천지가 작고,
胸中塊疊多 가슴 속 응어리 많다.
峰頭最高處 봉우리 꼭대기에 서서,
拔劍縱狂歌 칼을 빼어들고 미친 듯 노래를 부른다.
民國十六年丁卯中秋 중화민국 십육년 정묘 중추
다시 계단을 올라 ‘칙수옥황정(勅修玉皇頂)’이라는 글자가 가로로 새겨진 문패가 붙은 석조 아치문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마당 가운데에는 바위가 있고 그 위에는 붉은 글씨로, 태산을 뜻하는 雨자를 닮은 도교의 부적 글자 밑에 泰山極頂 1545米라고 쓰인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그 둘레의 돌난간에는 무수한 놋자물통이 채워져 있고 붉은 천이 울긋불긋 달려있다. 사당에는 옥황상제상이 모셔져 있고 그 앞에 ‘玉皇大帝’라고 쓴 위패가 있다. 사당 곁에는 ‘古登封臺’ 넉 자가 크게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마당 담장 아래에는 높이가 오미터는 되어 보이는 글자가 없는 사각형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한 나라 무제가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그 옆에는 현대 중국의 인문학자 궈뭐루(郭沫若)의 시비가 있다.
공자님 시대부터 청나라 때까지 여기 태산 절정에 올라 토단을 닦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사당 뒤로 가서 담장 바깥으로 보니 구름에 휩싸여 산 아래 풍경은 전혀 볼 수 없다. 광활한 산동 평야의 한 가운데에 이 태산이 우뚝 솟아 있어서 이곳에 서면 아스라이 바다가 보이고, 발아래에 뭇 산들이 올망졸망하며, 궁궐과 인가는 개미굴보다 더 작아 보였을 것이다.
공자님도 지평선 아득히 솟은 태산을 어린 날부터 바라보며 자랐다. 너새니엘 호손의 소설, <큰 바위 얼굴>에 나오는 소년처럼 말이다. 공자는 자신을 태산에 비유하였다. 공자는 태산의 기운이 잉태한 인물인 것이다. 누구나 들어서 아는 <<맹자>> <진심장구>에 나오는 그 유명한 말을 다시 음미해 본다.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공자께서 노나라의 동산에 오르시니 당신이 생장한 터전 노나라가 너무도 작게 보였다. 그런데 다시 태산에 오르시니 천하가 작게 보였다. 그러므로 바다를 흠껏 맛본 사람은 시냇가에서만 논 사람들 앞에서 물에 관하여 말하기가 어렵고, 성인의 문하에서 직접 배운 사람은 학문의 경지를 시골 서생들 앞에서 형언하기 어렵다. 대저 물을 본다는 것은 방법의 차원이 다양한 것이니 반드시 그 장활한 파란을 보아야 한다. 해와 달과 같은 거대한 인격을 갖추게 되면 그 빛은 아무리 작은 틈새의 공간이라도 반드시 비춘다. 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라! 앞에 웅덩이가 있으면 반드시 그것을 다 채우고 난 후에야 앞으로 나아간다. 군자가 도에 뜻을 둔다고 하는 것은 기초적 실력을 완비하여 문채(文彩)를 이루지 아니 하면 통달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孟子曰: “孔子登東山而小魯, 登泰山而小天下. 故觀於海者難爲水, 遊於聖人之門者難爲焉. 觀水有術, 必觀其瀾. 日月有明, 容光必照焉. 有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君子之志於道也, 不成章不達.“
옥황정에서 내려오며 오악독존 비석 앞에서 태산 등정 기념 소주를 한 잔씩 마셨지만 나는 사진만 한 장 촬영하고 술은 마음으로만 마셨다. 다시 대관봉 앞을 내려와 벽하사 동문을 지나 서문을 내려왔다. 백운빈관을 지나자 길가의 바위에 새겨진 ‘登泰山看祖國山河之壯麗!(태산에 올라 조국 산하의 장려함을 본다!)’라는 글씨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1984년 6월에 젊은 날 5.4운동에도 참여하였던 팔순의 원로 여성혁명가이고 주은래의 부인인 등영초(登穎超)가 썼다.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미려한 글씨지만 굳센 느낌을 준다. 대묘의 비석에 새겨진 같은 글씨를 보았지만, 태산의 수많은 각서 중에, 만년필 글씨체에 감탄사 문장 부호까지 붙은 문구가 눈길을 끈다. 여성의 글씨로는 거의 유일한 것이다. 공산당 총서기를 지낸 강경파 정치인으로 1995년에 ‘전인대의장’으로서 우리나라를 방문한 교석(喬石)의 글씨, ‘海岱繼目’도 보인다. 태산노모가 내린 글자의 비석도 새겨져 있는데, 무슨 글자인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글자들이 새겨진 마애비도 있다.
中昇門 아래의 천가 식당 앞에 멈추었다. 차가운 날씨에 김이 술술 나는 마두나 기름기를 빼고 굽는 밀가루 호떡, 꽈배기, 밀가룰 엷게 펴서 부친 커다란 빈대떡을 판다. 무슨 맛일까 당기는 구미를 김옥순 선생님에게 한 조각 얻어먹는 것으로 풀었다. 김옥순 샘은 울릉도에서 오셨다. 퇴직하고 울릉도에서 민박 영업도 하며 울릉도 약소를 키우신다.
남천문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파른 계단이 끝없이 이어진다. 중턱에서 수천계단을 올라와 마주치는 정상의 문이 이 문이다. 이 문으로 올라오는 계단의 중간에 오대부송이 있다. 진시황제가 태산에 올라 봉선의식을 거행하고 내려가던 중 비바람을 피한 나무에 오대부라는 벼슬을 내렸다는 기록이 <<사기>> <진시황본기>에 나온다. 케이블카를 타니 태산에 오면 보고 싶었던 그 소나무를 보지 못하여 아쉬웠다.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왔다. 케이블카 안에서 여선생님의 성함을 물었다. 임정숙, 김인숙, 최미숙 샘들이다. 임정숙 샘은 중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는데 해외여행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신다. 이번 중국여행이 전공과목과 불가분의 관계이니 나처럼 보람된 여행이 될 것이다. 김인숙, 최미숙 샘은 인천에서 동참하였다. 두 분이 단짝이 되어 표정이 참 밝으시다. 그리고, 관포지교의 우정을 나누는 차재환, 윤현중 샘이다. 이 분들은 태산을 함께 등정하고 태산의 케이블카에서 얼굴을 마주하며 만났으니 그 얼마나 고귀한 인연들인가!
케이블카를 타러 다시 텅 빈 이층 식당가를 걸어 나왔다. 태산을 등정하고 내려오는 33명의 남녀가 왕사장님을 왕초로 삼아 보무도 당당하게 길을 주름잡았다. 우리는 하늘 거리를 휘어잡은 ‘깡패들’이었다. 도로가 태산의 발치에는 비석이 세워진 어느 문중의 묘역이 보인다. 묘마다 봉분과 비석이 있는 것이 우리나라와 비슷한 모습이다.
맹부참방(孟府參訪)
아침에 출발하였던 태산국제반점으로 돌아와 점심밥을 먹었다. 식사를 하고 나오니 식당 수조에 산천어들이 헤엄친다. 맹자님 사당과 맹자님 고택이 있는 추성(鄒城)으로 차는 달린다. 가는 길에 난생처음 가보는 재미있는 곳에 들렀다. 라텍스 침구류들을 파는 창고형 가게이다. 안으로 들어가서 소파에 앉자 곱슬머리를 하고 억양이 북한이나 연변 말투를 내는 조선족 우리 동포 사원이 나와 중국의 남쪽지역에 고무나무가 많다고 하며, 라텍스 제품의 장점과 효능을 또랑또랑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청산류수로 설명해 주었다.
어느 분이 동남아시아에 여행 가서 400만원어치의 라텍스를 사고는 후회하였다는 말이 기억난다. 아내가 학교에서 앙코르와트에 친목여행 갔을 때 사 온 라텍스 베개를 지금도 쓰고 있다. 하지만, 피곤하고 추워서 나는 머리를 외투에 파묻고 눈을 감은 채 동포의 음성을 자장가 삼아 겨울 호수의 백조처럼 풋잠에 들었다. 마침내 일장 소개가 끝나고 매장의 제품들을 둘러보았다. 천희연유교(千禧緣乳膠) 가게에서 나와 다시 추성으로 향하였다.
추성이 그렇게 멀지는 않았다. 아마도 2시간 정도 이동하였을 것이다. 추성 시내에 이르자 익숙한 식당 이름이 눈에 띈다. ‘家和萬福源’, 가정 화목은 만복의 근원이다. 화목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에서 출발한다. 길거리 가로등 기둥에는 죽간(竹簡) 두루마리 책 그림이 있는 간판이 붙어있다. 거기에 ‘人之患 在好爲人師(사람의 병통 중의 하나가 타인의 스승 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맹자> <이루(離婁)>에 나오는 말.)’, ‘孟子 公開課(<<맹자>> 공개 강의)’라는 붓글씨가 쓰였다. 교사의 직분을 가진 내가 이 맹자님 말씀에 괜히 가슴이 뜨끔해지는 것은 왜일까? 시간이 허락되면 나도 저 <<맹자>> 공개 수업에 출석하여 배우고 싶었다. 맹자님 고향 마을에서 듣는 <<맹자>>는 얼마나 각별한 맛이 있을까!
그런데, <<맹자>>에는 이 구절 바로 다음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제자 악정자(樂正子)가 제나라의 몰염치한 권력자 자오(子敖)의 사치스러운 행락을 따라 노나라에서 제나라로 왔다가 며칠이 지난 뒤에야 늦게 문안 인사를 하러 오자, 맹자는 제자를 꾸짖었다.
“자네는 머물 객사가 정해진 연후에나 어른을 찾아뵙는 것이라고 배워 처먹었는가?
(子聞舍館定然後求見長者乎)”.
여헌 선생 문집의 <입암기>를 읽고, 꿈에도 가보고 싶었던 입암에 어둑해서야 도착한 병와에게 마중 나온 사람들이 먼 길 오느라 피곤한 것을 생각하여, 서원의 여헌 선생 영당(影堂)에 참배하는 일은 내일로 미루시라고 하자, 병와는
“자네들은 숙소가 정해진 뒤에 어른을 찾아뵙는가?(子聞舍館定然後求見長者乎) 나는 감히 악정자가 되고 싶지는 않네!”
라고 하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맹자>>를 읽고서 호연지기를 가진 대장부가 되고 권력과 재물 앞에서 당당하였고, 선비로서 예의염치를 잃지 않고 살았다.
맹자님 고향에 온 것이 마치 고향에 온 듯 반가웠다. ‘오십보백보’, ‘호연지기’, ‘사단 칠정’, ‘대장부’ 같이 어릴 때부터 들었던 말들의 출전이 <<맹자>>이다.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출가를 하였던 보경사의 오암 스님 문집에도 <<맹자>> 독후감을 읊은 시가 실려 있다.
내 고향 영천 출신의 요절한 미모의 작가, 일제강점기에 진보적인 민족운동을 한 인텔리 여성, 백신애도 어린 날 집 가까이에 있는 향교에서 <<맹자>>를 배웠다. 그녀의 수필, <백안(白雁)>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건너 못에 날아오는 기러기는 백설같이 희고 깨끗한 털을 가졌으므로 처음에는
“기러기가 빛이 왜 흰고.”
하는 의심이 생겨 촌부들에게 물어보니 그것은
“고니”
라는 거요, 라고 대답했다. 나는 얼마만치 실망이 되어 어떻게든지 그것이 기러기라는 확증을 찾기에 애썼다. 그 울음소리나 날아가는 모양이 꼭 기러기와 틀림없는 빛깔이 희다. 누가 무어라고 하더라도 흰기러기도 있다는 것만 알고 싶어 누구에게 물어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어느 날 밤 요란한 기러기 소리를 들으며 앉았으려니 홀연 입에서 나도 모르게 글 읽듯 군소리가 나왔다. 무의식간에 나오는 군소리가 가끔 나에게 반가움을 느끼게 하는 때가 있다. 내가 어릴 때 아주 재미있어 부르다가 잊어버린 노래나 어느 때 기억조차 없는 한시 구절 같은 것이 툭 튀어나오기를 잘 하는 까닭이다. 이날 저녁에도 열서너 살 적 배워보고 그 후는 꿈에도 되풀이 한번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인데, 입술이 제 혼자 기억하여 군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맹자양혜왕孟子見梁惠王 하신데, 왕이 입어소상立於沼上 이러시니, 고홍안미록왈顧鴻雁麋鹿曰 현자賢者도 역낙차호亦樂此乎 잇가.”
하고 내 입술은 그 다음으로 줄줄 내려가고 있는데 그때 내 머리는 그 군소리를 듣고 무엇이 생각났는지 내 몸을 재촉하여 책장을 뒤지게 했다. 나는 연방 군소리를 하며 책장 한편 구석에서 <<맹자>>를 끄집어내 막 뒤져보았더니, 마침내 내가 알고자 애쓰는 것을 알아내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우리 집 건너 못에 날아오는 그 백색의 새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맹자>> 책은 현토주해(懸吐註解) 한 것이었으므로 내가 군소리로 외었던 글의 주해란(註解欄)에 ‘홍鴻’은 ‘안지대자야雁之大者也’ 라고 쓰여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공연히 무척 반가워 얼른 옥편을 열고 ‘홍鴻’ 자(字)를 찾아보니 역시 백색(白色)으로 ‘안지대자雁之大者’라고 쓰여 있었다.
“올치, 그러면 그렇지. 기러기임에는 틀림없다.”
하고 기뻐했다. 그 이튿날부터는 안심하고 기러기, 기러기 하고 부르게 되었으므로 전보다 더 운치가 깊었다.
금년 겨울은 봄날같이 따뜻한 날이 많으므로 거의 날마다 푸르게 개인 아침 하늘 아래 수백 마리씩 열을 지어 저 먼 앞산으로부터 기럭기럭 서로 부르며 대답하며 날아오는 아름다움. 더구나 아침햇발에 백설 같은 그 나래들이 장미색으로 내 눈에 비치는 그 나래의 맑은 빛이 끝없이 신비스럽고 보드라운 그 나래 소리에 내 영혼도 함께 청정해지는 듯 하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월명(月明)하고 기청(氣淸)한 심야에는 외기러기 아닌 떼 기러기들의 상호(相呼)하는 요란한 울음소리에 튀미한 잠꾸러기인 나로서도 잠 못 들어 남폿불을 돋웠다 낮추었다 하며 애꿎게 책장만 뒤지게 한다. 어떤 때는 책을 치켜든 팔이 기진하여 잠을 들이려 애를 쓰면 두 귀에 요란하던 기럭기럭 소리가 가슴속에까지 파고들어 온 몸뚱어리 속까지 새어들고 나중에는 온 방 안에 꽉 차고 온 천지에 꽉 차서 기럭기럭 울음소리에 내 정신조차 혼미하여진다.
금년 겨울은 기러기 속에서 거의 보내게 되는가, 고 생각이 든다. 그저께는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고 내다보니 만공(滿空)에 백설이요, 온 땅 위가 또한 백설에 잠기어 있었다.
“오늘은 기러기들이 어데 가서 이 눈을 피하는고.”
하며 생각하였더니 의외에도 반가운 기러기 울음소리가 설공(雪空)에 들려왔다.
나는 눈을 그대로 맞으며 바삐 들 가운데 나서니 여전하게 기러기들은 떼를 지어 내 머리 위로 날아가고 있었다.
분분한 설공을 나는 흰 나래들...... . 이 또한 기막히게 아름다워 단 하나 나의 혼이 나래 따라 끝없이 갔다 오니 추워진 내 옷 위에 눈이 쌓여 있었다.
“응당 나래 위에 흰 눈이 쌓였으련만, 나래 역시 흰 빛이라 내 눈에 보이지 않았으니 그 나래 무거운 줄을 몰랐구나.”
나는 무식한 시인 부스러기 같이 군소리를 하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조선일보>(1937년 3월 5~7일))
-이중기, <<백신애선집>>(현대문학)
사학과에 입학하여 자형의 추천으로 한문 공부의 교과서로 삼아서 <<맹자>>의 첫 부분을 여름방학에 읽은 경험이 있다. 지구력도 없고 소심한 나는 냄새만 맡다가 다 읽지는 못하였다. 초등학교가 학력의 전부인 어느 국회의원은 어릴 때 <<맹자>>를 수백 번 읽었다고 하고, <<맹자>>에 대하여 주변 사람들이 말하지만, 나는 사서집주본 <<맹자>> 책만 구해놓고 읽지는 못했다.
<<대학>>은 유학의 강령, <<논어>>는 유학의 근본, <<맹자>>는 유학의 확충, <<중용>>은 유학의 총론이다. 재작년 초여름에야 김용옥 교수가 한글역주를 한 <<맹자, 사람의 길>>을 정말 재미나게 읽었다. 대학 입학 후 삼십 년이 넘었다. 정말 너무 늦은 독서이다. 우리나라에는 왜 제대로 된 사서(四書)가 그동안 없었는지 이상하였다. 하지만, 내면의 목소리와 외면적인 조건들이 어울려 <<맹자>>를 읽었기에 그 의미의 지평은 넓고 그 독서의 기쁨은 컸다. 추성에 오기 전에 그래도 <<맹자>>의 맛을 한 번이라도 보고 온 것에 감사하고, 안도가 되고, 천만 다행이다.
버스가 서고 측백나무가 심어진 광장 끝에 맹묘의 문이 보인다. 가까이로 다가가자 문 앞마당에서 중년과 노년의 마을사람들이 빠른 템포의 음악에 맞추어 두 손을 허리춤에 올리고서 발을 굴리다가 두 팔을 흔들며 흥겹게 춤을 춘다. 신명과 익살이 많은 박 단장님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두 팔을 어깨 위로 올려 저으며 우리의 춤사위로 어울리고, 권영탁 선생님과 중년의 여 선생님들도 허리에 양 손을 집고서 마을 사람들과 금세 박자를 맞춘다. 머리카락은 반백(斑白)이 되고, 얼굴은 주름지고, 옷은 남루하지만 노인들의 낙천적인 모습에 우리는 모두 절로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구경했다.
경작지를 주고 전쟁을 일으키지 말아서 도탄에 빠진 민생을 보호하고, 학교를 지어 도덕을 세워 삶의 질을 높인다면, 그 나라는 반석에 세워지고, 그 군주는 성군이 되는 인의(仁義) 길을 맹자는 설파하였다. 맹자님 사시던 마을에는 맹자님의 덕화(德化)가 오늘에도 이어지고 있다.
화강암 네모 석주 위에 푸른 단청을 입힌 여러 겹의 박공과 붉은 칠을 한 문이 기와지붕이 아래에 나 있는 세 칸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에는 금색의 글씨로 ‘영성문(欞星門)’이라고 쓰여있다. 우람하고 고풍스러운 편백나무 노거수가 서 있고, 동쪽 담장에는 ‘계왕성(繼往聖)’, 서쪽 담장에는 ‘開來學’이라고 금빛 글씨가 쓰인 목조 패방이 보인다. 정면에는 ‘亞聖廟’라고 금빛 글씨를 새긴 세 개의 문이 있는 석방이다.
그 안으로 들어가자 신도 좌우에는 수령이 몇 백 년은 되었을 늙은 측백나무 대략 50~60 그루가 도열하여 숲을 이루고, 서쪽에는 금나라 시대에 주조된 큰 종이 걸려 있다. 기와지붕의 태산기상문을 들어서자 다시 곧게 자란 측백나무 노거수들이 너른 마당에 숲을 이루고 있다. 숲이 정말로 고풍스럽고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승성문 앞에 벽돌로 쌓고 이층의 기와지붕을 올린 강희제비각이 있다. 비 높이가 5미터는 되어 보인다.
그 동쪽 담 밑에 세 개의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孟母斷機處’, ‘孟母三遷祠’, ‘子思子作中庸處’, 어릴 때부터 말로만 듣던 맹자님이 자라나 사시었고, 공자님의 손자인 자사가 이곳에서 <<중용>>을 지은 곳이다. 나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여기가 진정 모친의 훈육 속에서 성장하여 아성이 되신 맹자님의 고향인가! 단기비는 도광 임진년(1832) 중추에 장계욱(張繼郁)이 쓰고 맹자 후손 맹광균(孟廣均)이 다시 세웠고, 중용비는 도광 임진년 맹춘에 제남(濟南) 사람 양악춘(楊岳春)이 쓰고 공자 71세손 공경용(孔慶鎔)이 다시 세웠다. 비석들에 흠집이 많고 다시 세운 듯하다. 문화혁명의 광풍 속에서 홍군 아이들이 했던 짓일 것이다.
다시 오른쪽의 계현문 안으로 들어갔다. 벽돌이 깔린 좁은 길 좌우로 측백나무 아래에 수십 기의 비석들이 도열해 있다. 그 중에는 벽돌을 쌓아서 비석 전체를 보호해놓은 것도 있다. 가까이로 다가가서 보니 전서체로 ‘述聖遺像’의 비액을 쓰고 역시 전서체로 송 이종(理宗)의 찬문과 자사(子思)의 상을 새겨 놓은 비이다. 그 옆도 비석이 부수어 벽돌로 보호를 하였다. 상단 표면에 쌍룡이 여의주를 물고 구름 속에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고, 깨어지고 희미하여 비문을 읽을 수 없지만, ‘萬曆陸年’, ‘謁告于’, ‘欽差巡撫’, ‘亞聖孟子曰’이라는 글자는 눈에 띈다. 안쪽 끝에 작은 사당이 있다. 붉은 칠을 한 닫집에 ‘啓聖鄒國公之位’라고 쓴 위패 뒤에 면류관에 홀을 잡고 하얀 수염의 빼빼 마른 얼굴의 상이 모셔져 있다.
다시 서쪽 담장에 나있는 쪽문 안으로 들어갔다. 너른 마당에 우람하고 당당하고 고풍스러운 측백나무 노거수들이 숲을 이룬다. 석조 기단 위에 이층의 녹색 기와지붕을 이고 있고 녹색이 주조를 이루는 단청이 입혀져 있으며, 팔각 석주가 처마 아래의 바깥에 세워지고 벽체에는 붉은 기둥이 세워진 일곱 칸 큰 건물이 웅장하게 서 있다. 지붕 사이의 처마에 세로로 ‘아성전’이라는 금색 테두리에 금빛 글씨 글자가 청색 바탕에 쓰인 편액이 걸려 있는 맹자님 사당이다.
계단을 올라 사당 앞으로 나아갔다. ‘아성맹자위’라는 위패 뒤에 면류관을 쓰고, 녹색 곤룡포를 입고, 홀을 들고 있는 하얀 눈썹과 수염이 난 맹자님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 앞의 향로에는 향연이 피어 오르고 있다. 나는 허리 숙여 맹자님께 경의의 절을 하였다.
위패 옆에는 ‘叩拜 孟廟祖庭, 千里尋親 朝拜祖先, 山西交城縣大營孟氏宗親會, 09年 4月 26日’이라고 쓴 금빛 플라스틱패가 놓여 있다. 붉은 칠을 한 출입문 문지방 위에는 금색 용들을 조각한 테두리에 청색 바탕에 금물로 건륭제가 쓴 ‘道闡尼山(공자님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천명하셨다.)’이라고 쓴 대자의 편액이 걸려 있다.
사당 앞마당에는 돌난간으로 둘러놓은 작은 우물이 있다. 안내 비석에는 ‘천진정’이라고 하며, 우물의 유래를 소개해 놓았다.
"공묘(孔廟)에 고택정(故宅井)이, 안묘(顔廟)에 누항정(陋巷井), 증묘(曾廟)에 용천정(溶泉井)이 있는데, 오직 맹묘만 우물이 없었다. <<重纂三遷志>>에 “강희 십일 년 봄날 어느 때에 홀연히 벼락 치는 소리가 나서 들은 사람들이 모두가 놀라고 두려워했다. 아침에 일어나 가보니 사당 앞 섬돌 아래에 땅이 꺼졌고 항아리처럼 둥근 흔적이 있었다. 살펴보니 옛 우물이었다. 언제 판 우물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하루아침에 땅이 꺼지며 나온 까닭을 모르겠다.”라고 우물의 유래를 실어 놓았다. 이 마을의 맹씨들이 ‘천진정(天震井)’이라고 이름 하였다. "
맹묘를 참배하고 다시 서쪽문을 지나 담장 밖의 길거리로 나갔다. 해는 기울어 있는데 하늘이 미세먼지에 덮여 있어서 해가 달처럼 보인다. 삼각형 돌 받침대 위에 붉은 기둥이 있고 기둥 위에 청색과 녹색과 하늘색으로 단청을 입힌 박공이 있으며 그 위로 중앙의 높은 기와지붕과 그 좌우에 날개처럼 붙은 지붕이 올려진 3문이 있는데, 문미에는 금물로 ‘아성’이라고 쓰인 패방이 높이 세워져 있다. 맹자님 사시던 옛 마을이고 맹자님 고택이 있는 맹자님 마을, 맹부의 입구이다.
좁은 골목길로 꺾어 들자 ‘아성부’라는 편액이 걸린 대문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다시 ‘예로의문’이라고 쓴 현판이 걸린 중문이 있다. 중문 안에 다시 작은 문이 있는데, 마당 가운데 홀로 서 있는데 ‘의문’이라는 편액이 걸렸다. 대문부터 검은색 문에는 관복을 입고 한 손에 홀을 든 한 쌍의 관리가 서 있는 그림을 그렸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써 놓았다. ‘명 경태2년(1451) 맹자 56대손, 孟希文에게 世襲翰林院五經博士 작호를 내렸다. 1935년, 남경국민당정부가 맹자 73대손, 孟慶棠에게 亞聖奉祀官으로 임명하였다. 맹부 건물은 송나라 때 처음 지었다.’
의문을 지나자 석단 위에 맹부대당 건물이 나온다. 석단 아래에는 두 그루의 웅장한 기세의 측백나무 노거수가 엄청난 기운을 내뿜으며 유서 깊고 고색창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석단 동쪽 모퉁이에는 백색의 둥근 돌 위에 쇠바늘을 꽂아서 그림자가 눈금을 가리키도록 되어 있는 해시계가 해를 향하여 세워져 있고, 서쪽 구석에는 부피를 재는 돌 됫박이 석주 위에 올려져 있다. 여기가 맹자마을의 작은 정부, 맹부임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대당은 맹부의 집무실이다. 노란 휘장이 쳐진 의자가 놓여있고 좌우에는 ‘세습한림원’, ‘오경박사’, ‘숙정’, ‘회피’ 같은 팻말을 벌려 놓았다. 대당 출입문 위에는 황금색 용들이 조각된 테두리 안의 청색 바탕에 청나라 옹정제가 옹정 삼년(1725) 팔월 초오일에 쓴 ‘七篇貽矩’라는 금물 대자 편액이 걸려 있다. 문 좌우에는 ‘계왕개래사숙천년승연익, 거인유의연원백대앙선열’이라는 대련이 검은 바탕에 금빛으로 쓰여 있다.
맹자가 제시한 인의와 민본의 부국강병책은 합종과 연형의 치열한 생존경쟁을 하는 전국시대 제후들에게 우활한 대책으로 홀대받았다.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와 시서예악을 정리하고 <<춘추>>를 지었고, 제자들이 <<논어>>를 편찬하였듯이, 제나라와 양(위)나라에서 물러나 맹자는 이곳 추나라의 고향에 은거하며 만장, 공손추 같은 제자들과 7편, 261장, 34,685(현재는 35,382)자의 <<맹자>>를 지어 후세에 요임금과 순 임금 같은 성군들이 남긴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도를 전했다.
<<맹자>> 첫 편인 <양혜왕>은 올해의 내 나이와 같은 53세의 맹자가 서기전 320년에 양혜왕과 나누는 대화로 시작한다. <<맹자>>에는 정말 탁월한 식견과 천재적인 언변을 구사하며 패도(覇道)의 시대에 인의(仁義)와 민본(民本)의 왕도(王道)를 갈파하는 인간 맹자의 뜨거운 숨결이 배어 있다.
맹자께서 양혜왕을 알현하시었다. 왕은 기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노선생께서 추나라에서 대량까지 천리를 멀다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오셨으니, 또한 장차 내 나라에 무슨 이로움이 있겠나이까?” 맹자께서 이에 대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를 말씀하십니까? 단지 인의가 있을 뿐이오니이다.
(孟子見梁惠王 王曰: “叟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孟子對曰: “王, 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본당에서 서쪽 문으로 나가니 너른 마당이 있는 후원이다. 북쪽으로 조금 걸어가니 역시 벽돌로 지은 이층 건물인 맹부감은당(孟府感恩堂)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호호백발에 주름살 가득하고 늙으신 세상의 수많은 어머니들의 흑백 사진들,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젊은 엄마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다. 옆에는 부모님의 은혜를 기리는 문구들이 적혀있다.
당신을 낳고 키우셨기에
부모님이 당신에게 생명을 주셨음에 감격하시오.
당신을 어루만지며 길렀기에
부모님이 당신이 성장하도록 하셨음에 감격하시오.
당신을 늘 도와주었기에
부모님이 당신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셨음에 감격하시오.
당신을 보살펴주셨기에
부모님이 당신에게 따뜻한 품성을 주셨음에 감격하시오.
당신을 늘 격려하셨기에
부모님이 당신에게 힘을 주셨음에 감격하시오.
당신을 교육시켰기에
부모님이 당신에게 지혜를 주셨음에 감격하시오.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은
오늘도 감사하는 하루를 열게 한다.
감사하는 마음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에 감사하는 데서 시작한다.
부모님이 우리를 낳고 키워주시고
또 우리를 보살피고, 격려하고, 교육시키시었다.
어머니와 물과 같고, 아버지는 산과 같으시다.
배움의 은혜에 감사하니,
재능은 진정으로 인생 행복의 문에 이르게 한다.
자식이 먼 곳에 공부하러 갔다가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베틀에 앉은 채로 짜고 있던 천을 칼로 잘라 버리며 추상같은 얼굴로 아들을 분발시킨 맹자님의 어머니, 자식 교육을 위하여 두 번이나 이사를 한 성인의 그 어머니, 옆집의 형 친구와 작당하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과자를 훔치다가 주인에게 들킨 나를 회초리를 들고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며 밤이 깊도록 호통 치시고는 울다가 잠든 나를 안으며 우시던 나의 엄마, 자식 공부를 위해 점심도 굶고 땡볕에 십 리 길을 걸어서 집에 오시던 우리의 어머니, 성인이건 범부이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어머니가 키우셨다.
틱낫한 스님은 말했다. ‘창조주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왜냐하면 창조주는 스스로 생겨났고 어머니를 가지는 좋은 행운이 없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오봉산 주사암에서 보시 받아온 <<부모은중경>>을 지금의 나처럼 돋보기안경을 끼고 호롱불 심지를 돋우며 읽다가, 나에게도 읽기를 권하였다. 부처님이 해골무더기 앞에 멈추어 서서 아난에게 설법하는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내 마음 속에서 곁에 있는 엄마 모습과 겹쳤다. 어린 나는 <<은중경>>을 소리 내어 읽다가 그만 눈물방울을 떨어뜨리며 울었다. 내가 대학 일학년을 마치고 눈이 내린 설날을 지내고 새봄이 올 무렵, 세상을 버리고만 엄마가 맹자님 사시던 집에 와서 문득 보고 싶고, 절절히 그리워진다.
감은당에 걸린 레바논(黎巴嫰) 출신의 미국 시인, 칼릴 지브란(哈紀伯倫, Kahlil Gibran : 1883-1931))의 글을 중국어로 옮겨 놓은 <모친송(母親頌)>을 남몰래 읽어본다.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가장 감미로운 말은 ‘어머니’이고, 가장 감미로운 외침은 ‘엄마!’이다. 이 간단하지만 또한 의미심장한 말 속에는 희망, 애정, 어루만짐 그리고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친근감, 달콤하고 호감의 감정들로 가득하다.
인생에서 어머니는 우리의 모든 것이다. 비통에 젖을 때, 어머니는 위안이 되어 준다. 낙담에 빠질 때 어머니는 힘이 되어 준다. 어머니는 동정과 연민과 자애의 원천이다. 누군가 어머니를 잃는다면 그는 얼굴을 묻을 품을 잃고, 그를 축복해줄 손을 잃고, 보살펴 줄 그의 눈을 잃고 마는 것이다.
...... 자연계의 일체 모든 것은 모성을 상징하고 표출한다. 태양은 대지의 어머니이다. 따뜻함으로 대지를 잉태하고 햇빛으로 대지를 감싼다. 대지는 수목과 화초의 어머니이다. 대지는 나무와 풀을 낳고 키우고, 북돋아 기르며, 곧바로 장대하게 자르게 한다. 나무와 풀은 또한 향기롭고 달콤한 맛의 열매와 생명력 넘치는 씨앗의 자애로운 어머니이다. 우주 만물이라는 어머니는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으로 충만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불멸의 절대정신이다.
어머니라는 이 말은 과일의 씨앗이 깊은 흙속에 묻혀 있는 것과도 같이 우리 마음의 밑바닥에 갈무리되어 있다. 우리가 슬퍼하거나 기뻐할 때, 어머니, 이 말이 우리의 입술에서 만리 창공에 부슬비가 뿌릴 때 장미꽃떨기에서 향기가 넘치는 것같이 흘러나온다.
-<黎巴嫰> 哈紀伯倫(레바논,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 1883-1931))
(The most beautiful word on the lips of mankind is the word “Mother,” and the most beautiful call is the call of “My mother.” It is a word full of hope and love, a sweet and kind word coming from the depths of the heart. The mother is everything – she is our consolation in sorrow, our hope in misery, and our strength in weakness. She is the source of love, mercy, sympathy, and forgiveness….
Everything in nature bespeaks the mother. The sun is the mother of earth and gives it its nourishment of heart; it never leaves the universe at night until it has put the earth to sleep to the song of the sea and the hymn of birds and brooks. And this earth is the mother of trees and flowers. It produces them, nurses them, and weans them. The trees and flowers become kind mothers of their great fruits and seeds. And the mother, the prototype of all existence, is the eternal spirit, full of beauty and love.
-Kahlil Gibran, Broken Wings, trans. Anthony R. Ferris, Citadel Press, 1962.)
맹부감은당에서 나와 동쪽으로 몇 걸음 가니 청색 바탕에 금물로 ‘습유관(習儒館)’이라고 쓴 편액이 걸린 문이 있다. 문 안으로 들어가니 정면에 자주빛 바탕에 ‘강유당(講儒堂)’이라는 편액이 걸린 교실이 있다. 동쪽엔 오경박사원이란 편액이 붙은 건물이 있고 서쪽에는 편액이 보이지는 않는 벽돌 건물이 있다. 강유당 안으로 들어가니 정면의 벽에 아성전에 봉안된 모습의 맹자상에 ‘아성맹자’라고 쓰인 족자가 걸렸다. 족자 왼쪽에는 ‘仲尼講杏壇玄言金聲醒世玉振’, 오른쪽에는 ‘子輿居聖域擧步乃法吐辭厥○’ 이라고 쓴 대련이 걸려 있다. 그 앞에는 검은 칠을 한 탁자와 의자 두 개가 있다.
강당의 동쪽 벽 밑에는 옹정제의 어필 ‘아성맹자찬’이 윤기 나는 자주색 목대에 금물로 쓰였고, 서쪽 벽에는 금물감으로 그린 산수도가 목대에 그려져 있다.
맹자상을 기준으로 2인용 책상과 의자가 좌우로 각기 15~16개가 놓여 있다. 우리는 학생이 된 기분으로 그 책상에 앉아 보며 즐거워하였다. 맹자는 학교를 세워 민중들도 평등하게 교육시켜 도덕을 알게 하여 인의가 넘치는 요순시대의 따뜻하고 평화로운 천하를 구현하려 하였다.
亞聖孟子贊 아성맹자찬
戰國春秋 춘추와 전국 시대,
又異其世 또 그 세상을 이상하게 하였다.
陷溺人心 인심은 무너지고 빠졌으니,
豈惟功利 어찌 전공과 이익만 생각하리.
時君爭雄 시대는 군주와 호걸이 다투고,
處士橫議 선비는 의견을 어지러이 제시하였다.
爲我兼愛 양주 무군(無君)의 이기주의, 묵적 무부(無父)의 겸애설,
篁鼓樹幟 생황 불며 북치며 깃발 날렸다.
魯連高風 노중련(魯仲連)의 높은 풍모와,
陣仲廉士 진중자(陣仲子) 같은 청렴한 선비,
所謂英賢 이른바 빼어난 인물들도,
不過若是 이와 같은데 지나지 않았다.
於此有人 여기에 사람이 있었으니,
入孝出弟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하며,
一髮千鈞 한 가닥의 터럭도 천근같이 소중히 하고,
有脉永繫 도의 명맥을 길이 이었다.
能不動心 명예와 권력과 재물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知言養氣 정밀한 논리를 구사할 줄 알고 호연지기를 길렀다.
治世之略 경세의 책략은,
堯舜仁義 요 임금과 순 임금의 인의를 전하였다.
愛君澤民 군주를 아끼고, 백성에게 은택을 내리게 하니,
惓惓餘意 그 분의 남긴 가르침의 의미를 가슴에 품는다.
欲入孔門 공자님 가르침에 입문하려면,
非孟何自 맹자님 아니면 어디서 시작되리.
孟丁其難 맹자는 정녕 그 말이 어렵고,
顔丁其易 안자는 정녕 그 말이 쉽다.
語黙故殊 말과 침묵이 예부터 다르지만,
道無二致 도가 둘이 되는 일은 없다.
卓哉亞聖 탁월 하도다, 아성이여!
功在天地 공은 천지에 가득하구나.
乾隆戊辰 건륭 무진년
仲春月御 중춘 달에 옹정 황제
筆. 씀
습유관을 나와 세은당으로 가는데 보름달처럼 둥근 문과 담벽 위에는 기와를 꽃잎처럼 아름답게 쌓았다. 담 밑에 작은 비석이 서 있다. 비석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구절이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宋賢了翁先生格言, 事親以孝, 事君以忠, 爲事以廉, 立身以學’.
송나라의 儒賢인 요옹 선생은 이름이 진관(陳瓘)이다. 그는 유안세(劉安世)의 학문을 종주로 삼고, 사마광, 소옹, 정호와 정이 형제를 사숙하였다. 태학박사와 좌사간의 관직을 지냈으며, 불교의 선종, 화엄학, 천태학에도 조예가 깊고 정토염불 수행을 하였다. 또한 설앙(薛昻)이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의 간행 목판을 폐기시키려고 하자 그를 막았다. 호를 료옹, 화엄거사라고 하였다.
제법 너른 마당 가운데에는 큼직한 맷돌도 그대로 있다. 맹자고택의 안채인 세은당(世恩堂)으로 들어갔다. 벽돌로 된 작은 건물인 세은당은 맹자의 74대손 맹번기(孟繁驥)와 부인 왕숙방(王淑芳) 부부가 살던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다.
기와지붕 아래의 단청이 된 처마를 6개의 검은색 기둥이 바치고 있는 5칸 건물이다. 정문 좌우로 두 개의 창문이 나 있고 문 안에는 거실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이 있다. 거실의 정면 벽면에는 북종화 산수도 족자가 걸렸고 그 좌우에는 붉은 바탕에 전서체로 쓴 대련이 있다. 그 위의 천정에는 세은당이라고 검은 바탕에 금빛 글씨로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족자 아래에는 긴 탁자가 있고, 탁자 위에는 청화백자 병이 놓여 있다. 그 앞에는 다시 장방형 탁자가 있고 그 좌우에는 빈객을 맞이할 의자가 놓여 있다.
다른 방에는 맹자상이 걸려 있고, 좌우에는 ‘천지지도득중니상행, 공자지도득맹자상명’이라는 대련이 있다. 마당 가운데에는 군선도를 그린 커다란 청화백자 항아리가 놓여 있다. 석단처럼 조성되어 있는 마당 테두리에는 석류, 호두 같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좁은 내택문으로 나오자 다시 맹부의 본당이다. 본당에서 다시 앞뜰로 나와 의문, 예로의문을 나와 대문을 나왔다.
대문 안의 복도에는 여러 점의 비석들이 보존되어 있는 그중에 ‘칙사아성예제전계석’ 비석도 보인다. 승마석이 있는 대문 오른쪽에도 길게 골목길이 나 있고 골동품 가게 간판들이 보인다. 골목길에 사람들이 지나가고 스쿠터 오트바이, 자전거가 다니며, 크고 작은 자동차들이 서 있다.
대문 앞 왼쪽에도 맹묘 담장 아래 ‘아성’이라고 쓰인 패방이 서 있고 길게 골목길이 나 있다. 패방 주변에 역시 골동품들을 길가에 길게 늘어놓고 팔고 있다. 맹부 앞의 작은 구멍가게 앞에는 녹이 쓴 놋쇠 기념패, 푸른 녹이 낀 많은 동전들, 나침반, 청동방울기념품, 놋쇠자, 패옥, 은팔찌, 군사용단검, 낡은 책들이 놓여 있다.
孟子名言百句, 鄒城通史, 中共鄒城地方史, 鄒城革命鬪爭記錄, 濟寧運河文化, 濟寧民俗, 濟魯文化槪說, 論語譯註, 孔子輝世, 孟子譯註, 請南懷瑾講孟子, 文化旅游融合發展報告, 論語讀本, 于丹論語心得, 修身法老子, 母親頌, 莊子夢蝶, 孔子說快樂, 孟子傳, 明靜致遠, 皇極經世, 實用中草藥圖集, 圖解麻衣神相 등의 단행본들과 풍수, 택일, 家神, 달력, 나침반, 三世, 三元, 三明, 算數, 五行擇日, 부적, 梅花, 婚喪 등 가정생활지침서시리즈가 종이상자에 담겨 있다.
중국의 민속 문화, 지방마다 역사를 기록하는 전통, 공맹과 노장을 대대로 읽는 중국인의 교양을 잘 보여준다. 책을 좋아하는 나는 이 가운데 한 권을 기념품으로 사오지 못해 조금 아쉽다. 그 옆에는 최호의 황학루 시와 황학루 정자, 최호의 모습, 구름과 소나무와 산이 돋을새김 된 구리 빛이 도는 작은 벼루가 내 눈에 띄었지만 역시 사진만 한 장 촬영하고 말았다. 애장품으로 사 오지 못하여 아쉽다.
또 옆에는 푸른빛이 도는 석불두(石佛頭), 낡은 옥 인장, 건륭통보, 옹정통보, 순치통보, 태평통보, 가경통보, 광서통보 동전이 가득 깔려 있다. 天圓地方을 상징하는 모양의 동전 뒷면에는 팔괘(八卦), 여진문자가 있다. 맹자님 말씀대로 恒産이라야 恒心이다.
버스가 서 있는 맹묘 앞마당으로 돌아와서 버스에 오르니 오줌이 마렵다. 하는 수 없이 문을 닫는 맹묘 안의 화장실로 다시 들어가서 갔다. 맹묘 동쪽에 ‘孟子小學’이라고 쓴 대문이 보인다. 중앙 큰 문 좌우에 작은 문이 있고 기둥 위에는 녹색과 청색의 단청이 칠해져 있다. 단청에는 금빛의 용과 봉황이 그려 있으며, ‘맹자소학’이라고 쓴 편액 위에는 맹자가 학동들을 가르치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대문 안에는 맹자를 고체로 쓴 죽간을 병풍으로 두르고 그 앞에 죽간을 든 맹자상이 세워져 있다. 맹자故里에서 만나는 초등학교가 참 반갑다. 맹자님 마을에는 아성, 맹자의 가르침이 오늘에도 어린이들의 가슴에 이어지고 있다.
추로(鄒魯)의 대학자로 이름이 난 맹자는 53세에 양나라로 초빙 받아 가서 늙은 혜왕을 만나 왕도를 설파하였다.
“상과 서와 같은 지방 서민학교 교육을 진흥시켜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사는 의로움을 반복해서 가르치면, 반백의 노인이 무거운 짐을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길거리를 다니는 일은 있을 수가 없게 될 것이외다. 50세 넘는 자가 따스한 비단옷을 입고 70세 넘는 자가 맛있는 고기를 먹고 일반 민중이 굶을 걱정, 춥게 살 걱정을 하지 않게 되고서도 천하에 왕노릇 하지 않은 사람은 있어본 적이 없습니다. 천하가 다 그에게 귀순할 것이외다.
(謹庠序之敎, 申之以孝悌之義, 頒白者不負戴於道路矣.
七十者衣帛食肉, 黎民不飢不寒, 然而不王者, 未之有也.)”
행단야연(杏壇夜宴)
해가 저물어갈 무렵에 추성에서 출발하여 곡부로 갔다. ‘鄒城市民政局 婚姻登記處’ 건물 아래층에는 ‘巴黎春天’이라는 네온사인 간판에 불이 켜진 옷 가게가 보인다. 차는 달려 우리가 묵을 곡부의 호텔에 섰다. ‘銘座杏壇賓館’의 기와지붕 현관에는 ‘杏亶儒風’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고, 입구에 공자상을 세워 놓았다.
로비에 들어가니 가운데에 춘절을 맞는 설레임을 표현한 시골집 소품이 울타리 속에 있다. 마당에는 맷돌이 있고 목화솜으로 표현한 눈이 마당 가득 쌓였다. 우리의 설을 맞은 시골집과 다를 게 없어서 친근감이 든다. 로비 정면의 안쪽 벽에는 금빛 ‘공자행교상’이 붙어 있고, 좌벽에는 누가 그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옛 그림, 행단도를 높이가 5미터 정도의 크기로 확대하여 걸어두었다.
공자가 폭포가 쏟아지는 계곡 가 복사꽃이 피어난 늙은 살구나무 아래의 토단의 의자에 오른손에 교편을 들고 앉아 있다. 그 옆에는 제자 셋이 서 있는데 그 중에는 스승에게 올릴 차를 들고 있다. 한 제자가 스승 앞에 나아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리고, 열일곱 명의 제자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스승께 다가가고 있다. 그 중에는 두루마리 죽간 책을 들고 있는 제자, 거문고를 둘러맨 제자가 보인다.
<<사기>> <공자세가>에는 ‘공자가 조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가서, 큰 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에게 예의를 강습하였는데, 환퇴가 공자를 죽이려 하여 떠났으며, 그 나무도 뽑아버렸다. 공자는 ‘하늘이 나에게 덕을 이을 사명을 주셨는데 환퇴가 나를 어찌하겠는가!’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장자>> <어부>에는 ‘공자는 우거진 숲 속을 지나다가 살구나무가 있는 높고 평탄한 곳에 앉아서 쉬었다. 제자들은 책을 읽고 공자는 노래를 하며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孔子游乎緇帷之林, 休坐乎杏壇之上, 弟子讀書, 孔子絃歌鼓琴.)’고 하였다.
로비의 우벽에는 공자님의 69대손 공계속(孔繼涑)이 건륭 16년 2월에 쓴 <<대학>> 전문이 걸려 있다. 행단도와 대학서의 좌도우서(左圖右書) 장식 사이에는 ‘논어’, ‘대학’, ‘중용’, ‘천자문’, ‘三字經’ 등의 유가 경전들의 목판본 책, 첫 쪽을 걸어두고, 로비 출입문 위에는 건륭제 글씨를 복제한 ‘사문재자(斯文在玆)’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어릴 적 사랑방 선반 위에는 누런 표지의 족보책 한 질과 돌가루 포대기천으로 묶은 <<천자문>> 책이 있었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가 이틀 동안 손수 쓰서 만든 책이다. 조부에게 그 책으로 천자문을 하늘 천자부터 끝의 어기 야자까지, 또 그 역순으로 외우며 배웠다고 한다.
작은형은 겨울방학이 되어 뒷집 서당 영감 앞에서 그 책으로 글을 외웠다. 뒷집에서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그 소리를 나는 누워서 들었고, 또 혼자서 그 책을 펴 놓고서 외워보기도 하였다. 우리에게 친숙한 천자문을 여기 공자님 마을 곡부에 와서 만나는 것이 정말 흥미로웠다.
천자문과 달리 삼자경은 여기서 난생 처음 보니, 새로운 것을 발견한 기쁨이 일어난다. 우리는 지금 ‘행단유풍(杏亶儒風)’이 부는 고을에 온 것이다.
방 배정을 받고 출입 카드를 들고 318호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복도에는 사신도를 돋을 새김한 와당 네 장이 붙어 있다. 방문마다 이름이 붙었다. 내가 묵을 방은 희부(禧府)이다. 청화백자도자기스탠드 등 밑에는 <<공문제자화전(孔門弟子畵傳)>>을 비롯하여 <<논어>> 관련 책들이 놓여 있고, 책상 달력도 달마다 <<논어>>의 구절이 들어 있다. 텔레비전 밑에는 청화백자도자기 붓통이 있고, 머리맡에는 산수화가 걸렸다. 등받이가 놓인 소파, 화장실 등 모든 것이 품격이 있다.
저녁을 먹으러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기념품 가게를 들여다보니, 안에 앉은 두 노인이 담배를 피워 연기가 자욱하다. 나는 견디지 못하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시례당(詩禮堂)이라는 편액이 걸린 입구로 들어가자 복도 양쪽에 방이 있다. 오른쪽의 홀로 들어가니 테이블이 많이 놓인 큰 식당이다. 식당에는 ‘명덕’이라고 하는 대자가 붙어 있다. 푸짐하고 정성스럽게 요리한 음식으로 저녁상이 차려졌다. 하지만, 음식마다 기름기가 많은데다 술을 전혀 먹지 않으며, 붂은밥이 차가워서 많이 먹지는 못하고 나에게 익숙한 탕수육과 감자채볶음으로 저녁을 해결하였다.
도반소묘(道伴素描)
저녁을 먹으며 박단장님이 사회가 되어 자기소개나 여행 소감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본인 소개가 끝나면 알고 싶은 분을 지적하게 하였다. 그런면서 중간에 또 자주 건배사를 하게 하였다. 미세먼지 때문인지 기침이 나고 목젖이 조금 따가 왔으며, 몸이 추우며 열마저도 나는 감기증상이 있었다. 서로들 너무 익숙하여 자기소개나 인사가 별로 필요하지 않는 분위기이지만, 모임에 처음 참가하는 나에게는 한 분 한 분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였다. 이틀, 사흘 여행을 같이 하지만 아직 이름도 다 몰랐다.
인천에서 온 맥콜 김 선생님은 참가자 모두의 이름을 별명 짓기로 기억할 정도로 센스가 넘치고 유쾌하시다. 맥퀸 최 선생님은 맥콜님과 단짝이며 긴 머리가 인상적이시다.
대장 박 선생님은 학구적이고 주도면밀하며 순박하며 리더십이 있으시다. 나와는 몇 년 전에 스님이 해주신 밥을 같이 먹은 깊은 인연이 있으시다. 카메라 김 선생님은 퇴직하고 농사를 많이 지으시는 부지런한 농부가 되셨다. 과묵하며 속정이 많으시다.
베드민턴 강 선생님은 산삼을 캘 정도로 약초 전문가이고 체력이 좋으며 에너지가 충만하고 기상이 산을 닮았으며, 내가 대학원에서 만난 교수님과 인상이 완전히 같으시다. 빡2 이 선생님은 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키가 크며 어린 아이같이 천진한 성품의 소유자이며 외모는 남들이 탄허 스님을 닮았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무한도전에 나오는 가수 길이와 많이 닮아 보이신다. 이 샘은 익재 선생의 후예로 자부심이 크시다.
청조끼 유 선생님은 수준 높은 사진을 촬영하며 담당과목이 과학이라서 수석의 취미가 있으며, 아주 자상한 성격에 말씨가 차분하다. 유 선생님의 부인이신 화가 서 선생님은 당나라의 미인을 닮았고 수채화를 그리신다.
두건 장 선생님은 부끄러움이 많고 겸허한 성품의 소유자로 보이신다. 남들은 따라할 수 없는 개다리 춤이 특기이다. 청주 이 선생님은 미모에 어울리지 않게 체력이 강하시다. 낡은 청바지천 모자를 늘 쓰고 여행하셨다.
추위를 많이 타서 양말을 세 켤레, 옷을 여러 벌 입고도 모자에 목도리를 두르느라 큼지막한 가방을 들고 온 보따리 윤 선생님은 퇴직하여 중국어와 중국사 공부를 하고 계신다. 선생님의 인상은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있는 우리 큰 처형을 많이 닮았다. 단짝인 멀티탭 오 선생님은 아주 자애로운 얼굴이고 산골 아이들을 즐겁게 가르치신다.
아침식사 채 선생님과 핸드폰지킴이 김 사장님은 첫사랑 커플이시다. 아내와 같은 학교에 근무한 채 선생님은 정조의 총신인 번암 채제공 선생의 후예이다. 과묵하면서도 익살스러운 표정을 잘 지으시는 김 사장님은 사업이 바쁜 데도 불구하고 여행에 참가한 애처가이시다.
감기 이 선생님은 비너스라는 별명 그대로 아포르디테처럼 미인이시며 나와 같은 역사 담당 교사로 퇴임하시었고 필기 샘의 은사이기도 하시다. 그 부군이신 변희봉 박 선생님은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백발이지만 무서운 병마를 이겨내고 청년의 체력을 과시하며 기상이 안정되어 있고 과묵하신 편이다. 이번 여행 중에 밥상에 차려지는 모든 요리를 촬영하신다. 내 고향 마을 산 너머에서 전원생활을 하는 죽림산방 주인이시다. 다음날 공림으로 가는 셔틀버스에서 25년 전에 내가 알씨와이 지도교사를 할 때 몇 번 뵌 적이 있는 인연을 알게 되었다.
예술가모자 김 선생님은 퇴직하여 부산에 살며 키가 크고 아주 부드러운 성품이고 멋있는 외모를 하고 계신다. 사모님인 여자 캐논 이 선생님도 퇴직하고 가족과 즐겁게 여행을 하고, 사진 촬영의 취미를 가지고 있으시다. 울릉도 김 선생님은 퇴직하여 부군의 일을 도우며 민박도 하며 중국어 강의를 듣고 여행에 참가하셨다.
치마 박 선생님은 백설공주보다 더 아름다우시다. 대구에서 온 쓰루메 박 선생님은 목소리가 아주 박력이 있고 퇴임하고도 학교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며, 여행을 많이 하고 미술학도답게 공부를 많이 하신다. 그리고 야생화를 댁에서 꽃 피울 정도로 야생화 매니아이시다.
인천 큰 언니 박 선생님은 자애로운 인상이고 아내와도 아는 사이로 알고 보니 나와 같은 아파트의 같은 통로에 살았던 이웃사촌이시다. 순수한 마음과 얼굴의 배낭두개 임 선생님은 해외여행이 처음이고 이런 여행에 동참하는 것이 좋다며 감격에 젖어 눈물을 보이신다. 이상의 소개가 필요 없다.
인천에서 온 이 선생님은 20대의 외모와 말씨를 가지고 있고 효녀이시다. 네팔 트렉킹 권 선생님은 아내와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였고 경쾌하고 인자한 인상을 가지고 계신다.
의성에서 근무하는 미니컵 김 선생님은 이번 여행에서 총무 일을 맡고 있으며, 얼굴은 새까맣고 귀여운 인상에 행동이 재바르시다. 내 옆에 앉은 안경 차 선생님은 키가 크고 이마의 면적은 넓으며 태산의 케이블카에서 앞에 앉은 이 선생님께 초코파이를 챙겨 줄 정도로 세심하고 부드러운 인품의 소유자이시다. 택견 윤 선생님은 차 선생님과 단짝 친구이고 차분하고 맑은 외모와 품성을 소유하고 있으시다.
필기 이 선생님은 순진무구한 인상에 천사 같은 성품의 소유자로 성함처럼 수첩을 들고 가이드의 설명을 부지런히 메모를 한다. 필기샘의 부군인 안 선생님은 나의 지인 중에 홍 선생님을 많이 닮았으며, 외유내강형이며 과묵한 편이다.
노란운동화 윤 선생님은 담당 과목이 나와 같은 역사이다. 이번 여행에서 나의 룸메이트이시다. 우리학교 강 선생님과 고교 동기생으로 실력파 선생님이시다. 네팔트렉킹 샘에게서 자기소개 바톤을 넘겨받은 나는 달리는 버스에서 중국사 강의를 장황하게 하다가 그만 별명이 ‘역사’가 되고 말았다.
몽중알성(夢中謁聖)
일어나서 자기소개나 여행소감을 발표하여야 하는데 도무지 무슨 말을 하여야 할 지 막막하였다. 앞서 발표하는 분들의 소감을 들으며 나는 어떻게 말할 것인지를 동시에 구상했다. 권 샘이 나에게 바톤을 넘겼다.
‘초등학교 이학년인 어린 나는 작은 누나가 경주에 수학여행을 다녀와서 왕릉이 아주 크더라고 하였다. 나는 누나에게 왕릉이 저 앞산만큼 커더냐고 물었다. 누나는 그렇다고 하였다. 십 원짜리 동전에 나오는 다보탑을 불국사에서 보았느냐고 물었다. 누나는 보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내가 누나처럼 육학년이 되어서 기차타고 경주와 포항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불국사 대웅전의 기단이 내 키보다 높았다. 자전거 타고 통학하던 중학생 시절에 자전거를 타고 경주로 가다가 삼거리 쉼터에 쉬고 있는 외국인을 만났다. 그곳에 있는 자전거 수리 가게의 할아버지와 일본말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영어시간에 배운 말로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는 벨기에서 왔다고 하였다. 사회시간에 배운 베네룩스 삼국의 한 나라였다. 우리와 작별 인사를 하고 미루나무 가로수가 서 있는 경주 가는 그 길로 가며 ‘빠이빠이’라고 외치는 우리들에게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여름방학이 되어 경주에서 직장을 다니는 작은 누나와 고등학교를 다니는 작은형의 자취방에 놀러갔다. 형이 끊어준 기차표를 들고 플랫폼으로 들어갔지만, 어느 기차가 집으로 가는 기차인지를 몰라서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울상이 되어 형에게 주황색 공중전화의 다이얼을 돌렸다. 형을 보자 참았던 서러움이 터져 울고 말았다. 형의 자전거 뒷자리에 타고 터미널로 갔다. 집으로 오는 버스의 창밖을 멍하니 쳐다보며 못쓰게 된 그 기차표를 손에 쥐고 버리지 못했다. 호주머니에 넣어서 집에까지 들고 왔다.
그런데, 그 때 놓친 그 기차를 이번 여행으로 탈 수 있게 해주어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린다고 하였다.
공자님 사시던 마을에 오니 내 인생의 실존적인 경험이 생각난다. 이런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처가가 퇴계 선생을 배출한 진성 이씨 가문이다. 그래서 지난 여름에 가족이 안동 온혜리 퇴계 선생이 태어난 방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는 노송정(老松亭) 고택을 방문하였다.
그 집의 대문에 성림문(聖臨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모친 박씨가 성인 공자님이 집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퇴계 선생을 낳았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대학시절, 우리 마을에 찾아온 친구들을 데리고 노계 박인로 선생의 묘소에 참배하고, 그 묘비를 읽었다. 거기에 이런 내용이 나왔다. 내 고향 마을에서 태어난 노계 박인로 선생은 꿈에서 공자님을 뵙고, 그 모습을 그려 대문에 붙였더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나도 공자님 사당에 참배하는 꿈을 꾸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을 앞두고 자취방에서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생사의 기로에 처했던 그 순간에 나는 한 점의 빛도 없는 암흑의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불빛이 휘황찬란한 공자님 사당에 들어갔다. 갓을 쓰고 흰 도포를 입은 선비들이 길게 줄을 지어 엎드려 절을 하고 있었다. 나도 그 말석에서 절을 하다가 빙그레 웃음 지으며 일어나다가 잠이 깼는데, 꿈이었다.
그 꿈을 꾸고 나는 연탄가스 가득한 그 방에서 걸어 나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일이 있은 뒤로 공자님 사당에 참배하고 태산에 오르고 싶은 소원을 지금까지 품고 살았다.
심지어 중국에 오고 싶어서 밀입국하여 중국의 어느 골목길을 헤메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한중 수교가 이루어진 뒤에 제일 먼저 아버지를 모시고 태산에 오르고 공자님 묘소와 사당에 오고 싶었다. 그렇지만, 소심한 나는 해외여행은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이렇게 오늘, 공자님 사시던 마을에 오게 되어 감개무량하다.
공자님 꿈을 꾸는 것은 한국인에게는 칼 융이 말하는 집단무의식에 유교가 들어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교는 한국인의 내면에 스며들어 우리문화의 피와 살이 되어 있다. 한국인의 문화유전자에는 공자님이 들어 있는 것이다.
젊은 날에 온고선생님께 논어를 배우며, 논어의 맛은 숭늉처럼 구수하다고 하셨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가마솥에서 밥을 퍼고 누룽지를 끌어낸 다음, 우물물 한 두레박을 길러서 솥에 붓고서 기다리면 검으면서도 누런 빛이 도는 맑은 그 숭늉을 엄마가 큰 대접에 가득 담아 방구석에 놓아두었다. 그 숭늉물을 마시면 구수한 맛이 입안에 감돌지만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이 세상에 숭늉보다 더 맛있는 음료수는 다시없다. 논어의 맛은 이러한 숭늉 맛이다.
젊은 날에 주자의 사서집주본 논어를 읽었지만 그 맛을 몰랐다가, 다행히도 공자님이 자연의 질서, 천명을 알았던 나이, 쉰 살에야 김용옥 교수가 쓴 한글역주본 논어를 읽고서 논어의 맛을 볼 수 있었다. 이 논어를 다 읽고서 나에게 떠오른 생각은 ‘공자님은 과연 성인이시구나!’라고 하는 것이었다.
사회를 보는 박단장님이 ‘아침에 도를 들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라고 한 공자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어떤 점이 공자님이 성인이하고 느끼셨는지를 물어왔다. 참, 두뇌가 명석하고 상황 판단이 기민하시다.
나는 일어나서, 나에게도 ‘이 쯤 하여 건배사를 하도록 시켰다면, 그 비밀을 말씀드렸을 것이라.’고 응수하였다. 일어나 건배사를 하였다. 공자님은 나이 일흔이 되자 ‘從心所欲不踰矩-마음먹은 대로 하여도 규범을 넘지 않았다.’라고 하셨다. 공자님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마음 가는대로 살아도 업을 짓지 않는 아라한과를 성취한 성인이 되셨다. 세 번의 건배사를 통해 공자님의 성인의 경지를 다 알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논어>>의 첫 머리에 나오는 그 유명한 말씀, 학이시습지면, 불역, ‘열호아!’, 유붕이자원방래면, 불역, ‘낙호아!’, 이런 말씀은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인부지이불온이면, 불역, ‘군자호아!’
이렇게 요번에도 또 장황하게 내 소개와 감회를 발표하고 말았다. 어릴 적부터 누나와 형들이 너는 말만 한다고 타박하던 일이 생각난다. 방으로 올라오며서 자애로운 얼굴의 박창순 샘이 어릴 적 일을 모두 기억하니 총명하다, 꿈 이야기는 인상적이었다고 칭찬을 해 주시어 그래도 위안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행에게 나는 다시 공자님 매니아로 각인되고 말았다.
곡부의 밤은 깊어가고 술병은 비었다. 내가 묵을 방, 희부(禧府)에서 나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고, 윤 선생님은 술 한 잔을 더 마시러 옆방으로 갔다. 잠자다가 천둥처럼 코고는 소리에 놀라 두 번 잠이 깼다. 공자님도, 주공님도 뵙는 꿈은, 그날 밤은 꿈도 꾸지 못하였다.
노계 선생이 주공을 만난 꿈 이야기를 여행기를 쓰면서 다시 읽어 보았다. 노계는 임진왜란에 종군하였다가 노계에 은거하여, 공자가 ‘조문도면 석사라도 좋다!’라고 한 말을 생각하며 공맹의 책과 주자의 해석을 심야에 향을 피우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읽었다. 실제로는 공자를 꿈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 지성(至聖), 공자가 꿈에서 만난 원성(元聖), 주공(周公)을 만났다. 그는 주공을 만난 일을 그림으로 그려서 벽에 걸어두고서 스스로를 성찰하였다.
<주공을 만난 꿈의 기록(夢見周公記)>
무하옹(無何翁)이 독서를 좋아하고 천고의 성현 말씀을 숭상하고 벗하였다. 일찍이 <<논어>> 한 책을 등잔불을 켜고 읽다가, 공자님이 ‘요새는 주공을 꿈에서 뵙지 못 한다.’는 구절에 이르러 책을 덮고서 탄식하며, ‘내가 공자님의 하나로 꿰어지는 가르침, ‘인’을 비록 얻어 들을 수는 없지만, 공자님이 꿈에서 주공(周公)을 만난 일은, 살펴보면 내가 성심으로 꿈에 주공을 뵙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라고 자문한 끝에, 칠언 율시 한 수를 적었다.
生平景仰周元聖 평생을 주공을 우러렀는데,
只願承顏一夢間 단지 한 꿈속에라도 뵙기를 바란다.
默誦潛思應有感 가만히 읊조리고 생각에 잠기니 응당 감응이 있을지니,
雖非眞境幸相看 비록 현실이 아니라도 요행히 만나 뵐 수 있으면.
이윽고 창에 기대어 깜박 잠이 들었는데, 잠시간에 한 곳에 이르렀다. 궁전이 장엄하고 깊숙한데 어떤 사람이 곤룡포를 입고서 숙연하고 단정히 앉아 있는데 곧 주공께서 사시는 곳인 줄을 알았다.
무하옹이 문지기에게 주공을 알현하기를 원한다고 청하였는데, 주공이 마침 창고의 수입과 지출을 점검하다가 시자로 하여금 나가서 맞이하게 하였다. 무하옹이 옷자락을 여미고 계단을 올라 들어갔다. 뜰아래에서 절을 하고, 성과 이름, 사는 곳을 갖추어 말씀드렸다. 주공께서 반갑게 맞이하며 무하옹에게 물어 가로되,
“동국은 평소에 예의의 나라라고 칭하는데, 은나라의 태사 기자(箕子)의 유풍 여운이 지금도 남아 있는가?”
라고 하시었다. 그리고서 천지인 3재와 인의예지신 5상의 도를 힘주어 말씀하시었다.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부덕한 자로서 하늘의 신령스러움에 기대어 왕조와 제후의 왕업을 도와 이루어서 나라가 8백 년 동안 왕업을 누렸다. 또 더불어서 한둘의 신료를 도와서 예법을 만들고 음악을 지어서 한 시대의 전장(典章)으로 삼았다. 또한 <<주역>> 삼백팔십사 효사에 해석을 달아 정결하고 고요하고 정미로운 이치를 거칠지만 드러내었다. 또한 대아, 소아를 지어 조회와 연향의 악곡으로 정하였는데, 어찌 문왕과 무왕이 창안하여 이은 공이 아님이 없겠는가?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릇되게도 내가 만세의 태평을 열기 위하여 하였다고 하니 나는 정말로 부끄럽구나.”
라고 하셨다.
또 물어보시기를,
“중니가 주역 십익을 짓고 천지의 깊은 이치를 드러내어 밝혔으니 참으로 하늘이 낸 성인이다. 꿈에 늘 나를 찾아왔건만 이제는 다시 보지 못한다. 어찌 된 것이냐?”
라고 하셨다. 무하옹이 일어나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중니씨는 주 영왕 21년 경술년에 태어나 경왕 41년 임술년에 삶을 마쳤습니다. 대개 일찍이 듣기로 중니가 말하기를, ‘내가 꿈에 주공을 다시 뵙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주공께서 또 그런 일을 말씀하시니 비로소 성인의 마음이 융합하고 정신이 만나서 서로 감응하는 바가 깊이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주공께서 말씀하시기를,
“천 년 동안 나를 아는 자가 오직 중니뿐이었다. 중니는 매번 도를 행할 마음이 있어서 꿈에서 서로 만난 지가 오래 되었다.”
라고 하셨다.
또 말씀하셨다.
“그대가 나를 방문하니 또한 부지런하구나. 내가 무엇을 선물할까?”
라고 하시더니, 붓을 찾아 들고서 ‘성(誠), 경(敬), 충(忠), 효(孝)’ 네 큰 글자를 쓰서 주면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도를 구하려면 성, 경, 충, 효, 여기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셨다. 무하옹이 글을 받들고 두 번 절을 하고 사례하며 말하기를,
“평생을 성인의 가르침을 배우기를 원하여도 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 가르침의 요체를 들었으니, 소자에게는 진실로 깊이 감사하고 다행입니다. 제가 심히 불민하지만 성, 경, 충, 효 이 말씀을 청컨대 섬기겠습니다.”
고 하였다.
주공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주역은 곧 성명(性命)의 뿌리로 복희씨가 선천(先天)의 오묘한 이치를 열어 보인 것이며, 문왕께서는 후천의 요지를 지으셨는데, 천지를 범위로 하며 일만 가지 이치를 갖추었으니, 그것을 배우는 자는 길흉소장(吉凶消長)의 이치와 진퇴존망(進退存亡)의 도에 밝을 것이므로 큰 허물이 없을 것이다. 지금 그대가 대개 머물 때는 천지의 모습을 살피고 효사를 음미하고, 움직일 때는 변화를 관찰하고 점괘의 의미를 되씹어 보면서 몸에 체득하여야 할 것이라!”
라고 하셨다.
무하옹이 말씀드리기를,
“이미 성대한 가르침을 받았는데 감히 분부를 따를 수가 없겠습니다. 다만, <<주역>>을 읽고 공부해 나가는 과정에서 중니의 성스러움으로도 오히려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고 하는데, 하물며 이 어리석고 벌레 같은 제가 어찌 쉽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뒷날을 기다려 다시 와서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두 번 절을 하고서 물러나며 홀연히 잠을 깼는데, 한 꿈이었다.
(번역 김희준)
翁好讀書。尙友千古。嘗取論語一部。秉燭而讀。至夫子吾不復夢見周公。忽廢書而歎曰。吾夫子一貫之旨。雖不可得聞。若其夢周公之夢。則顧不在誠心願見耶。遂題一律曰。生平景仰周元聖。只願承顏一夢間。默誦潛思應有感。雖非眞境幸相看。而已。倚牕假眠。俄到一處。宮殿嚴邃。衮衣繡裳。儼然端坐。乃知其周公所居也。翁叩閽請謁。周公方倉吐哺。令侍者出迎。翁摳衣涉級而入。拜於庭下。具道姓名居地。公欣然問之曰。東國素稱禮義之邦。殷太師遺風餘韻。至今尙存乎。因論說三才五常之道亹亹不已。又曰。予以不德。賴天之靈。輔成王朝諸侯。享國八百餘歲。又與一二僚佐制禮作樂。以爲一代典章。又繫周易三百八十四爻辭。粗發潔靜精微之理。又作大小雅。以定朝會宴饗之樂。何莫非文武創繼之功。而世人謬以我爲爲萬世開太平。予實愧焉。又問曰。仲尼撰周易十翼。闡發天地之蘊奧。眞天縱之聖也。夢寐常來尋我。今不復見。何也。 翁起對曰。仲尼氏生於周靈王二十一年庚戌。至敬王四十一年壬戌而卒矣。蓋嘗聞仲尼曰。吾不復夢見周公。今公亦言之。始知聖人心融神會。有所相感者深矣。 公曰。千載之下。知我者惟仲尼也。仲尼每有行道之心。夢寐相見。良有以也。又曰。子之訪我亦勤矣。吾何以爲贈。遂索筆書誠敬忠孝四大字以授之曰。子欲求道。盍於此留意焉。翁奉書再拜而謝曰。生平願承聖訓而不可得。今聞旨訣。在小子實深感幸。雖甚不敏。請事斯語矣。公又曰。周易。乃性命之根抵。伏羲開先天之妙。文考述後天之旨。範圍天地。萬理具載。學之者明乎吉凶消長之理進退存亡之道。故可以無大過。今子盍若居則觀象翫辭。動則觀變翫占。以體之於身乎。翁曰。旣承盛敎。敢不從命。但讀易工程。雖以仲尼之聖。尙亦韋編三絶。矧此愚蠢。豈可易言哉。請待後日更來受業。遂再拜而退。蘧然而覺。乃一夢也。
-<<蘆溪先生文集>> 권1 <夢見周公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