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斷絶)은 어떤 대상과의 관계나 교류 등을 끊어 버릴 때 쓴다.
절단(絶斷)으로도 쓴다.
족보에서 혈통은 어떻게 단절되는가.
전조(前朝) 고려의 흔적을 지우고,
공신(功臣)의 기록을 삭제하여 계대를 끊는 방법이 있다.
이는 절대자가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변란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이로 인해 문중의 계대가 사라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실록에 기록된 사례를 살펴보자
조선은 상징성이 높은 문화재와 고려 임금의 어진, 동상이나
몇몇 불교 문화재들을 찾아내 땅속에 묻거나 불에 태웠다.
(세종실록32권, 세종 8년 5월 19일 임자 9번째기사)
도화원에 간수된 전조(前朝) 왕씨(王氏)의 역대 군왕과
비주의 영자초도(影子草圖)를 불태웠고
태조 왕건의 진영, 쇠로 만든 주물상, 고려 2대 왕 혜종의
진영과 조각상을 개성으로 옮겨 묻었다.
고려 군주들의 영정과 역사서 또한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렇게 사라진 공신들의 영정도 몇 점 남아있지만
묻히거나 불태워졌다.
(세종실록 41권, 세종 10년 8월 1일 경진 3번째기사)
앞서 1170년 고려 무신난 시절 수많은 문신들이 처단되었다.
1백 년간 지속된 무신난으로 감히 문중들은
기록으로 남길 수 없었다.
삼국사기 편찬에 동참했던 편수자들은 해당 문중의 족보에서 사라졌다.
문중들은 멸문의 화를 면하기 위해 족보에 기록하는 것을 꺼렸다.
대체적으로 많은 문중들의 상계가 불분명한 이유이다,
혈통의 단절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된다.
1420년 3월16일 집현전을 설치하고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당부했다는 말이 회자되어 참조한다.
“우리 모두 목숨을 버릴 각오로..... 조상을 위해,
후손을 위해 여기서 일 하다가 같이 죽자”
한문수/ 역사칼럼니스트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