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9일 연중 제28주일>
신앙은 관계다.
누군가 그랬다. 한국에서 모든 종교는 길흉화복으로 귀결된다고. 샤머니즘이든 토테미즘이든 자연 발생적 민속종교는 모든 인간의 염원인 길흉화복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종교적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기성 종교들도 한국 사회에서는 마치 민속종교처럼 변질하고야 만다는 자조적인 표현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열 명의 나병 환자가 등장한다. 잘 알다시피 나병은 저주받은 자들의 병으로 인식될 만큼 병이 주는 고통도 크지만, 사회적 소외나 외면, 낙인이 더 큰 고통을 주었다고 할 수 있는 병이다. 따라서 나병 환자에게 있어서 치유란, 다시금 공동체로 수용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치유 받은 열 명의 나병 환자는 병으로부터의 치유뿐만이 아니라 삶 전체가 회복되는 큰 은혜를 입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열 명 중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오직 외국인 한 명뿐이었다고 한다. 어떤 대가를 바라실 분이 아닐 텐데 어찌 예수님께서는 한탄하시듯 불평하시면서 감사를 드리려 돌아온 그에게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하신다.
성경을 주의하여 보노라면 참으로 여러 곳에서 특이한 점이 나타나는데, 그것을 잘 살펴보면 주관하시는 하느님, 역사하시는 하느님을 계시하고 있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 것도 하느님 은총의 결과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고 선택하신 것이지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도 내가 자비를 받을 만한, 즉 주님의 계명을 잘 지켰다든지 하는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 등 성경은 이렇게 특이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 안에 주권자 하느님, 역사하시는 하느님으로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드러내 보여주고-계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복음 내용 또한 성경만의 특이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앙이란, 길흉화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복음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가톨릭 종교’의 본질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좀 더 복을 받고 큰 어려움 없는 인생길을 기원한다. 시대마다 민족마다 자연 발생적인 종교의 형태를 보면 인간의 보편적인 염원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톨릭 신앙이 아니다. 오늘 복음은 그 점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열 명의 나병 환자, 그들 역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달려온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예수님을 뭐라 불러야 좋을지도 몰라 우선 다급한 대로 불러댄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정체나 그분의 인격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어찌 됐든 이 지긋지긋한 저주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하고 절규한다. 이것을 신앙이라 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그들의 병을 고쳐주신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들이 사제에게 몸을 보인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깨끗해졌음을 인정받는 것이며 사제의 인정을 통해 공동체에 다시 수용되는 통과의례다. 어쨌든 열 명이 나병의 고통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예수님께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린 사람은 또 역시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인이다. 복음에 있는 그대로 풀어보면, 열 명의 나병 환자가 나았지만 ‘구원’을 받는 자는 사마리아인 하나뿐인 셈이다.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인 유대인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외국인인 사마리아인 그것도 유대인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차별당했던 ‘사마리아’ 사람이라니!
오늘 복음은 신앙이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신앙은 ‘관계’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관계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다. 아홉 명은 병이 나았지만 ‘예수님과 만남’에까지 이르지 못한다. 외국인인 사마리아인만이 자기를 치유해주신 ‘그분’을 다시 찾는다. 그리고 ‘그분’께 감사를 드린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하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함으로써 ‘구원자와 구원받은 자’의 관계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신앙이다. 관계가 성립한 것이다. ‘그분’은 나의 주님이시고, 나는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물론 주님께서는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그분은 당신이 선택한 이들을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며 그들을 축복과 은총으로 돌보실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복을 비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아니다. 신앙은 ‘관계’다. 하느님과 맺는 관계요, 세상과 맺는 관계다. 하느님은 우리와 기꺼이 관계를 맺으시는 ‘인격신’이시다. 인격적 관계는 ‘벗’(요한 15,15 공동번역,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에서 잘 드러나며, 이 점은 ‘가톨릭 종교’의 특징으로 설명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성경은 절대자 신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보지 않는다. 신앙은 생살여탈권을 가진 절대자 앞에 제물을 바치며 길흉화복을 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신앙인은 본질적으로 ‘관계하는 자’다. 누구와 어떻게 관계할 것인지가 그 사람의 신앙을 나타내며 신앙인의 삶이 된다.
우리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친밀한 관계, 멀어져가는 관계, 비겁한 타협 관계, 거래 관계, 야합하는 관계, 사랑하는 관계, 미워하는 관계, 멀리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관계 등 수많은 관계가 우리의 삶을 채워간다.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이 보이고 그 사람의 신앙이 보인다.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톨릭 신자들은 세상의 정의가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를 부르짖고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이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인간’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신앙인은 신앙인이라 할 수 없다. 타인과의 관계를 외면하고 자기만의 공간에 머물러 있는 자는 결코 가톨릭 신앙이라 할 수 없다. 가톨릭 신앙인은 보편되고 공번된 관계의 세계 속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확장해가야 한다. 은수자들은 결코 자신이 세상을 등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세상 모든 이들과 보편되고 공번된 관계를 맺으셨다. 누구라도 ‘예수의 이름’을 믿고 그 관계 속에 있게 되면 마지막 날에 구원되리라는 것이 바로 가톨릭 신앙 아닌가?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느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야말로 우리의 이정표가 되는 것이다. 거짓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 참된 관계를 맺는 사람들, 지금은 잘 구분되지 않지만, 그날 그때가 되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마태 24,40; 루카 17,34-36).
첫댓글 계속 세상것을 구하는 기도 였는지 되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고.
이미 받았는데.
돌아와.
감사와 찬양이 없었는지도.
보았습니다.
강론 말씀에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가고 있는거 같아요.
아니.많이요~~^^
ㅎㅎ 감사합니다 .
아내느깜.엄마 느낌
카톨릭 신자 느낌이 나는 사람으로도 한발 한발 정진해 보겠습니다.
나의 인격에는 다양한 모습이 통합되어 있지요. 아내 엄마 사회인 신자 그리고 나 자신으로서의 향기를 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 통합된 인격안에서 성숙한 사람이 되겠지요!^^♥
@라자로 김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