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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1·26 ‘SGI의 날’ 기념 제언 - 평화의 개가(凱歌) 우주관의 부흥
제24회 SGI의 날을 기념하여 이케다 SGI회장은 「평화의 개가 (凱歌)― 우주관(cosmology)의 부흥」이라는 제목으로 제언을 발표했다.
제언에서는 우선 지구일체화(globalization)의 움직임에 따라 세계에 널리 확산되고 있는 정체성(正體性:identity)의 위기 양상에 대해 언급. 또 일본에서 거세지고 있는 정치불신이 전체주의를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하고, 수상공선제(首相公選制) 등을 감안한 제도개혁 검토도 제안하고 있다.
이어서 군사 경제경쟁에 광분했던 20세기를 총괄하며, 현행 세계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모두가 승자가 되는 세계’로의 전환을 호소했다. 또 그 원동력이 되는 ‘세계시민 의식’을 함양하기 위해 인간의 생존 의미에 대한 회답을 주는 우주관의 부흥이 시급하다고 강조.
특히 여기에서 법화경의 드라마를 현대에 소생시켰던 도다 제2대회장의 ‘옥중오달(獄中悟達)’에 대해 소개하면서 SGI운동의 의의와 시대가 요청하는 인간상을 ‘지용의 보살’적인 삶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평화의 문화’ 구축이라는 21세기의 방향성을 고찰하며 ‘소년병금지조약’의 제정을 내놓는 한편, 공존사회를 구축하는 ‘문명의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울러 ‘전쟁없는 세계 실현의 제도화’ 촉진을 위해 지역의 신뢰조성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그를 위한 ‘동북아시아평화포럼’의 설치를 호소했다. 또 무기거래의 기본틀을 제정하는 구체적인 접근을 제시함과 동시에, 핵군축문제에 대해서도 언급. 비핵국과 NGO(비정부기구)가 연대하여 ‘핵무기금지조약’의 체결을 추구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끝으로 5월에 개최되는 ‘헤이그 평화회의’의 의의에 대해 논하면서 민중의 손으로 ‘세계 부전(不戰)선언’과 ‘지구헌장’을 수립하여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지구사회’” 건설의 도전을 개시하자고 제언했다.
세계에 확산되는 정체성(正體性)의 위기
‘대화’와 ‘정신’의 힘으로
인간을 위한 ‘지구문명’의 건설을
드디어 21세기―‘제3의 천년’의 문이 이제 막 열리려 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천년의 개막이 되는 21세기가 전란(戰亂)과 비인간성이 맹위를 떨쳤던 20세기의 단순한 연장선상에 지나지 않는 시대로 될지. 문자 그대로 ‘새로운 세기’로서 미래를 향해 평화와 희망에 가득차 드넓은 지평을 열어가는 시대로 될 것인지. 인류는 크나큰 기로에 서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깊은 어둠을 뚫고 새로운 천년의 지평을 비추는 빛은 과연 무엇인가 ― 그것이 엄격하게 되물어지는 시점입니다.
지난해 11월, 깊어가는 가을의 ‘천년의 도읍’ 교토에서 키르키스스탄공화국의 세계적 문호인 칭기스 아이트마토프 씨와 대담했을 때도 바로 이 점이 초점이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아이트마토프 씨가 제기했던 하나의 질문은 “20세기는 19세기를 초월했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19세기에 활약했던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푸쉬킨 등은 ‘21세기의 정신적 규범’의 골격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과연 20세기의 작가들이 그들만한 위치에 다다를 수 있는지. 그 한계는 여타의 예술이나 철학면에서도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라고.
이에 덧붙여 그가 난색을 표명한 점은 “이 세 사람의 문호조차도 제2차대전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 공산주의나 페레스트로이카 시대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이라 할지라도 20세기 역사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최대 문제에는 직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소련 하에서부터 전체주의의 압정에도 굴하지 않고 문학을 통해 인간의 삶의 방식과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을 끊임없이 구해 마지 않았던 아이트마토프씨의 진지한 물음은 저의 가슴에도 강하게 부딪쳐왔습니다. 그것은 저 자신이 여러 해 전부터 갖고 있던 문제의식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20세기는 과학기술의 진보에 수반해서 인류에게 크나큰 혜택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보’가 인간을 방치한 채 자기 목적화하여 확대일로로 치달아 일어났던 비극도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경향은 해가 거듭될수록 뚜렷해지고 있고, 근년 복제기술을 인간을 향해서까지 적용하는 등 생명윤리 분야에서의 논의가 고조되는 것처럼, ‘과학기술의 단독 활보’에 대한 우려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진정 20세기는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전진’했는가 어떤가 ― 엄격하게 재확인하고 21세기를 향한 희망의 대도를 열어가는 것, 그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책임과 의무라는 생각으로 저 역시 행동해 왔습니다.
무엇보다 그 근저에는 저의 은사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제2대회장의 뜨거운 염원이었던 “지구상에서 비참이라는 두 글자를 없애고 싶다”라는 외침이 있었습니다.
은사는 금세기 중엽, 20세기의 분기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대에 있어서 불법의 인간주의를 내걸고 인류의 불행한 역사가 다시금 되풀이되는 것을 막는 행동을 개시하셨습니다.
그 은사가 언제나 강조했던 것은 바로 “2백년 앞을 내다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이었고, “대화로써 전인류를 하나로 결합해 무너지지 않는 연대를 구축해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오늘날까지 철저히 일관해서 세계의 식자들이나 뜻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거듭해 온 것은 이러한 은사의 말씀을 가슴깊이 새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교훈’을 시대의 격류 속에서 퍼올리며 역사의 지하수맥에서 빛을 발하는 ‘정신의 보석’을 찾아내, 어쨌든 21세기를 그릇되지 않은 방향으로 이끌어가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국가나 민족에 상관없이, 어떠한 역풍에도 발걸음을 내딛으며 오직 같은 ‘인간’으로서 마음을 열고 대화를 거듭해 왔던 것입니다.
아놀드 J. 토인비 박사와의 대담집 『21세기를 여는 대화』를 비롯, 제가 세계의 많은 식자들과 해왔던 대부분의 대담집 타이틀에 ‘21세기’, 혹은 ‘세기’라는 말을 붙였던 것도 그러한 마음을 담아서였습니다.
은사의 외침으로부터 반세기. 눈앞의 일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1백년 후, 2백년 후의 세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를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끊임없이 사색하고 행동해 왔던 50년이었던 것입니다.
‘제3의 천년’이라 할지라도 달력상으로 날짜가 새롭게 바뀌었다고 갑자기 시대가 창출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를 창출하여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의지이고, 현실의 행동입니다.
여기에서 21세기를 지향해 가는 데 중대한 과제라고 생각되는 점으로, 현재 맹렬한 기세로 추진되는 경제면에서의 지구일체화 ― 이른바 ‘글로벌 경영(globalization)’ ― 움직임을풍부하고 다양한 지구문명의 건설로 방향전환해 가기 위한 비전 제시입니다.
아울러 그 과제 실현을 위해 SGI운동은 어떠한 공헌을 할 수 있는지, 또 어떠한 의의가 있는지를 새롭게 확인하는 일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반년쯤 전에 만나뵈었던 유엔의 전(前)사무총장인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박사가 예리하게 문제제기했던 내용을 상기해 봅니다.
박사는 금융을 비롯한 환경, 질병 등 점차 세계화되어 가는 제문제에 직면한 세기말 사람들의 심상(心象)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국제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 가지 않으면 ‘국내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그러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국 뿐만 아니라 국제정세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 사람들은 마음 저변에서 국제화 조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불안으로 인해 자신들의 작은 ‘지역 국가’나 ‘전통’에 얽매어 외국인과의 교류를 거부하는 경향을 또 보이고 있습니다. 일종의 ‘새로운 고립주의’입니다”라고.
박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요약하면 이미 대부분의 식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정체성 위기<자기 존재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세계를 끌어들이면서 가차없이 진행되는 세계통합주의(globalism)의 스피드와 난폭함에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망연자실하여 안으로 안으로 자폐해 갈 수밖에 없는 꽉 막혀버린 상태.
혼돈스러운 시대변화의 조류에 ‘뿌리없는 풀’과 같이 표류하면서, 거기에다 또다시 삶의 근거를 묻지 않으면 안되는 불안함 ― 그러한 살풍경한 마음상태야말로 세기의 전환기를 맞은 인류에게 산적한 지구적 문제군보다 더한 과제가 아닐까요.
‘유네스코헌장’이 제시하고 있듯이 평화를 원한다면 먼저 마음 속에서부터 ‘평화의 요새’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덧붙여 최근 몇 년을 되돌아볼 때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킨 두 권의 철학적 환상이 저의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그 하나는 『소피의 세계(Sofies Verden)』(요슈타인 가아더著)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들의 모험(Running from Safety)』(리차드 바크著)입니다.
아시는 바대로 이 두 권의 책은 제목을 보더라도 그렇고, 각각 소년 소녀가 중요한 역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철학 전문서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평이한 실마리로 시작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심원한 철학의 세계로 빨려들어가는 환상적인 구성입니다.
상징적인 것은 이 두 권의 책의 띠지에 붙어있는 문구입니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 세계는 어디서 왔나?(『소피의 세계』)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왜 여기에 있는가?(『우리들의 모험』)
그로부터 부각된 주제는 바로 삶의 근거를 묻는 ‘자아발견’의 여행이라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이후, 사람들이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반드시 되돌아가 거듭해서 물어왔던 낡고도 새로운, 철학의 원초적 주제인 셈입니다.
또한 수많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공략되었다가 <미국 카터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이었던 브레진스키 씨의 시험적 계산에 따르면 금세기에 전쟁이나 혁명 등 인위적으로 빼앗긴 인명은 1억 6천 7백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제 그 숙취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20세기 말의 우리들에게도 역시 이 원초적 주제는 부득이 반문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인류사의 난문(難問)을 놓고 일본만이 ‘강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전통적인 것을 너무나도 쉽게 버릴 수 있었기 때문에 후발의 근대국가로서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물게 성공을 거둔 대가로, 현재의 일본인의 정체성 위기는 보다 심각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냉정하게 생각해볼 때 황당무계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교리(dogma)를 앞세우는 기괴한 컬트교단에 최고학부를 졸업한 수많은 영재들이 무방비 상태로 휘말려 들어가는 등, 실로 세기말적 현상이 일어날 리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자아발견’의 여행이란 인간이라는 필연적 증거이기도 합니다만, 대단히 주의하여 여행의 발걸음을 옮기지 않으면 ‘당신 자신’ ‘진실된 자아’에 도달하기도 전에 미처 생각지 못했던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특히 제가 우려하는 것은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고 말해지듯이, 작금의 일본에 있어서의 정체성의 위기상황 틈을 메우지 않으면 갈리 박사가 말했던 것처럼 ‘새로운 고립주의’가 ‘국가주의’적인 포장으로 대두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국가주의’에 대해서 몇 년 전부터 경종을 울려왔습니다만, 지난해의 예를 들어 잡지 『세계』(12월호)가 ‘신(新)국수주의적 토양’이라는 특집을 기획한 바 있듯이 더한층 그 기세를 더해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정신의 공백에 소리없이
다가오는 ‘국가주의’의 위험성
‘군사’‘경제’ 경쟁에 광분했던 20세기
모두가 승자가 되는 세계로의 전환을
더한층 우려되는 것으로는 그러한 국가주의적 풍조에 이의를 주장하는 측에서조차 국가주의에 “노(No)”를 내밀기에 충분한 근거, 또는 뛰어난 대응책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정치세계 하나만 보더라도 각종 선거 투표율의 저조나 무소속층의 증대, 정당지지율의 점차적인 감소경향 등, 근래의 정치불신이나 정치문화의 쇠퇴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인간의 뛰어난 언어적 영위인 정치의 생명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념이나 정책 등은 뒷전에 미뤄 놓은 채 오로지 ‘정국(政局)’만을 뒤좇는 정당정치의 방황, 귀결로서의 정치 언어 ― 예전에는 ‘윤언여한(綸言如汗: 군자의 말이 한 번 입밖으로 떨어지면 취소하기 어려움이 마치 땀이 다시 몸 속으로 들어갈 수 없음과 같다)’이라 불리던 정치가의 말의 타락은 그칠 줄 모릅니다.
‘나가타초(永田町: 도쿄 남단의 한 구역으로 황실의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회의사당과 수상관저 등이 있다)’라는 폐쇄된 공간아래 암호처럼 어지럽게 오가는 말들. 그러한 폐색적인 상황을 타파해가는 힘이나 특히 젊은이들의 마음의 어둠을 가르고 그 오저에서 공명음을 연주하는 힘 같은 것은 바랄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의를 환기해 두고 싶은 것은, 전쟁 전의 국가주의 ― 저 혐오스러운 군국주의 파시즘이 활기를 띠었던 것도 정당정치의 쇠퇴, 소멸과 그 길을 같이 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다이쇼(大正) 민주정치를 시대적 배경으로 마침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던 정우회(政友會)와 민정당(民政黨)에 의한 2대 정당제는 내외정세의 격동, 정(政)·관(官)·업(業)의 유착, 선거제도 미비 등의 여러 조건이 겹쳐 민심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국민의 마음에 정치 불신과 냉소주의가 확산되는 가운데 불과 8년 만에 그 명맥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주1>라는 국가주의 체제로 수렴, 자리를 잡았던 것입니다.
그 군국주의 파시즘의 악덕정치 밑에서 철저히 탄압받았던 창가학회의 출현 의의에 비추어볼 때, 저는 두 번 다시 그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고 호소해 두고 싶습니다.
그를 위해서라도 벼랑끝에 서 있다는 느낌조차 드는 작금의 정치불신,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나 냉소주의를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한 퇴영감(뒤로 물러나서 움직이지 않음), 무력감이 바로 전체주의를 낳고 증장시키는 온상으로 화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민중이 각성, 한 사람 한 사람이 강해져서 현명한 비판력과 판단력을 지니는 것이 근본이고 왕도(王道)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경각심을 가지고 정치를 감시하라”고 했던 은사 도다 제2대회장의 유언을 새겨, 민중 속으로 민중 속으로 착실한 활동을 전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제도면에서의 대응도 더이상 지체할 수 없을 만큼 그 시기가 임박해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수상공선제’를 시야에 선거제도를 포함한 일본의 정치 시스템이 전후(前後) 50여 년 간 이른바 정(政)·관(官)·업(業)의 유착으로 상징되듯, 여러 면에서 제도의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 지적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5, 6년 사이에는 정치개혁이라는 슬로건을 귀에 따가울 정도로 들어 왔지만,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진척된 것이 아님은 선거제도의 개혁문제 하나만 보더라도 분명합니다. 개혁 전보다 개혁 후가 더 좋아졌다고 하는 사람은 아마 10명 중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이같은 폐색(閉塞) 상황을 타파하는, 민주주의 본연의 자세에 입각해 하나의 제안을 해 두고자 합니다.
그것은 한 나라의 ‘얼굴’이라고도 해야 할 수상의 지위나 권한을, 예를 들면 독일처럼 더욱 강화하든지 아니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수상공선제(首相公選制: 수상을 일반국민이 선출하는 제도)를 도입, 혹은 미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대통령제까지도 시야에 넣어 논의해야 할 단계에 들어서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선진국에서는 일본처럼 수상의 지위나 권한이 ‘경미(輕微)’해서 단기간에 교체를 되풀이하는 사례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지속한 채 불신감을 갖지 말라고 한다면 너무 무리가 아닐까요.
제가 왜 이와 같은 제안을 하게 되었는가는 ‘제3의 개국(開國)’을 맞고 있는 일본에 있어서 지금 요구되는 바는 뛰어난 지도력이기 때문입니다.
전후의 일본 외교를 돌이켜 볼 때, 요시다(吉田) 내각 당시 미일(美日) 안보체제 아래에서 비핵경무장(非核輕武裝)이라는 국가 정책을 채택한 이래, 본격적으로 지도자의 지휘력이 중시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할 것입니다. 미국 반공정책의 일환으로써 대충 그것을 따라가기만 하면 큰 잘못 없이 모든 사항들을 매듭지을 수 있었고,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주체적인 결단을 요하는 사태같은 것은 일단 염두에 둘 필요가 없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수십년 동안 ‘외교부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냉전(冷戰) 구조가 붕괴된 이후부터는 그렇게 하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습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러시아, 한반도, 인도, 동남 아시아와 같은 이웃 나라들을 비롯한 전세계에 범지구적 시야가 골고루 미치는 균형 감각과 과감한 결단력이 없으면 이만큼 경제력이 비대해진 나라의 지도자로써는 도저히 제기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일본처럼 수뇌급 회담이 있을 때마다 다른 얼굴의 수상이 등장해버릴 경우에는 수뇌간의 신뢰관계를 구축하는 데도 지장이 생길 것이며, 국가간의 신뢰 관계를 조성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필요한 정책의 일관성마저도 결여되고 맙니다.
저의 지인(知人)인 헨리 키신저 씨가 일본의 한 기자에게 “오랫 동안 일본과 교류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일본에는 어떤 일을 결정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고 말했다고 합니다만, 과거는 과거로 돌리고 선거를 통해 선발되어 강력한 권한을 부여받은 리더가 일정 기간 아주 큰 문제가 없는 한 그 직책에서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예를 들면 수상공선제에 대한 검토도 폐색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한 대담한 발상(發想)의 전환을 할 시점이 다가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의 초점을 원위치로 돌리면 갈리 박사가 우려하셨던 새로운 ‘고립주의’는 일종의 ‘반면교사(反面敎師)’<편집자 주1> 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해 ‘고립주의’의 방아쇠가 될 수 있는 정체성 위기의 문제를 잘 극복만 할 수 있다면 참된 세계통합주의 -- 작금과 같은 세계경제(global economy)측면에서만의 비대화가 아닌, 정치, 사회, 정신면에도 상응하는 글로벌 경영이 갖추어진 지구문명의 모형의 미래상(未來像) -- 가 도래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교시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갈리 박사는 유엔사무총장을 이임하기 직전 제출했던 “민주화를 향한 과제”라는 연구 보고서를 통해 범지구적인 민주주의의 선결과제에 대해 오랜 기간 ‘인류의 의회’의 파수꾼으로서 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열의와 설득력으로 논하셨습니다.
“21세기, 지금부터 2, 30년 사이에 ‘여러 국가간의 민주주의’를 확립해야만 합니다. 국제적인 민주주의, 세계시민에 의한 민주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국제질서는 피라밋처럼 되고 맙니다. 저변에 민주주의가 있어도 그 정상은 비(非)민주주의가 될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말 그대로 박사가 ‘2, 30년’이라는 제한된 시간을 강조한 것도 당연하다고 할 만큼 최근 세계통합주의의 발걸음은 급속도로 빨라졌고 동시에 수많은 난문제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한편 20세기는 ‘열강(列强)’이라 불리는 대국(大國)끼리의 식민지 지배확대를 통해 패권다툼을 벌이고 있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초대 회장은 그런 양상을 좬인생지리학좭에서 “호시탐탐,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이면 다투어 타국을 침략하여 빼앗으려 하고, 그를 위해서는 횡폭하고 잔학한 행동을 결코 꺼리지 않았다”(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전집 제1권)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패권경쟁의 귀결로서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핵전쟁의 위협이 전세계를 감싸는 ‘냉전’이라는 동서 대립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냉전에서는, 동서 양진영이 핵개발 경쟁에 몰두한 결과 군사력은 인간이 조절 가능한 범위를 훨씬 넘어서고 말았고, 상대방을 섬멸하려는 파괴력으로 자신들의 생존까지도 위협하게 되었으며 세계 전체를 파멸시켜 버릴 수 있다는 최악의 상태로까지 인류를 몰아넣었습니다. 인류의 운명은 어느 사이엔가 ‘위기일발의 균형’으로 노출되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냉전을 만들어 냈던 ‘벽’이 허물어진 후 급속히 확대된 현재의 세계통합주의의 양상을 볼 때, 그때까지의 ‘군사력에 의한 일체화(一體化)’의 움직임이 표면적으로는 자취를 감춘 대신, 이번에는 ‘자유경쟁’이라는 목표 아래 ‘경제력에 의한 일체화’라는 새로운 형태로 패권적 관계가 국제사회 속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는 “강한 자는 더욱 강하게, 약한 자는 더욱 약하게”라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또 헤지펀드<주2>로 상징되듯이 머니게임(money game)형 금융 거래가 실제 경제를 훨씬 능가하는 형태로 비대화, ‘자본주의의 카지노화’가 진전되는 가운데 ‘시장원리’를 앞세워 국가조차도 전혀 조절할 수 없는 영역으로 무제한 확대되고 있습니다.
연초 일본의 어느 TV에서는 미국의 경제학자 레스터 써로우(Lester C. thurow - 메사추세츠 공과대학 교수) 박사가 지적했듯이 “국가가 경영을 규제하는 시대는 점점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범지구적으로 경제가 규제되는 시대는 아직 도래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행의 세계경제는 불안정을 초래할 위험성을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으며 실제로 97년 7월에 발단된 아시아의 경제 위기나 러시아의 통화 위기 등도 마땅히 일어날 것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다른 여러 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새로운 위기를 낳는 상황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구적 규모에서의 공정성(公正性)을 한 번도 검토하지 않은 ‘윤리의 부재’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장주의를 도외시해 버리면 모두 배제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세밀한 검토도 없이 ‘세계표준(global standard)’이라는 명목 아래 일률적으로 추진되는 일이 실로 타당한 것인가를 되묻는 작업이 요구되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써로우 박사는 좬자본주의의 미래좭라는 저서를 통해 “서로 협력하는 이데올로기는 쇠퇴하고 적자생존의 자본주의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고 하며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갖는 사회 다위니즘(Dawinism: 약육강식)적인 경향을 비판하면서 “자본주의가 금후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소비 이데올로기에서 건설 이데올로기로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습니다만 그 의견에는 저도 대찬성입니다.
작년에 했던 제언에서 저는 마키구치 초대회장이 제창했던 인도적 경쟁의 이념에 입각해서 약육강식의 ‘경쟁’이 아닌 ‘공창(共創:함께 가치를 창조한다)’의 전환을 촉구했습니다. 이것을 경제에 입각해서 말하면 서로 재산을 빼앗는 ‘소비 경제’가 아니라 서로 가치를 부여하는 ‘건설 경제’ -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이 가치창조를 실현할 수 있는 경제로 전환시켜 가는 것이야말로 지금 절실히 요구된다고 느끼는 바입니다.
특히 작금의 금융 위기에서 공격의 대상이 된 헤지펀드 같은 단기자본 이동의 폭주에 대해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제동을 걸어 규제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인이자 미래학자인 헤이젤 핸드슨 박사가 제창한 “모두가 승자가 되는 세계”를 향한 전망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아무래도 불법자로서의 저의 관심은 정체성의 문제로 향하게 됩니다. 세계시민이라면 그에 걸맞는 아이덴터티의 근거, 다시 말해 세계관이나 우주관의 이론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글로벌경영에 뒤따르는 시장경제의 보드레스(borderless)화는 필연적으로 문화, 특히 소비 문화의 획일화, 동질화를 초래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비인칭적(非人稱的) 소비자 지위에 만족할 리 없는 인간의 정신은 어느 시점에서는 획일화, 동질화의 흐름과 마찰을 일으켜 늘상 어떤 형태의 배타주의 - 갈리 박사가 말하는 새로운 ‘고립주의’와 상통하고 있습니다 - 로 치닫게 됩니다.
이러한 대립의 구도를 미국 라트거즈(Rutgers) 대학의 베냐민 바버 교수(Benjamin R. barber)는 좬지하드(jihad) 대(對) 맥월드(Macworld)좭라는 저서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수는, 세계는 지금 모든 국가를 동질의 테마 파크(공원)로 가두어 버리는 ‘통신, 정보, 오락, 상업으로 일체화된 하나의 맥월드’와 모든 종류의 상호 의존이나 인위적인 사회협력, 상호관계에 반대하는 ‘편협하고 맹목적인 신념이라는 이름 아래에서의 성전(聖戰: 지하드)’이라는 두 조류로 나뉘어 있으며 서로가 연관되어 가는 속에서 혼미(混迷), 다시 말해 정체성의 위기가 더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경영의 혼미를
타개하는 ‘세계시민’ 의식
‘맥월드’ ‘지하드’란 바버 교수 특유의 용어로 ‘맥’이란 미국 최대의 햄버거 가게인 맥도널드의 호칭에서 착상을 얻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통신, 정보, 오락, 상업 등을 통해 세계통합주의의 물결이 밀어닥쳐 일체화된 세계를 말하며, 그를 움직이는 추진력이 되고 있는 것이 ‘이윤 동기의 보편성(거기에 따른 상품 정치)’이라고 했습니다.
확실히 시장경제 도입에 깊이 빠져들었던 페레스트로이카 초반에는 모스크바 번화가에 인접해 개점했던 맥도널드는 그 주변에서 2∼3시간을 기다리는 일이 보통이라 할 정도로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는 사실도 있듯이 그 맥도널드가 세계경제하에서의 ‘단독승리’라 일컬어지는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적 존재라고 할 때 ‘맥월드’라는 호칭도 수긍이 갑니다.
한편 ‘지하드’란 말할 나위도 없이 이슬람어로 ‘성전(聖戰)’을 뜻하는 말입니다. 저는 지하드라는 말을 배타주의전반에 전용(轉用)시키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하지만, 여기서 이슬람어 본래적인 의미와는 분리시켜 교수가 뜻하는 개념을 표현하는 말로써 이해하고자 합니다. 실제로 교수 자신도 ‘이슬람 교도뿐만 아니라 기독교 교도, 아랍인뿐만 아니라 독일인에게도, 힌두어를 말하는 사람’에게는 공통된 폐단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독자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들을 이질적인 타인과 비교해서 상대방을 배제하고, 분노를 그 정책으로 삼는다”라고. 따라서 그 추진력이 되는 것은 ‘편협한 민족의 독자성(그에 따른 분노의 정치)’인 것입니다.
‘맥월드’라 하고 ‘지하드’라 해서 두 영역이 뚜렷이 나누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란 끊임없이 ‘의미’를 묻는 존재인 이상 순수한 ‘맥월드’의 거주자 등은 생각할 수도 없고, 또한 아무리 국경을 굳게 폐쇄한 ‘지하드’라 해도 환경파괴와 같은 ‘지구적 문제군’ 밖으로는 도망칠 수 없으며, 세계경제의 물결을 완전히 차단시키는 일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대인은 많든 적든간에 양자(兩者)가 서로 혼재하는 가운데 정체성의 위기를 끌어 안고 살아가는 것이 거의 숙명적으로 짐 지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왜 ‘위기’라고 하는가 하면 ‘상품=탐욕’ ‘분노=노여움’으로 부합되듯이 ‘맥월드’나 ‘지하드’도 그 저변의 힘이 불법상으로 말하면 삼독(탐진치=탐욕, 노여움, 어리석음)이라는 무명(無明) 중의 무명의 영역을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수가 “양자의 변증법적인 상호 작용에서 예기치 않은 새로운 형태의 독재가 탄생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우려하듯이 무명이라는 어둠 속을 배회하고만 있을 뿐,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광명(光明) 같은 것은 발견하지 못하고, 또 플라톤이 경고했듯이 독재의 그림자가 소리없이 다가올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범지구적인 민주주의 형성을 위해 요구되는 세계시민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무엇이 필요할까요.
바버 교수는 개인적(사적)인 공간에 틀어박혀 있지 않고 ‘공적(公的)인 것’에 항상 적극적이면서 주체적으로 참여하려고 하는 시민상(市民像)을 ‘공중(公衆)’이라 부르면서, 세계시민에 대한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공중(公衆)을 만들어내는 것은 시민 사회가 할 일이다. 거기서만이 민주주의를 염원하고 맥월드의 매력적인 노랫소리에 대항할 수 있는 태도가 나온다. 그럴 때 비로소 지방적인 상호관계의 인간적 필요에 답할 수 있는 공동사회가, 누구의 참여도 거부하지 않는 세계시민의 감정이 열려질 수 있다.”
이 공중이 주로 활동하는 공간은 당연히 ‘정부’와 ‘사적 영역’ 사이에 있는 중간 영역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도시 사막’의 모래를 씹는 듯한 현대라고 하는 무미건조한 사회풍경을 보면 이러한 언어 공간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 책(좬지하드(jihad) 대(對) 맥월드(Macworld)좭)에서도 확실한 전망이 제시된 것은 아니며, 초기 뉴잉글랜드 타운미팅<주3>에 대표되듯이 언어 공간이 숨쉬고 생기를 발하면서 활발한 토의가 진행되고 있는 미국 민주주의의 가장 양질의 부분이 힌트로써 제시되는 것에 그치고 있습니다.
저는 세계시민을 육성하고 배출해 가는 요람이라고도 해야 할 이러한 언어 공간의 활성화야말로 종교, 특히 21세기를 개척하는 도덕적 기풍(ethos)의 핵심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계종교에 맡겨진 최대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행위의 정점에 이를 수 있는 진실된 종교야말로 인간의 자원봉사활동의 구극에위치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런 종류의 종교는 모든 자원봉사활동의 ‘의미 부여’ ‘동기 부여’를 가능케 하고 확고한 ‘발판’을 제공해 갈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창가학회에서는 올해를 ‘신세기를 향한 지역 승리의 해’라 정하고 21세기를 향한 전진을 개시했습니다만, 여기서의‘지역’이란 바로 지금 말했던 것처럼 ‘활성화된 언어공간’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서민들이 모여 서로 대화하는 활기찬 언어 공간을 일본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시켜 가는 일만이 침체될대로 침체된 일본사회를 활성화시키고, 나아가서는 갈리 박사가 권장하고 있는 듯한 범지구적인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세계시민의 군상(群像)들도 계속해서 배출되어 가리라는 것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또한 1996년 6월, 저는 미국 플로리다 자연문화센타에서 개최된 SGI총회 석상에서 SGI는 ‘창가학회 인터네셔널’임과 동시에 ‘사회의 선한 단체(Social Good Institution)’의 머리글자로써 사회에 애칭을 제안하여 찬동을 얻었습니다.
마키구치 초대회장이 사회에 이익을 부여하는 것이 선이며 거기에야말로 진정한 종교의 역할이 있다는 것에서 착안한 것입니다.
인간을 활성화시키고 사회를 활성화시키는 것보다 더한 ‘선한 일’은 없으며, 종교는 물론 정치도 경제도 교육도 모두 이 일점에 맞추어 가는 것에 그 존재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세계종교의 역할을 깊이 인식하여 SGI운동의 역사를 따뜻하고 또 주의깊게 지켜봐 주셨던 분이 국제종교사회학회의 전 회장인 브라이언 윌슨 박사(옥스포드 대학 명예교수)이십니다.
해박한 지식과 공정한 식견의 소유자이신 박사는 종교가 인류의 역사에 끼친 공죄(功罪)에 대해 엄격한 견해를 나타내고 계십니다만(이 점은 저도 동감하는 부분입니다), 그래도 사회에서 종교가 최후의 의처(依悽)로서 완수해야 할 역할에 대해서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와의 대담집에서 “한편에는 잡다하면서 다양한 지방적 관심이라는 것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지구적 문명과 전인류의 문화라는 보편적이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목표가 있다고 합시다. 이들 양자를 연결하는 움직임이 생겨나 그 도랑에 다리를 놓아야 한다면, 그것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종교밖에 없을 것이다” 좬사회와 종교좭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냉철한 분석 속에서도 인류의 미래를 생각하는 열정으로 가득찬 박사의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동시에 굳은 결의를 했던 것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윌슨 박사 “분단극복의 열쇠는 종교에”
법화경의 드라마를 체현한 도다 제2대회장의 「옥중의 오달」
인간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여 소생시키는 SGI운동의 원점
또 박사는 작년 여름 저의 입신기념일에 보내주셨던 글월에서 창가학회가 종교라는 울타리에 갇히지 않고 평화·문화·교육의 만반에 걸쳐 힘을 쏟고 있는 점에 대해 언급하면서 ‘시대의 요청에 부응한 종교’라고 평가해 주셨습니다. 종파성(宗派性)을 초월한 SGI운동의 측면을 예리하게 간파해 주시고 있는 셈입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와 같은 종교운동은 단순히 지친 사람들이 서로 모여 고민을 풀거나 위로를 구하는 차원의 피난처와 같은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종교를 신봉하는 것에 의해 새로운 자신으로 탈피(脫皮)해 가는 해방감, 의식변혁 또는 혼의 고양(高揚)을 가져오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거기에 바로 시대변혁을 향한 종교운동의 진면목이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정체성 위기의 극복, 또 ‘지방적 관심’과 ‘보편적이면서 중요한 목표’의 가교작업(架橋作業)등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입니다.
여기서 또한 저는 현대인의 혼을 깊이 잠식(蠶食)시키는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록 우회하는 듯 보이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세계관, 우주관의 부흥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거기까지 깊이 파고들지 않으면 세계시민이라 하더라도 ‘그림의 떡’과 같이 부질없다고 생각됩니다.
유럽의 정신사(精神史)에 입각해서 말하자면 중세에서 근세, 근대로의 이행(移行)은 낡은 ‘세계관’에서 새로운 ‘세계관’을 향한 이행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의 시대에서 ‘세계관’이 없는시대로의 이행이었다고 지적됩니다.
단테의 『신곡(神曲)』 등은 분명 장대한 세계관이며 우주관입니다. 땅속 깊은 곳에 ‘지옥계’가 있고 그 중심을 지나 반대쪽으로 빠져나가면 ‘정죄계(淨罪界)’의 산이 있고 상공(上空)에는 ‘천상계(天上界)’가 구층(九層)으로 쌓여 있어서 거기를 올라가면 신이 살고 있는 지고천(至高天)으로 연결됩니다.
저는 이러한 세계관을 그대로 긍정하지도 않으며 또 역사의 진보라는 것을 무턱대고 부정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관이 근대지식이나 과학에 의한 검증에 견뎌내지 못했다는 문제는 차치하고, 그보다 중요한 것으로 서두에서 언급했던 “자아발견”이라는 말입니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 세계는 어디서 왔나?’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왜 여기에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 『신곡』의 우주관이 그 나름대로의 ‘답’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 그것이 사람들의 정체성의 근거가 되어 행불행, 고락, 성쇠가 있을 때마다 ‘신의(神意)’를 감득하는 것에 의해 정신세계의 ‘의미’ 있는 위계질서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근대의 과학적, 기계론적 세계관은 그러한 인간의 원초적 ‘물음’에 대한 ‘회답’은 전혀 모른다는 얼굴로 도리어 ‘회답’을 거부하는 쪽이 더 옳다고 하는 것으로 성립된 그런 종류의 세계관, 우주관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반세계관(anti-cosmos)의 성격을 본래부터 지니고 있으며, 근대가 ‘세계관이 없는 시대’라고 불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아니 깨달으려 하지도 않고 지식을 지혜로, 쾌락을 행복으로 착각하면서 오로지 근대화의 길만을 전력질주한 결과, 인간은 지금 ‘맥월드’에 있어서 단순한 ‘소비자’로 왜소화(矮小化)되어 ‘상품’의 노예로까지 전락할 정도입니다. 정체성의 균열이 더욱 깊어진 것도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D.H. 로렌스는 좬묵시록(Apocalypse)좭에서 우주관의 부흥을 호소해 마지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원하는 것은 허위의 비유기적인 결합, 특히 금전과 이어지는 결합을 무너뜨리고 우주, 태양, 대지(大地)와의 결합과 인류, 국민, 가족과의 생생한 유기적 결합을 또다시 이 세상에 수립하는 데 있다. 우선 태양과 함께 시작하라, 그렇게 하면 다른 것은 서서히 잇달아 일어설 것이다.”
로렌스가 이같은 경세(警世)의 외침을 울린 지 70성상(星霜)이 되었습니다만, 마치 오늘날의 사태를 예감이나 한 듯한 절박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탁월한 예견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의 SGI운동도 또한 우주관의 부흥을 위한 하나의 시도이며, 정체성의 위기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을 호소해 두고자 합니다.
그 원점이 된 것이 은사 도다 조세이 선생님의 옥중오달(獄中悟達)입니다. 1944년 옥중에 있었던 은사는 마음먹고 원단부터 창제에 면려하는 사이 법화경을 신독(身讀)하게 되고 3월과 11월에 두 차례에 걸쳐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하나는 ‘부처는 생명’이라는 오달(悟達)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영산일회(靈山一會), 엄연히 아직 산회하지 않았다’는 깨달음입니다. 즉 석존이 법화경을 설한 영추산의 회좌에 상행보살(上行菩薩)=니치렌(日蓮)대성인을 필두로 무수한 지용의 보살이 용출해서 석존으로부터 올바른 법의 부촉을 받았을 때 틀림없이 자신도 그 중의 한사람으로서 회좌에 열석하고 있었다 ― “나는 지용(地涌)의 보살(菩薩)이다”라는 깨달음인 것입니다.
이 두번의 깨달음 ― 특히 두번째의 “나는 지용의 보살이다”라는 자각은 자칫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 가공의 이야기로 간주되기 쉬웠던 법화경의 극적인 전개를 니치렌 불법의 본의에 준해서 생생한 우주관의 화폭으로 소생시킨 불법사상 실로 괄목할 만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실증과학적인 ‘사실’과는 차원을 달리하며 나아가 ‘사실’이라는 차원에 배반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마저도 감싸안은 종교적 ‘진실’의 세계, 우주관의 개시(開示)였습니다. 이 은사의 흉중에서 연출된 우주관 부흥의 드라마야말로 우리들의 원점이며, 영원히 변치 않는 SGI운동의 정체성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이 우주관은 또한 앞서 언급했던 인간의 원초적 ‘물음’에 대한 확고한 ‘답’을 마련함으로써 정체성의 위기로 흔들리는 세기말의 ‘혼돈(chaos)’을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되찾아 줄 수 있는 ‘코스모스(cosmos)’로 변모시키는 인류사적 의의를 가진다는 것이 우리들의 긍지이자 확신입니다.
제가 열 아홉살, 은사를 처음 만났을 때 받았던 그 강렬한 인상을 한 편의 즉흥시를 빌어 표현했었습니다.
나그네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려 하는가
달은 이미 저물었는데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동트기 전의 카오스에
빛을 구하여
나는 나아간다
마음의 먹구름을 거두고자
폭풍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대수(大樹)를 구하여
나 대지로부터 솟아나려 하는가
물론 그 당시의 제가 법화경의 심의(深義)를 알 리는 없었습니다만, 은사의 오체에서 뿜어나오는 인격의 힘, 생명의 힘에서 그러한 우주관의 태동(胎動)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우주관의 내실(內實)에 대해서 구극적으로는 ‘신(信)’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므로 본론의 문맥에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특필할 만한 것은 삼세를 가로지르며(영원성), 시방을 포섭하는(무한성) 은사의 오달이 내포하고 있었던 놀라운 자력(磁力), 기폭력(起爆力)입니다.
은사는 석존 시대, 니치렌 시대의 청년신도에 대해 언급하면서 우리들 초창기 청년들에게 이렇게 호소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위대한 과거의 청년과 같은 목적, 같은 도정(道程)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이에 뒤지지 않는 각오에 서지 않으면 안된다. 영추산회에 자리를 같이했을 때 ‘말법의 청년들은 칠칠치 못하구나’ 하고 사리불존자나 대성인 문하의 상인들로부터 비웃음을 받아서는 지용의 보살이라는 직함이 부끄럽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분기하라! 청년 제군이여! 싸우지 않겠는가! 청년 제군이여” 라고.
이 은사의 사자후에 호응하여 저를 비롯한 수만, 수십만의 청년들이 ‘분기하여’ ‘싸워’ 낸 결과, 일파가 천파 만파로 되듯 오늘날의 SGI운동의 광대한 흐름을 구축해 왔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우주관이 가지는 자력이며 기폭력이었던 것입니다.
링컨은 “모든 사람들을 잠시 동안 우롱한다거나 소수의 사람을 끊임없이 언제까지나 우롱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을 언제까지나 우롱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만, 전후 창가학회의 50여 년간의 역사와 그 유포는 도다 조세이라는 한 사람의 위인의 흉중에서 시작된 우주관 부흥의 드라마가 전전(展轉)에 전전을 거듭하여 얼마나 획기적인 의의를 새겨 왔는가 하는 증거입니다.
두번째로 특필할 점은 우주관 부흥의 주역이며 우리들의 정체성의 근거인 지용의 보살이 체현하고 있는 인격, 품성(character)이며, 정신성(mentality)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대화의 달인’ ‘소프트 파워의 기수’라 할 수 있습니다.
법화경에는 지용의 보살이 되는 사람에 대해 간결하게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지(志)와 염력(念力) 견고하고
언제나 지혜(智慧)를 부지런히 구하며
종종(種種)의 묘법(妙法)을 설하여
그 마음 두려워하는 바 없도다.
(법화경병개결, 487쪽)
난문(難問)에 지혜롭게 답하고
그 마음 두려워하는 바 없으며
인욕(忍辱)의 마음 결정(決定)하여
단정(端正)하고 위덕(威德) 있도다.
(법화경병개결, 493쪽)
‘두려워한다’란 상대를 두려워하고 꺼려서 자신과의 사이에 벽을 만들어가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국경의 벽, 인종의 벽, 계급의 벽, 남녀의 벽, 호악(好惡: 좋고 나쁨)의 벽, 종교의 벽, 귀천의 벽, 지위의 벽….
그러한 벽을 높여 상대를 배제하고 차별하는, 따라서 양심의 가책을 슬그머니 덮어버리는 선입관으로 상대방을 보며(월터 리프먼은 ‘고정관념<stereotype>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마음의 회로(回路)를 닫고 맙니다.
그것은 서로 믿고 이해하려는 의지와 노력, 대화를 성립시키려는 인내심과 긴장감과는 무관한 지극히 타성적인 태도라고밖에 할 수 없으며, 역사가 증명하듯이 그와 같은 나태한 정신이 폭력으로 향하는 데는 한 걸음 정도의 차이밖에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바 없다’고 칭찬받았던 지용의 보살은 그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인간 상호간을 가로막는 어떠한 차별의 벽도 뛰어넘는 그는, 그곳에 인간이 있다면 언제나 대화의 테두리, 대화의 바다에 살고 있는 주민입니다.
어느 때는 병을 치유해 주는 미풍과 같이, 또 어느 때는 격려의 드럼소리와 같이, 어느 때는 각성을 촉구하는 종소리와 같이, 그리고 어느 때는 파사(破邪)의 검처럼 강하면서도 유연하고 유연하면서도 강하게 서로 부딪치면서 그 대화는 두려움없이 꺼리낌없이 그치지 않고 계속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그가 인간이 온갖 차별로 나눠지기 이전에 무차별 평등한 인간이라는 점, 인간은 누구라도 대화의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는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창출의 소프트 파워’를
체현하는 ‘지용의 보살’
하버드대학의 조셉 나이 교수는 동 대학에서 했던 저의 강연(<소프트 파워의 시대와 철학>, 1991년 9월)에 대한 소감발표에서 소프트 파워의 정수(精髓)를 ‘협조력(協助力)’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지용의 보살이란 인간을 깊이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이 ‘협조력’을 최후의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대화를 관철해 가는 ‘소프트 파워의 기수’라는 뜻입니다.
그 인격, 정신성을 트리아드(triad: 삼인조, 세 가지가 갖추어져서 하나의 조를 이루는 것)식으로 요약해 두고자 합니다.
一. 자신에게 ‘추상(秋霜)’과 같이
一. 벗에게는 ‘춘풍(春風)’과 같이
一. 악(惡)에 대해서는 ‘사자왕(獅子王)’과 같이 라는 것입니다.
그 ‘소프트 파워의 트리아드’를 체현하는 자가 되어야 비로소 대화의 달인, 명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제2차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부터 46년에 걸친 겨울 학기에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전쟁의 죄를 묻는다”는 연속강좌를 실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이 ‘독일의 양심’은 그 서두에서 “우리들은 서로 대화하는 것을 배우고자 합니다”라고 조용하게 호소했습니다.
확실히 대화야말로 평화를 창출하는 원천이며, 가장 강력한 무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화의 달인’이자, ‘소프트 파워의 기수’인 지용의 보살이라는 직함을 얻은 우리들은 동시에 ‘평화의 기수’로서 항구평화의 지보(地步: 자기 자신의 현재의 지위·입장·위치)를 굳혀 갔으면 합니다.
다음으로 제가 21세기에 기조로 해야 할 시대의 방향성으로서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세계의 부전화(不戰化)로써 ― 즉 ‘전쟁의 문화’에서 ‘평화의 문화’로의 전환입니다.
냉전종결에 의해 전면적인 핵전쟁 사태가 일단은 회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해마다 지역분쟁이나 민족분쟁이 증가하고 있으며, 전혀 감소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해만 해도 유고슬라비아의 코소보분쟁이나, 콩고(구<舊>자이르)내전 등으로 수많은 희생자와 피난민을 내는 참극이 되풀이되었습니다.
그때까지 평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증오와 광기의 폭풍우에 여지없이 휘말려 서로 상처 입히고, 죽이는 너무나도 비참하고 잔혹한 전쟁이 지금도 여전히 세계 각지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울려퍼졌던 전쟁으로 인한 민중의 비탄, 파괴와 살육의 애음(哀音)이 21세기에 시작되는 ‘새로운 천년’에도 똑같이 되풀이되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렇지 않고 인간이 함께 생명의 풍요로움을 서로 구가하는 ‘평화의 문화’의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해 가야만 합니다.
이미 유엔은 2000년을 ‘평화의 문화를 위한 국제해’라고 정하고 있습니다만, 여기에 가미되는 형태로 21세기 최초의 10년간(2001년~2010년)을 ‘세계 어린이를 위한 평화의 문화와 비폭력의 국제 10년’으로 할 것을 작년 11월 총회에서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유네스코를 비롯하여 고르바초프 전 소련대통령, 남아프리카의 만델라 대통령, 아르헨티나의 인권투사 에스키벨 박사, 간디 비폭력연구소 소장 아룬 간디 씨(마하트마 간디의 손자)와 같은 식자들이나 여러 단체가 예전부터 제정을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며, 실로 21세기의 궤도를 ‘평화의 문화’와 ‘비폭력’으로 향하게 하는 참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 국제 10년인 것입니다.
결의(決議)에서는 “미래 세대를 전화(戰禍)로부터 구하여 ‘평화의 문화’로의 전환을 실현시키는 일이 유엔의 책무”라고 하여 가맹국이나 유엔기관, NGO(비정부기구) 등의 협력을 얻으면서 지구상의 모든 어린이들의 행복을 위해 노력해 갈 것을 지향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부조리에 가장 악영향을 받는 것은 언제나 아이들이며, 그것은 전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의 문화」 야말로 21세기의 궤도
비폭력 세계를 지향하여 ‘소년병 금지조약’을
「문명의 대화」로 공생의 지구사회를 구축
지난해 10월 오라라 오투누 유엔사무총장 특별대표가 발표했던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50개의 분쟁지역에서 18세 미만의 어린이들 30만 명이 병사로서 전쟁에 참전하여, 매일 8백 명이 지뢰로 인한 사상(死傷) 등, 1987년부터 10년 동안 2백만 명이 희생되었고 6백만 명이 상해 등의 후유증으로, 그리고 1천만 명이 정신적 외상으로 괴로워한 다고 합니다.
또 보고서에 따르면 내전에 있어서는 “다음 세대를 말살하는 잠재적 적군인 전략하에서 어린이들이 표적이 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특히 우려하는 것은 병사가 되어 싸우는 ‘소년병(child soldier)’이 늘고 있다는 문제입니다.
국제인권단체인 ‘국제 엠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가 이번 1월에 발표했던 보고서에 따르면 18세 미만의 병사를 모집하고 있는 나라는 44개국에 이르며, 그 중에는 분쟁으로 가족을 잃었거나, 군대에 빼앗겨버려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투행위에 참가하는 경우마저 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이같이 일상적으로 폭력에 노출되고 있는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여, 국제사회가 한시라도 빨리 18세 미만의 징병이나 종군을 금지하는 ‘소년병 금지조약’을 제정할 것을 저는 강력히 촉구하는 바입니다.
어린이들을 전투행위에 참가시키는 것은 ‘어린이권리조약’에서도 각별히 항목을 정해 놓고 있듯이 인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임과 동시에, 차세대에게 증오심을 재생산하여 분쟁을 항상화(恒常化)시킬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증오심의 연쇄’‘복수의 연쇄’가 사회에 온존하는 한, 전쟁을 유발시키는 뿌리는 영원히 잘라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들 SGI는 지금까지 유네스코나 유니세프 등 국제기관에 협력하는 형태로 ‘평화의 문화’ 창출을 위한 활동들을 실천해 왔습니다만, 이 국제 10년을 향해 더욱 힘을 쏟아 가고자 합니다. 평화연구기관인 ‘보스톤 21세기센터’에서도 2월부터 ‘평화의 문화’에 관한 지속적인 회의를 실시할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이 ‘복수의 연쇄’를 멈추게 하고 ‘전쟁의 문화’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범죄가 범죄를 부르고 폭력이 폭력을 유발하는, 끝이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인간의 업과 운명을 주제로 한 그리스비극으로는 아이스킬로스(Aischylos)의 좬오레스테이아좭<주4>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헤겔은 『법 철학』에서 이 이야기를 거론, 이렇게 논하고 있습니다.
“복수는 ‘하나의 주관적 의지의 행위’이며, 타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새로운 침해’가 된다. 그러므로 모순으로서 무한한 과정에 빠져, 끝없이 대대로 전해져 간다”라고. 그리고 이 모순을 없애기 위해 복수적 정의가 아닌 형벌을 가하는 정의를 요청하는, 불법(不法)적인 상태를 지양하기 위한 방향성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헤겔의 관점은 국제사회의 문제를 고찰하는 데 있어서도 깊은 시사성이 있습니다만, 작년에야 비로소 설립 합의를 본 ICC(국제형사재판소)는 실로 이 ‘복수의 연쇄’를 억제해 가기 위한 법제도로서의 의의를 가지는 것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ICC는 국제사회에 중대한 침해를 초래하는 대량학살이나 전쟁범죄 등을 중재하기 위한 상설법정으로서 실로 반세기 이전부터 구상되어 오던 것으로, ICJ(국제사법재판소)가 국가간의 분쟁을 다루는 것에 비해, 개인의 형사책임을 추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행해졌던 뉘른베르크나 극동(極東)국제군사재판, 또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설치했던 구(舊)유고나 르완다의 국제재판소와 같은 법정은 있었지만, 모두 개별전쟁에 대응하기 위한 기간이나 관할권을 한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임시 법정에 대해서는 ‘승자에 의한 중재’ 라는 비판이 적지 않았던만큼, 지역분쟁이 격화되는 속에서 대상범죄(對象犯罪)와 형사수속을 사전에 정해놓은 상설재판소에서 대응하는 것이 무엇보다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고조되어 이번에 ICC의 설립 합의를 본 것입니다.
채택된 규정에서는 ICC의 대상범죄로서 ①집단살해 ②인도(人道)에 어긋나는 범죄 ③전쟁범죄 ④침략죄가 거론되고 있습니다만, 특히 전쟁범죄에 관해서는 내전(內戰)에 대한 것도 인정하고 있는 점이 주목됩니다.
또 최고형(最高刑)으로서 사형을 채용하지 않았던 점은 특기할 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수의 연쇄를 억제하기 위해 사형을 채택하는 것은 문제가 남을 뿐 아니라, 현재 사형폐지의 움직임이 세계적인 조류로 되고 있듯이 인도적 차원에서, 또 인권의 견지에서 보아도 타당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관할권이나 유엔안전보장이사회와의 관계 등 실효성의 면에 있어서는 아직 많은 과제가 남아있는 ICC이긴 하지만, 어쨌든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전쟁의 문화’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제도적 토대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일입니다.
앞으로 협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더한층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한 합의가 요구되며 동시에, 안타깝게도 이번 규정에서는 대상범죄로 포함되지 못한 ‘핵무기 등 대량 파괴무기사용’에 대해서도 다시금 검토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는 바입니다.
이어서 ‘전쟁의 문화’를 극복하기 위한 과제로서 제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분쟁이나 대립, 국제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에 관해서입니다.
여전히 국제사회에서는 장기화되는 분쟁 해결을 위해 군사개입의 모색이나, 용이치 않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력 행사가 선택되는 예가 적지 않습니다.
코소보분쟁에서의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공중폭격의 검토, 케냐와 탄자니아가 미국대사관을 표적으로 삼아 실시했던 폭파 테러에 대한 미국의 보복공격, 대량파괴무기의 사찰을 거부했던 이라크에 대한 미영(美英) 양국의 공중폭격 등도 그와 같은 경우입니다.
물론 국제사회에 커다란 위협을 주는 문제를 안이하게 방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지만, 해결방법으로서 군사력을 이용하는 것은 끝까지 신중해야만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드 파워에 의한 강제 해결은 결국 본질적인 해결로는 되지 못하며 불씨를 남기는 예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헤겔이 시사했듯이 아무리 정의나 큰 뜻을 지닌 일일지라도 그것이 타인의 입장에서 침해로 되어버린다면 역시 복수를 초래하거나 수렁에 빠질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고 문제가 되는 바를 분명히 파악하면서 장해를 하나하나 제거해가는, ‘대화’를 축으로 한 소프트 파워가 가장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를 위한 도전은 이미 북아일랜드와 같이 분쟁의 상처가 깊이 남아있는 지역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테러나 유혈참사가 30년 가까이 계속되면서 ‘불치병’이라고까지 일컬어졌던 북아일랜드분쟁은 대화노선의 적극적인 촉진에 의해 지난해 4월 역사적인 화해, 합의에 도달한 바 있습니다.
합의가 쌍방의 주민투표와 국민투표에 의해 승인되었듯이 ‘분쟁이나 살인은 이제 충분하다’는 것은 3천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는 등, 그 무모함을 뼈저리게 느낀 사람들의 실감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합의의 참신성은 뭐니뭐니 해도 국경을 초월한 ‘남북 평의회(南北評議會)’라는 지역운영을 담당하는 기구를 설치,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공생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국가의 틀보다도 먼저 지역주민의 의향을 중시하는 것으로, 분쟁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귀속의식 문제를 극복하는 이번 시도가 궤도에 오를 수 있다면 세계각지에 일어나는 다른 분쟁들을 종결시키는 데 있어서도 귀중한 표본이 되리라고 기대되어집니다.
실제로 이미 스페인의 바스크분쟁<주5>에도 영향을 미쳐 정전(停戰)으로 가는 길을 열고 있습니다.
무장해제 등 과제는 여전히 있습니다만, 신뢰조성을 깊게하는 가운데 합의이행이 진척되도록 국제사회가 협력하여 후원해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북아일랜드의 평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불가피한 대립구도나 타고넘지 못할 벽같은 것은 본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처음부터 ‘대립된 존재’로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장해가 되고 무엇이 대립을 낳는지를 판별해내는 작업이야말로 선행되어야 하겠지요. 평화의 실마리는 상대를 ‘적’으로 보기 이전에 똑같은 ‘인간’으로 보아가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유엔은 2001년을 ‘문명대화의 해’로 정했습니다. 이것은 결의(決議)에도 있듯이 “새로운 천년의 출발을 맞이하여 서로 다른 문명간의 건설적인 대화를 통해 상호이해를 심화시키는 일에 공동으로 노력해 가야만 한다”는 국제사회의 의사표명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제가 창립한 도다기념국제평화연구소는 그 모토로서 ‘지구시민을 위한 문명간의 대화’를 내걸고 활동을 지속해 왔습니다. 동(同)연구소에서는 도다 제2대회장의 탄신 1백주 년에 해당하는 2000년 2월에 “문명의 대화 ― 새로운 천년을 위한 새로운 평화과제”라는 테마 아래 국제회의의 개최를 예정하고 있으며,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동(同)연구소의 소장으로 계시는 하와이대학의 테헤라니안 교수와 저는 현재, 이슬람교와 불교를 둘러싼 ‘문명의 대화’를 진행 중에 있습니다. 교수는 거기서 현대사회는 “커뮤니케이션의 회로가 점차로 확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화 그 자체는 절실히 부족한 세계”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정보화사회가 진전되어감에 따라 이미 만들어져 있는 고정관념의 정보가 일방적으로 투입되고, 실상(實像)을 더욱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의 직접적인 대화가 요구되며, ‘문명의 대화’라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이 기본으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동서냉전이 한창일 때 “그곳에 인간이 있기 때문에”라는 신념으로 소련, 중국 등의 사회주의 국가들을 방문하여 우호의 다리를 놓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종교, 민족, 문명적인 배경이 서로 다른 많은 세계의 분들과도 대화를 거듭해 왔습니다만, ‘인간성’이라는 공통된 대지에 서서 마음을 열고 서로 이야기하면 문제해결의 길은 반드시 열리게 된다는 것이 거짓없는 저의 실감입니다.
누구라도 정말로 분쟁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고립이 의심을 낳고, 의심이 대립을 부릅니다. 그러므로 어떤 나라나 민족도 절대로 고립시켜서는 안된다는 마음으로 철저히 세계를 돌며, 어떤 때는 대화를 통해, 어떤 때는 교육교류나 문화교류를 통해 한 방울 또 한 방울 우정의 물줄기를 불리면서, 인간과 인간을 잇는 평화의 대하를 만들어 온 것입니다.
심리학자 융(Carl Jung)이 지적했듯이 ‘개인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힘은 “인간과 인간의 개인적인 접촉에서밖에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며, ‘평화의 문화’를 신장시키고, 공생의 지구사회를 구축한다고 해도 인간과 인간의 일대일의 대화를 끈기 있게 거듭해 가는 일이 우회하는 것 같지만 확실한 대도로 직결되는 것임을 저는 강하게 확신하는 바입니다.
계속해서 저는 ‘부전(不戰)의 제도화’를 위한 방도를 고찰하여 평화와 희망의 제3의 천년으로 향하는 길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동북아시아 평화포럼’의 설치를
첫번째 과제는 신뢰조성추진을 위한 지역포럼의 육성, 강화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역포럼은 외부의 적에게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한 방위동맹과 같은 성격은 아니며 근접 국가들간에 전쟁으로 치닫는 대립을 막기 위한 신뢰 구축의 ‘대화의 장’ 마련을 뜻합니다.
이러한 틀은 EU(유럽연합) 등에 있어서 이미 실현을 보고 있습니다만, 그때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두 번의 대전(大戰)을 경험했던 독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각국이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강한 결의를 가진 데 있었습니다.
EU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오랜 숙원이었던 ‘화폐통합’을 올해부터 실현시켜 가맹국 가운데 11개국이 통일화폐인 유로를 도입하는 등 통합의 더한층의 깊이로 크게 도약하고 있습니다.
2002년 7월에는 각국의 지폐와 동전은 법정화폐로서의 지위가 말살되어 유로에게 완전 이행될 예정입니다만, 주권국가가 자국의 통화발행을 중지하는 것은 단순히 경제차원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크나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CB(유럽중앙은행)가 통화발행 등 금융정책을 장악함으로써 특정 국가가 마음대로 전쟁비용을 조달하려 해도 타국의 이해가 없는 한 절대로 불가능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EU뿐만이 아니라 ASEAN(동남아국가연합),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OAS(미주기구)나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 또 OAU(아프리카 통일기구) 등과 같은 지역간 협력을 추진하는 기구에 많은 국가가 참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이 각각의 지역에서 신뢰조성의 노력이 추진되어 안정과 평화에 기여하고 있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여전히 포럼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지역 ― 동북아시아나 중동에 있어서도 대립의 심각화를 방지하기 위한 환경만들기의 일환으로 지역포럼의 설치, 지역간 대화의 촉진이 요구됩니다.
역사를 돌이켜봐도 대부분의 전쟁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국가간에, 혹은 이웃나라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만큼 그 제어장치가 되는 ‘대화의 장’을 항상적(恒常的)으로 확보해 가는 일이 반드시 필요 불가결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 저는 ‘동북아시아 평화포럼’의 설치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동북아시아문제에 대해서는 작년 5월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경희대학의 학원장인 조영식 박사를 만나 대담했을 때도 하나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조 박사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랫동안 전쟁만 해왔던 유럽에도 EU가 생겼는데 왜 동북아시아만은 그와 같은 것이 없을까요. 유럽은 이미 하나의 단일국가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들 동북아시아에 있어서도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이 서로 힘을 합쳐서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지 않으면 안됩니다.”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염원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제언을 계속해 왔던 저 역시 참으로 그와 똑같은 생각을 품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21세기를 향해 경희대학과 창가대학의 두 대학이 앞장서서 한일양국의 주축이 되어 이 역사적인 사명을 완수해 가자고 서로 약속했습니다.
이 ‘동북아시아 평화포럼’을 실현시키기 위한 발판으로서 우선 민간학술, 연구자 차원에서 지역간 대화의 촉진을 도모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하나의 방안으로서 현재 창가대학이 격년제로 개최하고 있는 ‘환태평양 심포지엄’과 같은 형태로 경희대학과도 협력하면서 한국, 북한(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국, 러시아, 몽고, 일본 이렇게 6개국을 중심으로 여러 대학, 연구기관 등이 참가하는 ‘평화를 위한 파트너쉽’ 회의를 2000년에라도 개최하는 것이 어떨까라고 제안하는 바입니다.
이같은 시도가 중동 지역에서도 촉진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전(不戰)의 제도화’를 위해
‘ 무기거래규제 ’의 기본틀 제정
비핵국과 NGO의 연대로 ‘ 핵무기금지조약 ’ 제정을 추진
도다평화연구소에서는 올해 3월 터키 이스탄불에서 ‘걸프 안전보장포럼’ 제1회 모임을 개최할 예정입니다. 이것은 노르웨이 국제문제연구소, 코펜하겐 평화연구소,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의 중동·중앙아시아 연구센터 등과 협력하여 개최하는 것으로, 이란과 이라크, 카타르 등 걸프주변의 8개국과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 5개국으로부터 유식자나 정책 담당자, 또 유엔 관계자가 참가하여 걸프지역의 지속적인 안전보장구축의 방도가 검토될 예정입니다.
이러한 대화의 장(場)을 통해 신뢰조성, 경제 협력, 서로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협정 체결, 군비삭감 등과 같은 지역간 협력을 심화시킴으로써 전쟁을 초래할 위협과 긴장상태를 꾸준히 해소해 가는 노력을 거듭하는 것이 지역의 안정과 세계평화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저는 생각하는 바입니다.
‘부전(不戰)의 제도화’를 향해 노력해야 할 제2의 과제는 분쟁을 격화시키고 교착화시키는 원인이 되는 무기거래<무기수출> 문제입니다.
안타깝게도 해마다 무기거래는 증가 일로에 있으며 영국의 국제전략연구소가 발표한 연차 보고서 “군비 균형(military balance)”에 따르면 97년도의 무기거래는 전년보다 12%나 증가했고, 특히 중동이나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증대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97년 세계의 무기거래 총액은 346억 달러에 달한다고 하고, 다른 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무기수출시장이 계속해서 지역분쟁의 무대가 되고 있습니다.
또 통계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으로써, 분쟁이 빈발하는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중고시장을 통한 경무기(輕武器)의 거래가 확산되고 있다고 지적되었습니다.
유엔의 아난 사무총장은 지난해 4월에 발표했던 아프리카 분쟁방지에 관한 보고서에서 이같은 점을 깊이 우려하여 안보리에서 결의한 무기금수제재(武器禁輸制裁)에 대한 위반을 국내법에서 처벌하는 입법조치를 가맹국에 요구함과 동시에, 국제 무기상인이 암약하는 실태를 공개하기 위한 대책을 안보리에 요청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타국의 전쟁이나 내란을 이용하여 자국의 영향력 강화나 상업적 이윤추구를 꾀하는 무기거래는 ‘인간의 안전보장’이라는 관점에서도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이며 그 밑바닥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인의 희생따위 관계치 않는 ‘인간의 악업(惡業)’이 집약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어떤 나라가 무기를 수입해 군비증강을 꾀하면 그것이 지역의 불안정 요인이 되고, 다른 나라는 더한층 신무기(新武器) 도입을 추진하여 긴장이 고조된 사례나, 내전을 치르고 있는 각 세력에게 무기가 건네짐으로써 분쟁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 어려움이 가중되고 장기화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러한 군비확대와 분쟁격화의 악순환을 초래하는 무기거래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상호간의 신뢰조성을 높이는 것에 의해 ‘수요(需要)’를 줄여가는 노력을 추진하는 한편, 어떻게 하면 무기가 분쟁 지역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하는 ‘공급’ 측면에서의 대책을 강구하는 일이 강하게 요구되어집니다.
92년부터 유엔에서는 군비등록제도 <주6>가 새로이 시행되었습니다. 구속력은 없어도 가맹국의 거의 반수가 등록했고, 특히 주요 무기수출국인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과 독일이 보고를 함으로써 (이들이 세계무기수출의 85%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무기이전(移轉)의 개요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제도는 무기 이전의 투명성을 높인면에서 의의가 있는 만큼, 이 기본틀을 토대로 하여 대상(對象) 무기의 범위를 확대함과 동시에 모든 가맹국에 등록을 의무화하도록 조약 교섭을 추진해 갈 것을 저는 제안하고 싶습니다.
이 조약이 실현되면 가맹국간의 신뢰조성 측면에서도, 급격한 군비확장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는 조기 경보의 측면에서도, 결과적으로 세계 전체의 안정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저는 실질적인 무기거래를 억제하기 위해 두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무기의 불법거래에 관한 규제입니다. 아난 사무총장의 보고서에도 있었지만 이미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에 무기를 가지고 들어간 자나 비밀원조를 행한 자, 특히 금수조치의 위반행위에 대해서는 국내법으로 엄중하게 처벌할 것, 그렇지 않으면 국제형사재판소의 기소 대상으로 할 것을 국제사회의 합의로써 실현시키는 일입니다.
둘째는 주요 무기 수출국이 자주적으로 기본선(guide line)을 정해 선행적(先行的)으로 거래억제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에 대해서는 걸프전쟁 후에 안보리 상임이사국 사이에 대화가 추진된 적이 있었으나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올해 서밋<수뇌급 회담>의 주요 과제로서 G8<편집자 주2>에 중국을 추가한 형태로 재개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G9이라는 틀이 바람직한 이유는 주요 수출국인 독일 등도 포함되어 있고 일본이나 캐나다가 중개역(仲介役)이 되어 조정을 도모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서밋에서는 유니세프와 NGO 등의 이름으로 무기이전제한조약의 성립을 위한 노력을 요구한 유엔 결의를 G8이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호소한 바 있습니다만, 조약화까지는 어려움이 뒤따랐다고 해도 그러한 환경만들기를 추진하는 데 있어서 주요 무기수출국이 기본선을 자주적으로 정한 의의는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기본선이 이행되어 신뢰성이 높아지면 다른 무기 수출국에게도 이해가 넓혀져 조약화를 위한 길이 점차로 열려가지 않겠습니까.
제3의 과제로는, ‘전쟁 없는 세계’의 실현을 위해 절대로 피해갈 수 없는 과제로써 군축에 대한 노력을 호소하고자 합니다. 가장 제가 논하고 싶은 부분은 핵무기 군축에 관해서입니다.
지금까지 국제사회는 생물무기나 화학무기 등 대량학살무기나 대인지뢰를 금지하기 위한 여러 조약을 성립시켜 왔습니다만, 자동소총이나 소구경 포 등의 소화기(小火器)와 더불어 핵무기라는 두 가지 분야에 있어서 실제로 군축을 다루는 국제적인 기구는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범람하는 소화기의 규제를 위한 국제적인 기구형성에 대해서는 지난해의 제언에서도 역설, 유엔 총회에서 소화기 규제를 위한 국제회의를 2001년까지 개최하기로 지난해 12월에 의결된 바, 어느 정도의 진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핵무기에 대해서는 냉전이 종결된 지 거의 10년이 지났는데도 지구상에는 아직 3만 발(發) 이상의 핵탄두가 남아 있으며, 미국과 러시아의 START (전략무기감축협상)를 둘러싼 이행 상황도 진전되지 않고 있으며 그밖의 핵군축 교섭도 지지부진합니다.
NPT(핵확산금지조약)의 무기한 연기가 결정되었던 95년 이래, 제네바 군축회의에서의 성과라고는 무기용 핵분열성 물질의 생산을 금지하는 조약의 교섭을 시작하겠다는 지난해 8월의 결정뿐입니다.
그 한편으로 지난해 5월 인도, 파키스탄의 잇따른 핵실험은, 대립상태의 인접국이 함께 핵을 보유하는 길을 선택했다는 의미에서 국제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준 것은 물론 CTBT(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 NPT체제를 근저에서부터 뒤흔들었습니다. 또 국제사회가 두 나라에 핵실험을 금하도록 설득하지 못한 사실은 일면, 핵보유국 본위의 억지론(抑止論)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며, 핵을 보유하기를 바라는 다른 나라들이 그 뒤를 잇는 걸음을 내딛게 만드는 유인(誘因)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덧붙여 최근 미국은 원자력 발전소에서 수소폭탄의 재료가 되는 트리튬을 제조하기로 방침을 세웠습니다.
민생과 군사는 분리시켜야 한다는 것이 미국 본래의 대원칙이었다는 사실을 너무도 간단하게 전환했다는 점에서 보유국의 오만함을 느끼며, 미국 자체에 핵군축을 위해 노력하는 진지한 자세가 결여되어 있음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6월 스웨덴, 브라질, 남아프리카 등의 비핵(非核) 8개국이 보유국 5개국과 핵제조 능력을 가진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에 대해 조속한 핵폐절을 촉구하고, “핵무기가 없는 세계로 - 새로운 과제(agenda)의 필요성”이라는 이름으로 공동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또한 비핵 8개국은 뜻을 모아 이것을 결의안으로 유엔 총회에 제출하여 지난해 12월에 채택되었습니다.
이 제안은 핵군축에 대한 보유국의 책임을 강조하고 비전략 핵무기의 철거나 핵무기의 임전태세(臨戰態勢)의 해제, 선제 불사용선언(先制不使用宣言) 등 핵폐절에 이르는 구체적인 조리(條理)를 제시하고, 지금까지 유엔에서 채택되었던 결의안 중에서 가장 본질을 꿰뚫은 내용이었습니다.
‘신(新) 아젠다 연합’이라고도 불리는 8개국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으며 또 보유국의 ‘핵 우산’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는 만큼 많은 비핵국의 찬동을 얻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스웨덴과 브라질, 남아프리카 세 나라는 핵개발 계획을 포기한 경위가 있으며, 제안은 “핵폭탄은 긴장과 상호불신의 씨를 뿌릴 뿐 사람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지역통합의 길을 막아 버린다”(브라질의 카르도조 대통령)는 현실적 인식에 기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지난해 7월에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칠레, 볼리비아의 남미 6개국이 구역 내에서의 교전권(交戰權) 상호 포기와 대량 파괴 무기의 금지를 정한 의정서에 조인했습니다. 이 의정서에서는 6개국에 국경문제 등의 긴장관계가 발생했을 경우, 무력을 행사하지 않고 핵, 생물, 화학무기 등의 개발 연구와 보유도 금지하며 군사 독재정권이 탄생되는 나라는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에서 제명하겠다는 취지를 정하고 있습니다.
앞서 지역간의 상호 신뢰조성만이 군비 확장을 멈추게 하는 길이라고 강조했습니다만, 대립하는 인접국들이 더욱 핵을 보유하려고 애쓰는 상황과 지역적 불안이 항존하기 때문에, 이러한 ‘평화지역’을 형성하는 것만이 ‘핵 우산’ 정책이 고정화되는 상황을 타개하는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미 중남미를 비롯해 남태평양,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에 ‘비핵지대’가 설치되고 있듯이 핵무기에 의존하지 않는 지역이 확실히 확산되고 있습니다.
저는, 현재 ‘핵 우산’ 아래에 있으면서 핵군축을 강력히 지향하는 캐나다와 노르웨이, 네덜란드와 일본 등의 다른 나라들이 장래를 고려해서 ‘핵 우산’에서 벗어날 것을 선언하고 ‘신 아젠다 연합’의 움직임에 연대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신 아젠다 연합’의 움직임을 민중 차원에서 지원하는 활동은 이미 ‘중견국가구상(中堅國家構想: middle power initiative)’ 등 NGO에 의해 추진되고 있습니다. 저는 대인지뢰 금지조약을 실현케 했던 ‘오타와 프로세스(ottawa process)’<편집자주 3>와 같이 군축에 적극적인 나라들과 민중운동이 힘을 합쳐 ‘핵무기가 없는 세계’를 향해 크나큰 발걸음을 내딛는 일이 중요하다고 호소하고 싶습니다.
우리 창가학회는 1957년 도다 제2대회장이 핵무기는 인간 생존의 권리를 빼앗는 ‘절대악(絶對惡)’이라고 호소했던 ‘원수폭 금지선언’을 발표한 이래, 일관되게 핵무기 폐기를 요구하는 운동을 지속해 왔습니다.
최근에는 97년 말부터 98년에 걸쳐 청년부가 중심이 되어 ‘핵시대 평화재단’ 등의 NGO가 추진하는 ‘애볼리션 2000’(abolition)<편집자주 4>을 지원, 서명활동 등을 전개해 왔습니다.
이 ‘애볼리션 2000’에서는 단계적으로 검증 가능한 일련의 수단에 의해 핵무기 금지와 폐기를 실현하는 ‘핵무기금지조약’ 안(案)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이미 유엔의 공식 문서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조약안을 하나의 토대로 다른 제안 등도 감안하면서 핵폐절에 있어서의 ‘오타와 프로세스’ 실현을 지향해 가야만 한다고 호소하고 싶습니다.
핵폐절을 위한 구체적인 방책과 시점상의 계획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도다평화연구소에서도 주요 테마로써 국제회의를 개최하는 등 의욕적으로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역시 군축의 진전을 핵보유국의 교섭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계획을 민중의 의사(意思)로써 비핵국 정부와도 연대하면서 실현시켜 가는 의의가 참으로 크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이러한 기구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보유국 전체가 참가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비판도 있겠지만, 일찍이 일부 보유국만으로 출발한 NPT가 나중에 핵보유 5개국의 참가와 핵의혹국, 일시적 보유국의 참가를 가능케 했던 선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행해서 조약을 제정하는 것에 의해, 보유국과 그 동맹국이 핵무기에 의존하는 체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세계부전선언’ ‘지구헌장’을 기축으로
민중이 주역인 ‘제3의 천년’을
사상가 에머슨은 “이 무시무시한 전쟁이라는 집을 지은 것은 실로 하나의 사상이며, 또한 어떤 사상은 이 건물마저 녹여 버릴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인간의 생존권리를 위협하는 핵무기는 ‘절대악’이라는 사상을 시대정신으로 내걸고, 억지론과 같이 ‘필요악’으로 간주하는 환상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SGI로서도 ‘핵무기가 없는 21세기’의 건설을 위해 다른 NGO 등과 협력하면서 전력을 기울여 행동해 가고자 합니다.
미래는 단순히 현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변함없는 신념입니다.
시대의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앞장서서 ‘새로운 세기’의 문을 열어 간다 - 그런 의미에서 올해는 “민중의 손으로 21세기의 개막을 알린다”는 의욕적인 도전을 개시해야 할 중요한 해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합니다.
올해 5월에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NGO 주도의 ‘헤이그 평화회의’가 개최될 예정입니다. 이와 병행해서 정부 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헤이그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평화회의가 개최됩니다.
이러한 회의는 1899년에 개최되었던 ‘제1회 헤이그 평화회의’ 1백주년의 의의를 담아 열리는 것으로 ‘제3회 헤이그 평화회의’로써 그 성과에 기대가 모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NGO의 회의는 21세기를 여는 ‘민중평화세력의 총결집의 장’이 될 것을 지향하여 전세계의 수많은 조직과 개인이 협력하는 체제로 되어 있으며, SGI로서도 의식계발과 홍보활동에 힘쓰는 이외에 회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가고자 합니다.
이 회의에서는 ①국제 인도(人道)·인권법 및 그 제도를 강화할 것 ②무력 분쟁의 예방 및 그 평화적 해결과 개혁을 추진할 것 ③핵폐절을 포함하여 군축을 추진할 것 ④전쟁의 원인을 밝힐 것과 ‘평화의 문화’를 발전시킬 것 등의 주제가 토론될 예정이며 민중 자신의 ‘부전의 세기’를 향한 크나큰 도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회의인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이전부터 주장했던 ‘세계부전회의’의 구상에도 통하는 것이며, 이 회의에서 검토될 ‘21세기의 평화와 정의를 위한 헤이그 조약’을 민중의 총의(總意)로써 ‘세계부전선언’의 의의를 담아 채택하면 어떨까 하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조약을 2001년에 개최가 검토되고 있는 ‘제4회 유엔군축특별총회’에서 국제사회의 합의로 명실공히 ‘세계부전선언’으로서 결의하여, ‘전쟁이 없는 세계’ 실현을 위한 행동계획의 골격으로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움직임으로써 ‘지구헌장’의 최종 초안작성이 2000년에 개최되는 유엔의 ‘천 년기(期) NGO 포럼’에 제출하기 위해 추진 중이라는 점과 ‘지구서밋’으로부터 10년 째에 해당되는 2002년까지 유엔 총회에서의 채택을 목표로 하는 운동도 추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지구헌장’ 제정 운동에는 보스턴 21세기센터도 협력해 왔습니다.
민중의 영지와 연대에 의해 만들어진 이 ‘세계부전선언’과 ‘지구헌장’이라는 두 가지 지표를 기축으로 핵무기도, 전쟁도 없는 생명의 존엄에 입각한 조화와 공생의 ‘제3의 천년’을 건설해 간다 - 21세기란 이러한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지구사회(global society)’의 방향성을 만년의 미래로 명확히 결정짓는 시대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절실히 실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불가결하게 요구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증명인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역사 변혁의 주인공이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명이 있다”는 깊은 자각으로 지구적 문제군과 싸우는 인류 공동투쟁의 연대를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우리 SGI는 세계의 선한 사람들과 함께 힘을 합쳐 ‘지금, 현재의 행동’으로써 1백년, 2백년, 천년 앞까지 인류가 걸어갈 ‘대도(大道)’를 열고 토대를 쌓고 있다고 강하게 확신하며, ‘새로운 천년’의 봉우리를 목표로 당당한 도전을 개시해 가고자 합니다.
주(註)
주1.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
1940년 10월, 코노에(近衛) 내각하에서 조직된 관제(官製)국민총합단체.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권력에 의한 지배체재확립과 전쟁으로의 동원을 꾀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그 결과 국민은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감시하에 놓이게 되었다.
주2. 헤지펀드(hedge fund)
부유층 등에서 모은 자금으로 고도의 금융기술을 구사하여, 높은 수익을 추구하는 투자그룹. 위험회피(헤지)를 위해, 금융파생상품을 다용(多用)한 점에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투기적 색채가 짙은 운용 수법에 대한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주3. 타운미팅(town meeting)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의 주(州) 등지에서 볼 수 있는 전유권자가 참가할 수 있는 직접민주정치의 형태를 취한 지방정치의 최고의결기관.
미국 독립운동추진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그후의 사회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지역문제에 관한 공개토론의 장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주4 . 오레스테이아(oresteia)
트로이 전설을 소재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레스테스(orestes)가 어머니를 죽이는 내용을 주제로 한 비극으로,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이야기를 통해 피로 피를 씻는 ‘보복의 관례’에서 탈피하는 시민사회의 새로운 윤리와 해결 방법이 모색되고 있다.
주5. 바스크분쟁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분리독립을 둘러싼 민족분쟁.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가 1968년에 무장분쟁을 개시한 이래 대립상태가 지속되고 있는데, 북아일랜드 화평(和平)의 영향을 받아 작년 9월에 ETA가 무기정전(無期停戰)을 선언.
화평으로의 기운(機運)이 움트고 있다.
주6. 유엔 군비등록제도
통상무기의 국제 이전(移轉)을 파악하기 위해 전차·전투용 항공기 등 일곱 종류의 무기 수출입의 실태를 유엔에 보고하는 제도.
단 이 제도는 총회 의결에 의거하기 때문에 구속력은 없으며 등록은 가맹국의 자주성에 맡겨져 있고, 특히 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의 등록이 추진되지 않고 있다.
편집자 주1. 반면교사
부정적인 것을 보임으로써 긍정적인 것을 한층 더 분명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사물.
편집자 주2. G8
서방선진 7개국(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캐나다, 이탈리아)과 러시아 정상 간의 경제회담.
편집자 주3. 오타와 프로세스
96년 10월에 캐나다가 중심이 되어 제창한 것으로 “예외없이, 유보없이, 빠져나갈 길 없는 금지조약”이라는 원칙에 찬동하는 나라만이 선행하여 국제적인 체제를 형성하자는 새로운 방식.
이러한 움직임이 생겨난 배경에는 ‘전회일치(全會一致)의 원칙’이 방해가 되어 유엔 제네바군축회의 등에서의 교섭이 막히던 상황이 있었다. 지뢰의 대량보유국의 참가가 현안으로 되어 있지만, 다른 지구적 문제군에의 해결에도 새로운 지평을 열 것으로 기대된다.
편집자 주4. 애볼리션 2000
ICJ(국제사법재판소)의 권고적 의견을 실현시키기 위한 핵폐기 현실화의 발전형태로, 모든 핵보유국에 대해 2000년까지라는 기한을 정하여 전폐(핵무기 전체를 폐기하는)조약의 체결을 요구하는 운동.
정의를 위하여
열심히 투쟁하는
전 동지에게 감사!
명랑하게
완벽한 승리의 정상을 향해!
이상에 살아라! 사명에 살아라!
자기답게 살아라!
거기에 후회없는 인생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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