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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지용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지 3년 차로 접어든 여름이 되었다. 옥천공립보통학교에 경이로운 일이 벌어졌다. 1925년 8월 15일 지용의 모교인 옥천공보 동창회 주최로 제1회 문화강연회가 열렸는데 관중이 무려 400명이나 운집한 것이었다. 3.1 만세운동 이후 처음인 듯한 관중이었다.
매일신보는 8월 18일 자에 “옥천 초유의 문화강연 청중 무려 4백”이라고 제목을 뽑고 그 아래 “연사와 연제는 여좌하더라(沃川). ‘동요와 아동교육’ 동지사대학 정지용 군, ‘기독교란 여하한 종교인가’ 조대 영어과 유석동 군. ‘문화원을 건설하라면’ 대구고보교유 조구순 군”이라고 보도하였다.
정지용이 졸업한 쿄도의 도시샤 대학
지방의 문화강연에 4백의 관중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그 시절 옥천의 문화 수준을 잴 수 있는 가늠자가 될 것이다. 지용의 집을 이웃하고 있던 옥천의 성당을 비롯한 향교와 사마소, 산기슭 궁터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궁사들, 마성산의 적요를 수시로 깨뜨리며 달리는 경부선 석탄 열차가 토하는 흰 연기, 하계리 장터에 땔나무를 싣고 오는 우마의 풍경소리 등등…. 옥천 문화적 총화의 꽃이 옥천공보 대강당에서 활짝 핀 것이다. 이날 첫 번째 연사로 등장하는 지용의 강연 제목은 ‘童謠와 兒童敎育’이었다. 이때 지용은 ‘창가조의 동요’에서 벗어난 현대 동시 출발의 필요성을 강조했을 듯하다.
해바락이 씨를 심 ᄶᅡ/ 담모롱이 참새 눈 숨기고/ 해바락이 씨를 심ᄶᅡ.// 누나가 손으로 다지고 나면/ 바둑이는 압발로 다지고/괭이가 ᄭᅩ소리로 다진다.// 우리가 눈감고 한밤 자고 나면/ 이실이 나려와 같이 자고 가고/ 우리가 이우세 간 동안에/ 해ㅅ비치 입맞추고 가고,// 해바락이는 첫시약씨 인데/ 사흘이 지나도 북그리워/ 고개를 아니 든다.// 가만히 엿보로 왓다가/ 소리를 ᄭᅢᆨ! 지르고 간 놈이--/ 오오, 사철나무 닙에 숨은/ 청개고리 고놈이다. -정지용의 <해바락이 씨>(1925년 3월) 전문
지용은 동요 ‘삼월 삼짇날’ 2행 5연(1924), ‘다알리아’ 2행 7연(1924.11) 등을 창작하였고, 1925년 들어, 창가조의 동요에 새바람을 일으킨다. 동요 ‘산넘어 저쪽’(5행3연)의 정형화 율격을 <해바락이 씨>에 와서 (3행2연, 4행3연)처럼 율격 변화를 시도한다.
손진태가 <옵바 인제는 돌아오서요>를 《어린이 1926》에 동시라는 장르명으로 발표하였으나, 실상 “장난꾸러기인 화자의 성격을 잘 살려 썼고 내용이 무척 해학적”이라고 평가받는 <해바라기 씨>를 현대 동시의 시발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굴뚝새>(신소년 /1926.12.5.)에 와서 내재율을 갖춘 ‘현대 동시’로 완성되었다.
굴뚝새 굴뚝새
어머니-/ 문 열어주오, 들어오게/ 이불 안에/ 식전내-재워 주지//
어머니 산에 가 얼어죽으면 어쩌우/ 박쪽에다/ 숯불 피워다 주지
<굴뚝새> 전문
지용의 ‘童謠와 兒童敎育’ 강의와 <해바락이 씨>는 매우 유의미한 관계에 있었다 할 수 있다. 이 동요는 해바라기씨를 심는 과정의 공동체적 정서 작업을 통해 희열감을 하나로 모으는 데 성공하고 있다. 시조의 목가(牧歌)나 민요의 낙천성을 뒤로한 채, 해바라기씨를 심은 뒤 새싹이 나오는 과정에 동화적 천진난만함을 그려 넣는 변화를 이끌고 있다.
참새 눈을 속여 씨를 넣는다. 흙을 다지는데 누나와 바둑이와 고양이가 모두 동원된다. 생명체의 촉감들이 정서로 녹여지는 순간이 여기에 있다. 저녁에는 이슬, 한낮에는 햇빛이 비춰준다. 새싹이 올라온다. 결정적으로 사태를 주시하던 청개구리가 ‘ᄭᅢᆨ’하고 소리 지른다.
첫 시악시인 해바라기가 나오는 걸 기다리다 지친 청개구리 고놈의 짓이다. 인간 삶에 여러 생명체가 연합하는 정서의 새로운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지용의 모교 죽향초에 있는 '해바라기씨' 시비
1927년 조선동요연구협회에 가입한 지용은 같은 해 6월에 시 <해바락이 씨>를 《신소년》과 《어린이》에 게재하고, 1928년 《조선동요선집》에 올렸다. 그리고 1935년 《정지용 시집》에서 <해바라기씨>로 정착된다. 그 과정에서 청개구리 소리는 ‘ᄭᅢᆨ’→‘캑’→‘객’ 등을 거쳐 지용시집에는 ‘깩’으로 정리된다. 시어 선택에 고심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해바라기씨>가 민요 가락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율조를 형성한 동시의 효시가 되었다 할 것이다. 지용의 동요형 동시는 <굴뚝새>(《신소년》1926.12 )에 와서는 현대 동시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해바라기씨>는 지용 시집에 와서 정착되지만 <굴뚝새>는 누락되었다. 현재 옥천 죽향초등학교에는 <해바라기씨> 시비가 세워져 있다.
지용의 출현은 옥천 군민과 옥천보통학교 후배들에게 큰 파문을 던졌다. 문학뿐 아니라 학문에 대한 열망을 뜨겁게 하였다. 특히 지용의 아버지 태국은 이제야 그동안의 고생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받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지용이 장자로써 집안일에 의견을 적극 피력하고 방향을 제시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