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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꽃 조지훈
까닭 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
이 얼마나 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距離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 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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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 단장 조지훈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라기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이 피어오르는 한 떨기 영혼이여.
* 조찰히 : 아담하고 깨끗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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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 僧舞 조지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꼬갈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 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문장 11호, 1939.11.
* 봉화에서 영양을 거치고 영월에 이르는 새로 개발된, 트레킹 걷기코스의 길 이름이 <외씨버선길>. 조지훈의 이 시에서 따왔다. 조지훈은 경북 영양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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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 화 조지훈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珠簾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歸蜀道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저허하다 : 마음에 꺼려 하다. 두려워하다 옛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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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초우 芭蕉雨 조지훈
외로이 흘러간 한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 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열고 푸른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아침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에서 쉬리라 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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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수 鳳凰愁 조지훈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
풍경 소리 날아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 위엔
여의주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甃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위에 정일품, 종구품 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號哭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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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황수 鳳凰愁 : 봉황의 슬픔 노래.
봉황은 우리 민족 상징. 황폐한 궁궐 모습,
몰락한 조선왕조 국권상실의 슬픔을 읊음. * 두리기둥 : 둥근 기둥
* 둥주리 : 둥지
* 추석甃石 : 벽돌같이 다듬어진 돌
* 패옥 : 금관 조복의 장식옥
* 바이 : 전혀
* 호곡 : 소리를 내어 슬피 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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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화삼玩花衫 -목월에게 조 지 훈
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놀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
* 완화삼玩花衫 ; '꽃무늬 적삼을 즐긴다' 란 뜻으로 꽃을 즐겨 구경하는 선비를 말함. * 차운산 ; 차갑게 보이는 산, 비극적 현실 상황. * 多情多恨한 나그네의 우수憂愁, 일제말의 암울한 현실이 배경이 됨.
조지훈 연보
- 1920. 음력 12. 03.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에서
조헌영과 유노미의 3남 1년 가운데 차남으로 출생.
- 1936. 상경하여 인사동에서 고서점 일월서방을 운영.
- 1938. 한용운과 홍사용을 찾아뵘.
- 1939. 「문장」 3월호에 <고풍의상>이 12월호에 <승무>가 추천됨. 동인지 「백지」발간.
- 1940. 「문장」 2월호에 <봉황수>가 추천됨. 김위남과 결혼
- 1941. 03월 혜화전문 졸업. 4월 오대산 월정사 불교강원 외전 강사. 12월 상경
- 1942. 03월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원. 박물월과 교유.
- 1943. 09월 낙향
- 1945. 10월 명륜전문 강사. 10월 한글학회 국어교본 편찬원. 11월 진단학회 국사교본 편찬원.
- 1946. 2월 경기여고 교사. 9월 서울 여의전 교수.
3월 전국문필가협회 중앙위원. 4월 청년문학가협회 고전문학 부장
박목월의 시 15편, 박두진의 시 13편, 조지훈의 시 12편을 모아 「청록집」간행.
- 1947. 04월 동국대 강사
- 1948. 10월 고대 문과대 교수
- 1950. 07월 문총구국대 기회위원장. 10월 종군하여 평양에 다녀옴.
- 1952 첫 시집 [풀잎단장] (창조사) 간행
- 1953. 평론집 [시와 인생] (박영사) 간행, 평론집 [시의 원리] (산호장) 간행
- 1956. 시집 [조지훈 시선] (정음사) 간행 자유문학상 수상
- 1959. 시집 [역사앞에서] (신구문화사) 간행 고대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
- 1962. 수상집 [지조론] (삼중당) 간행
- 1964. 시집 [여운] (일조각) 간행, 수필집 [돌의 미학] (고대출판부), 평론집 [한국문화사서설] (탐구당)
- 1967. 한국시인협회 회장
- 1968. 사망
- 1973. 일지사에서 「전집」발간.
- 1982. 경북 영양군 주실에 지훈 조동탁 시비 건립.
- 1996. 나남출판에서 한글판 「전집」발간.
[시 집]
- 시집 <청록집>(공저) 을유문화사 1946
- 시집 <풀잎단장> 창조사 1952
- 시집 <조지훈시선> 정음사 1956
- 시집 <역사 앞에서> 신구문화사 1959
- 시집 <여운> 일조각 1964
- 시집 <청록집·기타>(공저) 현암사 1968
- 시집 <청록집·이후>(공저) 현암사 1968
- 시집 <승무> 삼중당 1975
- 시집 <조지훈> 한국현대시문학대계19 지식산업사 1982
- 시집 <조지훈시집> 정음문화사 1983
- 시집 <승무> 정음문화사 1984
- 시집 <깊은 밤 홀로 깨어나> 영언문화사 1985
- 시집 <승무> 자뉴문학사 1987
- 시집 <동문서답> 범우문고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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