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호주 시드니 유영재
바람이 분다. 새로운 계절이 오고 또 다른 계절이 떠날 채비를 하는 창밖에, 나뭇잎을 어루만지며 연두색 바람이 지나간다. 나무는 바람의 손길에 색깔을 바꾸며, 잎을 떨구며 온 몸으로 응답했을 것이다. 무수히 많은 바람과 조우했을 나무를 바라본다. 또 다른 바람을 기다리며.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먼지가 날리고 쓰레기들이 오토바이 폭주족같이 몰려다니다가 하늘로 치솟는다. 커다란 나무들은 머리채를 풀어헤친 여인처럼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흔들린다. 항상 앵무새들의 놀이터였던 유칼립터스 나무도 예외는 아니다. 거기에 매달려있는 새 먹이통도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그 나뭇가지에서 한 떼의 앵무새들이 무언가 긴급회의를 하는지 무척이나 시끄럽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더욱 세차게 흔들자, 새들은 불안했던지 떼 지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나도 바람이 불면 도망치듯 날아가는 새였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바람과 맞대면했다. 순풍도 있었지만,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구부려 몸을 최대한도로 낮추었는데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때도 많았다. 바람은 키가 쑥쑥 커가는 아이들 같이 늘 바라는 쪽으로만 불지 않았다. 역풍으로 왔던 길로 떠밀려 올라가기도 했고 때로는 난폭한 바람에 무릎이 깨어지기도 했다. 삶에서 바람은 숙명이었다. 알지 못하는 곳에서 불어오고 어디로 어떻게 지나갈 것인지 알 수 없는 삶의 현장, 그 터전에 서 있는 것 자체가 흔들림이고 위태로움이다. 앞으로 나아감을 선택하는 순간 쉽게 절벽위에 서게 되고 거기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몸부림, 우리네의 자화상 아닌가. 얼마 전 자신이 담당했던 국책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책으로 냈다가 직위 해제된 어느 공무원의 이야기를 읽었다. 안온함을 버리고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댓가였다. 옳지 않은 것을 보았더라도, 외면하고 침묵하면 자리는 보전할 수 있었을 텐데, 가족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면서까지 무엇인가를 이야기 하려고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이야기를 하게 만들었는지, 그렁그렁한 가족의 눈물을 담보해야 했던 그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에게 닥쳐왔을 엄청난 폭풍이 느껴진다. 그 바람도 내가 움직일 때마다 직면하게 되었던 살을 에이는 칼바람이었으리라.
사람에겐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보이지 않는 바람도 있다. 자기 자신이 만들어 냈지만 결국엔 그 바람에 의해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보이지 않는 바람. 마이클이라는 호주인 친구가 있었다. 대학교 실험실 직원이었던 그와 친하게 된 것은, 실험 기구를 다루는데 서툴렀던 나의 무능함 때문이었다. 요즘의 실험기구들은 첨단 기술의 발달로 실험의 결과를 내는 데는 많은 발전을 하였지만 나처럼 전자기기를 다루는데 서툰 사람들에게는 높은 울타리로 작용했다. 그 벽을 넘는 것은 마이클 같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때만 가능했다. 실험기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의 가슴 속에 숨겨져 있던 이야기들이 나에게로 전해졌다. 어느 날 그는 팔에 깁스를 하고 나타났다. 산악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어깨뼈가 부러졌다고 했다. 뼈에 철심을 박아 넣는 수술을 했지만 그는 그런 것쯤은 늘 있어왔던 일상인 듯 여전히 활기찼다. 놀랍게도 그는 자전거를 타다 차에 치어 의사로부터 다시는 걷지 못할 것이라는 선고를 받았던 적도 있고, 며칠간 의식에서 깨어나지 못한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전거를 탄다. 자기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바람을 뿌리치기 위해서라고 했다. 남들처럼 보란 듯이 똑바로, 반듯한 길을 걷고 싶었지만 바람은 자꾸 길옆 구렁텅이로 그를 밀어 넣었고, 그는 그 바람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자전거에 올랐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 바람이 잦아들리 없었다. 바람은 자전거에 오른 그를 수없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쳤고 온 몸이 부러진 철구조물이 되어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도 보이지 않는 바람에 의해 수없이 뜻을 꺾어야 했다. 거침없이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고 싶었지만, 뜻과는 반대로 조그만 바람 앞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바람은 머뭇거리는 자에겐 더 가혹한 듯 했다. 수없이 주저앉아야만 했으니까. 앉아있으면 어느 정도 바람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체의 늪은 더 고역이었다. 멈추어 있다가 뒤늦게야 늦은 것을 알고 속력을 내다보면 그 내는 속력만큼 맞바람은 더욱 강렬하게 나를 저지했다. 맞바람에 넘어지고 깨어지더라도 끊임없이 바람 앞에 서는 것이, 차라리 덜 힘들었다.
나무가 흔들린다. 변화의 바람이 지나갔으리라. 나무도 나처럼 바람 앞에서 매번 흔들리며 갈등했으리라. 그러나 흔들리며 자라고 있지 않은가. 다시 고개를 들어 나무를 바라본다. 나무가 또 흔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