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딸아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밤 산책을 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사갑들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사갑들길은 너른 들판 한가운데 일자로 쭉 뻗어 난 십 키로 남짓한 농로다. 시내와 우리 동네를 연결하는 그 들길을 나는 좋아한다. 시내에서 볼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올 때 자주 그 길을 걷곤 했다. 모내기 전 무논을 써레질할 때면 기계가 뒤집어 놓는 자리마다 왜가리 떼가 새하얗게 몰려들어 흙탕물에 부리를 푹푹 박으며 벌레를 잡아먹는 광경을 한참씩 구경하다 오기도 했다. 겨울이면 사방에서 불어 닥치는 거센 바람으로 머리통이 떨어져 나갈듯 시렸지만 그래도 나는 그 길을 걸었다. 딸아이가 다니는 인근 초등학교에서는 봄마다 그 길에서 단축 마라톤대회를 벌였다. 딸아이도 사갑들길을 좋아했다. 여름 내내 밤에 집을 나선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신기리를 지날 때쯤엔 나도 모르게 사방 어둠 속을 힐끗힐끗 살펴보게 되었다. 약간 으스스했던 것이다. 딸아이도 바람이 섞인 검은 공기의 기운에 눌리는 모양인지 무섭다고 했다. 집들은 문이 잠기고 불은 꺼져있었다. 지난봄엔 이보다 더 늦은 시간에 밤 산책을 나왔어도 무섭지 않던 길이 낯설기까지 했다. 밤공기도 문을 닫아걸고 우리를 떼미는 것 같았다. 어찌할까 망설이는데 배나무 과수원 조금 못 미친 길가의 가로등 밑에 작은 개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흐린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개의 이마가 희미하게 빛났다. 나는 다소 마음이 놓였다. 큰 개도 아닌 작은 개가 쏘다닐 정돈데 크게 무서워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딸아이가 개를 불렀다. 개는 우리를 돌아보지 않았다. 저 개가 저기 앉아서 뭘 하는 걸까, 할 때 길 저쪽 어둠 속에서 또 한 마리의 개가 불쑥 나타났다. 그 개도 몸집이 작았다. 앉아있던 갈색 개가 벌떡 일어나 검은 색 개를 맞았다. 속으로 코웃음이 났다. 저것들이 야밤에 데이트하러 나왔군. 개들은 가까워지는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어두운 길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어둠이 개들을 집어삼키자마자 우리도 개들을 잊었다. 어둠은 사물들 사이에 이어진 끈을 조각조각 잘라버리는 큰 가위 같다. 또다시 어둠 속엔 우리만 남게 되었다. 애초 열 시가 넘은 시간에 집을 나선 것이 불찰이었다.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그렇다고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검은 공기 속을 억지로 뚫고 나갈 일도 아니었다. 들판 저 끝에 있는 시내의 불빛들이 더욱 멀게 느껴졌다. 과수원 끝에서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대신 왔던 길과 다른 길로 가기로 했다. 더 멀리 안 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 한결 마음이 놓였다.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동네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한집에서 푸른 텔레비전 빛이 새나오고 있었다. 길에서 부엌으로 바로 통하는 문도 열려있었다. 누군가 잠들지 않은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텔레비전을 켜놓은 채 노인이 잠들어있는지도 몰랐다. 경로당을 돌아 어른 두 팔 너비쯤 되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푸른 감이 다닥다닥 열려있는 감나무들이 양쪽 담장 밖으로 삐져나와 골목에서 가지 끝을 비비댔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숨을 곳이 많은 옛집처럼 마음을 안정시켰다. 아이와 나는 천천히 걸었다. 여름방학 동안 발이 커버린 아이가 운동화 뒤축을 구겨 신었다. 골목 중간쯤 길이 휘어지는 곳에 오래되고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다. 지나치려는데 나무 밑으로 평상과 벤치가 새로 놓여진 것이 눈에 띄었다. '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 프로젝트에 우리 동네가 속한 면이 선정됐다는 말을 들었는데 모처럼 제대로 돈이 쓰인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느티나무 옆에도 보호수로 지정됐다는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벤치에 편히 등을 기대고 앉았다. 잠시 쉬던 아이는 곧 바닥에 깔린 조약돌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길 위에 있는 가로등이 조약돌에 그어진 흰줄까지 비춰주었다. 멀지 않은 곳에 우리가 사는 아파트도 보였다. 반가운 마음은 금세 식었다. 밤이 너무 깊었던 것이다. 가로등의 흰 불빛이 닿는 자리마다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고 나무 그림자가 얼룩진 느티나무 바로 앞집의 흙벽도 허옇게 바래보였다. 바람에 잘디잘게 흔들리는 초록색 이파리들도 차가운 물에서 방금 나온 아이의 입술처럼 파리해 보였다. 비탈진 시멘트 길에 얕게 파인 홈의 음영도 부랑자의 피부처럼 거칠게 느껴졌다. 회색의 돌들을 들추고 땅을 파 비밀 공간을 만들겠다고 설쳐대는 아이만 밤의 바깥으로 빠져나간 것처럼 생기롭게 보였다. 가을이 오는 모양이로군. 딱히 그런 느낌이 든 것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해버리기로 했다. 아니라면 사위를 둘러싼 어둡고 찬 공기의 이 묽은 느낌은 무엇이란 말인가. 공기가 성성해지면 시원하기보다 먼저 쓸쓸해진다. 그리고 가을이 온다. 어쩌면 내 마음이 성성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계절에 감정을 기댈 정도로 말이다. 아이를 일으켜 세워 다시 길을 걸었다. 다행히 아이의 걸음에도 힘이 붙어 있었다. 큰길로 나와 길을 건넜다. 이차선 옆 인도를 따라 이 백여 미터 올라가면 바로 아파트 정문이었다. 건너편 선술집에서 젊은 남녀 두 쌍이 나와 길을 가로지르더니 우리 앞쪽에서 느릿느릿 걸어갔다. 주흥이 남은 듯 그들은 간간히 멈춰 서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아파트에 사는 젊은 부부들이 술을 마시러 나왔던 모양이었다. 딸아이를 앞세운 나는 그들의 옆을 비집고 걸어야 했다. 지나치면서 슬쩍 맨 뒤에 선 여자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여자의 얼굴이 갓 태어난 아기의 얼굴처럼 너무나 태평스러워 가면을 쓴 것처럼 낯설었던 것이다. 술의 힘일까. 그 얼굴엔 소도시 외곽의 소형 아파트 주민들의 얼굴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찌든 피로와 주변에 대한 경계가 깨끗이 제거돼 있었다. 그 얼굴은 또한 낯이 익은 것이기도 했다. 나도 저런 태평한 얼굴을 하고 주점을 순회하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삶의 고난으로부터 완벽하게 방어된 얼굴. 하지만 지금 나는 그 얼굴이 낯설다. 여자의 얼굴을 붙잡고 와락 찢어버리고 싶다. 내가 너무 멀리 온 걸까. 여자를 지나치자 남자 둘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단정한 칼라가 달린 흰색 면 티를 입은 남자의 어깨에 지갑처럼 생긴 조그만 가방이 단정하게 매달려 있었다. 중키의 그 남자는 옆에서 걷는 키가 큰 남자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술값이 쎄다는 얘길 하고 있었는지 남자의 얼굴은 약간 상기돼 있었다. 그럼에도 남자의 표정은 다감했고 눈길도 다정했다. 그들은 친구처럼 보였다. 남자는 방금 내가 지나쳐온 여자의 남편처럼 보였다. 남자는 친구와 앞서 걸으면서도 흰 백묵으로 동그라미를 친 것처럼 자기 여자를 포함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여자의 태평한 얼굴은 그런 남자와 한 묶음일 때만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남자들이 우리에게 길을 비켜주자 맨 앞에서 걸어가던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 여자의 얼굴도 무심하고 태평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삶에 대한 최소한의 긴장마저도 남편들에게 양도해 버린 것 같았다. 그들은 이제 곧 인테리어가 잘 된 환하고 산뜻한 집으로 돌어갈 것이다. 그리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초가을 바람에 몸을 헹구며 자신들의 짝을 품을 것이다. 정문 앞에 당도했다. 길가의 슈퍼마켓과 상점들은 집안의 불을 몽땅 켜고 음식을 준비하는 잔칫집처럼 술렁거렸다. 새나라 치킨 집 앞 간이 탁자에도 사람들이 오글오글 모여 닭과 맥주를 먹고 있었다. 대여섯의 어린 아이들과 서넛의 여자들이 비좁게 껴 앉아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들의 머리가 동그랗게 모여 만들어진 원 안에도 태평한 안심이 깃들어 있었다. 주변의 큰 저수지와 큰 산들에 눌려서 규모에 비해 조촐하다 못해 퇴락한 느낌마저 들던 아파트 주변이 시내의 중심가처럼 불빛이 환하고 들뜬 분위기로 달아오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어둠 속을 걷다가 방금 빠져나온 내 눈의 착시 현상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고 몸이 움츠러들었다. 나는 밝고 환한 세상과 상관없는 외딴집 과부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딸아이의 손을 잡고 걸음을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어둑한 단지 내로 들어오자 딸아이는 또다시 발이 아픈 모양이었다. 우리는 다리가 긴 벤치에 앉아 발을 공중 놀리면서 건너편의 불 꺼진 상가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때 작은 개 두 마리가 상가 앞길로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들판으로 나가다 본 그 개들이었다. 개들은 줄곧 함께 다녔는지 무덤덤한 포즈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앞서가던 검은 색 개는 뒤따라오는 갈 색 개를 기다리느라 걸음을 멈추곤 했다. 그 개들은 상가의 닫힌 출입문 밑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기도 했다. 잠자리를 찾아 빈 건물의 샤시 문을 툭툭 밀어 보는 노숙자들처럼 개들은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아이가 일부러 낮고 굵직한 목소리를 내 개들을 불렀다. 개들은 잠시 이쪽을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고 언덕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개들의 밤 산책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두운 상가 옥상의 각진 모서리 위로 검은 하늘이 보였다. 검은 하늘 속엔 휘장을 뚫고 삐져나온 불빛 같은 별들이 띄엄띄엄 박혀 있었다. 검은 휘장이 쳐진 저 위에선 눈이 부시게 환한 빛으로 둘러싸인 서커스단의 여자들이 공중 그네를 타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명랑한 웃음을 터트리면서 박수를 치고 음식을 나눠먹으리라. 나는 검은 휘장의 바깥에서 딸아이의 손을 잡고 앉아 있지만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작은 개들처럼.
첫댓글 어둠이 내려앉은 들길과 푸른 불빛이 새어나오는 시골마을 들길을 지나서 술렁거리는 아파트 단지의 젊은 부부의 모습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잔잔한 평화가 깃든 몇 폭의 풍경화를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구름밑을쏘다니는개처럼....음
'구름 밑을 쏘다니는 개처럼' 해야 했나요?? 이런 경우도 인용구 표시를 해야하는지 헷갈리던데..
깊은 어둠이 좋아 밤길을 나섰다가, 깊은 어둠이 무서워 발길을 되돌린 적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