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쌍문동의 유래
-지극한 효성을 기리는 마을-
쌍문동雙門洞의 동명 유래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현재 쌍문동 286번지 근처에 계성鷄聲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계성과 그 부인이 이름 모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은 생시에 부모를 정성껏 모시지 못한 것을 후회하여 부모의 묘 앞에 움집을 짓고 여러 해 동안 기거하다 죽었다고 한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그 아들의 효성을 지극히 여겨 그의 묘 근처에 효자문을 2개 세운 데에서 '쌍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일설이 있다. 그 외에도 현 창동 우체국 부근에 열녀문이 2개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면 또 쌍갈래 길에 이문이 있었으므로 쌍갈 무늬가 쌍문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조선 시대 자연 마을을 보년 계성동, 쇠죽골, 해등천 등이 있었으며 이 자연 촌락들이 합쳐져 쌍문동이 형성되었다.
과거의 효자 정문은 정의여자중학교 오른쪽에 있었는데 이 지역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 1965년도에 양주군 은현면 용암리 돌락산으로 37기가 이장되었다. 현재도 음력 시향時享 때에 6대 이상 조상들은 시제時祭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쌍문동에는 조선 시대 내시 묘 군이 있었으나 다른 곳으로 거의 이장하고 이후 신흥 주택이 들어섰다.
쌍문동 일대에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걸친 마제석토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 때부터 이곳에서 농경 생활을 하면서 마을 형성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 이곳은 한국전쟁 때 의정부시에 공산군이 침입해오자 국군이 수도 서울의 최후 방어선으로 창동과 함께 쌍이문의 구릉 지대에 연대 병력을 배치하여 창동 저지선의 일익을 담당한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는 1980년대 후반부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해 현재는 주택단지와 혼함되어 있다.
쌍문동의 쌍문
쌍문동의 유래비, 강북구 효문고등학교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