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 눈물
https://youtu.be/Gq432OPNVrc?si=HCYz736y184cz9aA
https://youtu.be/zwMwOGJIxBA?si=5qBvLQ90CzmyLA2h
https://youtu.be/KXbbgG3JPsc?si=JR3yVpY9Dm-V6JBA
https://youtu.be/7EeRP66DnTc?si=hCLtbbl5KEKq_I1s
https://youtu.be/CphVeAWP9FA?si=Gnbkj2_PGMja5a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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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눈물(기타연주곡)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
1
사공의 뱃 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아씨 아롱 젖은 옷 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2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3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 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지나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영상
https://youtu.be/nTEaztgefWE
목포의 눈물- 이난영 (미도파 레코드)-스타365
문일석(文一石) 작사, 손목인(孫牧人) 작곡, 이난영(李蘭影) 노래의 대중가요
2013 오태환의 그림사랑 제작
내용
1935년 초 『조선일보』에서 향토 노래 현상 모집을 실시했고, 거기서 당선된 가사에 곡을 붙여 9월 신보로 발매되었다.
1936년 일본에서는 「와카레노후나우타(別れの船歌)」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고 애상적인 멜로디는 일본인에게도 적지 않은 사랑을 받았다 한다.
모두 3절로 된 노랫말의 1절은 다음과 같다.
4분의 2박자, 라단조, 약간 빠른 빠르기의 자유로운 형식의 곡이다.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로 시작되는 2절의 가사가 문제되어 가사지를 인쇄할 때에는 고친 가사를 표기하기도 했다.
작사자와 가창자가 모두 목포 출신인 이 곡은 일본식의 곡풍을 지녔으나 지금도 끊임없이 불리고 있는 곡 가운데 하나이다.
이 곡을 기념하기 위한 한국 최초의 대중 가요 노래비가 목포의 유달산 중턱에 세워져 있다.
1935년에 발표된 노래로 민요풍의 가락과 구슬픈 곡조가 잘 살아있어 '남행열차' 와 함께 목포를 대표하는 노래이자 전라도를 대표하는 노래로 남아 있다.
지금도 매년 목포에서는 '이난영 가요제'를 열고 있다.
망국의 한을 표현하는 노래로, 이를 보여주는 '삼백년 원한 품은'이라는 가사가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걸리자 '삼백련 원안풍은'으로 바꿔서 발음이 비슷하게 들리도록 바꾼 일화가 있다.
특징
특히 1970-80년대에 상대적으로 차별받던 전라도 사람들의 설움을 달래줬고 전라도를 대표하는 야구팀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가로도 매우 유명했다.
1980~1990년대에 리그를 지배했던 해태 타이거즈는 한국 시리즈에 진출하면 경기장 중립 규정 때문에 5~7차전을 잠실에서 치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때 해태 팬들의 응원석 쪽에선 이 노래가 나오면 가히 종교집회를 연상케 하는 그 무엇이 응원석을 맴돌았는데 술에 거나하게 취해 혀가 꼬여서 노래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역전 홈런이나 안타, 삼진이라도 나오면 울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전라도 출신의 아버지를 둔 1980년대생이라면 이 주제를 가지고 한 번 물어보자. 상세하게 설명해주실 것이다.
한 마디로 전라도의 한(恨)이 담겨 있는 노래다.
여기에 덧붙여 목포의 눈물을 완창한 뒤 야구와는 전혀 무관한 이름이었던 김대중을 관중석에서 연호하기도 했다.[6]
그러나 1990년대 중반까지 위세를 떨쳤던 해태 타이거즈도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모기업인 해태그룹이 휘청이면서 약해졌으며 결국 2001년 기아자동차로 구단이 넘어갔으며 해태를 인수한 KIA 타이거즈는 해태 타이거즈의 색채를 빼기 위해 아예 이 노래를 의도적으로 응원가에서 빼버렸다.
이후 팬덤의 교체와 프로야구의 스포테인먼트화를 거치면서 목포의 눈물은 점차 잊혀져 갔고 현재 타이거즈의 젊은 팬 중에서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지경에 이르렀다.
결정적으로 2009년 한국시리즈 6차전, 그리고 7차전 우승 확정 즈음 슬그머니 응원가로 복귀했는데, 하필이면 위에 서술된 대로 가사를 아는 사람이 드물어서 바로 호응이 끊겨버렸다.
이후에는 거의 불리지 않는다.
신안군 하의도 출신이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목포에서 자라나 목포를 정치적 고향으로 삼았던 김대중도 생전 이 노래를 즐겨 불렀는데 대통령 퇴임 후 목포에 내려올 때면 귀향 기념 행사 때 이 노래가 반드시 연주되기도 했다.
목포 유달산에 가면 노래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난영과 목포의 눈물, 그리고 연이어 나온 목포는 항구다 노래를 기리기 위해 매년 이난영 가요제를 개최한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오프닝 음악으로 쓰였다
정작 영화의 배경은 부산광역시다.
원래 제목은 ‘목포의 노래’였는데 나중에 목포의 눈물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木浦의 눈물
〈목포의 눈물〉은 일제 강점기인 1935년 이난영이 처음 부른 뒤 오랫동안 애창되고 있는 한국의 트로트곡이다,
작사자는 문일석, 작곡자는 손목인이다.
와세다 대학 출신의 20대 무명 시인이었던 문일석은 1935년 조선일보가 오케레코드와 함께 향토 신민요 노랫말을 공모하자 〈목포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응모하여 1등에 당선되었다.
흥행의 귀재로 불렸던 오케레코드의 사장 이철이 제목을 〈목포의 눈물〉로 바꾸고 작곡가 손목인의 곡을 입혀 대히트를 기록했다.
가수는 목포 출신의 신인으로 당시 나이 십대 후반이었던 이난영이었다.
이난영 특유의 비음과 흐느끼는 듯한 창법에는 남도 판소리 가락과 같은 한이 스며 있다는 평이 있었다.
결국 이 노래는 이난영의 대표곡이 되었고 이난영의 또다른 노래 목포는 항구다와 함께 목포를 대표하는 향토색 짙은 곡으로 남았다.
'목포의 애국가'로까지 불리기도 하고, 목포 출신의 대표적 정치인이었던 김대중의 애창곡이기도 했다.
또한 호남 지역을 연고로 했던 프로 야구팀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가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
노래의 가사와 곡조는 매우 애잔하여 목포항을 배경으로 이별의 끝없는 아픔과 서러움을 그리고 있다.
깊은 한과 울분이 숨겨진 〈목포의 눈물〉은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주는 상징적인 곡이었기에 국민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는 해석이 있다.
'한국가요사에서 불후의 명작'이라는 찬사가 있을 만큼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이 노래에는 삼학도, 유달산, 노적봉 등 목포의 지명이 나오는데, 이 중 노적봉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 대한 전설이 깃든 곳이다.
유달산 입구에 노랫말을 적은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이난영(李蘭影)
이난영(李蘭影, 1916년 6월 6일 ~ 1965년 4월 11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로 유명해졌다.
일본식 이름은 오카 란코(岡蘭子)이다.
전라남도 출신.
생애 초기
전라남도 목포시 출신이다.
본명은 이옥례(李玉禮)이나 호적에는 이옥순(李玉順)으로 기록되어 있다.
1923년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을 하지 못하는 등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 자랐다.
15세에 여배우를 지망하여 태양극단에 입단했고, 이 때 박승희가 그에게 이난영이란 예명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무대에 주연으로 서지는 못하였다.
그뒤 일본에 건너가서 태평 레코드에서 '도라지 타령'을 발표했으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 오케 레코드사에 입사하여 음반을 냈으나 빛을 보지 못하였다.
1932년에 목포에서 극단 태양극장에 입단하면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난영이라는 예명도 이 무렵 얻었다.
1933년에는 태평레코드에서〈시드는 청춘〉을, 오케레코드에서는 〈향수〉를 발표하여 정식으로 데뷔했다.
1943년까지 그는 오케레코드 전속가수로 활동하며 오케의 간판 스타 역할을 했다.
1935년에 일제 강점기 최고의 인기곡이자 한국 가요사의 불후의 명곡으로도 불리는 〈목포의 눈물〉을 발표하면서, '가왕(歌王)'이라 불릴 만큼 높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
비음이 섞인 경쾌한 창법이 특징이며, 트로트와 신민요를 비롯하여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에 모두 능했다.
1936년에는 오카 란코(岡蘭子)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음반을 발표하였고, 1937년에 가수 겸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하였다.
이난영은 천재적 음악인이었던 김해송과의 결혼 이후 남편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면서 전성기를 보냈다.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도 김해송의 지도를 받아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다.
해방 이후
태평양 전쟁 종전 이후에는 무대 활동에 주력하면서 김해송이 이끄는 KPK악극단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김해송이 실종되어 혼자 자녀들을 키우면서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1958년 동료 가수 남인수가 이혼한 뒤로는 사실혼 관계로 지내다가 1962년 남인수가 사망하여 다시 혼자가 되었다.
1963년에는 미국에 건너가 딸들이 결성한 그룹 김시스터즈와 함께 공연을 하였고, 1965년 삼일절 기념공연을 마지막으로 서울 중구 회현동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사망하기 1년 전인 1964년에 이난영의 일생을 극화한 《님은 가시고 노래만 남아》가 제작되었다.
목포를 상징하는 가수로서 목포에서는 시민들을 중심으로 이난영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