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이 지치고 피곤한 시대(2211.2023.10.1) 약5:7-11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추석명절은 잘 보내시고 오셨습니까? 사람들마다 밤중에 차를 출발하여 밀리지 않고 가겠지하는 마음으로 출발했는데 새벽에도 여전이 밀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고향이 좋아서 찾아가는 것은 사람의 도리일 것입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사람들을 만나서 좋은 대화도 나누고 왔을 것입니다. 추석마련 음식을 만들고 사람들을 만나면 결혼은, 직장은, 대학은 등등을 물어보는데 많이 지치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가족이라고 보고 왔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살다가 보면 때로는 삶이 지치고 힘이들고 피곤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아무리 가지고 있어도 그럴 때가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어디에서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성경의 인물중 가장 큰 시련과 불행에 부딪혀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욥’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욥은 아들이 일곱명, 딸이 세명, 양 칠천마리, 약대 삼천마리, 소가 오백결이요, 암나귀가 오백이었으며 노비도 남녀간에 많이 거느리고 사는 거부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칭찬할 정도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는 아주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보통 생각하기에 저 사람은 신앙이 좋기 때문에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순식간에 아들과 딸을 다 잃고 이방인 도적들에게 짐승을 다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온몸에 종기가 생겨서 잿더미에 올라앉아 기와조각으로 자기의 몸을 긁는 그런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하고 떠났습니다. 그를 위로하러 온 친구들조차 ‘죄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고 참소를 했습니다. 이렇게 말한마디에 깊은 상처를 받고 울기도 하고, 스러지기도 하고, 낙심과 좌절이 찾아와서 삶이 피곤하고 지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결코 낙심을 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신앙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위대한 신앙인이라고 해서 낙심되는 일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이 아주 좋은 사람도 삶이 지칠 때가 있고 피곤할 때가 있고 낙심이 되어질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어려운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지금 어려운 일을 만난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위대한 신앙인 중의 한사람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칠십오세에 고향산천을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갔으나 그에게 큰 시련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기근이 와서 마실 물이 없었고, 끌고 온 짐승들도 다 굶어 죽고 종들과 친척들은 다 뿔뿔이 떠나가 의지할 곳 없는 큰 시련에 부딪혔습니다. 그는 위대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낙심해서 아내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왔다가 애굽왕이 그의 아내 사래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 아내를 취해서 아내로 삼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큰 낙심되는 일입니까? 훗날에 하나님이 거기에서 건져 주셨지만 위대한 신앙이라고해서 시험과 환난이 없는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삭은 아버지 손에 이끌려 하나님 앞에 재물로 바쳐져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를 묶어서 제단에 얹을 때 깊은 절망에 부딪혔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그를 죽이지 말라고 외치지 않았으면 그의 심장에는 아버지의 칼이 박혔을 것입니다. 왜 택함 받은 이삭에게 이러한 고난이 다가오고 낙심이 다가왔을까요? 야곱도 외삼촌집에 20년동안 머슴살이해서 겨우 재산을 모아서 처자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압복강에 왔을 때 형이 4백인의 군인을 거느리고 그를 죽이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은 그만 낙심하고 절망했습니다. 간담이 서늘하고 창자가 녹았습니다. 큰 시련과 환난과 낙심을 당한 것입니다.
애굽의 국무 총리가 된 요셉은 열 일곱살 때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애굽으로 가는 대상에게 팔려서 보디밭의 집에서 17년동안 종살이를 했습니다. 종살이를 해서 겨우겨우 살만하자 보디밭의 아내에게 모함을 당해 3년동안 감옥살이 했습니다. 모세도 40세에 나라를 구원하여고 하다가 오히려 동포에게 배반을 당하고 광야에 가서 목자가 되어 젊은 청춘을 40년동안 광야에서 방황을 하다가 80세가 될 때까지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 위대한 신앙인들은 종국적으로 하나님께서 다가오셔서 그들을 위대하게 사용했고 인류의 역사를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에 거대한 빛을 던져주었지만 그들의 삶속에서도 환란과 시험은 존재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도 마찬가지로 하루하루 살기가 피고한고 피곤한 시대입니다. IMF한파와 코로나19라는 질병으로 인하여 나라는 나라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개인은 개인대로 정말 피곤하기가 짝이 없는 시대를 맞이하여 살고 있습니다. 삶이 지치기 쉬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위로를 받으시고 용기를 내시고 힘을 내시기를 축원합니다.
1. 시험과 시련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습니다.
일생을 살면서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도 시련은 찾아옵니다. 날씨도 궂은 날이 있고, 맑은 날이 있고, 바다도 잔잔할 때가 있고, 풍랑이 일 때도 있고, 그러나 만물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섭리와 영역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게 찾아오는 시련은 세상으로부터 오기도 하고, 사탄의 시험으로 오는 사련도 있고, 때로는 내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못해서, 시련이나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맞추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시련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시험, 마귀의 시험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또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눅10:19절‘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약4:7절‘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 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벧전5:7-9절‘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면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이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하나님 안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시련은 있지만 결코 실패도, 포기도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내가 얼마를 사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행13:22절에 주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마음, 뜻에 합한 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내 뜻을 다 이루리라’우리를 하나님 뜻으로 이끄시고, 이루게 하십니다. 시련 앞에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거나, 내가 포기하지 마십시오. 사43:19절이하에 하나님께 소망을 갖고, 믿음으로 힘차게 출발하십시오. 사방이 막혔어도 하나님을 향한 창은 열려 있고, 광야와 같은 막막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길을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시험과 환란이 다가오는데는 하나님의 면밀한 계획과 뜻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은 모두다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서 아담과 하와의 혈통을 받아서 타락했습니다. 인간속성에는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하고 거역하고 반역하는 마음이 근본적으로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하나님의 도구로 만들어서 쓰기 위해서는 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는 것은 우리의 아집을 깨트리기 위한 것입니다. 자아를 깨트리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자랑과 자기의 능력의 위대함을 의지하고 자랑합니다. 조금만 일이 잘되어도 내 지혜와 내 지식 내 총명과 수단방법으로 일을 이루었다는 교만의 열매를 들어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성격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교만 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직 시련을 당하여 마음이 낙심 된 후에야 인간의 자랑과 한계를 깨닫게 합니다.
고후10:5절‘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낙심되지 않고는 자아 중심의 아집이 깨어지지 않습니다. 아집이 깨어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크게 복 받는 사람은 하나님께 크게 깨트림을 당한 사람입니다. 자아가 깨어져서 하나님앞에 완전히 항복한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시험과 환난을 통해 깨어질 때 감사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에게 낙심되는 일이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복주기 위해서 그 자아를 깨트리는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시험이 다가오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길로 가는 사람은 ‘길이 좋다. 내 계획이 좋다. 그래서 내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부귀 영화, 쾌락을 취하겠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면 고난이 다가와서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돈도 쾌락도 다 빼앗겨 버립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서 ‘나의 길이 잘못 되었구나! 하나님의 길,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사는 길이 산 길이구나’고 깨닫고 ‘주여 오시옵소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는 어디로 갑니까?’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55:6-7절‘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홀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 용서하시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불순한 동기로 삶을 살던 사람이 낙심하고 고난을 당할 때 깨어져서 실신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과 환난에 부딪히고 낙심하여 눈물을 흘려 보아야 강인한 신앙의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요사이 자식들을 기를 때 강한 자식을 기르려면 고생을 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옛말에도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자식은 고생의 자리에도 있게해야 됩니다. 쉽게 낙심하고 문제 소굴에 빠지는 것은 고생을 하지 않고 컸기 때문이며 너무나 과보호해서 고통, 슬픔에 부딪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조그만 고난을 당해도 그만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강인한 신앙 의지를 만들기 위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시험과 환난을 보내어서 부딪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낙심될 때 그것을 극복해야 신앙의 승자가 되는 것입니다. 시험과 환난을 눈물을 머금고 받아 들여서 그것을 기도로 소화할 때 강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평안한 길만 걸어가면 절대로 강인한 신앙인이 되지 못합니다. 운동하는 사람이 끊임없이 몸을 단련하는 것은 근육을 발달시키고 힘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약1:2-4절‘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고 낙심하는 일이 다가와야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낙심했을 때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 만만하고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된다고 할 때는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낙심하게 될 때 그때는 ‘하나님, 날 도와 주십시오’라고 손들고 나갈때 주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당하여 주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사41:10절‘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그러면 우리가 낙심될 때에 어떻게 해야 될까요? 낙심은 파멸을 가져 오기도 하지만 오히려 우리를 단련시켜 위대한 승리자로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낙심이 다가올때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2. 낙심될 때에도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봉주란 마라톤 선수를 잘 알 것입니다. ‘봉달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이봉주는 한국 마라톤의 살아있는 전설이 아닙니까? 2001년에는 제105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하기까지 각종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 우리나라 마라톤계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희귀질환인 근육긴장 이상증 병에 걸려 뛰지도 걷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 근육이 제멋대로 비틀어지고 통증에 시달리는 비참한 자리에 빠졌습니다. 그런 그가 지난 11/말에 1,2km를 뛰었습니다. 거의 기적입니다.
그는 마라톤을 마친 후 ‘내 인생에서 가장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며 다시 재기하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치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도 모든 일이 형통하게 잘 풀리다가도 어느 순간엔가 도저히 일어설 수 없고, 희망이라곤 가져볼 수 없는 상황이 우리 앞에 놓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우리의 마지막 자리는 아닙니다. 힘든 걸음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움직여서라도 결승선을 통과한 이봉주처럼 때로는 우리도 그 힘든 삶을 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어디에서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을 수 있을까요?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어디에서 힘을 얻어 다시 달려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인내’라는 말이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물론 한국말 성경에서는 ‘길이 참으라’ ‘길이 참아’ ‘길이 참고 ’오래 참음’ ‘인내’ 등으로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만, 헬라어 원어로 보면 ‘마크로뒤미아’라는 단어와 ‘휘포모넨’라는 두 단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둘 다 ‘인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속에 담겨진 의미가 약간 다르기 때문에 구별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마크로뒤미아’라는 단어는 ‘관계 안에서의 인내’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고 고통을 참을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반면에 ‘휘포모넨’은 ‘환경 속에서의 인내’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사업에 부도가 났다든지, 대학시험에 떨어졌다든지, 몹쓸 병에 걸렸다든지 하는 환경 속에서도 참고 인내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야고보 사도가 쓴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고 있던 초대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타향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고향에서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갖은 박해와 시련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박해가 덜한 곳으로 이주하였는데 거기서도 삶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끊임없는 고통이 뼈속까지 파고듭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왜 그렇게 힘이든지 모릅니다. 그런 그들에게 인내를 온전히 이룬다는 것, 곧 길이 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그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면서 격려와 아울러 성도답게 당당하게 살도록 권면했습니다. 그러면서 야고보서 기자는 그것이 관계로부터 오는 어려움이든지, 환경으로부터 오는 어려움이든지, 성도에게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참고 견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인내의 열매를 맺기 위해 취해야 할 태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낙심될 때 만사를 제쳐 놓고 교회나 기도원에 올라가서 기도 하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약5:13절‘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 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기도하는 사람과 같이 하십니다. 우리가 고난 당하고 낙심 당할 때 사람들을 찾아가서 자꾸 동정 받으려고 하고, 위로 받으려고 하기보다 기도로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원망하고 탄식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 되는것은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해결 하려고 해도 소용 없습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 물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낙심 되었을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롬12:12절‘소망중에 즐거워 하며 환난중에 참으며 기도에 힘쓰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무엇이든 예수 이름으로 구하면 예수께서 시행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볼때도 기도하지 않았는데 주님께서 가서 병자를 고쳐주고 도와준 적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장님 앞을 지나갔을 때에도 나중에 바디메오가 기도하고 부르짖을 때 주님이 도와주셨습니다. 부르짖기 전에는 그냥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낙심될 때 만사를 내려 놓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자복하고 깨어지고 기도할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낙심될 때에 희망과 긍정적인 마음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마음이 낙심되면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짖누르려 합니다. 부정적이고 악한생각을 심어주고 그렇게 행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낙심될 때에 희망과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원수 마귀를 대적하고 우리가 나가서 부정적인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해야되는 것입니다.
히12:2-3절‘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운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 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자를 생각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낙심 당할 때 예수님을 생각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을 베풀고 은혜를 베푼 죄인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참소를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어도 주님은 낙심하여 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께 자기의 영혼을 맡겼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낙심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푹 빠져서 살아야 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말씀 이외에는 우리에게 절대로 믿음을 주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를 절망에서 건질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어디에서 만납니까? 하나님을 성경안에서 만날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깊이 읽고 묵상하면서 성경 속에 푹 빠져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큰 치료의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마음에 낙심되는 요소들은 다 밀어내고 마음에 부정적인 가시를 다 뽑아 내고 마음을 믿음으로 채워 놓아서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려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다시 해보자’는 용기를 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낙심될 때 성경을 읽는 것은 계속해야 되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평상시에 일년에 성경3회는 통독하시잖아요. 읽으시여 합니다. 직분자들은 반드시 일어야 합니다.
성경은 믿음의 밥입니다. 밥을 먹지 않고 활동할 수 있나요? 믿음의 영양분이 바로 말씀인 이상 듣고 묵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될 때 중보의 기도를 부탁해야 되는 것입니다. 낙심될때 나에게 가장 가까운 분들, 주의 종이나 장로님, 권사님, 속장님, 평신도, 이웃사람들에게 기도의 도움을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중보의 기도는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한사람이 천을 쫓으면 두 사람이 만을 쫓기 때문에 혼자서 기도하는 것보다 힘을 모아야 합니다. 기도의 동지가 있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또한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고 낙심될 때 무조건 감사하십시오. 감사 할 조건을 따지지 말고 좋을 때나 낙심될때도 감사하십시오. 실패하고 병들었을 때도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29:10-12절‘여호와께서 홍수때에 좌정하셨으며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홍수 위에 앉아서 홍수를 수레 삼고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시험이 오면 하나님도 같이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으로 오시기 때문에 홍수를 다스릴수 있습니다. 홍수가 올때 우리는 그냥 우리가 물리치고 원망하고 발버둥을 치면은 하나님이 타고 오는 수레를 물리치는 것입니다.
낙심될 때는 또한 인내해야 됩니다. 풍랑이 지나갈 때까지 낙심하고 뒤로 물러나지 마십시오. 성도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뒤로 물러 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시련을 잘 넘기면 항상 시련의 홍수는 축복의 수레로 변합니다. 환난과 시험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뒤에 하나님은 그 등등 이상 갑절로 반드시 축복을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삶이 지치고 힘이 들고 피곤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지만 오늘 주신 말씀 붙잡고 힘을 내시고 용기를 내시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런 일이 있습니다.
3.인내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믿음에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11절‘인내하는 자가 복되다’고 말씀합니다. 길이 참으라는 말씀도 여러 번 나옵니다. ‘길이 참으라’는 말의 의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참으라’는 뜻입니다. 이 어떤 일이라는 말에는 많은 고난과 핍박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인내란 참는 것 뿐 아니라 끝까지 열심하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어떤 시련이 있어도 열심히 신앙생활하라는 말씀입니다. 인내하는 자가 복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온전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7-8절에 인내해야 할 이유로 예수님이 강림하실 날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임하셔서 우리의 수고를 다 보상해 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온전하게 하십니다. 농부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것처럼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비를 기다린다 했듯이 이스라엘에는 건기가 늘 문제입니다. 씨앗을 파종할 수가 없고 곡식도 자라지 않고 채소도 자라지 않습니다. 슥10:1절‘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했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건기가 있습니다. 마음에 은혜가 없고 기쁨도 즐거움도 없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응답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체험도 많았는데 체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나주시지 않습니다. 전혀 안 만나주시는 건 아니지만 만족하지 않습니다. 시42:1절‘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했던 시편 기자의 심령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건기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 뿌리를 깊이 내려 온전히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가뭄이 와야 식물이 뿌리를 깊이 내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크게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환난을 통해서 만났습니다.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신앙에 좋은 환경은 없습니다. 좋아도 시험이요 나빠도 시험입니다. 그래서 풍부에 처해도 위험, 궁핍에 처해도 위험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가운데서 죽고 또 죽어서 한 알의 밀알처럼 견고한 신앙을 가져 아름다운 열매를 맺길 원하십니다. 매사에 순종하면서 내가 그렇게 순종함에 감사해야 합니다. 왜 감사합니까? 그것이 나를 주님께 제물로 드림이기 때문입니다. 매사에 순종하면서 주님께 나를 산제사로 드림을 기뻐해야 합니다. 고난이 와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첫 경험할 때도 그랬을 것입니다. 시험이 와도 그 시험에 나를 드리지 않고 주님께 나를 드렸고 그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고 기뻐했습니다. 죄에 드리지 않고 의에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복함이 나의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감사함이 합격점에 이르렀던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아주 큰 은혜였습니다. 놀라운 임재와 생명의 풍성함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순종하려고 힘써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얼마나 하나님께 드렸는지 살펴보십시다. 이 시간도 나를 죄에 드리지 않고 주님께 드림을 감사하십시다. 그래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예수만 나타낼 때 풍성한 열매를 주십니다.
인내하는 자가 복되는 것은 심판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9절‘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하나님은 원망을 아주 싫어하십니다. 왜냐하면 나는 문제가 없고 하나님이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원망이 얼마나 두려운 것이냐 하면 원망하는 순간 심판이 내려질 정도로 두렵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물이 없을 때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좋은 길 놔두고 왜 우리를 이런 길로 인도해서 목이 말라 죽게 하느냐? 하는 원망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먹던 고기를 못 먹어서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마다 불뱀에 물려 죽게 하시고, 고기를 넘치게 주셔서 온갖 병으로 치시기도 하셨습니다.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은 원망하고 불평하면 끝납니다. 남의 약점에 관심 갖고 비난하기 시작하면 가정도 우정도 친구도 이웃도 다 깨집니다. 인간은 약점 투성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심판입니다. 심판자가 문밖에 서계신다는 것은 즉각적이라는 말씀입니다.
10년 쌓은 우정 하루 아침에 깨집니다. 원망처럼 빠른 결과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거든 입을 닫고 늘 인내하면서 좋은 면, 잘한 면만 생각하고 감사하는 말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요즘 서로 칭찬해주기 운동을 해야 합니다. 좋은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더 잘하게 되고 조직이 견고하고 평안해집니다. 그러나 불만 불평하면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내하는 자가 복된 것은 좋으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10-11절에 여기 선지자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가장 박해를 많은 받은 사람들입니다. 거짓선지자들은 듣기 좋은 말만 하기 때문에 핍박 받지 않고 칭찬만 받지만 참 선지자들은 미움과 오해를 한 몸에 다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에게 박해를 받지만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않고 더 좋은 것으로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가운데서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우리 주님을 생각하며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고난 가운데 훈련시키시고 계십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더 열심히 믿고 더 열심히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인내하는 자가 복이 있음을 믿고 예수님과 욥의 인내를 본 받아 더욱 주님을 사랑하며 온전한 믿음으로 거듭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