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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수아킨 출항 ~ 지부티 (충무공 이순신의 후예들은 아덴만을 지키고, 이순신의 나라 백성은 아덴만을 지난다.)
지부티 에이전트 아산 : +253 77 62 70 15
3월 29일 오전 8시. 윌리엄이 먼저 왔다. 5분후 마르코가 그의 딸 마티아와 함께 왔다. 보관하던 앵커를 공짜로 주고, 설치까지 도와주려는 그들에게 너무 감사하다. 아내가 커피와 비스킷을 내 놓는다. 한국, 미국, 독일의 요티들이 제네시스에 모여 한가로운 오전 티타임이다. 이렇게 서로를 알아가고 긴장을 풀며 슬슬 작업을 준비한다. 윌리엄이 젠틀맨, 시작할까? 하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선수로 간다. 그리고 서로 한참을 앵커 교체 작업에 관해 토론한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어떨까? 아냐 그것 보다는 이렇게 이 구멍으로 넣어서 밧줄을 감고. 그들은 머릿속으로 미리 작업을 다한다. 그리고도 밧줄을 이용해 교체할 앵커를 단단히 맨다. 절대로 바다에 빠뜨릴 일이 없다. 나는 그들의 작업 방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인다.
그런 후 마르코가 윌리엄에게 얻은 앵커를 들고 앵커 자리에 앉힌다. 힘든 작업이다. 앵커 자리에 놓은 후 다시 밧줄로 맨다. 마르코는 콕핏에서 휠을 잡는다. 내가 전동윈치로 앵커를 끌어 올리고, 적당한 위치에 멈춘다. 그런 후 윌리엄이 기존 앵커를 헬리야드로 잡고 있고, 내가 앵커 사슬과 샤클을 풀어 분리한다. 앵커리지 바닥이 진흙이라 앵커는 진회색 진흙투성이다. 다시 윌리엄이 새로운 앵커와 쇠사슬을 샤클로 연결하고 스텐 철사로 고정한다. 마르코는 배가 바람에 밀리지 않도록 계속 천천히 조종한다. 나는 버킷에 물을 퍼 진흙을 닦아낸다. 나중에 민물로 다시 씻어 낼 거다.
새로운 앵커가 장착됐다. 윌리엄이 신호하자, 마르코가 적당한 앵커 포인트를 찾는다. 5~6미터 깊이가 적당하다. 마르코가 신호하고, 내가 앵커를 내린다. 30미터 가량 풀어내고 멈춘다. 앵커사슬에 아무런 표시가 없어 정확한 미터수를 알 수 없다. 윌리엄이 내게, 나중에 도크가 있는 마리나에 가면 쇠사슬을 모두 갑판에 풀어 놓고 줄자로 잰 후, 타이밴드로 한 개는 10미터, 두 개는 20미터 이런 식으로 표시하란다. 좋은 생각이다. 오만 살랄라에 가면 그 작업을 해야겠다. 새 앵커를 장착한 제네시스는 앵커리지에 단단히 고정되어 안정적이다.
9시 20분, 작업이 끝나고 다시 콕핏에 앉아 2차 수다를 시작한다. 주로 윌리엄이 많이 이야기하고 우리는 듣는다. 그의 경험이 후배 세일러들에겐 무척 중요하다. 윌리엄이 스리랑카의 Trincomalee 앵커리지를 적극 추천한다. 꼭 가보라고 한다. 말레이시아로 올라가는 도중이니 코스도 적당하다. 마르코가 거기 에이전트 연락처를 준단다. 다들 스리랑카가 엄청 좋아서 장기간 여행한다니, 들러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몰디브 울리가모에서 최종 결정하자.
오전 10시 10분. 요티들끼리의 수다는 끝이 없다. 아쉽지만 내가, 이제 갈 시간이라고 수다를 끊는다. 마르코가 리나와 놀고 있던 딸 마티아를 부른다. 우리 딸 리나의 첫 외국인 언니다. 리나는 국제적인 아이로 자라기를 기대해본다. 우리는 아쉽게 석별의 정을 나누고, 서로의 안전과 건강을 빈다. 출항 전 배를 다시 점검하고, 민물로 기존 앵커를 잘 닦아 선창에 보관한다. 이제 예비 앵커도 있다. 제네시스는 다시 완전체가 되었다. 앞으로 뛰어가 앵커를 올리고, 콕핏으로 달려가 배가 바람에 밀리기 전에 전진한다. 일부러 앵커리지를 한 바퀴 돌며 일일이 인사한다. 3일전까지 얼굴도 모르던 세계 각국의 세일러들과 서로 돕고 절친이 되고, 이런 게 인류애, 휴머니즘 이라는 생각에 울컥한다. 이렇게 다들 도우면서 행복하게 사는데, 전쟁이라니. 그런 녀석들은 류머치즘에나 걸려라.
리나 엄마가 마르코 부인과 힘차게 손을 흔들어 작별하고, 마지막으로 윌리엄의 배를 지나며 그곳에 있던, 윌리엄, 마르코, 마티아와 인사한다. 수아킨 입구가 관건이다. 수로가 좁고 수심이 낮아 지난 몇 주 동안 3대가 모래톱에 좌초 됐고, 그 중 한 대는 터그보트가 와서 끌고 갔단다. 바다를 보니 모래가 뽀얗게 보인다. 깊이가 5미터 이상 되는, 폭 10미터의 좁은 수로를 이리저리 휠을 돌리며 빠져나간다. 대한민국 세일러의 실력을 보여줄 때다. 당연히 무사히 빠져 왔다. 좌우의 기둥 부이 사이로 운항하여 큰 바다로 나오니 바람이 클로즈 리치 11노트.
바로 메인세일과 집세일을 편다. 여전히 펄링 메인은 콕핏에서는 잘 안 펴지고 마스트로 나가 직접 윈치를 돌려가며 편다. 그게 수월하다. 둘 다 80%만 편다. 바람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속도 7.5 노트로 육지와 빠르게 멀어진다. 엔진을 꺼버린다. 선속 6노트. 그만하면 충분하다. 모처럼 제대로 세일링을 즐긴다. 아내는 다운 받은 I.U.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리나는 비스킷을 양껏 먹고 깊은 잠에 빠졌다. 신기한 것은 19개월짜리가 질투를 한다. 아내가 마티아와 놀아주면, 자기도 놀아 달라고 양팔을 벌리고 엄마에게 안기고, 마티아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 그것을 자기가 빼앗아 놀고 싶어 한다. 혼자 있을 땐 처다 보지도 않더니. 이런 리나의 성장과정이 내겐 모두 신기하다. 가족과 함께. 이번 항해의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내 딸의 성장을 1미리씩 바라보는 즐거움.
오후 2시. 이상하게 실내에 오일 냄새가 심하다. 엔진룸을 열어본다. 오일이 고여 있다. 엔진에서 새는 건 아니니, 같은 오일을 쓰는 기어박스다. 오일 캡이 의심스럽다. 지난번 얀마 엔진에서도 정품 플라스틱 기어오일 캡이 오일이 새서 애를 먹었다. 결국 정품을 버리고 같은 사이즈의 스텐 볼트에 고무링으로 깔끔하게 해결을 봤다. 왜 플라스틱으로 기어박스 오일 캡을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엔진룸에 기름이 줄줄 새는 건 옳지 않아! 일단 기어 박스 오일 캡을 의심하고 플라스틱 캡 내부의 고무 오링을 본다. 오래 됐으니 쪼그라 들었겠지. 오일 캡을 단단하게 고정하고, 이 배안에 오일이 새지 않게 하는 오링이 있을까? 있다. 엔진용은 아니지만, 수도 호스를 연결하는 커넥터의 내부에 오링이 있다. 두 개를 찾아 내부의 오링을 꺼낸다.
엔진을 끄고 바람으로 항해한다. 선속 4노트다. 아내에게 견시를 부탁하고 엔진으로 가서 기어 박스 오일 캡을 연다. 오링을 끼워보니 빡빡하게 맞는다. 캡을 돌려 끼우니 오링이 옆으로 삐져나오며 틈이 확실하게 막아지는 것 같다. 일단 임시변통이다. 다음 마리나에 가면 확실한 오링을 구해 교체할 예정이다. 휴지로 기어박스와 엔진 헤드부분, 엔진룸 바닥에 흐른 오일을 깨끗이 닦는다. 그래야 오일이 조금이라도 흐르면 금방 확인 가능하다. 다시 엔진을 켜고 1,400 Rpm으로 6.4 노트. 10분후 다시 내려가 엔진룸을 열고 기어 박스 오일 캡을 확인하니 아직 기어오일이 새는 것 같지 않다. 30분 후에 또 확인하자.
분명히 오일은 새지 않는데 냄새가 줄어 들지 않는다. 뭐지? 연료 라인이 새는 건가? 연료? 헉! 갑판에 묶어 둔 연료 말 통 두 개가 넘어져 있다. 디젤이 새고 있다. 다행이 주입구가 높은 쪽이라 약간 샌 거다. 얼른 갑판으로 가 연료통을 세우고 고정 끈을 보강한다. 스턴으로 내려가 바닷물을 한 양동이 퍼서 갑판에 뿌린다. 기름 냄새가 사라졌다. 둘러보니 다른 덴 다 잘해 놓았는데, 영국인 마크에게 얻은 1갤런 통 10개만 보강 끈이 없다. 통이 좀 작으니 가볍게 생각했나? 아니면 다음에 보강하지! 하고 잊어 먹은 건가? 항해 중엔 작은 실수라도 치명적이다. 예상치 못한 손실과 항해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이번엔 디젤유 1~2리터에 최대 3.2 달러 손실이지만, 방심하지 말자. 실패는 작은 틈을 찾아 스며든다. 이 난리 통에 아내가 잠자고 있어 정말 다행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내는 내가 기어 박스 오일 캡을 수리해 냄새가 사라진 것으로 오인(?) 하고 칭찬해마지 않을 거다. 입 꾹 다물고 제 발등 찍지 말자구. 아내가 잠든 사이, 김선장은 별짓 다 하는 중이다. 제네시스 연료 유출 사건이후, 세계는 다시 평화롭다.
오후 3시 50분. 잠에서 깨어난 리나에게 늦은 점심을 먹이고, 배 뒤에 차양을 설치한다. 역시 아프리카 햇살의 무게가 장난 아니다. 빔리치 풍속 15노트, RPM 1,400. 선속 6.7 노트다. 일단 바람 좋을 때, 최대한 거리를 빼자.
제네시스 선내의 서비스 배터리를 완충해도, 10시간이면 12.0 DCV까지 떨어진다. 이때 시동을 켜면 배터리 에러가 난다. Rpm 1,100으로 5초만 돌리면 알람은 꺼진다. 1시간 정도 이대로 공회전하면 배터리 완충이다. 냉장고 두 대 돌리는 것과 화장실, 수도, 야간엔 실내 LED등 한 두 개다. 이건 좀 심한 것 아닌가? 200Ah 짜리 배터리 2개니까, 400Ah 인데도 지나치게 빨리 배터리가 닳는다. 적어도 하루나 이틀은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습식 납축전지 효율이 50%라고 이중식 교수님께서 알려 주신다. 그러면 두 개 200Ah. 전기 사용량이 5Ah라면 40시간 사용가능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아니라면 제네시스가 시간당 20Ah를 사용한다는 의미. 그래서 10시간에 200Ah를 몽땅 사용한다는 말이다. 문제는 이 배터리가 오트란토에서 천신만고 끝에 새로 산 배터리다. 새 배터리가 엄청나게 빨리 닮는다? 흠... 전기 전문가의 진단을 받아 보고 싶다. 그전에 교체되어 보관중인 배터리를 병렬로 하나 더 달아보자. 개선 효과가 있을지 확인해 볼 일이다. 오트란토 기술자는 아마 배터리 3개는 충전이 안 될 거라고 했다. 그러나 전의 헤밍웨이호에는 120Ah 짜리 배터리 세 개였는데, 엔진 끄고 이틀 정도는 끄떡없었다. 물론, 그 배는 냉장고가 하나뿐이긴 했지만.
오후 5시 10분. 44 해리를 왔다. 남은 거리 584해리. 선속 6.6노트다. 다시 나온 수단 앞바다는 암초투성이다. 겉보기에는 평온한 바다. 나비오닉스를 줌인해 보면 작은 섬들과 암초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Wreck - 난파선 표시도 많다. 아무래도 오늘 야간 견시는 초긴장 상태일 것 같다. 계속 나비오닉스를 확대해 가며 항로를 잡아야 한다.
오후 7시. 빔리치 풍속 13노트, 선속 7.0 노트, 집세일, 메인세일 80%. 쾌속 전진 중이다. 리나를 씻기고 아내와 리나는 선실로 들어갔다. 왼쪽 TMARSHIRA 암초가 보인다. 레이더에도 잡힌다. 주의하며 지난다. 공기는 미지근하고 바람을 맞으니 시원하다. 좌현에 하늘을 가득 메우며 북두칠성이 물구나무 중이다.
3월 26일 일요일에 수아킨 도착해서 3월 29일 수요일 출항했다. 3박 4일. 기항 일정이 당초에 예정했던 대로 잘 진행되었다. 스마트하고 신사다운 에이전트 모하메드 덕분이다. 그는 늘 묻기 전에 알려줬고, 말 한대로 약속을 지켰다. 서로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으로 겪어 보는 앵커리지. 바다 한가운데서 감옥에 갇힌 것처럼 옴짝달싹 못할 거라는 공포도 사라졌다. 연료와 물도 잘 보급 받았다. 앵커와 배터리 문제만 없었다면 앵커리지 안에서 나만의 섬에 사는 느낌이었다. 안전하고, 평화롭고, 자유로웠다. 텐더 고무보트를 타고 이배 저배 다니며, 여러 나라의 요티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컸다. 앵커리지에 앵커링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다. 진짜로 세계일주 세일링을 하는 요티들이 어떤 방식으로 항해하는지도 배웠다.
다정하고 친절한 윌리엄과 마르코의 도움을 받아, 앵커를 기증받아 교체했고, 선박무전기를 수리했다. 세계의 요티들과 함께 택시를 타고, 포트수단으로 마실도 다녀왔다. 달러를 현지 돈으로 바꾸어 장보는 법도 알았다. 수단의 사와킨은 정말 너무나 많이 배우고, 너무나 많이 깨우친 나의 첫 앵커리지였다. 정말 감사한 일들뿐이다. 지부티도 앵커리지다. 윌리엄의 앵커를 기증 받아 장착했으니 아무 걱정도 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물가가 비싸다는 것만 염려된다. 지부티에서 아무 것도 사지 않고, A.T.M.으로 달러를 확보한 뒤, 그저 딱 필요한 것만 보급하고, 바람 바뀌기를 기다렸다가, 오만 살랄라로 떠날 거다. 어제 저녁 지부티의 에이전트 아산이 선상파티를 하고 있는 사진들을 보내주었다. 제법 즐거운 분위기로 보인다. 지부티의 앵커리지는 어떤 곳일까? 기대가 된다.
오후 9시 42분. 잠시 졸았나 보다. 뒤로 반달이 쫒아오고 있다. 선속 5.6노트. 아직 6시간을 더 가야 암초 지대를 벗어난다. 아내가 조금 일찍 나왔다. 오늘 아침부터 설친 내가 피곤할 것으로 보여 조금 일찍 나온 거다. 너무 고맙다. 나는 아내에게 견시를 맡기고 바로 잠든다.
3월 30일 2시 32분. 멀리 우현에 ED DOMESH SEESH 암초를 끝으로 드디어 암초지대를 벗어난다. 스타보드 15, 침로 변경하여 제대로 방향을 잡는다. 이제부터 이틀간 직진이다. 바람은 순풍이지만 잠잠하다. 선속 4.5노트, 다시 역조류네. 바람이 도와주기를 기대하며, 레이더를 살핀다. 좌 후방에 두 대의 배가 보인다. 레이더의 Guard Zone을 Circle로 바꾼다. 이젠 사방 어디에서 배가 접근해도 경보를 울릴 것이다. 홍해 후반부 항해다. 긴장하자.
어제부터 마스트 등이 정상 작동한다. 내적인 갈등을 마치고 제네시스의 항해에 협조하기로 마음먹었나 보다. 마스트 등을 살피다, 총총히 박힌 별들을 본다. 나도 저 별들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느낌이다. 이번 항해를 통해 나이가 60이어도, 내가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지 절감한다. 나는 순례자처럼, 이별 저별을 다니며 보고 듣는다. 크로아티아에서, 이탈리아에서, 크레타에서, 이집트에서, 수단에서 배웠다. 모하메드를 다시 생각한다. 그는 최빈국 수단에 살지만, 그는 지혜롭고 차분했다. 나에게 긴장을 풀라고 말하며, 내가 요청할 내용을 미리 알아 처리해 주었다. 수단에서 어떤 경찰도, 방역의사도, 세관원도 오지 않았다. 수단에선 모하메드가 정부였다. 내겐 그랬다. 그가 혼자 모든 것을 처리했다. 그는 느리고 낮은 음성으로 이배 저배 돌아다니며 급한 요청들을 효율적으로 처리해 주었다. 나도 더 나이 들기 전, 모하메드와 같은 태도와 장중함을 갖추게 되길 소망한다.
오전 6시. 선실에 내려가 밥을 지으려다 보니, 밥솥에 남은 밥이 조금 있다. 찬물에 만다. 먹던 올리브가 냉장고에 있다. 후딱 아침식사를 한다. 배에서는 온 가족이 모여 단란하게 식사가 좀 어렵다. 아니 매우 어렵다. 누군가 견시도, 조정도 하고 흔들리는 배에서 밥그릇이 쏟아지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탓이다. 특히 19개월 우리 리나가 요주의 인물이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몰라, 안전 줄에 매 두었지만 그래도 늘 불안하다.
바람이 없다. 미리 캡춰해 두었던 윈디를 보니, 오후부터는 순풍이 분다. 엔진 Rpm을 1,600으로 올린다. 선속은 5.5를 간신히 유지한다. 홍해에서 남쪽으로 가는 배는 역조류를 감안해야 한다. 위성전화가 울린다. 청해부대다. 받으려니 전화기가 꺼져버린다. 아니 전화가 끊어진 것도 아니고, 아예 전원이 꺼진 거다. 이건 뭔 상황? 전화를 켜니 정상적으로 켜진다. 전화를 연결해 경위도를 불러준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안전을 확인해 준다. 실제로 위급상황이 벌어지면 어떨지 몰라도, 일단은 내 존재를 확인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적잖이 안심이 된다.
오전 8시 30분. 아내가 견시와 리나를 돌보려 콕핏으로 올라온다. 나는 미루던 작업을 한다. 먼저 배 바닥에 약간 고인 물을 퍼낸다. 처음 배를 시험 할 땐 없던 물이다. 배에서 생활하면서부터 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민물이다. 먼저 수도 펌프가 새는 것을 파파로코가 새 워터펌프로 바꾸어서 새지 않는다. 그래도 물이 고였다. 화장실 마다 다 다니며 확인해보니, 바우 화장실의 샤워 한 물을 내보내는 워터 펌프가 샌다. 그동안 바우 화장실은 사용하지 않았다. 물이 더 늘어나지 않는다. 며칠 전 바우 화장실 워터 펌프 밀봉 작업을 했다. 작업 후 샤워실을 일부러 사용해 봤다. 물이 더 새어 나오지 않는다. 하루 더 두고 보고, 오늘 바닥에 고인 물을 다 퍼낸다. 아주 약간이라서 펌프로는 안 되고 수건으로 물을 적시고 짜낸다. 어느 정도 물을 빼니 1/3 양동이 정도다. 물을 버리고 수건을 깨끗이 빨아 넌다. 다음은 어제 오링 작업을 한 기어 박스 오일 캡이다. 엔진룸 바닥에 아주 약간 오일이 보인다. 이건 그동안 유출됐던 오일 일 수 있다. 휴지로 기어 박스 오일 캡을 닦아 보니 오일이 새지 않는다. 엔진룸 바닥을 휴지로 깔끔하게 닦아낸다. 내일 또 확인해 보자. 고무보트 용 본드를 들고 바우로 가서 텐더의 물 새는 곳을 찾아 메운다. 내 텐더는 조디악이다. 중간에 앉는 나무 좌석이 없다. 조디악 대리점에 가서 부품을 사야한다. 몰라서 못 챙겼다. 아마 마리나스베바 사무실에 있을 거다.
마지막으로 배터리 룸을 확인하고, 서비스 배터리 추가 공간을 확인한다. 한 개는 더 추가할 수 있겠다. 일단 운항 중에는 전기 때문에 신경 쓸 일 없으니, 괜히 건드려서 항해 중에 배터리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 지부티 도착해서 추가 배터리를 연결해 보기로 한다. 한국가면 좋은 배터리가 싸다. 인버터도 굉장히 성능 좋은 것을 적절한 가격에 구할 수 있다. 배터리와 충전시스템을 싹 갈아엎어야겠다. 남은 거리 495해리, 선속 5.8 노트. 조류가 좀 느려진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래 가지고 한국은 언제 가냐?
북위 18도 12분 181초, 동경 39도 23분 791초를 통과중이다. 햇살이 무시무시하다. 하지만 그늘에 가면 서늘하게 바람이 분다. 햇살과 그늘이 완전 천국과 지옥이다. 그러나 이건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더 남쪽으로 가면 갈수록 더위는 심해 질 거다. 싱가포르 해역을 지날 때는 북위 1도니 바로 적도다. 중간에 부채와 햇빛 가리개를 준비해야만 할 거다.
오후 1시 45분. 누룽지를 끓여 아내와 점심. 리나는 점심 직전 잠들었다. 수아킨에서 야채를 사지 못하는 바람에 반찬이 별로 없어 고민이다. 야채를 먹어야 영양에 균형이 잡힐텐데. 아내가 적상추를 잘라 반찬통에 잔뜩 넣어두었다. 매 끼니 된장, 또는 마요네즈에 찍어 먹는다. 맛 타령을 할 때가 아니다. 뭐든 먹어서 건강을 유지해야만 한다. 초콜릿이 모두 녹아 냉장고에 넣어 하나씩 꺼낸다. 수아킨에서 물과 환타를 산건 잘 했다. 애초에 수아킨 재래시장에서 장을 볼 것을. 포트수단 구경은 잘 했지만, 물건을 제대로 못 사고 고생만 싫컷 했다.
레이더에 배 두 척 포착, 한 대가 정면에 있어 긴장했지만, 4백 미터 거리로 지나감. 커다란 크레인이 두 대 설치 된 카고다. 빨간 굴뚝에 흰 바탕에 까만 글씨로 PIL 이라고 적혀있다.
세계일주 항해하는 서구인들은 대부분 직접 설계하거나 만들거나, 제대로 본격 항해를 위해 만들어 진 세일 요트들을 타고 있었다. 목선이나 알루미늄 배도 많았다. 오래되어 낡고, 비좁지만, 커다란 기름 탱크, 워커메이커, 이리듐 고, 솔라 패널, 풍력 발전기 등 생존에 필요한 것들은 반드시 갖추고 있다.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제네시스는 크고, 새롭고, 여유로운 공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 판단에 제네시스는 세계일주 항해엔 적합하지 않다. 만약 한국서 세계일주를 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굳이 우리가 익히 아는 메이커의 배를 살 이유가 없다. 바로 유럽에 가서. [오래되어 낡고, 비좁지만, 커다란 기름 탱크, 워커메이커, 이리듐 고, 솔라 패널, 풍력 발전기 등 생존에 필요한 것들은 반드시 갖춘] 배를 저렴하게 사면된다. 그리고 1~2년의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5대양 6대주를 돌면 된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가지고 있는 배를 일부 개조해서, 기름 탱크 1톤(15일 이상 기주 항해 가능), 워터메이커, 솔라 패널, 풍력 발전기를 갖추면 된다. 내 생각이다. 아, 그리고 AIS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아덴만까지는 모든 배들이 정해진 코리도어(Internationally Recommended Transit Corridor)를 가지만, 인도양으로 나가면 다 제각각으로 방향 전환을 하기 때문에, AIS를 갖추어야만 서로 인식하고 변침하여 충돌을 피하기 쉽다는 거다. 맞는 이야기다.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제네시스는 처음부터 AIS가 없었다. 내가 다음 항구 어디선가 AIS 수신기를 사도 한국에 가면 사용 못한다. 전파인증 등의 이유로 한국서 다시 모든 시스템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세계일주는 한국서 출발하는 것이 제일 낫다. 식료품서부터 전자제품까지 준비도 용이하다. 21년째 세계일주 중인 72세의 미국선장 윌리엄이 떠오른다. 어떤 인생일까? 21년간 바다에 떠 있다는 건. 21년의 자유일까? 21년의 고독일까?
오후 2시 35분. 뒷 바람 11노트다 메인 세일은 펴 있지만, 집세일을 펼까 말까 망설인다. 각이 잘 안 맞는다. 폈다가 펄럭이면 시간낭비 에너지 낭비다. 제네시스는 스피니커 폴이 없다. 고정할 수 없다. 평안하다가도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게 바다. 제네커를 펴 보려다가 그만 둔다. 한국 가서 맘 편할 때 하자, 더 이상의 모험은 아내와 리나를 강릉에 잘 데려다 놓고 하자. 나는 뭐든 해보고 싶은 스키퍼지만, 그 이전에 아비고 남편이다. 도전과 무모함은 한 끝 차이다. 성공하며 도전이고, 실패하면 무모한 짓이다.
오후 3시. 결국 내 성격대로 지부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예비 배터리 한 개를 더 연결했다. 배에 원래 장착되어 있던, 바르타 190Ah 짜리 배터리다. 문제는 점퍼 선으로 연결한 것이라, 충격을 가하면 단자 집게가 빠질 수 있다. 빠져도 되지만, 그러다 서로 쇼트가 나면 큰일이다. 접착 패드와 타이 밴드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 단자가 빠져도 서로 쇼트나지 않도록 여기저기 단단히 비끌어 맨다. 200Ah 배터리 2개, 190ah 배터리 1개. 총 590Ah 다. 일단 충전은 잘 되는 것 같다. 200Ah 배터리들은 14.21 DCV, 190Ah 배터리는 13.05DCV 더니 10분 후 14.07 DCV가 된다. 여기저기 손을 대보고, 혹시 뜨거워지는 데나, 냄새가 나거나, 연결이 약한 곳이 있나, 꼼꼼히 살핀다. 지부티에 가면 정식 연결 단자를 구해서 다시 체결하자. 안 그러면 풍랑 칠 때마다 맘이 조마조마 할 거다. 습식 배터리 보충액도 사야 한다. 잊지 말자.
갑자기 리나가 토한다. 리나는 밥 먹을 때마다 엄마와 전쟁이다. 배고프면 쪼르르 달려와 잘 받아먹는데, 어느 정도 배가 차면 돌아다닌다. 나는 그 정도에서 멈춘다. 리나는 사람이다. 배고프면 또 먹을 것을 달라고 할 거다. 아내는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고 애쓴다. 권하고, 애원하고, 사정하고, 달랜다. 그런데 리나가 돌아다니다, 날 벌레 시체를 주워 입에 넣었다. 그걸 뱉게 하는 과정에서 토해버린 거다. 단백질이 부족했나? 리나를 몽땅 벗기고 작은 물통에 물을 받아 목욕을 시킨다. 리나는 신났다. 물놀이를 좋아한다. 토사물로 버린 옷을 대략 손으로 세탁한다. 마르면 다시 입혀야지. 김리나 19개월 차. 대한민국, 아니 홍해의 새로운 말썽 유망주로, 급부상 중.
오후 5시 10분. (갑자기 핸드폰 시계가 한 시간 빨라졌다.) 남은 거리 454해리, 풍속 포트 쿼터런 11노트, 선속 6.4 노트다. 어디선가 새 두 마리가 날아와 배 주변을 돈다. 홍해 한가운데인데 웬 새지? 힘들면 갑판에서 쉬어가도 좋다. 똥만 싸지르지 말아다오. 수단 수아킨 앵커리지에 남은 사람들은, 지금 차 한 잔 앞에 두고 서로 수다 중일까? 불과 2~3일 만난 사람들도 어지간히 그리운 데, 수십 년 인연을 끊는 이들은, 담배 끊는 이들보다 수백 배 독하다.
근데 장거리 항해라는 게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든다. 지금까지도 상세히 적었지만, 항구에 한번 들를 때마다 에이전트 피와 유류비, 마리나 이용료 수리비 등등 100~200만원씩이다. 평균 150만 잡아도, 한국까지 20군데면 3,000만원이다. 풍랑이나 역풍 등으로 마리나에 오래 머물면 더 많은 돈이 들어 건다. 처음 이탈리어에서 제네시스 수리를 기다리며 약 20일간 체류비, 항해 유류비, 기본 부속품 및 물, 식량, 의류비, 보험료 240만 원 등 약 1,500만원이 들었다. 모든 게 예상 보다 많이 들었다.
그냥 기본적인 것들이 그 정도다. 마리나스베바에서는 전 선주 까를로의 배려로 아예 계류비 한 푼 안 낸 게 그렇다. 이후 이탈리아에서 지부티까지 가는데 1,000만원이 더 들었다. 이미 2,500만원이 항해 비용으로 들어간 거다. 그중 수에즈 통과비용과 유류비가 약 450만원, 수단 수아킨에서 유류비, 물 등 1,748,000원이 들었다. 물론 이중 디젤 500리터 * 1.6달러= 800달러, 약110만원을 빼면 648,000원 이다. 시장 본 비용 10만원 포함이다. 이탈리아에서 현재까지 총 유류비 390만원. 게다가 나는 제대로 수리소에 맡겨 수리한 것도 별로 없다. 이탈리아에서 준비한 임펠러 등 기본 부품들과 플로터, 전동윈치, 윈드 인디게이터, 연료필터 10개, 앵커 체인 등이 330만원이다. 대부분 친절한 세일러들의 도움으로 거저 수리한 게 그렇다. 앵커도 거저 얻고 도움으로 장착하지 않았는가?
앞으로도 그냥 정박과 식량보급만 하면 60~80만원. 기름을 보급하면 기본 100~150만원이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한국까지 13곳이 더 남았지만, 일본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에이전트 따위는 없다. 마리나 이용료 등 기본비용만 계산하면 된다. 그럼 11곳이다. 평균비용만으로 적게 잡아도, 1,100만원이 더 들어 갈 거다. 거기다 비싼 몰디브 같은 곳은, 300만 원 가량 예산을 잡아야 할 것이다. 대략 한국까지 1,500만원. 그럼 이탈리아에서 한국까지 항해 비용으로 어림잡아 4,000만원이다. 선적하여 운반하는 비용 5,500~6,000만원이면, 차액은 1,500~2,000 사이. 전체 금액에 비해 그 폭은 크지 않다.
당연히 대양 항해의 멋진 추억을 돈으로만 치환할 수 없다. 하지만 지나치게 비싼 항구 통관비용은, 세일러들의 낭만적 세계일주 항해에 가장 큰 난관 중 하나다. 추후 더 오르면 올랐지, 내려 갈 것 같지 않다. 멋진 추억에 씁쓸한 비용이다.
세계일주 항해를 하고 싶은가? 그런 들러야 하는 항구 수를 확인하고, 유류 등 보급 없으면 70만원, 보급하면 150만원, 수리하면 + α 를 더 고려해서 계산하면 비슷하게 추산 될 것이다. 이건 50피트 모노헐의 이야기다. 카타마란이나, 더 큰 세일 요트는 더 많은 비용을 책정해야한다. 특히나 유류비에서는 더 큰 차이가 날 것이다. 낭만적인 꿈만 아니라, 실질적인 비용 계산을 잘 하고 출항해야, 항해도중 낭패를 보는 일이 없을 것이다.
3월 31일 오전 1시. 아내가 견시를 교대해줘서 나는 콕핏에서 잠시 잠 든다. 자는데 리나의 울음소리가 났다. 벌떡 일어나 여보 리나! 하니 아내가 웃는다. 핸드폰으로 전에 찍어 둔 동영상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전 4시 6분. 응? 3시 6분이다. 지금 핸드폰 시계가 오락가락이다. 1시간씩 오르내린다. 제네시스가 날짜 변경선을 지나는 모양이다. 리나는 선실에서 자고, 나는 콕핏에서 잠시 잤다. 아내가 견시를 마치고 다시 리나 곁으로 갔다. 홍해의 별들은 잠도 없다. 벌써 며칠 째 제네시스와 함께 항해중이다. 풍하 7노트, Rpm 1,600. 선속 5.8노트. 메인 세일만 펼쳤다. 지부티까지 391해리 남았다. 628해리에서 237해리 왔다. 37% 온 셈이다. 청해 부대 39진에서 매 4시간 간격으로 연락이 온다. 이상 없으십니까? 위치 부탁드립니다. 선속과 침로 알려주십시오. 젊은 군인들의 음성으로 딱 4가지 질문이다. 그래도 반갑고 든든하다.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 에서 귀리로 만든 군인들은 행진하고, 음악을 연주했지만, 진짜 군대는 언제 어디서든 자국민을 지킨다. 군인의 사명 역시 굳건히 지킨다.
충무공 이순신의 후예들은 아덴만을 지키고, 이순신의 나라 백성은 아덴만을 지난다.
오전 5시 34분. 금요일 아침 해가 솟는다. 하늘은 구름 몇 점만 떠있다. 선속 5.5노트, 바람은 여전히 약한 풍하다. 리나가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선실 바닥에 엎드렸길래, 콕핏에 데려다 뽀로로를 보여 준다. 배고픈 것 같아, 이집트에서 산 크노르 크림야채 스프를 조금 끓여 본다. 소태다. 엄청 짜다. 어째 이런걸 먹고 살지? 리나는 당연히 뱉어낸다. 이 스프는 완전 맹물로 끓여야 할 모양이다. 다음은 리나의 주식, 쏘세지 계란 볶음밥. 다행이 잘 먹는다. 나는 찬밥에 물 말아 양배추 김치 한 조각으로, 밥 한 그릇 뚝딱! 아내는 오늘 새벽 늦은 견시로 아직 꿈나라다. 많이 피곤할거다. 깨우지 않는다. 짙은 구름이 지나고 다시 양떼구름, 지금 사우디아라비아 앞 해안을 통과중이다. 사막에 비가 내리지는 않겠지? 동남아시아 쪽으로 갈 때는 스코올 비에 대한 대책도 세워야 한다.
오전 7시. 풍하 10노트. 좋다. 스타보드 브로드 리치다. 퀴터런에 조금 못 미친다. 메인 세일을 좀 더 열어준다. 구름 사이로 나오는 햇살도 따갑다. 파도가 1미터로 높아진다. 그러나 뒷파도라 다행이다. 백파가 이는 것을 보니 풍속 12노트 이상, 아내가 자신이 견시 할테니 잠시 눈을 붙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듣자마자 까무룩!
오전 10시 25분. 깨어보니 리나는 잠들고, 바람도 잠들었다. 주변에 배가 많다. 좌전방에서 오던 탱커가 좌현 2마일로 멀어지고, 우후방에서 오던 화물선이 우전방으로 사라진다. 그 사이 우전방에서 탱커가 나타나 2마일 우현으로 지나간다. 청해 부대에서 전화가 온다. 좌표를 불러 주다 보니, 어느새 Massawa 와 Al Maday A 사이 홍해의 거대한 암초지대 사이로 진입중이다. 배들이 암초를 피해 한 곳으로 모이니, 배가 더 많아 진 것 같다. 레이더에 가드 존 알람이 계속 울려, 끄고 진행 중이다. 견시와 레이더를 번갈아 하며 운항중이다. 아내가 수돗물에서 먼지 나온다고 투덜댄다. 수아킨에서 절대 물 공급 받지 마라. 물탱크 청소를 해야 할 판이다. 오만 살랄라에 가면 물탱크 청소를 한 번 하자고 맘먹는다.
11시 4분. 아내가 끓여준 부대찌개에 찬밥을 말아 점심을 먹는다. 이탈리아에서 산 햄과 쏘세지, 양상추 김치로 만든 거라, 짜지만 맛나다. 서너끼 정도는 이것으로 충분히 버틴다. 당장 수아킨에서 리나가 먹을 것을 많이 못 샀다. 지부티 도착하면 감자, 양파, 오이, 양상추, 요거트, 치즈, 마실 물, 아기 음료수, 우유, 런천미트 캔, 부채 등을 사야한다. 아내가 우리가 가는 곳은 지부티가 아닌 ‘주부티’라고 잘 못 가는 거 아니냐고 한다. 아내의 구글맵에 주부티라고 표기된다. 그러니 헷갈린다. 인터넷으로 여러 번 찾았지만, 제대로 된 항구는 지부티 밖에 없고 거긴 줄 알고 가는데 갑자기 주부티라니. 지부티 근방에 가면 전화로 한 번 더 확인하자. 앞으로는 출발 전, 다음 항구의 정박지 까지 확실하게 찾아 놓고 가야겠다.
노란색 해초가 많이 떠다닌다. 스크루에 걸리지 않기를 소망한다. 걸리면 골 아프다. 홍해에서 잠수해야 한다. 선저에 고인 물을 마저 훔쳐 낸다. 퍼낸 물이 양동이에 고이자, 리나가 자꾸 물놀이를 시도한다. 더러운 물이라, 버리고 새로 물을 받아 물장난을 시켜준다. 대야에 3리터 정도 붓고 넣어 놓으면 혼자 물을 튀겨가며 잘 논다. 리나에게 이번 항해는 어떤 의미일까? 아무리 상상해도 적당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오후 1시 25분. 위성전화가 울린다. 마침 리나 기저귀를 갈아주는 참에 청해부대인가 싶어, 아내더러 먼저 받으라 하고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받고 보니 해양수산부다.
“4월 1일 경 위험해역으로 진입하시는 데요. 처벌 받으실 수 있다는 것을 고지해 드렸고요.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 보실 수 없는지요?”
“이것 보세요. 2023년 1월 1일부터 아덴만 지역이 HRA 구역에서 완전 해제 된 건 알고 계시지요?”
“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의 요트들이 아덴만을, 수 없이 지나다닙니다. 제가 다 기록해 두고 있어요. 그런데 왜 대한민국 요트만 지나가면 처벌됩니까?”
“그래도 한국은 아직.”
“그리고 지금 거친 바다를 죽을 둥 살 둥 항해하는 사람에게, 처벌이니 어쩌구니 그게 할 소립니까? 참 섭섭합니다. 그런 말은 안전하게 항해 마치고, 한국 가서 해도 되는 이야기 아닙니까? 제가 어디 다른 나라로 갑니까? 한국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일단 한국 가서 해도 얼마든지 문제없잖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분해서 손이 막 떨린다.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나? 2023년 1월 1일부터 국제해사협회에서 아덴만을 위험해역지정에서 풀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겠다? 그럼 발 빠르게 행정처리를 해서 다른 나라들과 같이, 대한민국 요트들도 지나가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해야지. 자기들 늑장행정으로 법을 바꾸지 않은 것이 팩트다. 그것을 개인에게 책임 전가해 보시겠다? 이제 4월인데, 아직 자기들 할 일은 하나도 안했네? 한국 해수부는 세일 요트들에게 아덴만을 포기하라 강요한다. 또 외국에서 요트를 사면 임시선박안전검사? 그게 벌써 언제부터 필요 없는 법이 돼버렸는데, 아직 그 타령? 그러니 수에즈 운하를 서구 요트들은 수없이 지나는데, 한국 요트는 나 포함 오직 세 대뿐이라고 하지 않는가? 구유속의 개. 자신도 먹지 않으며 남도 먹지 못하게 하고 있다. 대한민국 해양문화의 발전을 창달해야 할 해수부에서, 대한민국 해양인들의 세계진출을 막고 있다. 이게 현실이다. 속에서 불이 솟는다. 저렇게 제살 깎아 먹기 하는 자들 때문에라도, 이번 항해는 반드시 성공적으로 마쳐야 하겠다.
오후 3시 50분. 풍하 10노트, 엔진 1,600Rpm. 선속 6노트. 아내와 한국에 돌아가면 하고 싶은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먹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우리의 전체 항로는 10,020해리. 그림 상으론 지부티까지 가면 1/3 간걸로 보이네. 나중에 계산을 다시 해봐야지. 지금 그딴 거 계산하기 딱 싫구만. 뒷 바람 뒷 파도 다 좋다. 이대로 내일 토요일 오후까지 진행되는 걸로 윈디 상에 나왔다. 일요일, 월요일은 바람이 약하다. 월요일 오전 중 도착 예정이다. 예정대로 가는 거다. 화요일 전까지만 가면 된다. 아마 독일 선장 마르코 네는 화요일 아침에 수에즈로 출항하지 않을까? 지부티 도착하면 SIM카드를 사서, 소식 전할 일이 많을 것 같다. 아내는 지금 신나게 노래 부르고 있다. ‘사건의 지평선으로~’
오후 5시 20분. 나는 부대찌개 국물에 라면 사리. 아내는 누룽지 끓인 것. 리나는 계란 햄 볶음밥이다. 각자 식성에 따라 열심히 먹는다. 먹어야 건강을 유지한다. 특히, 나는 적상추 썰어놓은 것을 쌈장, 또는 마요네즈를 열심히 찍어 먹는다. 야채를 먹어야 비타민을 보충 할 수 있다. 예전 선원들은 비타민 부족으로 괴혈병에 걸려 죽어가면서도 그저 괴질인줄로만 알았단다. 안타까운 일이다. 배 뒤편으로 석양이 지고 있다. 지부티 항해 삼일 째 밤이 오고 있다. 풍하 13노트, 선속 6.4노트다. 토요일까지 바람이 강하고 일요일은 약해진다. 부지런히 가자. 리나가 입을 딱딱 벌리며 밥을 잘 받아먹는다. 머리를 묶어 주었던 머리끈을 풀어 팔찌처럼 찬다. 19개월 짜리가 뭘 안다고 멋을 부리나. 신기하기 짝이 없다.
상현달이 떠 있어도 구름에 가려 어둡다. 레이더에 선박 4~5 척이 표시된다. 마음 놓기 어려운 상황이다. 배는 점점 더 많아질 거다. 이제 24 시간 후면 Bab al-Mandab Strait 입구의 코리도어(Internationally Recommended Transit Corridor)에 진입한다. 거기서부터 가운데로 코스를 잡고 상선들을 좌우로 벽처럼 두고 진행한다. 미국드라마 Suits 의 주인공 Harvey Specter 가 듣던 곡 모음을 듣는다. 결전의 날을 앞두고 그 정도는 괜찮겠지.
4월 1일 오전 3시. 청해부대의 전화다. 위치를 불러주니 현 시각부터 위험해역 진입. 2시간 마다 콜을 해준단다. 풍하 9.3노트, 뒷 파도 1미터, 선속 6.0 노트다. Jabal Zubayr Island 앞을 지나고 있다. 지부티까지 248 해리.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 선미등에 비친 파도만 하얗게 부서진다. 레이더 화면에는 좌현에 3대의 선박이 지나고 있다. 12시간 후면 아덴 코리도어(통로)에 진입한다.
오전 5시 00분. 여명의 도움을 받아 배에 기름을 넣는다. 20리터 말 통 8개, 총 160리터. 흔들리는 파도 속에 쉬운 일이 아니다. 연료를 채우다가, 2월에 Noonsite에 받은 기사가 떠오른다. HRA (High Risk Area)구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는 제목. HRA가 지정된 지 10년 만에 2023년 1월 1일 부로 완전 해제 되었다는 주 내용과 함께, 많은 세일링 보트들이 아덴과 수에즈 지역을 통과하고 있으나, 높은 에이전트 비용, 제한된 시설 이용 및 이집트 군사시설 근처 정박의 어려움으로 인해, 선장들은 점점 더 많은 연료를 갑판에 싣고 있다. 는 부내용. 읽을 때는 아하, HRA 지정이 해제 되었구나. 잘됐다. 하고 나머진 그리 와 닿지 않았다. 글만으로는 뭔지 납득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제 직접 수에즈와 아덴만을 지나고 보니, 다 이해가 된다. 아하, 이게 그런 내용이었구나.
홍해의 에리투리아와 이집트 인근의 앵커 포인트는, 군사시설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다. 또한 정박하려는 곳 마다, 오랜만에 다시 열린 뱃길에 한 몫 보려는 에이전트들과 상인들의 바가지가 극성이다. 이래서 선장들은 연료만 잔뜩 싣고, 꼭 필요한 곳에만 정박한다. 결국 바가지의 역효과다. 나만해도 여기저기 들러 구경하기보다는, 에이전트들의 바가지 때문에 1톤이 넘는 연료를 가득 채우고, 보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곳들만 정박하고 있지 않은가? 바가지 씌우려는 자들은 근본이 바보다. 박리다매라는 상술의 기본 원칙을 모른다. 바가지로 인해 선장들이 아예 들르지 않거나, 꼭 필요한 보급품 외엔 돈을 쓰지 않는다. noonsite 기사의 ‘선장들은 점점 더 많은 연료를 갑판에 싣고 있다’ 는 내용을 달리 말하면, ‘더 많은 연료를 싣고 꼭 필요하지 않은 항구는 패스 하라.’는 권고와 다름없다.
아마도 작금의 에이전트나 상인들은, 돈이 잘 안 벌리면 더 큰 바가지로 해결하려 할지 모르겠다. 이래저래 세계일주나 장거리 항해는 점점 더 문턱이 높아만 간다.
청해부대와 해수부에서 번갈아 전화가 온다. 위치와 진행 방위각과 속도다. 서로 공유하면 되지 않을까? 이게 2시간 마다 반복되니 상당히 번거롭다. 어제는 리나 기저귀 갈다가, 오늘은 계란 후라이 하다 받았다. 아내에게 방법을 알려준다. 그럼 좀 덜 번거로우려나? 아내는 국가가 우리를 지켜 준다고 상당히 고마워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09시 15분. 이제는 핸드폰 시계가 한국과 6시간 차이로 고정이 되었다. 내 시계를 조정한다. 뒷 바람 9노트, 선속 5.5노트다. 이게 굉장히 골치 아프다. 전체적으로 밀어주는 바람이고 파도도 좋지만, 조금이라도 속도에 도움을 받으려고 활짝 열어놓은 세일이 문제다. 배가 롤링하고 바람이 조금이라도 바뀌면 붐이 좌우로 크게 움직이거나 아예 반대로 돌아가 버린다. 바람 속도 9에 선속 5.5를 빼면 바람이 3.5 정도 밖에 영향을 주지 못하므로, 붐이 힘을 받지 못하고 배의 롤링에 따라 흔들린다. 이대로 30분 더 해보고, 바람이 10노트 이상이 되지 않으면, 메인 시트를 도로 당겨 놓자. 바람이 Run 일 경우는 참 엄청 신경 쓰인다. 이제 56.9 해리만 더 가면 Bab al-Mandab Strait 입구의 코리도어에 진입이다.
오전 10시. 다행이 바람이 10노트가 되고, 스타보드 5로 침로 수정 하면서, 세일이 바람을 더 잘 받게 되었다. 메인세일을 풀로 편다. 선속 6.0 노트. 레이더 가드 존 알람이 번갈아 울린다. 좌현 우현 2마일 지점으로 탱커들이 지난다.
이제 지부티부터는 카드도 되고, 달러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지부티를 마지막으로 앵커리지를 이용할 일이 없어 보인다. 물론 몰디브에서는 다시 앵커 정박을 하지만, 거긴 세계적인 관광지니, 많이 불편하지는 않을 것 같긴 하다. 우려했던 오만 살랄라도 도크가 있다고 하고, 전기와 물도 잘 공급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다시 문명으로 들어가게 된 것일까? 아내가 무척 지쳐 보인다. 세일 요트를 타고 새로운 세계를 맘껏 구경하는 게 아니라, 먼지와 낙타, 나귀 똥이 가득한 곳에서, 카드도 안 되고, 달러가 없어 고생하며, 바다 한가운데 갇혀 있는 것이 맘 편안하지는 않을 거다. 게다가 현지 물가가 우리 방문객들에게만 지독하게 비싸다. 뭔가 계속 사기당하는 찜찜한 느낌. 이집트에서 너무 많은 내상과 금전적 손실을 입었다. 이후 스리랑카 갈레나, 말레이시아는 도크에 정박하니, 아무래도 엄청나게 불편하지는 않겠지. 이후 항로가 우리 가족에게 차츰 나아질 것으로 기대해 본다. 분명한 것은 고향까지 점점 가까워진다.
오후 4시 16분. 갑자기 돌고래 떼가 나타났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수십 마리다. 배 전체를 에워싸고 높이 점프한다. 이번에도 리나는 자고 있다. 아내와 함께 바우로 나가 한동안 돌고래 구경을 했다. 이들도 우리와 같이 Bab al-Mandab Strait로 나가 아라비아해로 가는 것인지, 우리를 배웅하고 회유할 지는 알 수 없다. 세상은 온통 신비로 싸여있다.
오후 5시 10분. 아내가 만든 양상추김치 참치 덮밥으로 이른 저녁을 마쳤다. 앞으로 두 시간. Bab al-Mandab Strait 입구의 코리도어(Internationally Recommended Transit Corridor)에 진입하면 배들이 많아져, 정신없을 것을 대비해서 미리 먹었다. 풍하 Run 12노트, 엔진 Rpm 1,600. 메인세일은 100% 펼쳤다. 선속 6.7노트. 제네시스는 빠르게 코리도어로 접근중이다. 뒤에서 다가오는 커다란 파도를 보며, 안도한다. 이게 뒤에서 오기 망정이지, 앞이었으면 Bab al-Mandab Strait 입구에서, 지부티를 코앞에 두고 돌아 설 뻔 했다. 지금은 파도의 도움을 받아 쾌속 전진 중.
오후 7시 12분. 드디어 Bab al-Mandab Strait 코리도어 입구 진입. 이제부터 코리도어 경계선을 잘 보며, 벗어나지 않도록 집중해서 항해한다. 물론 지나는 배들도 잘 살펴야 한다. 바쁜 야간항해가 될 예정. 오늘도 달빛이 아름답다. 파도에 춤추는 달빛은, 설원을 달리는 수십 마리의 은여우 같다. 오늘밤은 어떤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게 몽환적이다.
오후 9시. 리나가 선실이 더워 잠들지 못하다, 콕핏에서 지금 간신히 잠들었다. 어린 딸을 곁에 누이고, 코리도어 확인하랴, 침로 조정하랴, 뒤에서 끊임없이 다가오는 배들을 견시 하랴 바쁘다. 방금 해수부에 위성전화로 위치, 침로, 속도를 불러줬다. 어찌어찌 잘 해가고 있다. 풍하 14노트, 선속 5.8 노트다. 좌현 아주 가까이 (2마일) 3개의 암초가 지나갔다. 항로 중간에 좌초 지점도 있다. 뭔가 혼란스럽다. 뒷 파도가 높아 요잉이 심하다. 그래도 아내와 리나는 잘 잔다. 이젠 단련이 된 것이다. 이번 Bab al-Mandab Strait 코리도어 잘 지나면 말레이시아 싱가폴 해협을 지날 때 많은 도움이 될 거다.
4월 2일 오전 12시 52분. 뒷바람이 14노트 이상이다. 선속 7노트로 달리고 있다. 아내 말로는 순간적으로 8노트, 넘은 적도 있다고 한다. 바람과 조류가 모두 잘 맞았다. 지금까지 견시한 아내와 리나는 선실로 들어가고 나는 혼자 견시 중. 좌현에는 수에즈를 향하는 배들의 항해등이 줄지어 있다. 교교한 상현달 빛 아래 일평생 다시 못 볼 장관을 구경중이다. 멋지다. 코리도어가 중간에 끊어져 있는 곳이 있다. 뭘까? 회차 선인가? 이유가 자못 궁금하지만 물어 볼 곳은 없다. 1시간 후 침로 변경을 해야 하는데 뒷바람이 강해, 메인세일을 돌릴 일이 걱정이다. 야간에 혼자 해야 하는 일이라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 아차 하면 홍해로 빨려들어 간다. 조심 또 조심하자.
오전 1시 34분. 한 밤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배를 맴돈다. 후방 5~10미터 사이로 배가 지나온 궤적에 뛰어들곤 하는 걸 보니 거기에 뭔가 먹이가 있는 모양이다. 늦은 저녁 식사다. 많이 먹어라. 달이 구름에 가린다. 손바닥만 한 먹장구름 사이로 숨었다. 갑판 작업등을 켠다. 곧 있을 침로 변경을 준비한다. 홍해 한가운데서 야밤에 혼자 하는 작업이다. 정신 바짝 차리자.
오전 2시 15분. 침로를 스타보드 10 간격으로 두 번 변경하고, 추가로 스타보드 2 를 더 변경해서 침로를 잡았다. 메인세일이 펄럭이며 방향을 바꾸려 한다. 클리트에 묶어 놓은 줄을 조금씩 풀어 메인세일 트레블러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서서히 방향을 바꾼다. 재빨리 스타보드 쪽 줄을 풀고, 메인세일이 움직이기 전에 포트 쪽 줄로 붐을 묶는다. 뒷바람이 스타보드 5로 들어오니까, 이대로 한동안은 메일세일이 Run에서 안정될 거다. 성공적으로 작업을 마치고 축하의 의미로 Jazz를 끄고 나훈아 메들리를 듣는다. 달 빛 아래 부모님 생각이 간절한 홍해의 소야곡이다.
오전 4시 50분. 제네시스 좌우로 선박들의 행렬이 펼쳐져 있다. 좌현에도 붉은 야간 항해등의 행렬, 우현에도 붉은 야간 항해등이 열을 지어 있다. 좌현은 Bab al-Mandab Strait에서 수에즈로 가는 배들, 우현은 Bab al-Mandab Strait로 가는 배들이다. 잘 보고 기억해 두자. 평생 두 번 보기 힘든 장관이다. 이제 홍해 항해의 끝으로 가고 있다.
풍하 17노트, 선속은 5.8노트. 이쯤 되면 슬슬 걱정이다. 내일 늦은 오후에 지부티에 도착하게 된다. 문제는 야간에 진입을 못하니 할 수 없이 내일 모레 일요일 오전 일찍 일출 후에 진입해야 한다. 뒷바람이 밀어줘 빠른 것은 좋으나, 입항 시간이 맞지 않는다. 오후 5시 이전에 도착하면 좋겠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일단은 Bab al-Mandab Strait를 잘 빠져 나간 후 생각해 보자. 일요일 저녁 도착으로 하루 저녁이 빨라진 것은 감사한일이다
갑자기 물이 졸졸 나온다. 수도꼭지 필터들을 체크해도 별 문제가 없다. 급수 모터 소리가 이상하게 ‘타라라~’ 하고 난다. 급수 모터가 문제인가? 아니면 수아킨에서 넣은 물에 잡티가 많아서인가? 급수는 큰 문제다. 지부티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확인해야 겠다. 이런저런 문제가 자꾸 생기니, 걱정만 늘어난다. 어떻게 해야 뱃장 편하게 운항할지 방안을 모색해야겠다. 결국 다 돈 문제다. 모터를 수리하거나 교체하면 또 돈이다. 제장. 얼마나 들어갈까? 그래도 지부티 도착 직전이라서 다행이다. 또는 10일 이상 장거리 항해 전에 미리 발견해서 다행이다. 수아킨처럼 막막한 곳에서 고장 난 것이 아니라 다행이다. 이렇게 다행인 점만 생각하자.
홍해 항해를 하면서 암초가 엄청 많은 것을 보았다. 수심 1,000 미터가 넘다가 갑자기 암초 또는 수심이 1.8미터 인 곳들이 있다. 나비오닉스를 줌인해 봐야지만 나타난다. 그냥 여기서부터 여기가 직선이군! 하고 항로를 잡았다간 바로 사고다. Bab al-Mandab Strait을 빠져 나가면 지부티까지 직선을 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코스를 줌인해 본다. 바로 1.8미터 수심 위험 표시가 있다. 암초 지대는 무조건 돌아가야 한다. 암초 사이 널찍한 길이 있을 것 같지만, 그게 바로 좌초로 가는 첩경이다. 의심가면 무조건 줌인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인터넷이 되는 곳에서 항로를 잡을 때, 미리 경로를 따라 확인해야 한다. 바다로 나와 인터넷이 끊기면 바로 깜깜이 항해가 된다. 출항부터 입항까지 무조건 미리 한번 다 확인 해 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4월 2일 오전 8시 35분 Bab al-Mandab Strait를 지난다. 이탈리아 마리나 스베바를 출항해서, 오트란토, 크레타 하니아. 이집트 포트사이드, 이스마일리아, 수에즈를 통과, 수단 수아킨, 드디어 Bab al-Mandab Strait. 이제 전체 여정의 1/3을 지나고 있다. 침로를 수정하고 천천히 지부티로 가자.
이번 항해를 통해, 세계일주 항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 내가 하는 건 그냥 딜리버리 항해라는 것도 안다. 아예 2~3년을 세계일주에 할애하지 않으면 제대로 세계일주를 할 수 없다. 세계일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바람이 맞건 안 맞건 6월말까지 한국에 가려고 맘먹은 상황에서 여러 가지로 상당히 괴롭다. 시간도 박하고 금전적 여유도 없다. 연료를 많이 쓰니 연료비만 해도 만만치 않다. 거기에 에이전트들의 바가지요금. 한국까지 얼마나 더 들어갈지 가늠하기 어렵다. 다 직접 해보고 알게 된 사실이다. 누군가 진짜 세계일주 항해가 아닌 딜리버리 항해를 하고자 한다면, 나도 충분히 답해 줄 수 있게 됐다. 즐길 게 아니라면 시작하지 말라고 말할 거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듯 항해하면, 항해는 괴롭다. 오늘 문득 내가 굉장히 괴로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괴롭게 배우고 있다. 나의 기록이 장거리 항해나 세계일주를 꿈꾸시는 분들에게 실제적인 참고와 도움이 되면 좋겠다.
오전 10시 35분. 지부티로 항로를 바꾸니, 바람은 쿼터런 15노트다. 집 80%과 메인 세일100% 모두 펴고, 7.5노트 쾌속전진 중이다. 문제는 이래도 지부티에 오후 7시쯤 해 지고 나서 도착이니... 어쨌든 하루 밤을 새우더라도 지부티 근처에 가서 대기하자. 항구 입구에서 대기 하는 경험도 처음이다. 일단 갈 때는 부지런히 가보자. 바람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를 일이다. 지부티까지 남은 거리 65.3 해리.
수아킨에서 산 우유를 먹으니 맛이 쓰다. 아내가 상했다고 버리라고 한다. 총 6팩을 샀는데, 상한 것은 버리고 새로운 팩을 따니 안쪽 캡이 찢어져 있다. 수아킨에서 받은 물과 우유 모두 제대로 쓸 수 없다. 수아킨에서 식수와 우유 등 식품은 사면 절대 안 된다.
12시 40분. 1시간 전부터 소형 배가 계속 같은 코스로 온다. 혹시 몰라 조금 일찍 지부티 방향을 침로변경을 하니 그 배는 계속 같은 코스를 유지한다. 아내가 사진을 찍어 확대 해 보니 M643 이라고 적힌 군함이다. 우리와 달리 곧장 남쪽으로 간다. 잠시 긴장했다.
만약 수아킨에서 물과 식량을 충분히 확보했다면? 아마 오만 살랄라로 바로 가지 않았을까? 그러면 최소 이틀을 절약할 수 있을텐데... 아하, 아니구나. 화요일부터 바람이 반대니까. 어차피 못 가는구나. 이렇게 정신이 오락가락하네. 아프리카가 덥긴 덥나 보다.
오후 3시 25분. ETA 7시 01분이다. 이대로라면 3시간 30분 후에 도착인데, 그때까지 해가 떠 있으면 입항. 해가 져 완전히 어두우면 인근에 대기하거나 앵커링 한다. 만약 지부티 항의 불빛이 밝아 피아 식별이 가능하면 입항을 강행해 보자. 아니면 날 밝을 때까지 최소 10시간을 더 바다 위에서 대기해야 한다. 신기한 것은 5일간을 항해해 왔는데, 마지막 1~2시간에 이렇게 애태우는 이유가 뭘까? 나의 역량 부족일까? 원래 월요일 도착을 예상했는데, Bab al-Mandab Strait를 빠져 나올 때, 갑자기 뒷바람이 강하게 불어주면서 속도가 7~8노트가 되는 바람에 욕심을 낸 것. 기도만이 답이네.
오후 7시 30분. 간신이 앵커리지에 도착했다. 북위 11도 35분 982초, 동경 43도 07분 906초다. 지부티는 상당히 규모가 큰 도시다. 항 입구에 정박 중인 대형 선박도 많고, 도시의 불빛도 휘황하다. 나비오닉스 수심표시와 수심계를 보며 간신히 도착해 보니 주변은 완전 어두운데, 우측 컨테이너 하역시설의 불빛이 밝다. 정면에 앵커링 되어 있는 요트들이 보인다. 5.6미터 깊이에 앵커를 내리고 마르코에게 배운 대로 나비오닉스로 이동 위치 확인 후 밧줄로 보강한다. 16번 채널로는 아무도 답을 하지 않았다. 한 참 정리 중에 보트 한 대가 온다. 지부티 에이전트 아산이다. 인상 좋은 젊은이다. 옆의 카타마란에 있었단다. 서로 악수를 하고, 그가 내일 오전 10시에 다시 오는데 필요한 것 없냐 묻는다. SIM 카드와 디젤 값을 묻는다. 리터당 1.4 달러란다. 헛! 지부티가 제일 비싸다고 하더니 어찌된 일인가? 제일 싸다. 세탁은? 세탁소는 비싸고 동네 사람들에게 부탁 하면 싸다. 그리고 물은? 물탱크에 실을 물은 내가 그냥 줄게. 뭐 공짜라고? 예스. 얼마나 필요한가? 350리터 쯤, 오케이. 비자도 배에서 내려 도시에 들어 갈 사람만 내라. 아이는 무료다. 저런, 이집트에서는 아이까지 다 받았는데... 여기서 나처럼 오산 살랄라로 가는 배는 없나? 그건 없다. 하지만 동쪽으로 가는 배는 있다. 오산 살랄라의 에이전트는 내가 연락처를 줄게. 고맙다. 이렇게 살랄라의 에이전트도 확인 가능하다. 일단 지부티는 수에즈부터 듣던 상황과는 좀 다르다. 뭐든 직접 와 보고 확인해야 한다. 아산은 상당히 신사적이다. 일단 두고 보자. 배를 정박해 놓고 점검을 시작한다.
일반 워터 펌프 점검. 이게 제일 급하다. 급수 라인을 점검하다 보니 필터가 있다. 이 필터가 꽉 막혀있네. 필터를 열어보니, 헛! 고운 모래가 쏟아져 나온다. 모래가 필터를 막아서 물이 잘 안 나온 거다. 그러고 보니 세수한 물에도 모래가 보인다. 아뿔싸, 수아킨 모하메드가 생수 아닌 동네 우물물을 팔아먹었구나. 이러니 ‘좋은 에이전트는 죽은 에이전트’라는 말도 나올 법하다. 하지만 그게 수아킨에서 구할 수 있는 최선의 물일지도 모른다. 좋게 생각하자. 그래도 한 걱정 덜었다. 앞으로 필터의 잔모래 청소만 두어번 하면 큰 문제 없을 것 같다. 워터 펌프를 사고, 교체하는 비용과 수고를 덜었다. 일단 오늘은 편히 자자. 여기는 아프리카 지부티. 잘 도착했다.
4월 3일 오전 2시. 한밤에 자다가 깼다. 저녁 바람은 상당히 시원한데, 모기가 극성이다. 그렇다고 창을 닫으면 더위에 잠을 못 이루고. 아내가 15 마리쯤 잡았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모기가 사라진다. 오히려 좀 추워져서 창을 닫았다. 해가 뜨자 이번엔 파리가 극성이다. 낮 동안, 나만 비자를 내고, 장을 보러 지부티 시내에 다녀오란다. 아내는 배에 있겠다는데 더위 때문에 괜찮을까? 비자는 상륙할 사람만 받으라는 아산의 말이 생각난다. 아프리카의 더위와, 흙먼지. 열악한 환경 때문에, 여자들은 별로 상륙하고 싶은 생각이 없나보다. 일단 오전 10시에 아산으로부터 SIM 카드를 받으면 일기예보부터 확인하자. 보급품을 싣고, 날씨가 맞으면 바로 출항하자.
오전 11시 30분. 하산은 오지 않는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다. 어쨌건 오지 않는다. 어제 저녁 10시라고 분명히 약속 한 것 같은데, 신뢰가 팍! 떨어진다. 배에 기름을 넣었다. 175리터를 넣으니 꽉 찬다. 중간에 200 + 175 = 375리터를 더 넣었다. 지부티 오는 길에 375 리터를 쓴 거다.
정오. 지부티 해양경찰이 왔다. 배를 샅샅이 뒤진다. 무기 검색을 하는 거다. 당연히 아무 것도 없지. 해양경찰에게 아산을 아냐고 하니 안 단다. 전화 연결을 부탁한다. 하산의 배에 이상이 생겨, 20분 후에 온단다. 알겠다. 그리고 1시. 아산은 아직 오지 않는다. 뭐지? 어제 태도하고는 다르다. 역시 그저 그런 에이전트였나?
오후 1시에 아산이 왔다. 늦은 이유는 라마단 때문에 사람들이 일을 안 한다는 거다. 이미그레이션 관리가 약속하고 조금만, 조금만 하는 바람에 아산도 기다렸다는 거다. 출입국 관리소에 가니 과연 관리가 우리와 같이 출근이다. 제네시스와 미국 배 하나만 입국만 처리하고 바로 퇴근이란다. 이들에겐 라마단 너무 좋은 거다. 아산의 배에서 제네시스로 옮겨 타다가 순식간에 발이 미끄러졌다. 양팔로 배에 매달려 물에 빠지지는 않았는데, 어깨 죽지부터 가슴 안쪽으로 뻐근하게 아프다. 밥 먹으면 낫겠지.
아산에게 12기가 SIM 카드를 받았다. 하나에 7달러, 아내 것 까지 샀다. 일단 인터넷이 된다. 이제부터 기상 확인하고 일을 하자. 아프리카 지부티 1일 차다.
첫댓글 오늘도 숨죽이고 함께 마음으로 항해 했습니다.
아무일이 없어 고맙고 감사할뿐 입니다 ..
생생하고 절실한 항해기가 마치 옛날 신대륙항해에 나선 모험가의 길과 같이 느껴집니다
해상실크로드 개척자이십니다
리나양 과자값이라도 보태고 싶은데 후원계좌 좀 부탁드립니다
전달하겠습니다
쉬지않고 정독, 안전항해하세요.
존경의 마음 전합니다.
여행기 책으로 출간 하시면 대박 나겠습니다.
안전 향해 기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