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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9:10-17, 오병이어의 표적, 24.12.8, 박홍섭 목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수천 명의 사람을 먹인 유명한 사건입니다. 사 복음서가 모두 다룰 정도로 중요한 내용이지만 정작 그 본의를 떠나 단순한 기적으로 이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그리고 앞서 사도들에게 위임하신 기적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표적입니다. 표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임을 알려주고, 주님이 가지고 오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안내판의 역할을 하는 사인입니다.
열두 사도들이 위임받은 예수님의 권능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각 고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돌아왔습니다. 주님은 사도들의 보고를 듣고 그들을 데리고 벳세다 광야로 가십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많은 무리들이 거기까지 따라왔습니다. 아마도 각 고을로 다니면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복음을 전했던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과 그의 나라가 궁금해서 따라왔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영접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이야기하시며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베풀어지고 있는 현장에도 날이 저물었고 끼니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따라왔고 은혜로운 말씀을 들었고 병이 낫고 행복한 순간이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이런 순간만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있고 말씀도 있고 병 고침의 은혜도 있지만, 어김없이 날은 저물었고 배가 고픈 현실이 찾아왔습니다. 우리도 오늘처럼 주일이 되면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듣고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직장도 나가야 하고 학교도 가야 하고 빌린 돈도 갚아야 하고 밥도 해서 먹어야 합니다. 은행 이자도 내야 하고 세금도 내야 하고 월세도 내야 합니다. 만나기 싫은 사람도 만나야 하고 가기 싫은 곳에도 가야 합니다. 현실입니다.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고 기쁨이 있는데도 결혼이 안 됩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데 취직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죽도록 공부하는데 성적이 안 오를 수도 있습니다. 돌아서면 출근이고, 돌아서면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살림해야 합니다. 돌아서면 설교 준비, 돌아서면 공부, 돌아서면 일해야 합니다.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제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2절입니다.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들이니이다.” 당연한 말입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무리들을 고치는 것도 좋지만 이제 날이 저물고 배고픈 빈들의 현실을 생각하고 그 현실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에 예수님은 보내지 말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해결해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있어야 하는지 몰라서 이러실까요? 지금 제자들에게는 이들을 먹일 돈이 없으며, 설령 돈이 있다 하더라도 여기는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마을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빈들임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까? 이 텅 빈 들판에서 무슨 수로 이들을 먹이라고 하십니까? 지금 예수님은 너무 현실을 모르는 황당한 명령을 하시는 것 같고,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억지로 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때가 중요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불가능한 말을 하실 때는 세상을 너무 모르고 현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준비해놓은 기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돈이 없는 것을 아십니다. 그런데도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 6:3은 빌립과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사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는 소명은 본질적으로 항상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빈들에 주님이 계신다면 그 빈 들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빈들의 현실보다 거기에 함께 계신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말씀하시는 주님을 내가 얼마나 신뢰하는가? 하는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준비해놓으신 은혜를 경험합니다.
주님은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하는 무리들을 그냥 돌려보내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 은혜로우시고 실제적인 문제는 전혀 돕지 못하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오천 명이 넘는 무리를 오십 명씩 떼를 지어 앉히신 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사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러자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차고 넘쳤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의 주린 배도 이렇게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현실의 필요를 공급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기적의 참된 의미는 따로 있습니다. 주님은 먹고 마시는 이 표적을 통해 우리의 일상적인 필요가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며 그것을 통해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평행구절인 요 6:1-5을 보십시오. 이 사건이 유월절을 배경으로 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온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지나갈 때 믿음으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던 집만 저주와 심판이 건너가고 구원을 받았던 날입니다. 유월절은 어린양의 죽음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건너뛴 날입니다. 어린양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몸을 십자가에 드려서 우리를 죄와 저주와 심판에서 구원하고 잃어버렸던 생명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이 이런 유월절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것은 이 일이 단순히 먹을 것을 주시는 일상의 기적 정도가 아니라 그 기적 속에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으로 내어주고 자신의 피를 생명의 음료로 흘려주시는 어린양의 희생과 은혜가 들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진리를 말씀하기 위해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해석하면서 자신을 줄곧 생명의 떡으로 강조합니다. 요 6:35과 4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자신을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떡이 어떤 떡입니까? 33절, 38절, 50절을 보시면 하늘에서 내려온 떡입니다. 예수님은 공자나 석가모니나 소크라테스처럼 땅에서 난 분이 아니십니다. 하늘로서 내려오신 분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예수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생명의 떡입니다. 이 떡을 먹으면 생명을 얻게 됩니다. 51절을 보십시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살을 먹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살을 먹습니까? 예수를 먹는 것이 무엇입니까?
52-58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으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며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예수를 먹는 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예수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사는 것이 곧 예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시는 것이며 그런 삶이 바로 믿음이며 믿음의 삶은 생존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인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살면 빈 들에서도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표적입니다 .
지금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인생의 본분대로 살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 대신 세상의 헛된 영광을 구하며 영육 간에 고통과 결핍을 느끼는 영혼의 빈들이 되어 주림과 목마름 속에서 신음하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참된 양식과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려 죽으시는 방법 외에는 주리고 목마른 빈들의 인생이 생명을 얻을 수 없음을 아시고 하늘에서 내려와 십자가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기적을 이렇게 베푸십니다. 본문 눅 9:16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더라” 떡을 어떻게 나누어주었습니까? 떼어 나누어 주었습니다. 여기 떡을 뗀다는 표현은 아주 중요합니다. 굳이 그렇게 표현함으로 분명하게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마 26:26절입니다. 최후의 만찬 장면입니다. 거기서 최초의 성찬식이 진행되는데 떡을 어떻게 주십니까?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떡을 줄 때 그냥 주지 않고 떼어서 줍니다. 떡이 돌아가면 제자들이 알아서 떼어먹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떡을 떼어서 주십니다. 주님이 떼어 주신 떡은 부서지는 자신의 몸, 잠시 후에 고난받으실 십자가의 죽음을 뜻합니다.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을 떼어서 제자들을 먹이고 우리를 살리십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를 안내하는 표적이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과 생명의 떡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은 풍성한 생명입니다. 모자라지 않습니다. 원대로 주셔도 열두 바구니에 차고 넘치는 풍성한 생명이요 풍성한 은혜입니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믿고 자신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은 이렇게 풍성합니다. 그 은혜를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께서 우리의 일상적인 필요와 먹고사는 문제를 채워주실 때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참된 신앙으로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이 되게 해야 합니다. 먹는 것은 먹는 것이고 신앙은 신앙이다는 식으로 살면 안 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주님으로 말미암는 신앙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공부가 주님으로 말미암는 믿음으로 연결되고 직장생활과 장사와 사업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삶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일상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신앙으로 연결되어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연결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풍성한 생명과 안식의 삶이 참된 복으로 시작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어떻게 믿고 계십니까? 혹시 한 끼 먹는 양식이 해결되면 두 끼의 먹을 것을 생각하고 그것이 해결되면 더 많은 끼니를 축적하기 위해 골똘하지 않습니까? 먹을 것이 해결되면 입을 것을 생각하고 입을 것이 해결되면 사회적인 지위를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하나의 필요가 해결되면 또 다른 필요에 갈급하면서 계속 자신의 필요에 매어 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살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생명의 삶은 요원합니다. 오늘 주님이 빈 들에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끝없이 자신의 욕망에 메어 사망의 삶을 사는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참된 삶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사 우리를 살리시는 생명의 떡으로 오신 그리스도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다짐을 하고 어떤 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까? 생명의 떡 되신 예수님, 내가 지금 생명의 떡으로 오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오니 먹고 마시는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하나를 위해서 욕심을 내고 그것이 채워지면 또 다른 욕심을 향하여 나아가는 끝없는 일상의 노예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의 일상과 삶의 모든 영역이 예수께서 주시는 진정한 생명의 삶이 되어서 그 생명으로 지체와 이웃을 진실되게 사랑하고 섬기는 한우리 식구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