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비열전 20
제20대 경종(이윤)의 여자들
단의왕후 심씨!
선의왕후 어씨!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앞으로
조선왕조의 쇠망기가 시작된다.
성공에서 배우는 것보다
실패에서 배우는 것이 더 많다고 한다.
앞으로 온고이지신보다는
법고창신 자세로 왕비열전을 보기를 바란다.
옛 것을 법도로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으로 법고창신(法古創新)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성어이다.(박지원의 열하일기 중에서)
''배울 게 없다!'' 라는 것은
우리의 무지의 하나이다.
자신의 명덕(明德)을 밝히려면
격물(格物)ᆞ치지(致知)ᆞ
성의(誠意)ᆞ정심(正心)해야 한다.
쉽게 이야기 하자!
자신의 덕(잠재력)을 발휘하려면
내가 알고자 함에 다가가서..
끝까지 파고들어 원리를 찾고..
그 뜻을 성실히 하며..
마음을 속이지 않고
부동심(不動心)을 가지라는 것이다.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이다.
쓰는 것도 짜증이 날 때가 있다.
망해가는 모습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애이불상(哀而不傷)!
슬퍼하되 상처는 받지 말라는 뜻이다.
망해가는 조선왕조를 보면서
현시국을 생각해보니 가슴이 답답하다.
그래도 우짜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계속 굴러가리니...
경종!
엄니 장희빈에게서 아동학대를 당하면서 컸고,
게다가 거시기를 엄니가 못쓰게 만들어서
사내다운 구실도 제대로 못했다.
''우짜나~'' ㅠㅠ
게다가 숙종이 60세까지 살아서
세자 생활만 32년 하고 33살 늦게 왕이 되었다.
그것도 고작 4년밖에 못했고
당파 때문에 힘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갔다.
한마디로 낙이 없었다.
밤이나..
낮이나..
그리고
얼마나 고뇌(agony)가 많았을까?
호랑이는 호랑이였으나 병든 호랑이였다.
어려서 클 때도 불쌍했고..
왕이 되어서도 불쌍했다..
조선왕조에 몇 안 되는 존재감이 없는 왕이었다.
아버지 숙종은 강력한 호랑이였고 이복동생
영조는 막강한 호랑이 였기에 더욱 그렇다.
경종은 심리학적 용어로 '우는 아이'였다.
갑자기 연민의 마음이 든다.
게다가 몸은 병들었고 세상사는 낙도 없다.
ㅠㅠ ㅠㅠ
남자도 여성처럼 갱년기가 있다.
젊어서 뼈빠지게 고생하며 가족을 먹여 살렸고
이제 은퇴하여 제대로 살아보고 싶은데
이제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생산능력(?)도 떨어지니
예전처럼 기를 펼 수도 없다.
우울하고..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얼굴도 달아오르고..
뭔지 두렵고 불안하다.
게다가 가끔 침울하기도 하다. ㅠㅠ
경종은 왕비에게 얼마나 미안했을까?
말은 못하지만 사내구실을 못하니
그 무슨 명목이 서겠는가?
그저 안사람 눈치만 볼 따름이다.
참 GR같은 삶이다.
밤이 무서웠을 것이다. ㅠㅠ
단의왕후 심씨!
그녀는 세종대왕의 국구인 심온 12대손이고
명종의 국구인 심강의 7대손이며 동서분당
원인을 제공한 심충겸의 6대손이다.
*국구는 임금이나 왕세자 장인의 존칭
심봉서의 손녀이며 첨정으로
후일 우의정, 영의정 등으로 추증된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 딸이다.
세자빈으로 책봉될 당시 증조부
심권(沈權: 당시 종4품 부응교)이 생존한
상태로 심권은 서인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1696년에 11살의 나이로
세자빈에 간택되어 경종과 가례를 올렸다.
주로 병약한 왕세자(경종)를 곁에서 극진히
모시다 급환을 얻어 사망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숙종실록 기록을 확인하면 오히려 왕세자는
건강한 편이었고 병약한 쪽은 세자빈 심씨였다.
숙환으로 풍질(風疾)을 앓았고,
1701년 9월에는 말이 횡설수설하는 증상이 있어 내의원에서 약을 의논하기도 하였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시어머니는 성깔 드러븐(?) 장희빈이지..
시아버지는 호랭이처럼 무섭지..
남편은 비리비리 하고..
게다가 밤에 후사도 못 만들지..
게다가 자신의 몸까지 아프니
그 심정이 어찌하겠는가~? ㅠㅠ
그리고 8월에는 병으로
인현왕후의 상사에 예를 갖추지 못했다.
가례 당시에도 극심한 복통을 일으켜
식을 전부 취소해야 한다는
언급이 있었을 만큼 심각한 소동이 있었다.
경종 즉위 2년 전인 1718년 3월 8일
(숙종 44년), 갑자기 혼절하여 돌연사하였다.
왕세자인 경종이 손수 지문을 지었고,
숙종은 그녀의 죽음을 비통해 하며
단의(端懿) 시호를 추서하고 단의빈으로 삼았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혜릉(惠陵)에의 능호와 영휘(永徽)의
전호를 받고 단의왕후로 추봉되었다.
경종의 급서 후 그녀의 동생 심유현은 경종이
노론 환관들에 의해 유폐당한 뒤 독살되었다고
주장하며 이인좌의 난에 동참하였고,
그로 인해 그녀의 친정 가문이 몰락하였다.
단의왕후는 왕비도 못해 본 채 갔다.
어려서는 매우 슬기롭고 의젓했으며
언행을 조신하게 했다고 한다.
천성이 간소한 것을 좋아했고,
남을 부러워하지 않았으며,
좋은 물건은 동생들에게 먼저
나누어 주는 등 욕심이 없었다고 한다.
세자비가 되어서도 숙종에게 좋은 며느리였고
어진 성품과 총명과 덕을 고루 갖추었다.
남편인 세자(경종)에게도 좋은 각시였다.
오죽하면 그녀가 죽었을 때
왕세자인 남편이 스스로 지문을 지었겠는가?
33살 젊우 나이로 창덕궁에서 생을 달리하셨다.
안타깝다.
왜 착하고 선한 사람은 불행하게 살다 갈까~?
그렇다고
굳이 악하게 살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
선의왕후 어씨!
계비로 들어온 어씨,
영돈녕부사 어유구(魚有龜)의 딸로서 어유구는
노론 영수 김창집 제자이며 일가가 다 노론계이다.
1718년 14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간택되어
같은 해에 31살 왕세자(경종)와 가례를 올렸고,
다음 해인 1719년 9월에 관례를 올렸다.
1720년 숙종이 사망하고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경종의 초비인 단의왕후 심씨의 왕비 추봉과
그녀의 왕비 책봉을 동시에 주청한 것이 청나라에
트집 잡혀 1721년에야 고명을 받을 수 있었다.
경종1년 경종 부부에게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하여
노론 4대신(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와 왕대비(인원왕후)의 강력한 추진으로 연잉군(영조)
왕세제 책봉이 결정되었을 때
그녀의 나이는 갓 17세에 불과했다.
일설에 따르면 연잉군을 반대하여 종실과
비밀리에 연합하여 소현세자의 직손인 밀풍군 탄,
혹은 밀풍군의 아들인 관석을 입양하려 하였으나
경종의 급서로 실패하였다고 한다.
1724년 경종이 사망하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불과 20세의 나이로 왕대비가 되었다.
지금부터는 어른 노릇을 해야한다.
영조 2년에 대비전이 있는 창덕궁이 아닌 경종이
세자 시절 거처하던 창경궁 저승전에서 지냈으며,
1730년 8월 12일(음력 6월 29일) 26세
꽃다운 나이에 창경궁 어조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거처하던 저승전은 후에
세자궁으로 개조되어 사도세자 처소가 되었다.
그래서 일찍 저승으로 갔나보다. ㅠㅠ
저승전 건너편에 위치했던 취선당은
세자궁의 소주방으로 개조되었다.
소주방은 주방이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정신질환을 앓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저 불길한 저승전에서 자라고
취선당에서 지은 밥을 먹은 탓이라 하였다.
선의왕후 어씨!
괜히 왕실에 시집와서 한 일이 무엇인가~?
병약한 남편 경종의 병수발만 하다가
아까운 청춘을 다 보냈다.
남들 다 낳는 토깽이같은 새끼도 하나 못 낳고
남편이랑 알콩달콩 신혼생활도 못해보고
이승의 여행을 끝마쳤다.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짠~하다. ㅠㅠ
성품도 온유했다고 한다.
착한 여자였다.
차라리 못 생기고 못된 짓만 했었다면
세자빈으로 간택이라도 안 되었을텐데...
여자는 확실히 남편을 잘 만나야 한다.
왜냐면 뒤주박 팔자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 말이 씨가 안 먹히지만...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여성분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지금의 부군이 경종보다 못한가~?''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저런 남편을 두고 있지 않을 것이다.
웬수같은 남편일지라도 그 사람이 있음으로
토끼 같은 새끼들도 낳지 않았는가~?
매사에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평범함 속에도
행복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기 바란다.
주제 넘게 말할지라도
참고 이해하기를 바란다.
흠~흠~~^^
슬픈 왕후 이야기는 이제 안했으면 좋겠다.
ㅎ ㅎ ㅎ ㅎ
내일 또 계속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