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신식군데 별기군의 비극 그리고 그 뒷 이야기
아들아, 나라에는 나라를 지키는 군대가 있다.
첫째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키는 것.
둘째는 나라 안의 안정과 치안을 유지하며 후일 있을지 모르는 위기에 대비하고
국권과 국익을 수호하는 것.
크게 이 두가지가 군대의 존재 이유란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나라를 지키는 군대가 있다.
우리나라는 국민들에게 나라를 지키는 국방의 의무를 지우고, 젊은 장정들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누구나 반드시 군대를 가야하는 징병제(徵兵制)를 채택하고 있지.
우리나라가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물론 현실적인 북한의 위협도 있지만..
크게 보면 주위 중국과 일본 같은 주위 강대국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그만한 군사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지키고 있는 국군은 그 뿌리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광복 직후인 1946년 1월..우리 정부수립 이전 미군정 하에서 창설되었던 국방경비대가
현재 한국군의 모태라 할 것이나,
나라를 지키는 국군으로서의 그 위상을 보고 그 정통성을 가진다면..
아들아, 우리 한국군은 마땅히 광복군(光復軍)의 계승한 것이라 하여야 할 것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독립군과 의병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대인 대한제국군이 그 근원을 두어야 할 것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문호개방 후 새로운 신식문물이 들어 오게되고..
우리의 뒤떨어진 문물, 제도와 격렬하게 만나 충돌하며 뒤섞이는 시대였지.
격동(激動)의 시대였다.
이제 막 새시대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 들이는 시대에 또 새로운 군대가 필요했어.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 않는 새로운 군대.
신식 무기, 신식 훈련, 신식 편제(編制)와 병종(兵種)으로 구성된 새로운 군대.
그래서 1881년에 최초의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이 창설되었단다.
별기군
총책임자인 교련소 당상에는 명성황후의 조카로 외척 실세, 실력자인 민영익(閔泳翊)
실적적 책임자인 정령관(正領官)에는 한성근(韓聖根),
좌부령관(左副領官) 윤웅렬(尹雄烈), 우부령관(右副領官) 김노완(金魯完)
참령관에는 우범선(禹範善)
군사훈련은 일본인 교관 호리모도가 맡았지.
아들아,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인물들이 있다.
정령관 한성근.
그는 1866년 병인양요 때 김포 문수산성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선전하면서
국난극복에 기여한 인물이었다.
아빠와 여름휴가 때 강화도 갔던 기억이 나느냐?
강화도에서의 마지막 일정..갑곶진에서 보는 맞은 편의 산 위에 있던 그 산성이
바로 김포 문수산성이란다.
다음은 좌부령관 윤웅렬(1840~1911).
그는 해평 윤씨. 고종황제의 신임을 받는 무관이었어.
온건개화파 관료로 상당히 굴곡 많은 관료생활을 하였는데..
최후엔 국채보상운동 방해하는 일제의 사주를 받아 친일파로 변절하기 시작해서
경술국치 후엔 일제로 부터 남작(男爵)의 작위와 많은 은사금을 받았단다.
그는 일제부역자, 친일매국노로 친일파 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윤웅렬과 윤치호 부자
그의 아들은 유명한 윤치호(尹致昊,1865~1945).
처음엔 개화파 지식인으로 국권회복과 민중계몽에 나선 애국자인줄 알았더니
나중엔 알고보니..아주 비뚤어진 지식인의 전형으로, 친일파로 변절한 사람이었어.
자기는 소극적으로 저항했고, 친일이 아니라 항변도 했다고 한다만..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아.
그런 당대의 지식인이 지조없이..변명은 또 그럴듯 한데..
당대의 지식인, 지도층 인사가 가지는 무게와 영향력을 잘못 썼으면 차라리 변명말고
입을 닫는게 옳은 모습이지.
애써 변명하는 모습이 아빠의 눈에는 좀 비루하게 보여.
아들아, 아빠가 누누히 강조하지만 이런 사람은 본 받으면 안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행보를 따라야지..이런 자를 본받는 것은 안될 말이다.
마지막 또 하나 봐둘 인물은 우범선(1857~1903).
개화파 성향의 무관으로..별기군에 지원해 참령이 되었고, 김옥균의 개화파에
가담하였지.
우범선
후에 이자는 1895년 일본이 주도하여 창설한 신식군대 훈련대의 2대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훈련대의 친일성향을 우려하여 훈련대의 해산과 무장해제를 명받자
다음날 경복궁을 침입해온 일본군과 낭인에 가담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전과정에 개입한..천하에 다시 없을 역적이 되었다.
1896년 고종황제의 아관파천으로 친일파가 실각하면서 이 땅에 살 수 없게 된
그는..일본으로 망명하여 살면서 일본인 여자와 결혼하고 일본의 후원으로 살아가던중
1903년 11월, 고영근(高永根)에 의해 피살되며 악행의 대가를 받았단다.
이 문제적 인물 우범선과 그와 혼인한 일본인 여자의 아들이..
육종학자 우장춘(禹長春,1898~1959).
흔히 씨없는 수박 개발자라고 알고 있는 사람인데..
사실은 개발이 아니라 기존에 개발된 기술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시연해서
소개한 인물이야.
6살에 아버지 우범선을 험하게 잃고, 한일혼혈아로서 힘들게 살았던 그는..
그래도 훌륭하게 육종학자, 농학자로 성장했어.
1950년 대한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우리나라의 농학의 기초를 쌓고
헌신하며 큰 공헌을 했지.
우장춘 박사
그렇게 그는 과로로 지병이 악화되어 1959년 8월 병원에서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해.
죽음을 앞두고 정부는 그의 공헌을 인정해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하고
우장춘 박사는 '고맙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고 눈물을 흘렸다고 해.
그 우장춘 박사의 헌신. 왜 그랬을까.
아버지의 과오를 만회하려는 그의 마음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죽음을 앞두고 조국이 수여한 훈장을 받으며 그가 흘린 눈물의 의미는..
아마도 그런 마음을 알아준데 대한 고마움이 아니었을까.
다시..별기군 이야기로 돌아와서, 결과적으로 별기군은 채 1년도 못가고
해산되고 말았단다.
이유는 우선 나라에서 신식군대라고 만들었지만 세상에서 아직 받아들일 준비도
능력도 안되었던 것이지.
별기군에 엄청난 급여를 주고 온갖 대우를 다해주면서, 조선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구식군대에는 월급도 제대로 안주고 박대를 하며 총칼을 쥔 군대의 불만을 키웠지.
어떤 일이 있었냐면..
1년 넘게 월급도 못받는 구식군대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자 정부에서 그 불만을 달래려
한달치 월급을 지급하는데..그 월급으로 받은 쌀과 곡식 대부분이 모래와 겨가 섞여
먹을 수 없었던 거야.
1년 넘게 밀린 월급을 그것도 일부만 주면서 그런걸 줬으니..
임오군란(1882년)
당연히 그걸 받은 구식군인들의 눈이 뒤집어 졌겠지.
그 분노가 폭발해서 별기군을 습격해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과 일본인을
습격하고 또 당시 실권을 잡고 별기군을 도입하는 등 개화정책을 주도하던
민씨 일족들을 척살하고 궁궐을 습격했지. 그들의 분노의 끝에 명성황후가 있었거든.
명성황후는 고향인 여주로 도망하고, 구식군인들의 분노를 잠재우고자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했는데 잠적한 명성황후가 또 청나라에 지원요청을 해서 외세를 끌어 들였어.
청군이 와서 흥선대원군을 납치해 끌고가고..
이런 혼란상은 또 일본이 국내정세를 명분삼아 군대를 이끌고 개입할 명분을 주었단다.
이 임오군란의 결과로 조선은 청의 정치간섭 하에 놓이게 되고 일본의 개입을 초래하여
일본에는 또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하고 제물포 조약을 맺어 일본군의 국내 주둔을
허용하게 만들었단다.
이는 청일전쟁(淸日戰爭)의 도화선이 되는 사건 중의 하나였지.
임오군란으로 촉발된 이 사태 속에 별기군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만약 이때에 우리가 제대로 된 군대를 만들고 유지할 기량이 있고, 의식이 있었다면
임오군란과 후일 청일전쟁까지 이어지는 비극도 막을 수 있었을 수도 있었겠다.
을미사변(1895)
다시 한번 말하는데..이 사건에서 보듯이 일개인이나 집안의 안위를 나라의 안위보다
우선시하여 섣불리 외세를 끌어들인 것, 명성황후와 그 주변 척족들의 대표적인
죄악이었다.
어떻게 보면..명성황후의 죽음을 초래한 을미사변도 한 나라의 황후답지 못하게
나라보다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함부로 외세를 끌어들인 그녀의 가벼운 처신이
초래한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조선을 이끌었던 고종황제부터 흥선대원군, 무엇보다 명성황후와 그녀 주위의
민씨 외척들..이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라를 이끌었던 것일까.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지. 이들이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고 가고 있었어.
아빠는 그들에게 대체 왜 그랬는지..나라는 그리고 백성은 그들에게 무슨 의미였는지
한번 묻고 싶다.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