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 <5> 임승택
“차별성 인정… 단순 비교는 의미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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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사진은 지난 3월13일 서울교육대학 전자계산소 공학실에서 열린 ‘초기불교 중심교리와 선정수행의 제문제’를 다룬 불교학연구회 제22차 학술발표회. |
간화선과 위빠사나에 대해 “시대가 다르면 옷을 달리 입듯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내연에 있어 큰 차이가 없다, 위빠사나가 번뇌를 끊기 위한 것이라면 간화선엔 번뇌가 존재하지 않는다, 간화선은 대승불교 위빠사나는 초기불교 전통이 바탕된 수행법이며 방편은 서로 조금씩 달라도 궁극적 목적지는 같다, 목적지는 같지만 출발점과 과정은 다르다”는 주장들이 본지를 통해 제기됐다. 이에 대해 동국대 임승택 연구교수가 최근 자신의 견해를 보내왔다.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문제를 다루는 그간의 태도를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양자 중에서 어느 하나만이 최고이고 다른 하나는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입장이다. 둘째는 양자의 방법이 내용적인 측면에서 하나로 통한다는 유형이다. 마지막은 양자의 차별성을 인정하면서 서로간에 대화와 타협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자세이다.
첫 번째의 유형에서, 간화선 우위론자에 따르면 “위빠사나는 하근기의 저열한 수행법으로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의심스러운 방법”이다. 또한 반대로 위빠사나 옹호론자에 따르면 “간화선은 중국에서 고안된 종파불교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서로 다른 입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용인하지 않으며, ‘간화선과 위빠사나’라는 ‘토론의 주제’마저 부인한다. ‘하근기의 수행법’ 혹은 ‘비정통적인 수행법’을 정당한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입장에 귀기울일 만한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일관된 방법에 몸과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어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겠는가. 사실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자신이 속한 전통에 강한 자긍심을 갖는다. 또한 이러한 경향은 실천.수행의 과정에 나름의 진지함과 치열함을 갖는 사람들에게서 곧 잘 목격이 된다. 그러나 그들을 대화의 장으로 유도하기란 결코 쉽지 않으며, 그러한 시도 자체가 부질없는 짓으로 내비칠 우려가 있다.
두 번째로 양자를 동일한 차원에서 해석하려는 태도가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어떻든 간에 서로의 전통에서 나타나는 유사한 측면에 논의의 초점을 모은다. 그리하여 마치 순교자적 입장에 선 듯한 비장함으로 양자간의 화해와 타협을 이끌어 내려 한다. 조준호 선생의 기고(불교신문 2012호/ 3월9일자)에서 보여지듯이,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연결고리 확보’라든가, ‘화두선 전통과의 교두보 확보’ 따위의 전투적인 구호가 그러한 자세를 잘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간화선과 위빠사나 모두가 불교의 실천법인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러한 시도 자체는 바람직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 입장이 서로의 일치점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양자 모두를 곡해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그러한 견해에 따르면, 선정(定)의 깊이와 위빠사나의 실천 정도는 비례한다. 또한 간화선 역시 ‘몽중일여(夢中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의 문구에서 드러나듯이 선정의 상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선정이야말로 양자의 ‘연결고리’가 된다.
그러나 전형적인 초기불교의 경전으로서 〈상윳따니까야〉(VIII.7)에는, 500명의 아라한 중에서 선정(定)과 지혜(慧) 모두를 갖춘 이는 60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대다수가 지혜의 방법으로 아라한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따라서 높은 단계의 선정만을 찬양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또한 역대 조사들의 행적을 전하는 어록이나 문집 등에도 선정의 상태와 무관하게 깨우침을 얻는 경우가 종종 기술된다. 따라서 선정을 중심으로 한 ‘양자간의 연결고리’는 개인적인 바람의 차원에서 그친다.
마지막으로 서로의 차별성을 인정하면서도 대화의 끈을 놓지 않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이러한 입장에 일단 공조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각각의 입각점에 따른 견해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한다. 먼저 인경스님은 간화선의 전통에 근거하여 위빠사나와의 비교를 시도한다(2014호/ 3월 16일자). 또한 김재성 선생은 현존하는 남방불교의 수행전통에 입각하여 위빠사나를 옹호한다(2016호/ 3월 23일자). 마지막으로 마성스님은 양자간의 차별성과 동질성을 함께 지적함으로써 근기(根機)에 맞는 수행법을 선택하도록 제안한다(2018호/ 3월 30일자).
인경스님의 견해에 따르면, 위빠사나는 초기경전에 기초한 점진적인 수행이고 간화선은 대승경전에서 설한 성품(性)에 대한 급진적인 돈오(頓悟)의 직관이다. 따라서 전자는 경전의 가르침을 부인하지 않고 그것에 일치시켜 나가는 방법론적 특징을 지니며, 후자는 경전을 참고하되 그것에 의존하지 않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입장을 갖는다. 또한 위빠사나는 초기불교의 인무아(人無我)의 기초하여 법을 세우는 반면에, 간화선은 법무아(法無我)에 입각하여 현상으로서의 법 자체마저 부정한다.
교리적 이해.실천통한 지혜, 관련성 입증부터
현실의 삶과 유리되지 않은 수행모델 탐색을
이러한 인경스님의 견해는 간화선이야말로 교리사적 발달 과정의 최후에 위치한다는 암묵적인 지향점으로 향한다. 그리하여 “위빠사나가 번뇌를 끊기 위한 것이라면 간화선에서는 번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정점에 이른다. 필자는 이러한 견해의 교리적 근거와 타당성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겠다. 그러나 현학적인 관념의 유희에 그칠 가능성에 대해서는 우려의 시선을 보낸다. 필자는 “번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씀보다는 “끊어야 할 번뇌가 있다”는 가르침에서 오히려 부처님의 큰 자비를 느낀다.
한편 김재성 선생은 위빠사나를 ‘수행에 의한 체험적 지혜(智慧)’로 규정하면서, 이것을 ‘화두라는 언어적 개념’에 집중하는 간화선에 대비시킨다. 그리하여 위빠사나와 간화선을 지혜와 선정의 길로 조심스럽게 결론짓는다. 물론 그에 따르면, 화두를 들고 성성(惺惺)하게 깨어 있는 마음은 위빠사나와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따라서 양자간에는 충분한 타협의 여지가 있다. 실제로 초기불교의 여러 경전에서는 수행자의 근기에 따른 다양한 수행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인경스님의 글에서 드러나듯이, 간화선을 언어적 개념에 대한 집중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즉 간화선의 화두는 전폭적이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매개이지 단순히 번뇌를 억제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필자는 이러한 초보적인 오해가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대화를 가로막는 중대한 장벽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또한 ‘선정의 상태’를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연결고리’로 여기는 일부의 시각이 바로 이러한 오해에서부터 기인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마성스님에 따르면, 간화선과 위빠사나 모두는 이미 역사적인 검증의 과정을 마친 거의 완벽한 수행법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지엽적인 문제만으로 단순 비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간화선은 대승불교 사상을 기초로 중국이라는 문화적.역사적 배경에서 체계화된 수행법인 반면에, 위빠사나는 초기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상좌불교의 교리와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수행법이다. 따라서 양자간의 차별성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논의를 출발해야 한다.
이러한 마성스님의 견해는 “간화선이 깨달음을 중시한 반면에 위빠사나는 닦음 그 자체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입장으로 귀결된다. 그리하여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위빠사나의 장점을 거론하기에 이른다. 필자는 이러한 기술의 이면에 현대인에게 적합한 수행 모델에 대한 진지한 탐색이 전제되어 있다고 본다. 따라서 마성스님의 글은 이전의 논의보다 진전된 성격을 지니며 그에 상응하는 설득력과 타당성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필자 자신의 입장을 드러낼 차례이다. 필자는 초기불교 전공자로서 아무래도 위빠사나의 관점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 우선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필자는 교리적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지혜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에 대해 일차적인 관심을 갖는다. 물론 교리적인 이해와 실천을 통한 지혜는 다르다. 그러나 양자의 관련성이 입증될 때 비로소 간화선과 위빠사나 모두 불교적 가르침으로 귀속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깊은 단계의 선정 체험도 중요하지만, 일상적인 논리와 추리가 가능한 평범한 의식 상태 또한 중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필자의 입장에 따르면, 수행의 문제는 결코 현실의 삶과 유리된 것이 아니며 상식적인 수준에서부터 논의가 가능하다. 그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은산철벽(銀山鐵壁)의 화두 또한 일상의 삶을 회복하기 위한 처방법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본다. 따라서 간화선이든 위빠사나든 모든 수행의 문제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일상의 ‘나’ 자신이 논의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임승택/ 동국대 연구교수
[출처 : 불교신문 2020호/ 4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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