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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위 성지 - 최초의 한국인 사제 기착지 |
2023년 3월26일 (일)
눈을 뜨니 4시. 어제 순례한 성지를 마음속으로 정리하면서 오늘을 일정 그려본다. 어제 여산 성지와 천호 성지를 순례했기에 오늘은 좀 여유가 있다. 나바위 성지의 순조로운 순례가 이루어진다면 보너스인 미륵사지 답사도 가능하다.
대중탕 문을 연다는 6시를 기다려 일행과 함께 1층에 있는 목욕탕에 갔다. 우리 이행뿐 아무도 없다. 목욕탕 역시 그렇게 좋은 시설은 못 된다. 식당, 숙소에 딱 어울리는 70년대식이라는 인상이 든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한참 동안 우리끼리 떠들다가 뒤를 돌아보니 나이든 욕객 3명이 조용히 욕탕에 들어와 몸을 담그고 있었다. 좀 조용하자는 말도 할만도 했는데 잠자코 기다려 주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여 인사 삼아 말을 붙였다.
이곳에 물이 좋지 못하다는 듯하다고 하니 부근 고지대에 쓰레기장이 있어 오염된 물이 흘려 내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함열역이 있길래 이곳이 함열이냐고 물으니 이곳은 원래 익산군 와리이고 함열은 여기서 좀 떨어져 있는 읍지역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 함열역이 생긴 것은 함열읍 주민들이 기차역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이런 곳이 많다. 당시에는 기차역이 생기면 주민들은 마치 마을이 망하기나 하는 듯이 생각했다. 봉화의 양반마을 법전이 그랬고 소천면 현동리가 그랬다. 이처럼 주민들과 소통하면 공식적으로 알 수 없는 정보나 비하인드 스토리를 많이 얻을 수 있다.
7시가 조금 넘어 여관을 서둘러 떠났다. 나바위 성지 미사가 10시이기에 딱히 서두를 필요가 없지만 딱히 할 일 없이 여관에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여관 주인 이상미 여사는 어제는 자기가 작사한 노래라면서 CD 한 장을 주었는데, 오늘은 자신의 글이 실려 있다는 문학지를 3권이나 주었다.
아침 식사는 가까운 식당을 이용하자고 하니, 운전자 라파엘 형제는 식당은 자기에게 맡겨라면서 우선 차를 타라고 한다. 차를 탄 후 네비게이션에 “가까운 기사식당으로”라는 멘트를 넣고 가자는 대로 따라가니 제대로 찾지 못했다. 왕복을 반복하다가 일단 나바위 성당으로 가면서 찾기로 했다. 하지만 도착할 때까지 식당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단식재를 지키게 된 것이다. 문명의 이기를 과신하다보면 이처럼 낭패 보는 일도 있다.
나바위 성당에 도착하자 미사 시간까지 2시간 가까이 남아서 일단 나바위 성지 순례를 미리 하기로 하였다. 결국 2시간을 버는 셈이 되었다.
나바위 성지 - 사제가 된 김대건, 첫발을 내디디다
나바위 성지의 공식적 행정 주소는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1158. 화산(華山)은 금강 하구 넒은 평야 한가운데 사발을 엎어놓은 듯한 산이다.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산’이다. 1800년대 후반 우암 송시열이 인근 황산에서 이 산을 바라보니 사철 바뀌는 경치가 너무 좋아서 ‘화산’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화산’이라는 이름과 함께 ‘나바위’라고도 불렀다. 화산 위에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어 ‘넓은 바위’, ‘너른 바위’로 부르다가 ‘벌어질 나(羅)’자를 섞어 ‘나바위’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래서 성당 이름도 옛날에는 화산성당이라고 하다가 1989년부터 나바위 성당으로 부르고 있다.
바로 이곳이 1845년 10월 12일 밤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작은 배 한 척에 몸을 싣고 우리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뜻 깊은 곳이다.
김대건 신부가 어릴 때 고국을 떠나 사제가 되어 나바위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은 참으로 파란만장했다. 1836년 12월, 15세의 어린 나이로 고국을 떠나 다음해 6월 마카오에 도착한 뒤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1월 천신만고 끝에 홀몸으로 의주 변문의 수구문을 통해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다.
하지만 3개월 뒤 1845년 4월30일 다시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함께 ‘라파엘호’라는 작은 목선을 타고 제물포를 떠나 6월 4일 상해에 도착, 8월 17일 김가항(金家巷)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8월31일 함께 길을 떠났던 조선인 선원들과 두 분 성직자를 모신 김대건 신부는 다시 라파엘호를 타고 고국을 향했다. 하지만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뜻하지 않게 제주도 차귀도 용수리에 도착했다. 일행은 오래 지체하지 않고 제주도를 떠나 제물포를 향했지만 배가 반파 상태여서 여의치 않자 목적지를 황산포(강경 부근)으로 하고 금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10월 12일 황산포 3km 전방 화산(나바위)에 도착한 것이다. 선원 중에 지역 사정에 밝은 사람이 있어 전국 3대 시장의 하나이며 많은 사람이 모이는 황산포보다는 한적하여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는 화산이 좋다는 의견을 내어 이를 따랐다.
김대건 신부는 그 해 1월 육로로 한 번 입국한 데 이어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밟은 고국 땅이었다. 그 때는 나바위 바로 코앞까지 금강물이 넘실거리며 흘렀다고 한다.
당시 고국 땅을 밟은 김 신부의 감회가 사뭇 어떠했을 지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1784년 한국 교회가 세워진 후 첫 신부로 맞았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6년 만인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했고, 그 뒤 33년간 목자 없는 양 떼였고 다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을 맞이했으나 그나마 1839년 기해박해 때 모두 잃었다. 그리고 6년 동안 또다시 한국 교회는 한 분의 사제도 없는 암흑기를 지내야 했었다.
목자를 기다리는 한국 교회의 양 떼들에게 세 분 성직자의 입국은 참으로 감격적인 사건이었으며 김대건 신부 자신도 그토록 목마르게 그리던 고국에서 첫 방인(邦人) 사제로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주차장에서 내려 언덕길로 오르는 입구에 안내표지판과 경내 지도가 있다. 나바위 성지의 경내를 한눈에 보는 듯 잘 나타내주고 있다.
나바위 성당
나바위 성당은 1897년 설립과 함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Vermorel, 張若瑟) 요셉 신부가 1906년에 시작하여 1907년에 완공하였다. 설계는 명동성당 설계자인 프와넬(Poisnel) 신부가 했고 공사는 중국인들이 맡았으며 건축양식은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한옥 형태에 고딕식을 가미했다. 그 뒤 1916-1917년에 흙벽을 서양식 벽돌로, 마루를 회랑으로 바꿨다. 용마루 부분의 종탑은 헐고 성당 입구에 고딕식으로 벽돌을 쌓아 종탑을 세웠으며, 그리고 1922년 회랑 기둥 아랫부분을 석조로 개조하여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한국의 전통양식과 서양의 건축양식이 독특하게 혼합된 나바위 성당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7년 7월 18일 ‘화산 천주교회’라는 명칭으로 사제관과 함께 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성당 내부에는 전통 관습에 따라 남녀 자리를 구분한 칸막이 기둥이 그대로 남아있다.
1997년 100주년을 맞은 나바위 성당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민족과 애환을 같이했다. 1907년 ‘계명학교’를 세워 1947년 폐교될 때까지 일제의 탄압 속에서 애국계몽 운동을 통한 구국에 앞장섰고, 신사 참배에 저항하던 사제와 신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6.25 당시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성당을 지킨 사제 덕분에 단 며칠을 제외하고는 매일 미사가 계속 봉헌된 기록을 갖고 있다. 당시 본당 주임인 김후상 신부는 “양들을 버리는 사제는 목자가 아니며, 미사를 지내다가 죽으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없다”는 일념으로 피신하지 않고 미사를 계속 봉헌했다.
성전이 있는 언덕 아래 넓은 광장이 있고 그 위 언덕 기슭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마리아 상이 찾아오는 모든 순례자를 맞아주고 계신다. 그런데 안내판에 따르면 이 성모상도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상이다.
이 성모상은 1830년 프랑스 파리의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 수녀회 모원에서 성녀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에게 발현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라파엘호가 폭풍으로 침몰의 위기를 맞을 때마다 기적의 패에 새겨진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의 상본(像本)을 들고 일행을 격려하면서 기도하였다. 하느님의 섭리와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김대건 신부 일행은 이곳 나바위를 통해 조선 땅에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1815년 김대건 신부 편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고 한다.
“저는 폭풍속에서 하느님 다음으로 우리의 유일한 성모님의 기적 상본을 내보이면서 ‘겁내지 말라, 우리를 도우시는 성모님이 여기 계신다’는 등의 말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언덕 위 성전이 있는 마당에는 예수성심상과 이 성당을 처음 지은 베르모렐(Vermorel) 요셉 신부의 기념비가 서 있다. 성심상에는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는 구절이 당시의 복음서의 문체로 새겨져 있다.
치유의 경당
성전 앞에는 치유의 경당이 있다. 안내판에 설명된 바는 다음과 같다.
1956년에 건립된 이 건물은 당시 진료소와 성당의 강당으로 사용되었다. 성 바오로회 수녀님들에 의해 운영되었던 이 진료소는 단순히 약을 나누어주는 시약소의 단계를 넘어 소규모 의원에 못지 않은 의료시설을 갖추고 있어 간단한 수술까지도 가능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진료소는 이 지역의 가난한 주민들에게 의료혜택을 주는 것은 물론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역할도 함께하여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육체적 치료와 마음의 치유 또한 주었던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장소였다.
훗날 보수 작업을 통해 1층은 개인 피정 장소로, 2층은 본당의 강당으로 사용되었고 2016년에 성지 재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층 강당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현재의 ‘치유의 경당’으로 거듭 나게 되었다. 이로써 건물의 역사와 정신이 다시 살아난 치유의 경당은 이제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육체적 치유와 영적 위안을 주는 장소로써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경당 입구 오른쪽에 있는 예수님 성상은 대레사 성녀가 영적 갈등을 겪고 있을 때 그녀를 회심케한 성화 ‘에케 호모(ECCE HOMO)’를 성상으로 만든 것이다. 많은 유명작가들이 그렸던 ‘ECCE HOMO’ 성화는 사형 선고를 받고 기둥에 묶인 예수님을 그린 것으로, 당시 병사들에게 채찍질을 당하고 상처가 난 몸에 가시관과 자주색 옷을 두른 다음 군중 앞에 선 예수님을 두고 빌라도가 “자 이 사람이오!(ECCE HOMO)”라고 말한 (요한 19, 5)내용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따라서 경당에 들어가는 순례객은 예수님의 공로를 통하여 인간의 상처와 고통에 대한 치유를 청하는 것이다.
한편 경당의 종탑 위에 세워진 닭은 베드로의 배신과 회심을 상징하는 새벽닭으로 예수님께서 “네가 새벽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과 세 번의 부인 후 자신의 잘못과 나약함을 깨달은 베드로의 눈물어린 회심을 상징한다.
새벽닭을 치유의 결당 꼭대기에 세운 것은 순례객이 경당에 들어가면서 나약한 인간이기에 세상에서 범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여 자신의 죄로 말미암은 상처와 아픔을 자비로우신 예수님께 맡기고 그 안에서 치유을 청하기 위함이다.
이제 화산(華山)에 오르기로 한다. 화산을 오르려면 성당 뒤편 성모동산을 먼저 들려야 한다.
화산에 오르는 길은 성모동산 오른편 김대건 성상이 있는 곳을 통해 올라가는 길과 성모동산 왼쪽 평화의 모후가 서 계시는 곳을 통하여 가는 길이 있다.
성모동산
성당 뒤편에는 야외 제대와 평화의 모후 상을 모신 널찍한 정원이다. 안내판에 의하면 이 성모동산의 조성 내력이 재미있다.
이 평화의 성모님이 서 계시는 자리는 전라북도 삼대 명당자리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초대 주임 베르모렐 신부님께서 본당을 설립하고 성당을 짓기 위해 준비하던 중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화산에 자리를 잡고 있는 암자와 그곳에 살고 계신 스님이었다.
암자가 있는 상태로 성당을 지울 수는 없어 고민 끝에 하루는 스님을 찾아가 성당을 지으려는 뜻을 밝히고 이곳에서 나가주시기를 정중히 부탁하였다. 그러나 스님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하고 쫓겨 나와 하루하루를 기도로 보내셨다. 그렇게 두세 달 지난 어느 날, 스님께서 바랑을 짊어지고 신부님을 찾아와서 하시는 말씀이 “이제 나는 이곳을 떠나니 이 암자는 신부님 마음대로 하십시오.”라는 것이었다.
너무나 뜻밖의 일에 놀란 신부는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된 영문인지 수소문하였고,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신부님께서 스님을 찾아간 그 다음 날부터 스님의 꿈에 매일같이 웬 여인이 나타나서 ‘이 자리는 내 자리이니 이곳에서 빨리 나가거라’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1960년대에 성모님을 그 자리에 모셨고 지금도 성모님은 높은 곳에서 나바위 성당을 굽어보시며 우리들의 기도를 전구해 주고 계신다는 내용이다. 평화의 모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모동산 왼쪽 평화의 모후 뒤쪽을 오르면 왼쪽 평화의 모후상 쪽으로 오르면 십자가의 길 14처와 2대 주임신부였던 소세(Saucet) 신부의 묘가 있다.
이제 성모동산 오른쪽 김대건 신부 성상이 있는 곳으로 정상에 오르기로 한다.
김대건 신부 성상은 김대건 신부의 고귀한 순교정신과 높은 덕을 기리기 위해 2007년 박 미카엘, 유 안나마리아 부부의 봉헌으로 세웠다. 재료는 함열석이며 높이는 4m이고 받침대는 제대 모양이다.
화산 정상에 오르니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망금정, 김대건 신부의 순교비가 우뚝 솟아있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마애삼존불까지 있다.
망금정(望錦亭)
망금정은 금강 황산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화산의 꼭대기, 이른바 나바위로 불리는 곳에 서있다. 예전에는 망금정 아래까지 금강 강물이 넘실거렸으나 1925년 일본인들이 이 일대를 간척하면서 금강 줄기가 바뀌어 지금은 비닐하우스로 뒤덮힌 농경지로 바뀐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바위 성당이 설립된 이후 초대 교구장이신 드망즈 주교는 이 망금정의 더할 수 없이 아름답고 조용한 이곳의 분위기에 감탄하여, 1912년부터 해마다 5,6월이면 이곳에 올라 금강을 굽어보며 피정을 하였다. 주임신부인 베르모렐 신부는 이러한 주교님을 위해 이곳에 금강을 바라보는 정자, 망금정(望錦亭)을 지었다. 남을 위한 배려가 망금정보다 더 아름답게 여겨진다.
김대건 신부 순교비(익산시 향토유적 16호)
김대건 신부의 나바위 기착 110주년과 함께 시복 30주년, 성당 건축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기념탑이다. 1955년 4월5일에 기공식을 하여 김대건 신부가 이곳에 도착한 10월12일을 택하여 제막식을 했다. 본당 단체 중 일심회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화산 서쪽 기슭에 있던 큰 암석을 깨어 목도로 옮겨 이곳 반석 위에 세웠다. 기념탑의 크기는 김대건 신부가 타고 왔던 라파엘호를 기준으로 했다고 한다. 전체 높이 4.5m, 기념비 1.82m, 십자가 1.2m.
기념비 안내문에는 '선구의 화산'이라는 김재덕 신부의 시가 있다.
복자여 안드레아 탁덕이 오르시던
거룩한 갈바리아 오늘도 제단이니
영원한 사제이로다.
금강물 굽이굽이 화산이 장하도다
대한의 수신탁덕 비로서 마저주니
선구의 화산이로다
이름도 숭고하다 교우여 기억하라.
복자의 귀한 이름 본명은 안드레아
아명은 재복이니 또다시 복자이로다.
겨레여 명심하라 영웅의 높은 이름
보명은 지식이오 관명은 대건이니
민족의 대건이어라.
정상에서 ‘평화의 모후’가 계신 성모동산을 향해 조금만 내려가면 소세(Saucet)신부의 묘가 있다.
소세신부의 묘
나바위 성당의 2대 주임신부였던 소세 신부는 1921년 10월 11일 무릎 종양이 발병하여 강경읍 병원에 가서 수술하였으나 실패하고 돌아가셨다. 전임 초대 신부인 베르모렐 요셉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10월 21일에 선종하셨다. 소세신부는 나바위 성당을 바라보며 눕고 싶다는 유언에 따랑 이곳에 안장되셨다.
신부님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1877 프랑스 출생
1903 파리 외방선쇼회 신학교입학
1906 사제서품
1907 경성에 도착
1907 이후 칠곡 가실에서 선교활동
1919 초대 베르모렐 신부를 이어 2대 주임 신부
1921 선종
마애삼존불
성당이 건립되기 이전 이곳에는 불심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 마멸이 심해 좌우 보살상은 식별이 어렵다. 이곳은 중국과 통하는 서해 바다와 인접해 있어 문물을 받아들이는 호남지역의 관문이다. 따라서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는 유물, 유적을 조성했으리라 짐작된다.
그것이 바로 이 바위 뒷면에 새겨진이다. 고기잡이의 만선과 무사 안녕을 기원하던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는 표상으로 세월과 함께 그 옛적 풍경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평화의 모후가 있는 성모동산에서 스님 이야기가 여기서 발단이 되지 않았나 한다.
마애삼존불을 마지막으로 화산 정상에 서 내려와 성당 반대편의 화산 둘레길을 표지판과 함께 전설이 곁들인 많은 유적이 있다.
수탉바위
화산에는 크고 작은 바위가 많다. 그중에서도 특이하게 풍선처럼 둥근 바위가 잇는데 수탉바위라고 한다. 옛날 이곳 사람들은 무척 가난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감탄한 신령은 그들을 도와주고자 하였다. 이 마을에는 수탉이 한 마리 있었는데 바로 이 수탉에게 황금알을 낳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수탉이 알을 낳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기에 사람들이 보니 않도록 동트기 전에 알을 낳게 하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해가 뜬 뒤 순번대로 매일 한 사람씩 와서 황금알을 가져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첫 번째 사람이 빨리 가져가고 싶은 욕심과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수탉이 알을 낳기 전부터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수탉은 알을 낳다가 누군가 보고 있는 것을 알고는 놀라 그 자리에서 돌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돌로 굳어진 바위가 그대로 남아 ‘수탉바위’라고 불리고 있다. 이는 과욕을 경계하라는 교훈으로 오늘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런 설화를 ‘장자못 설화’라고 하는데 구약성서에도 소돔과 고모라 멸망과 관련된 롯의 아내 이야기도 이와 같은 것이다.
십자바위
십자가가 선명하게 보이는 이곳은 둘레길 십자가의 길 제6처이기도 하다. 성녀 베로니카가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드림을 묵상하는 곳이다. 큰 바위 위에 깊고 선명하게 십자가 형태로 갈라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자리는 바로 김대건 신부님이 배에서 내려 육지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조선시대 때에는 금강 물이 여기까지 들어와서 배가 바다로 드나들 수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제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기억을 담고 있는 화산의 십자바위는 순교자의 얼이 새겨진 듯하고 그분들의 뒤를 따르는 신앙선조들의 기도가 선명히 남아 지금 우리 눈앞에 드러나고 있다. 성 김대건 안드래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그리고 부근 화산 중턱에 송시열이 붙였다고 하는 華山이라는 각석이 희미하게 나마 분명히 찾을 수 있었다.
김대건 일행 기착터와 라파엘 호
라파엘호(The Ship Raphael)는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가 1845년 4월 30일에 제물포에서 상해로 갈 때 탔으며, 8월 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8월 31일 조선으로 돌아올 때에도 탔던 무동력 목선이다. 대천사 성 라파엘이 길을 인도하는 배라는 뜻이다. 이 라파엘 호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페레올 주교의 기록을 바탕으로 고증된 제주도 용수성지 라파엘 호와 같은 크기와 모습으로 재현하였다. 배의 규모는 길이 13,5m, 너비 4.8m 깊이 2.1m.
내려오는 길에 나바위 성당 역사관, 성체조배실에 들렀다.
나바위 성지 역사관
이 건물은 1907년 성당을 지을 때 지었던 건물로 원래는 사제관이었다. 1909년, 1917년 두 번이나 화재가 나서 타버렸다. 19017년 신축하여 그 이후 여러 번 보수를 해 왔다. 대건관이 지어져 새로운 사제관이 마련됨에 따라 2019년에는 성지 역사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역사관 입구 전실에는 11대 김후상 주임신부(1948.7-1 나바위 성지 역사관954.11 재직)의 싯구가 김대건 신부의 사진과 함께 벽면에 적혀 있다. 뜻이 통하지 않는 어휘도 있으나 이런 것도 성당의 역사성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지?
김신부 화산에 상륙한때
행색은 초라하나
영웅성길 탄배이니
축-포는 못놓거니
깔보지나 말지어다.
오- 신부님 안의하옵소서.
오십 돌 지나가면
우렁찬 성가 소래
가신 임 찬양하리.
전시실에는 먼저 그야말로 성당이 겪어온 굵직한 사건, 사고, 행사가 연대별로 빠짐없이 정리 · 기록되었고 거쳐 가신 역대 신부님들을 비롯한 중요한 사진 자료, 당시 사용하던 성구(聖具)나 물품, 장부 등 그야말로 역사 전시관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이런 자료를 소중하게 여겨온 역대 신부님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높은 역사의식이 놀랍게 여겨진다. 오늘의 자취가 백년을 지나면 그대로 역사가 된다. 오늘날 역사실이나 역사 코너를 만들어 자료를 모아나가는 성당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볼 문제다. 우리 성당도 머잖아 성당 설립 50년을 맞는다. 자료를 평소에 정리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주보 이외엔 남는 것이 없다.
성체조배실
성채 조배실은 사제관(현재의 역사관)의 지하실에 해당되나 경사진 지형이기에 바로 측면에 외부로 통하는 문이 있다. 따라서 이곳도 원래 성당 초창기 1900년도 초기에는 불을 때는 부엌에 해당되는 곳이어서 외국 선교사로 오신 신부님들이 직접 빵을 구워 드셨던 식당이었다. 그리고 신부님들께서 직접 제병을 만드시던 곳이라 더욱 의미 있는 곳이다. 미사시간이 촉박하여 안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저만큼 길가 언덕에는 소나무 아래 햇살을 등지고 성모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아들 예수를 안고 고통에 잠기신 모습을 하신 조각상이 세워져 있는데 미켈란제로의 변형된 피에타상이다. 이처럼 이곳에서는 피에타 상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만큼 민족정서와도 부합되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나바위 성당 내부
10시가 가까워지니 신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성당 안에 들어가니 일부 신자들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성당 외면의 장엄함에 비해서는 내부는 매우 단촐하다. 협소한 감마저 준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그리 큰 건물도 아닌데 성전 가운데 큰 기둥을 세워 좌우를 분리했는데 이것은 초창기에 남녀를 구분한 형태라고 한다.
제대는 다섯 개의 길쭉한 촛대 위에 채색의 예수성심상이 그대로 벽 위에 모셔져 있는데 물론 이는 초기의 것이고, 나중에는 또 하나의 제단을 그 앞에 설치하여 현재 사용하고 있다.
초기의 제대는 성당 신축 당시, 제단을 비롯하여 촛대, 감실까지도 중국 남경 성 라자로 수도원에서 제작해서 가지고 와서 조립 또는 설치했다고 한다. 그만큼 유서가 깊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주보성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상과 함께 1995년 전주 교구청에서 옮겨온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목뼈)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따라서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감실이 끈에 매달려 늘여뜨려져 있는 것도 특이했다.
창문은 스태인 글라스 대신 유색 창호지를 붙여 소박하게 표현했고 십사처는 액자형이었다.
미사참여자는 60-70명 정도인데 시골이라 대부분은 고령자임은 우리 성당과도 다를 바가 없다. 미사야 어디서든지 같다지만 사실은 어디서도 같지 않다고도 볼 수가 있다. 강론, 분위기, 주보, 성가 등이 각각 다른 특색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
본당 신부님은 마치 성우의 음성과도 비슷한 톤으로 약간은 지루한 짧지 않은 강론이었지만 전체 분위기는 흐트려지지 않고 엄숙함을 유지했다.
미사를 마치고 성당 마당에서 멀리서 왔다고 인사들 드리고 일부는 강복까지 받았다는데, 우리가 성지 순례차 다닌다는 말을 듣고 옛 모습을 볼 수 있는 공소 하나를 추천해 준다. 용성성당 석동공소. 지금 시간이 11시. 시간적 여유가 있어 가보기로 했다.
용안 성당 석동 공소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 선상에 있는 용안 지역은 1882년 두동 공소,1890년 곰골(웅동) 공소,1895년 석동 공소,1896년 성당리 공소,1897년 두무다리 공소, 1898년 댁말 공소, 1899년 입산 공소, 1900년 하댁말 공소가 설립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신자들이 모여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신앙의 역사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익산군 용안면 석동리에 있는 석동 공소는 고산 되재에 살던 이 마리아 부부가 이곳저곳 방물장사룰 다니다가 1885년 석동에 초가집올 마련하여 복음의 씨앗을 뿌리게 되었다. 이 마리아는 방물장수를 하며 모은 재산을 공소를 위해 희사했으며, 좋은 표양으로 외인들을 권면하여 비공식 초가집 공소를 유지했다. 10년 뒤인 1895년 전주 성당(현 전동 성당) 보두네 신부에 의해 정식 공소가 설립되어 26명의 신자 중 13명이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를 봉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하여 석동 공소는 1912년에 공소 건물을 신축하여 봉헌하면서 신자가 늘어나 1938년에는 석동 성당으로 승격되기도 하였으나 1950년 다시 함열 성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1976년 석동 공소를 모태로 용안 성당이 설립되면서 용안본당 석동 공소로 이관되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현재도 공소에 성체도 모시고 있어 성체조배가 가능하다.
약 10여분 정도를 달려 도착. 마당의 성모님께서 반겨주신다. 마주 보는 두 채의 건물과 종탑으로 이루어진 공소이다. 작은 건물은 사제관이나 관리실로 사용되는 것 같다.
내부에 들어가면 벽면에 공소를 소개하는 안내문이 게시되어 있는데 여기 알 수 있는 점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이 건물이 지은 연대는 1905년이다.
▲지금도 24시간 성체조배를 하고 있다.
▲제단 앞의 성화는 100년이 된 명화이다.
▲성가대(聖歌臺)는 그동안 많은 성가단원들이 올라가서 지금은 휘어져 있다.
▲천장이 바티칸 교황청 시스틴 성당과 같이 원형 아치로 만들었다.
▲십자가의 길 14처는 1800년대 3,4조 가사체로 되어 고유한 곡을 붙여 사용했다.
. 이 중에서 특히 마지막 항인 십자가의 길 14처가 주목된다. 지금 우리나라에만 행해지는 ‘연도(鍊禱)’라고 하는 위령기도는 전통상례에서 곡을 하는 행태를 차용한 것이다. 이와 같이 옛날에는 십자가의 길 기도도 3·4조 가사체로 노래하듯 바쳤을 것이라고 추청 된다. 현재의 “어머니께 청하오니 ...”하는 기도말 대신 연도처럼 특유의 가락을 붙이는 이러한 기도문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이 공소에 게시된 14처를 전재한다.
가사체14처 기도문들
대부분 쉬운 말을 썼으나 간절함이 묻어난다. 특히 마지막 14처에 “내 마음은 주님의 무덤이기에 여기서 길이 편히 쉬시라”는 말은,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처럼 영원히 주님을 마음속에 간직하겠다는 기원이 아니고 무엇이랴?
1처 ‘하자’는 ‘瑕疵’ 곧 흠이나 결점, ‘바랍바’는 예수님과 함께 처형된 죄수 ‘바라빠’.
3처 ‘오리와산 동산’은 ‘올리브 동산’.
7처 ‘내진죄’는 ‘내가 지은 죄’
석동공소를 다 둘러보니 시간이 12시가 좀 못되었다. 이제 이번 성지순례는 끝났다. 다만 시간이 나면 답사하기로 한 미륵사지로 향했다. 사실 성지순례에 시간이 쫓기면 답사는 생략하기로 했는데 어제 여산 성지와 천 호성지 두 곳을 순례하고 그리고 오늘도 미사 전에 나바위 성지를 다 불러보았기에 미륵사지 답사가 가능하다. 일종의 보너스다. 천주교 성지에 웬 절이냐고? 절로 가는 것이 아니라 민족 문화유산을 찾는 것이다.
미륵사지에 도착하니 오후 1시가 조금 지났다. 미륵산과 미륵사지가 보이는 곳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소고기 비빔밥으로 때우고 미륵사지에 들어갔다.
彌勒寺址(미륵사지) (사적 제150호,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
미륵사지는 마한의 옛 도읍지로 추정되기도 하는 익산시 금마면 용화산(龍華山)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절터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무왕 때 왕이 왕비와 용화산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도중 산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절을 세웠다고 한다.
가람배치는 남북중심축선상에서 남에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을 배쳘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탑은 3기인데 가운데 목탑 좌우로 석탑이 있고 각 탑 뒤에는 부처를 모시는 금당이 자리한다. 이는 매우 독창적인 삼원병립식(三院竝立式) 배치이다. 금당의 바닥에는 빈 공간이 있는데, 이것은 바닥마루의 습기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폐사된 터에는 금년 4월에 해체 수리된 서탑(西塔)(국보 제11호)과 1991년도에 복원된 동탑 및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236호)와 잔재 석재들만 남아있지만, 미륵사는 백제 무왕의 왕권강화와 국력신장을 목적으로 조성한 백제 최대의 호국사찰로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존속되다가 조선 후기에 폐사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 이후 본격적으로 발굴조사가 시작되어 미륵사지 및 사자암 가람배치가 밝혀지고 금동향로(보물 제1753호)를 위시하여 1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어 삼국유사의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준다,
미륵사지 서탑은 높이 14.2m로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창건시기와 창건 동기가 명확하게 밝혀진 석탑이며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충실하게 잘 보여준. 원래는 9층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반파된 상태로 6층까지만 남아있었다.
1999년부터 해체 및 보수작업 및 착수하였는데 2009년에 1층 심주석에서 미륵사지의 창건 연대(무왕 40년 639)와 창건주(武王妃 佐平 沙宅積德의 딸)를 기록한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와 금동사리내·외호(金銅舍利內外壺)를 비롯해 각종 구슬 및 공양품을 담은 청동합 등 미륵사서탑사리장엄구(보물 1753호)가 나왔다.
사리봉안기의 출토는 어쩌면 우리 경주에는 일희일비랄 수도 있는데, 일희는 미륵사 창건연대가 639년이라 밝혀져 634년에 만들어진 분황사 모전석탑이 우리나라에서 가정 처음 만들어진 석탑임이 된 것이고, 일비는 백제 무왕의 왕비가 삼국유사에 나오듯 신라의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재상의 딸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중요한 자료의 발굴이 때로는 불편한 진실이 되기도 한다.
경내에 있는 국립익산박물관에 가서 출토 유물을 관람했다.
평소 보고 싶었던 백제문화의 국보급 유물로 눈을 즐겁게 하고 귀로에 올랐다. 어제 올 때의 역순이다. 5시 30분경 경주 도착.
마무리
첫 원거리 일정이라 부담도 되었지만 무난히 다녀왔다. 참여자들 다들 적지 않은 나이라 운전이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안전 운전을 한 라파엘 형제의 수고에 대한 감사를 보낸다.
어쩌면 여행이란 새로운 것을 보고 경험한다는데 몰입되어 다닐 때는 힘든 줄 몰랐다가 정작 다녀와서 여행 결과를 정리하는 것이 나로서는 매번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일주일 여행을 한다면 일주일 준비하고, 일주일 다니고, 정리하는 일주일이 또 필요하다. 이번 순례도 마찬가지다. 다녀와서 대략의 과정은 정리했지만 마무리할 말을 찾지 못해 꼬박 하루를 보냈다.
예수님의 제자 토마스처럼 제 눈으로 보고야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 순교 현장을 내 발로 걸어다니며 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면서도 자신의 목숨을 헌 신짝처럼 버리는 순교자의 마음의 실체를 무엇으로 정의하기 어려워서다. 이는 나바위 망금정에 올라서도 정작 아름다운 금강의 물줄기를 마음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것과도 같다.
이번 순례에는 가는 곳마다 유독 피에타 상이 많았다. 그래서 순교의 마음이란 자식의 죽음을 대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아닐까 하고 이번 순례를 마무리 짓고자 한다. 피 흘리는 아들 예수를 안고 지켜보는 그 참척의 고통과 눈물이 다름이 아닌 순교정신이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자식 사랑으로 치환할 때 순교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러자니 앞으로 성모상을 볼 때마다 환희와 영광보다는 고통의 신비만 떠올리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순교자의 행위는 어쩌면 오늘의 우리로 볼 때는 참 어리석게 비친다. 과거와 현재는 불문에 붙일 테니 앞으로만 믿지 않으면 풀어준다고 해도 이를 거부했다. 굳이 말로 배교한다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발 아래 있는 십자가를 밟기만 해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일단 목숨을 구하고 나서는 나중에 충분히 회개하고 헌신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얄팍한 마음이 우리들의 심정이 아닐까 한다.
농약이 독해질수록 병충해는 더욱 강해지듯 백지사니, 참형이니, 수장이니, 교살이니 별별 죽이는 방법을 써도 영생을 위한 끈질긴 생명력은 끝내 인멸 할 수 없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앞으로도 계속 탐구할 과제다.
인접 성지를 중심으로 짰는데도 이번 일정은 참 환상적이라고도 할 만큼 좋았다. 나바위 성지에서 김대건 신부의 영성으로 울려 퍼진 복음이 여산 성지에 흘러 들어가 무자비한 박해 끝에 많는 순교자를 내었지만 이들이 천호성지에서 그 주검들이 거두어져 영광스럽게 하늘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는 인과관계가 짜맞추 듯이 들어맞은 것이다.
어제 성당 성모상 앞에서 출발기도를 바쳤듯 오늘은 무사히 도착함에 대한 감사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함께 하지 못하더라도 이 글을 읽는 교우분들과 성지순례의 감동을 공유하고자 하며 앞으로도 많은 격려와 지지를 바란다.
주님
오늘 저희의 발걸음을 이끌어 주시고
모든 일에 함께하여 주심에 감사하나이다.
기뻤던 시간들, 힘들었던 순간들을
주님께 봉헌하며 청하오니
건강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가
가족과 이웃에게 주님의 참사랑을 전하게 하소서.
아울러 이 세상에 살면서도
늘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지상의 나그네로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굳은 믿음과 희망을 지니게 하시고
이 순례의 끝에 주님께서 미련하신 사랑의 천상 잔치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김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