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37. 라닥의 꽃 알치사원
라닥마을 지켜주는 3人의 보살상
<알치사원 슘첵라캉(대웅전에 해당) 전경>
레(Leh)에 도착한지 3일째 되던 2002년 4월13일. 라닥지역 불교미술의 꽃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알치(Alchi)사원으로 향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부산을 떨며 출발했다. 어질어질하던 머리는 적응됐는지 아프지는 않았다. 새벽의 라닥은 추웠다. 차 문틈으로 들어온 찬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몸이 절로 움츠려 졌다.
40분 쯤 달리니 어제 본 스피툭 곤파가 저 멀리 보였다. 스피툭 곤파를 지나 한 참 가다, 길 옆 계곡에 강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안내인은 인더스강의 상류라고 설명했다. 설산(雪山)의 눈이 녹아 강물이 됐겠지만, 물은 정말 탁했다. 우리나라 강물에 비교한다면 완전히 ‘구정물’(?) 수준이었다. 그러나 인더스 문명의 원천(源泉)인 강 아닌가. 차에서 내려 구불구불 흐르는 강물을 쳐다보았다. 무수한 인간의 삶과 수많은 동식물들의 생명이 이 강에 의지해 유지되고 있을 것이다.
황량한 산 속의 길과 협곡을 지나,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길을 차는 계속 달렸다. 점점이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거대한 산모퉁이를 돌자 곳곳에 살구꽃이 활짝 핀 마을이 갑자기 나왔다. 마을 사람들은 정말 순박한 인상이었다. 얼굴은 검게 탔고, 옷은 두툼한데, 외모는 우리나라 사람과 비슷했다. 살구꽃을 보니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 지고”라는 이호우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한국을 떠나 인도에 온지 벌써 1달 하고도 9일. 한국 음식도 그립고, 한국 사람도 그리워졌다. 그 때 살구꽃을, 황량한 히말라야 산중에서 살구꽃을 본 것이다.
마을 한 가운데 서있는 알치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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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치사원 슘첵라캉에 있는 관음보살> |
‘객수(客愁)’에 젖어드는 마음을 다잡고 인더스 강을 가로질러 20분 쯤 달리니 평화롭게 보이는 마을이 보였다. “저기가 바로 알치사원이 있는 마을”이라고 안내인이 말했다. 독일의 미술사가 로거 괴퍼가 지은 〈알치〉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사원. 어디서 본 듯한 마을이라 생각했는데, 책에서 보았던 바로 그 원경(遠景)이었다.
알치사원으로 접어드는 길은 마치 우리나라 시골 길 같았다. 다른 곤파들처럼 산 정상에 있지도 않고, 마을 한 가운데, 평지에, 그것도 주변에 많은 논밭을 낀 채 사원이 있다는 사실에 우선 의아했다. “이슬람 침입 이후 대부분의 곤파들이 산 정상이나, 함부로 쳐들어오기 힘든 곳에 건립하기 시작했다”는 몇일 전 안내인이 한 설명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을 한 가운데, 아주 평화롭게 서있는 알치사원을 보니, 뭔가 대단하다는 인상이었다. 안내인이 미리 연락했는지 - 우리를 알치사원에 안내한 사람은 환속한 라마승이었다 - 주지 ‘로브장 체왕’스님이 기다리다 반갑게 맞아 주었다.
간단한 몇 마디의 인사를 끝내고 3층 건물인 ‘슘첵 라캉’(우리나라의 대웅전에 해당)으로 갔다. 수백 년 동안 닫혀있던 비밀이 공개되듯,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슘첵 라캉의 문이 열렸다. 컴컴한 내부에 눈이 익숙해지길 기다렸다. 천장에서 빛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내부를 보기엔 부족했다. 익숙해진 눈을 돌려 내부를 보는 순간 갑자기 호흡이 멈춰졌다. 거대한 미륵보살상이, 사진에서만 보던 흙으로 빚은 거대한 미륵보살상(가운데)이, 왼쪽엔 관음보살을, 오른쪽엔 문수보살을 대동한 채 당당하게 서있고, 사방의 벽에 한 치의 틈도 없이 그림들이 빽빽하게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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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치사원 슘첵라캉에 있는 문수보살> |
세계문화유산 알치사원. 언제쯤 건립됐을까. 학자들에 의하면 800년 전 쯤 세워졌다. 주지 로브장 체왕스님은 ‘로차바 린첸 짠뽀’스님이 건립했다고 알려줬다, 그러나 〈알치〉에 의하면 1200년 경 ‘출트림’ 스님이 창건했다는 비문이 발견됐다고 한다. 로차바 린첸 짠뽀스님과 출트림 스님이 동일 인물인지는 주지스님도 모르는 것 같았다. 정면 맞은 편에 위치한, 거대한 감실 속에 안치된 미륵보살 앞으로 나가 삼배를 올렸다. 높이 4m, 흙으로 조성된 미륵보살의 온 몸에는 아름다운 그림과 채색 이외는 다른 것이 없었다. 상반신은 약간 검은 색을 띠며, 하반신엔 알 수 없는 찬란한 도형과 그림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팔굽 부분에서 팔이 다시 갈라져 전체 4개를 이루며, 목엔 뭔지는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목걸이 비슷한 것을 걸고 있었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 당당하게 힘을 주고 있는 발가락들, 날씬하면서도 당당한 체구 등 모든 것이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감살 좌우상하 벽엔 다양한 협시보살들이 미륵보살의 이상(理想)을 보여주듯 호위하고, 만다라 꽃으로 장식된 긴 줄이 하반신을 감돌아 팔위로 뻗어가는 모습이었다.
1200년경 건립된 세계문화유산
가슴 가득 기쁨을 간직한 채 왼쪽에 자리한 관음보살상으로 발길을 돌렸다. 당당한 체구를 자랑하는 관음보살의 전신은 백색이었다. 하얀 피부위에 미륵보살과 비슷한 외양을 했는데, 하반신엔 다양한 도형과 그림들이 치마를 이루는 모습이었다. 팔은 역시 팔굽 분분에서 4개로 갈라져 아래위로 향하고, 손바닥엔 ‘진리의 수레바퀴’인 법륜(法輪)이 보였다. 만다라 꽃으로 끈을 이룬 긴 줄이 하반신에서 시작돼 팔 굽 부분으로 이어지고, 감실의 상하좌우엔 보살세계의 이상을 표현한 듯 신비한 그림들로 가득했다. 어떠한 설명도 보살상을 제대로 묘사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과연 라닥지역 불교미술의 꽃이라고 할만하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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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치사원 슘첵라캉에 있는 미륵보살> |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는 문수보살에게로 나아갔다. 외양은 다른 두 보살과 거의 대동소이했다. 피부는 검은 색을 띠고, 하반신엔 역시 다양한 도형과 그림이 그려진 치마를 입고 있고, 상반신은 잘록한 허리와 넓게 벌어진 가슴을 가진 그런 모습이었다. 팔굽 부분에서 팔은 상하로 갈라져 4개를 이루며, 손바닥엔 법륜이 그려져 있었다. 문수보살이 봉안된 감실의 상하좌우에 그려진 그림들이 문수보살의 지혜를 한층 돋보이게 만들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옮겨 슘섹 라캉 옆 건물인 ‘로자와 라캉’에 참배하러 갔다. 조각상은 없고 알치사원을 창건했다는 로차바 린첸 짠뽀 스님과 부처님이 사방 벽에 가득 그려져 있었다. 찬찬히 살폈다. 손으로 만져보고 싶었다. 그러나 보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 생각하며 꾹 참았다. 바로 옆 건물인 ‘체명 라캉’에 들어갔다. 4면에 문수보살상이 모셔진 기둥이 있었는데, 감탄만 연신 터져 나올 뿐이었다.
‘불교미술의 꽃’ 미륵·관음·문수보살상
당우(堂宇)들을 일별하고 밖으로 나오니 따뜻한 햇볕이 사원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경내를 벗어나 사원 바로 옆을 흐르는 인더스강변으로 갔다. 강물은 여전히 더러웠다. 그래도 좋았다. 강물을 보며 “왜 하필 미륵보살 관음보살 문수보살을 모시고 있을까”를 생각했다. ‘지혜’(문수보살)가 있고, 다른 생물을 아끼는 ‘자비심’(관음보살)과 미래에 대한 ‘희망’(미륵보살)도 있어야만 척박한 히말라야 산중에 그나마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세 분의 보살을 모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알치사원과 밭가는 농부>
인더스강변에서 상념에 빠져있는데 어디선가 “이랴”하는 소리가 들렸다. 알치사원 주변 논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소몰이하는 소리였다. 천천히 걸어 일하고 있는 농부들에게 다가갔다. 알치사원 옆에서 열심히 일하는 농부들과 소는 마치 가족처럼 보였다. 우리나라 농촌처럼. 사람과 동물의 얼굴엔 근심이 없어보였고, 그들을 키워주는 자연 역시 아무런 걱정이 없어 보였다. 그 사이에서 알치사원의 살구꽃이 미소 짓고 있었다.
인도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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