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문학파/
우선, 1920년대 카프에 반발하여 1930년대 나타난 것이 시문학파입니다.
카프는 3.1운동의 실패에 의한 좌절과 민족의식의 자각의 분위기에서 발생했다고 고시면 되죠. 시대현실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켜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대립, 살인과 방화, 충동적인 해결방법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급주의적이라고 하지요.
카프계열의 문학운동이 일제의 검열과 사상 탄압에 점차 그 세력이 약화됩니다. 그 동안 카프계열의 시가 보여줬던 선전 선동 위주의 전투적 시와 도식적이고 이념 지향적인 경향에 대한 반발을 느껴왔던 사람들이 이때를 맞이하여 새로운 방향의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바로 순수시죠. 1930년대의 시단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박용철, 김영랑, 정지용 등이 중심이 된 시문학파의 등장입니다. 이들은 시에서 일체의 이념적, 사회적 관심을 배제하고 오직 아름답고 섬세한 언어의 조탁과 그로 기인한 서정성만을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지나치게 개인의 내면 세계에 몰입되어 언어의 조탁에만 관심을 가졌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이들에 의해 우리의 현대시가 언어와 형식면에서 한 차원 성숙해졌다는 점은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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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파
(카프 : 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1922년 이적효, 이호, 최승일, 심훈, 송영, 김영팔 등에 의해 조직된 행동적인 좌익운동체 <염군사>와, 이듬해 김팔봉, 박영희, 안석주, 김형원, 이익상, 이상화 등에 의해 조직된 무산계급문학운동 단체 <파스큘라>가 합동하여 1925년 8월 박영희, 김팔봉, 이호, 김영팔, 이익상, 박용대, 이적효, 이상화, 김온, 안석주, 송영 등을 발기인으로 하여 결성되었습니다. 곧 이어서 이기영, 한설야, 박세영, 박팔양 등이 가입, 당시 가장 강력한 예술단체로서 계급주의적인 좌익문학을
~곧 이어서 이기영, 한설야, 박세영, 박팔양 등이 가입, 당시 가장 강력한 예술단체로서 계급주의적인 좌익문학을 지휘하였고, 1926년 1월 기관지 <문예운동>을 발행하여 예술성보다 계급의식을 중요시하고 작품 창작보다 이론전개에 더 치중하였답니다. 1927년 일본에 있던 조중곤, 김두용, 홍효민, 한식 등이 귀국, 종래의 미온적이던 문화주의를 비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전국대회를 열고 보다 급진적인 슬로우건을 채택, 기관지 <예술운동>을 발간했습니다. 이 무렵 염상섭, 양주동 등의 소위 국민문학파 및 김화산의 아나키즘과 논전을 벌였고, 자체 내에서도 내용과 형식, 창작방법론 등을 중심으로 논쟁을 전개합니다. 1930년경 일본에서 귀국한 임화, 권환, 김남천, 안막 등이 카프의 불셰비키화를 부르짖어, 카프의 사상적 내분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1931년 6월 제1차 검거 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이 시작되고, 이듬해 10월 박영희가 퇴맹원을 제출함으로써 이른바 전향기에 돌입, 1934년 5월 제2차 검거 사건으로 80여 명이 경찰에 체포되지 마침내 이듬에 정식으로 해체되었습니다.
그런데 경향파 소설이 양은 많은 데 반하여 문학적 수준에서 그리 뛰어난 작품은 별로 없다는 점이 아쉬운 점입니다. 즉,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2분법으로 단순하게 대립시키고 거의 모든 작품에서 살인과 방화 등으로 결말을 맺었는데, 이것은 너무 도식적이고 매너리즘에 빠진 접근법이었던 거죠. 감정과 열정에 의한 충동적 해결보다는 좀더 진지하고 현명한 사리판단에 의한 해결방식이 바람직한데도 말이죠. 예를 들면 최학송의「홍염」에서 아버지가 빚 대신 자기의 딸을 뺏어다 첩으로 삼은 중국인 지주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를 도끼로 살해함으로써 모든 것이 해결됐노라고 외치며 결말을 맺었어요. 그러나 그로써 모든 일이 해결될까요? 방화범에다 살인범이 된 아버지는 이제 발뻗고 편히 지낼 수 있을까요? 그 지역 치안을 담당하던 사람들은 낮잠 잘까요? 그 이후의 일은 한층 복잡하고 불리하게 돌아갈 거예요. 이처럼 경향파 소설들 대부분이 좀더 진지하고 진전된 계급 문학으로 인정받기에는 아직 모자람이 많았어요. 그러나 고난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잘못된 현실을 바꾸려는 열정은 잊어서는 안되겠죠. 주요 작가로는 주요섭, 최서해(최학송), 박영희, 조명희 등이 있습니다/
시문학파
1930년에 창간한 《시문학》의 주요 시인 박용철(朴龍喆), 김영랑(金永郞)과 정인보(鄭寅普), 변영로(卞榮魯), 이하윤(異河潤), 정지용(鄭芝溶)이 참여하였고, 뒤늦게 김현구(金玄鳩), 신석정(辛夕汀), 허보(許保)가 참여하여 순수시 운동을 주도하였다. 《문예월간》《문학》《시원(詩苑)》에 참여한 문인들까지 포함시키기도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시문학》 동인만을 말한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반발하여 문학에서 정치색이나 사상을 배제한 순수 서정시를 지향하였다.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등은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 조화에 의한 자유시를 썼으며, 특히 시는 언어예술임을 내세워 언어의 조탁에 힘쓴 결과 주목할만한 성과를 보였다.
김영랑의 시는 음성구조와 의미구조 사이의 조화와 긴장을 통한 창조적 리듬과 김소월 시보다 한 걸음 발전된 현대성을 느낄 수 있으며, 정지용의 시에서는 은유와 심상을 1920년대 시와는 질적으로 다르게 의식적으로 다듬어서 참신한 감각을 보였다. 시문학사에서 시문학파는 현대시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http://www.kumigo.com/~kos007/hyundaesi2/si3.htm
① 시문학파
시문학파는 작품을 이데올로기를 위한 수단으로 보는 프로 문학 운동에 대항하여, 이데올로기가 배제된 참다운 시, 즉 순수한 서정시를 쓰고자 하는 일군의 시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들이 주장한 순수 문학이란 문학을 주제 의식으로부터 해방시켜 문학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이들은 시어에 대한 자각을 구체화하여 시가 마땅히 표현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가장 적당한 표현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탐구하기 시작함으로써 시적 언어를 가다듬는 시인의 역할을 중시하였다. 박용철은 평론으로 이들 시문학파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했으며, 김영랑은 실제적인 작품 활동을 통해 시문학파의 시가 우리 시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하였다. 이들은 언어를 매우 엄격하게 선택하고 참신한 감각적 표현을 위한 방법론을 탐색했으며, 세련된 기교를 사용하여 한국시에서 진정한 의미의 순수시의 영역을 구축하였지만 지나치게 문학의 형식적 측면에 치우쳐 시대적 현실을 도외시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출처http://www.hongkgb.x-y.net/stream/stream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