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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주의와 운명의 신화
많은 사람들이 정치 및 사회생활에 대한 깊은 이해는 인간 역사에 대한 고찰과 해석에 근거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말하자면 사회과학자나 철학자는 일반인들보다는 높은 위치에서 사물들을 개관해야 한다고들 한다. 이러한 입장에 서는 사회과학자나 철학자는 개인을 인류 역사의 발전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도구로 간주하며, 역사의 무대에서 정말로 중요한 배우들이란 위대한 민족이거나 그 민족들의 위대한 지도자이거나, 위대한 계급이나 위대한 이념이라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공연되는 연극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의 법칙을 발견하려고 한다.
이것이 역사주의라 불리는 태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다. 역사주의의 핵심적 원리란, 역사는 특수한 역사적 법칙이나 진화적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며, 우리가 이 법칙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운명을 예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주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단순한 형태는 선민사상에 의해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상은 유신론적 해석, 즉 신을 역사의 무대에서 공연되는 연극의 작가로 해석함으로써 역사를 이해하려는 시도의 하나이다. 이런 사상에서는 역사적 발전의 법칙이 신의 의지에 의해서 세워진다. 이것이 유신론적 역사주의와 다른 형태의 역사주의를 구별 짓는 차이점이다. 자연주의적 역사주의는 역사발전의 법칙을 자연의 법칙으로 취급하며, 정신적 역사주의는 역사발전의 법칙을 정신적 발전의 법칙으로 취급하고, 경제적 역사주의는 다시 경제적 발전의 법칙으로 취급한다. 즉 역사발전의 법칙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여러 종류의 역사주의가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선민사상이 사회생활의 부족적인 형태에서 성장해 나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부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부족의 절대적 중요성에 대한 강조라고 할 수 있는 부족주의는, 많은 형태의 역사주의 이론에서 발견되는 한 요소이다. 이제는 부족주의라고 할 수 없는 근대적 역사주의도 여전히 집단주의의 요소를 유지하고 있다. 선민사상이 갖는 또 하나의 요소는 역사의 궁극적 결과에 대한 확신이다. 그러나 이 목적은 먼 미래에 놓여 있는 것이므로, 이런 역사의 목적이 어느 정도 단정적으로 설명된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먼 길을 가야만 한다. 그리고 그 길은 멀 뿐만 아니라 구부러지고 상하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길이다. 따라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역사적 사건을 해석의 도식 아래 집어넣을 수가 있게 된다.
유신론적 역사주의인 선민사상은 종교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주의의 한 예증으로 제시된 것이다. 이 사상을 하나의 예증으로 삼은 이유는 이 사상의 중요 특성을 현대의 가장 중요한 두 역사주의 이론인, 파시즘의 역사철학과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종주의에서는 선택된 민족이 선택된 인종으로 대체되며,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에서는 선민이 선택된 계급으로 대체된다. 두 이론 모두 역사적 예측의 기초를 역사적 해석에 두고 있다.
2. 헤라클레이토스
역사주의의 원리를 보다 분명하게 도입한 최초의 그리스인은 헤시오도스이다. 그의 역사의식은 비관적이다. 그는 인류가 황금기로부터 후퇴하여 육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몰락하고야 말도록 되어 있다고 믿었다.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 나타난 여러 역사주의 사상은 플라톤에 와서 절정을 이룬다. 그는 역사주의에 있어서는 특히 헤시오도스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으나, 가장 중요한 영향은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였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의 관념을 발견한 철학자였다. 그 당시까지만해도 동양적 관념의 영향을 받았던 그리스 철학자들은 세계를 물질적인 것들이 재료가 된 하나의 안정되고 거대한 건축물로 보았다. 그것은 사물들의 전체, 즉 우주였다. 그들은 철학이나 물리학을 자연의 탐구, 즉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원재료에 대한 탐구라고 보았다. 어떤 과정들에 대한 고찰이 있었다 해도, 과정들은 근본적으로는 정지 상태에 있다고 보이는 구조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오늘날 우리 대부분조차도 자연스럽게 보는 이 접근법은 천재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해서 바뀌게 되었다. 그는 세계를 하나의 건축물이 아닌 하나의 거대한 과정으로, 사물의 총계가 아닌 사건이나 사실들의 전체로 보았다. 그의 철학의 좌우명은 모든 것은 유전하며 그대로 정지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발견은 그리스 철학의 발전에 장기간 영향을 미쳤다. 그 발견의 위대성은 가공할 만한 것으로 일컬어져 왔고, 그 영향은 모든 것이 흔들리는 지진의 영향과 비교되어 왔다. 자연뿐 아니라 윤리와 정치적 문제까지도 다룬 최초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사회적 혁명의 시대에 살았다. 그리스의 귀족적 부족정치가 새로운 민주주의 세력에 몰려 물러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전승된 바에 의하면 헤라클레이토스 자신의 지위는 에페소스 왕실의 후예였지만 그는 그의 형을 위해 자신의 지위를 포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혁명 세력의 조류가 밀려오는 것을 헛되이 막으려고 했던 귀족주의자들의 대의명분을 지지했다.
그의 철학의 특성을 이루는 변화의 강조는 그로 하여금 액체이건 고체이건 기체이건 간에 모든 물질들은 불꽃과 같은 것, 즉 그들은 사물이라기보다는 과정이며, 그들 모두는 불의 변형이라는 이론을 낳게 했다. 고체인 흙은 단지 변형의 상태에 있는 불일 뿐이며, 액체까지도 불이다. 이렇게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사물을 불꽃으로, 연소 같은 과정으로 환원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하나의 법칙, 하나의 적도, 하나의 이성, 하나의 지혜를 깨닫는다.
이런 철학으로부터 역사주의적 특성을 드러내는 이론이 나타난다. 전형적인 역사주의자로서 그는 역사의 심판을 도덕적 심판으로 받아들였다. 마지막 단편에 나타나 있는 가치의 상대주의에도 불구하고, 그는 근대적인 어떤 관념들과 매우 유사한 명성과 운명과 위인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부족주의적이고 낭만적인 윤리를 전개했다. 전체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은 고대 부족사회의 붕괴에 대한 무상의 감정을 표현한 것임에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
3. 플라톤의 형상 이론
플라톤은 헤라클레이토스가 겪었던 것보다 더 불안정한 정치적 투쟁과 전쟁의 시대 속에서 자랐다. 전승된 바에 의하면, 플라톤의 부계는 아티카의 마지막 부족 왕인 코드로스의 후손이었고, 모계는 아테네의 입법가인 솔론의 혈통이었다. 이런 가문의 전통으로 플라톤은 처음부터 정치활동을 열망하였지만, 젊은 날의 골치 아픈 경험으로 정치활동을 단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일생 동안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계속 관여했다.
플라톤은 그의 선배 역사주의자들이 했던 것과 똑같이, 역사적 발전의 법칙을 세움으로써 그의 사회적 경험을 종합했다. 이 법칙에 의하면 모든 사회적 변화는 타락이나 부패 또는 퇴보였다. 이 기본적인 역사적 법칙은 우주적인 법칙의 일부분이다. 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이 플라톤은 역사에서 작용하는 힘을 우주적인 힘이라고 보았다.
플라톤과 헤라클레이토스 사이에는 유사성이 대단히 많지만, 헤라클레이토스와는 반대로 플라톤은 역사적 운명의 법칙, 부패의 법칙은 인간의 도덕적 의지로 깨뜨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확실히 부패로 치닫는 일반적인 역사적 경향과 모든 정치적 변화를 억제시킴으로써 정치 면에서의 더 심한 부패를 방지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는 변화하지 않고 파멸하지 않는 최선의 완전국가를 건설함으로써 부패와 악이 없는 사회를 이루고자 했다. 이렇게 하여 플라톤의 사회철학과 정치철학에서는 역사주의와 사회공학이라는 두 가지 태도가 전형적으로 결합된다. 말하자면 전경에는 상당히 두드러진 기술적 요소를 놓고 후경에는 전통적인 역사주의적 특질들을 정교하게 펼쳐서 그들을 결합시키는 것이다.
플라톤의 정치적 목적은 첫째로 사회혁명과 역사적 부패로 나타나는 헤라클레이토스적 무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둘째로 그는 이 목적이 역사적 전개의 일반적 추세에 휩쓸리지 않는 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셋째로 그는 그의 완전한 국가의 모형이나 원형을 먼 옛날 역사의 여명기에 존재했던 황금시기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세계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패해 간다면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보다 완전한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국가란 나중에 생기는 국가들의 선조나 시존 같은 것으로, 나중에 생기는 국가들은 이 완전하고 가장 훌륭한 이상적 국가의 퇴화된 후손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국가철학에서 타당했던 것은 그의 형상 이론이나 이데아 이론에가지 확대될 수 있다.
형상 이론은 플라톤 철학에서 적어도 세 가지 서로 다른 기능을 갖는다. 먼저 그것은 가장 중요한 방법론적 고안이다. 그것은 순수한 과학적 지식을 가능하게 하고, 변화하는 사회의 문제에 대한 탐구와 정치과학의 수립을 가능케 한다. 또한 그것은 매우 필요한 변화 이론과 쇠퇴 이론에, 그리고 특히 역사에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다음으로 그것은 사회 영역에서 어떤 종류의 사회공학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준다. 즉 그것은 국가의 형상이나 이데아를 아주 닮아서 도저히 쇠퇴할 수 없는 최선 국가의 설계를 제시하기 때문에, 사회변화를 저지하는 방안을 만들 수 있도록 한다.
4. 변화와 정지
플라톤은 자신이 체험한 변화하는 사회를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역사주의적 사회학을 아주 세밀하게 발전시켰다. 그는 현존하는 국가는 불변하는 형상이나 이데아의 복사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국가의 형상이나 이데아를 재구성하고자 노력했고, 적어도 그것에 흡사하게 닮은 사회를 그리려고 노력했다. 그는 그의 재구성을 위한 자료로, 옛 전통과 함께 그리스에서 그가 찾아볼 수 있었던 가장 오래된 사회생활의 형태인 스파르타와 크레테의 사회제도에 대한 분석 결과를 활용했다. 플라톤의 사회학적 위대성은 사회부패의 법칙에 관한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사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풍부하고 치밀한 그의 관찰 내용과 놀랍도록 정확한 그의 사회학적 직관에 있다고 할 것이다.
플라톤은 정치적 퇴화의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네 가지 정치체제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완전한 국가 뒤에, 명예와 명성을 추구하는 귀족들이 지배하는 명예정치체제가 오고, 두 번째로 부유한 문벌이 지배하는 과두정치체제가 오며, 다음으로 방종을 뜻하는 자유가 지배하는 민주정치체제가 탄생하고, 마지막으로 국가의 종말 단계인 참주정치체제가 나타난다. 이와 같이 플라톤은 역사를 사회타락의 역사로, 마치 어떤 질병의 역사인 것처럼 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진화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역사적 시대의 체계를 수립코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루소가 재생시켰고, 콩트와 밀, 헤겔과 마르크스가 유행시켰는데, 역사시대에 관한 플라톤의 체계는 당시에 이용할 수 있었던 역사적 증거에 비추어 보면 현대 역사주의자들의 어느 체계에도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플라톤은 그의 최선국가에서 세 계급, 즉 수호자들과, 그들의 무장한 보조원이나 군인, 노동계급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력을 갖고 있고 교육받은 지배자들의 군벌성분과, 무력도 교육도 없이 지배받는 짐승 같은 인간의 성분이 있을 따름이다. 왜냐하면 수호자라는 것은 별개의 성분이 아니라, 보조원의 서열에서 승격된 노력하고 현명한 군인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배계급만이 정치적인 권력과 함께 온갖 특권을 향유하고 있으므로, 국가를 보전하는 문제는 오로지 지배계급의 내면적인 단합을 유지시키는 문제로 축소된다. 이 지배자들의 단합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훈련과 심리적 영향으로, 그렇지 않으면 주로 불화를 초래할 수 있는 경제적 이해요인을 제거함으로써 유지된다. 말하자면 지배계급에 철저한 공산주의를 도입하는 것이다. 모든 재산은 공유재산인 만큼 처자식에 대해서도 공유권이 해당되어야 한다. 지배계급의 어느 누구도 자기 자녀나 자기 부모를 확인할 수 있어서는 안 된다. 가족은 파괴되거나, 또는 차라리 모든 군벌계급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처자식의 공유제도로도 지배계급의 모든 경제적 위험을 막는 것은 불충분하다. 빈곤과 마찬가지로 풍요를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
플라톤의 최선국가에서 보조원과 지배계급의 양육이나 교육은 무기휴대와 마찬가지로 계급의 상징이며, 따라서 계급의 특권이다. 양육과 교육은 공허한 상징이 아니라 무기와 같은 지배계급의 도구로, 지배의 안정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말하자면 강력한 정치적 무기로, 인간가축을 통솔하고 지배계급을 단합시키는 데 유용한 수단으로만 양육과 교육은 논의되는 것이다.
5. 자연과 관습
자연적 법칙과 규범적 법칙의 구별은 사회과학의 탐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우리들 뇌리 속에 분명하게 정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렵고 파악하기 힘든 구별이다. 자연적 법칙은 태양과 달, 사계절의 계속을 설명하는 법칙과 같이 자연의 엄격하고 고정불변한 규칙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규범적 법칙은 어떤 행위양식을 요구하거나 금지하는 규범으로 인간에 의해서 제정되고 변경될 수 있는 규칙이다.
이 두 법칙은 이름만 같은 법칙일 뿐이지 공통되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소박한 일원론처럼 자연적 법칙과 규범적 법칙이 아직 구별이 안 되는 단계가 있는가 하면, 이 단계는 벗어났지만 사실과 결단을 완전히 구별하는 비판적 이원론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중간 단계들도 있다. 이 중간 단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로는 (1) 생물학적 자연주의, (2) 윤리적 또는 법률적 실증주의, (3) 심리학적 또는 정신적 자연주의를 들 수 있다.
생물학적 자연주의는 도덕적 법칙과 국가의 법률은 자의적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런 규범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영구히 불변하는 어떤 자연의 법칙들이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평등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강자 지배의 반평등주의를 옹호하는 데도 사용되어 왔다. 윤리적 실증주의는 규범을 사실로부터 도출해야 한다는 데는 생물학적 자연주의와 일치하지만, 실증주의적 존재하는 규칙 외에는 어떠한 규범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현존하는 규범만이 선의 표준으로 가능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윤리적 실증주의는 보통 보수적이었고 또는 권위주의적이기도 했다. 정신적 자연주의는 앞의 두 관점을 결합한 것으로, 인간의 진정한 자연적 본성으로부터 규범들을 도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은 이 정신적 자연주의를 최초로 공식화한 사람으로, 그는 소크라테스의 영혼의 권리, 즉 정신이 육체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가르침에 영향을 입었다. 플라톤은 영혼이 다른 사물에 앞서며, 그렇기 때문에 본래부터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는 개인의 영혼을 국가의 세 계급인 수호자, 전사, 노동자에 대응시켜, 이성, 기개, 동물적 본능의 세 부분으로 나눈다.
그는 국가를 인간 영혼과 비슷한 것으로 보았다. 특히 국가의 질병, 즉 그 통일성의 분열은 인간 영혼 내지는 인간 본성의 질병에 대응한다. 국가 쇠퇴의 모든 전형적 단계는 인간의 영혼, 인간의 본성, 인간 종족의 각 쇠퇴 단계에 대응함으로써 발생한다. 그리고 이런 도덕적 부패가 종족적 부패에 근거하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플라톤의 자연주의에서 생물학적 요소는 결국 그의 역사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그의 역사주의 이론을, 변화하는 가시적 세계는 단지 불변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쇠퇴해 가는 복사품에 불과하다는 환상적인 철학적 원리에서 이끌어냈다. 그러나 역사주의적 비관주의와 존재론적 낙관주의를 결합시키려는 이 순진한 시도는 면밀히 검토되었을 때, 난관에 부딪친다.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사회가 그 구성원들의 인간적 본성에 의존한다는 이론과 함께 생물학적 자연주의를 채택했고, 이것은 신비주의와 미신에까지 이르러 생식에 관한 사이비 합리주의적 수학 이론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6. 전체주의적 정의
플라톤의
플라톤의
이러한 플라톤의
사회정의에 관한 플라톤의
플라톤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동일시했다. 그리고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개인주의를 극력하게 혐오했고, 이를 분쇄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혐오는 플라톤 철학의 근본적인 이원론에 뿌리박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플라톤의 정의론은 그 시대의 평등주의적, 개인주의적, 보호주의적 경향을 극복하고 전체주의적 도덕이론을 전개함으로써 인종주의의 주장을 재확립하려는 의식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그는 평등주의를 논증으로써 논파하는 대신, 인도주의적 감정을 자연적으로 우월한 주인종족의 전체주의적 지배노선에 성공적으로 동원했다. 그리고 이러한 선전의 덕택으로, 그의 반인도주의적인 태도는 인정 있고, 이타적이고, 기독교적이라고 끊임없이 이상화되어 왔던 것이다.
7. 지도력의 원리
8. 철인왕
9. 탐미주의, 완전주의, 유토피아주의
10. 열린사회와 그 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