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면 풍호학원의 군인 선생님
나는 공군으로 입대해 강릉 비행장에서 근무했다. 일등병 시절
부터 병장으로 전역할 때까지 근무가 아닌 B번 날을 쉬지 않고
나눔의 자원봉사에 열정을 쏟았다. 나는 그때를 내 인생 가운데
가장 뜻 깊고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봉사는 도움을 받
는 쪽보다 도움을 주는 봉사자 스스로의 마음이 더 행복하다는
사실을 참여자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당시 나는 강릉시 강동면 풍호고등공민학교의 물리와 화학교사
로 봉사했다. 내 생애 가장 오랜 기간, 그것도 지속적으로 누군가
를 위해 봉사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날들이었다. 풍호고등공민학
교는 가정 형편상 정규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한 동면 지역 150명
의 소년 소녀가 중학교 1,2,3학년 과정을 배우고 있었다. 그 학
교에선 학생도 교사도 명찰을 달고 있어야 했다. 전국 어느 학교
에서도 볼 수 없는 아주 특이한 진풍경이라고나 할까! 그때 우리
는 15명의 교사 전원이 공군 병사였기에 봉사에 참여할 때에도
반드시 명찰을 달아야 했던 것이다. 선생인 나는 하늘색 플라스
틱 바탕에 흰색 글씨의 일병 홍기업이었고 남학생들은 흰색 천에
재봉 박음질로 이름을 새겨 달았다. 또한 여학생은 탈부착이 가
능한 플라스틱 명찰을 달고 다녔다. 아이들은 내 계급장을 볼 때
마다 졸병 선생님이라고 놀렸다. 그때마다 나는 한창 유행이던 ʻʻ그
래도 그게 어디냐고 신나는 홍일병ʼʼ으로 김일병 노랫말로 되받아
치며 선생의 체면을 지키려 애썼다. 하지만 아이들이 손톱 밑의
꼬질꼬질한 때를 못 볼 리 없었겠지!
군용 더블 백의 환호!
아이들은 교과서를 구입할 형편이 못 되었다. 때문에 교사들이
시내 학생들이 쓰던 헌 교과서를 얻어다 주어야 했다. 나는 헌책
구해주는 일만은 어느 교사들보다 실적이 우수했다. 특별한 재주
가 있었다기보다 교사들 대부분이 외지 출신이었지만 나는 강릉
토박이였던 까닭이었다. 친인척도 학부형도 은사 선생님도 내게
는 모두 든든한 백그라운드였다.
새학기 때면 B번 근무일마다 시내 중학교를 찾아 다녀야 했다.
선배 병사들이 그런 궂은일을 전적으로 강릉 출신인 내게 떠넘겨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헌책 수집실적하나만은 내가 짱이
었다. 군대는 까라면 까야하는 속설을 남자라면 누구나 그 뜻을
충분히 알고 있듯 고참이 시키는 일은 곧 지상명령이었다. 나는
더블 백을 메고 다니며 모교인 경포중학교를 찾았고, 그것도 모
자라 은사 선생님에게 매달려 풍호고등공민학교 학생들의 딱한
사정을 설명하며 교과서 확보작전을 벌였다.
헌 교과서는 정말 무거웠다. 군용 더블 백에 교과서를 짊어지
고 남대천 다리머리의 부대를 오가는 진중버스 정류장까지 걸어
야 하는 길은 멀고도 힘들었다. 고참은 앞에서 맨몸으로 그냥 걸
어가고 일등병 졸개는 허리가 휘는 완전 짐꾼이었다. 교실에 들
어설 땐 팔과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교과서를 짊어진 나는 산타크
로스 할아버지의 마력을 능가했다. 환호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나
는 그동안 힘들었던 일들은 금세 잊을 수 있었고 감격으로 가슴
이 벅차올랐다. 그렇게 확보된 헌 교과서는 아이들의 미래를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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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는 꿈과 희망이었다. 학교마다 채택한 교과서가 서로 달라
구해온 헌책 가운데 그나마 숫자가 제일 많은 교과서를 중심으로
가르쳐야 했다. 그래도 우리는 1년 동안을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어 마냥 즐거웠다.
대부분의 헌 교과서는 낙서로 얼룩져 깨끗한 책을 받은 아이
는 함박웃음을 지었고 책갈피가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낙서투성
이의 책을 받은 아이의 표정은 울상이었다. 앳된 소녀들은 작은
것에도 깊은 상처를 받았고 그런 것들도 내가 죄인이 되어 달래
야 했다.
교복은 더더욱 맞춰 입을 처지가 못 되었다. 당시 교복은 일반
인들과의 차별성은 물론 학생들만의 자존심이었고 일관성을 유지
시킬 수 있는 바로미터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런 때문에 선생은 교복도 얻어 입혀야 하는 임무까지
부여되었다. 아이들 교복도 시내 각 남녀 중학교 졸업식장을 돌
아다니며 모아야 했다.
3년을 두고 정규 중학교 과정을 똑같이 배우지만 풍호고등공민
학교 학생들은 정규 중학교로 인정받지 못했다. 반드시 검정고시
에 합격되어야만 비로소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
할 수 있었다. 검정고시는 한여름에 치러지고 있었다. 정규중학
교 학생들은 즐거운 방학을 맞이하지만 남다른 꿈을 키워야했던
풍호의 아이들은 무더위 속에서 고시준비에 더더욱 몰두해야 하
는 안쓰러운 모습을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풍호학원 병장 교무주임!
내가 고참 병장이 되자 학교 교무주임을 맡았다. 교무주임은
학교에 기거하며 교과과정을 관리하는 임무였다. 부대 내에서 비
상이 걸리거나 정규훈련 상황으로 인한 외출통제에 대비한 전담
학교관리자다. 부대 훈련이 있어도 교무주임은 학교에 남아 수업
을 지도할 수 있도록 조치해준 공군 부대장의 배려를 아이들은
참으로 고마워했다.
교무주임은 그런 상황이 발생할 때는 전 과목수업도 마다할 수
없었다. 교무주임일 당시 나는 학생들의 진학지도는 물론 학교지
킴이 노릇까지 해냈던 만능 선생이었다. 그럴만한 실력이 되었느
냐고 묻는다면 ʻʻ글쎄ʼʼ지만 학생들은 천재적 재능을 지닌 선생님으
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여 화학, 수학, 과학 등 이과 과목은 자
신이 있었지만 영어, 국어, 음악, 미술은 참고서를 뒤져가며 가르
치느라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그럴 땐 1~2학년은 자습, 3학년
은 아슬아슬한 줄타기 수업이었다. 수업 말미엔 아이들이 질문하
면 어쩌나 하고 가슴을 졸이고 있었던 내 속 마음을 누군들 짐작
이나 했을까. 그때의 그런 시간들은 왜 그리도 길던지….
아마 교무주임을 맞고 있던 그해 여름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아
이들에게 딱 한번 종아리를 때린 적이 있었다. 자습을 시켰는데
검정고시 준비로 머릴 싸매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인 아이들이 장
난을 치며 교실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든 모습을 그대로 보아 넘
길 수 없었다. 남녀 학생을 가리지 않고 종아리를 3대씩 때렸는
데 그 후가 문제였다. 치마를 입고 다니던 여학생들의 장단지가
하나같이 피멍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덜컥 벌을 주긴 했어도 특
히 여학생들의 피멍 자국은 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부모
님들의 항의도 큰 걱정이었다. 하지만 어느 부모도 내게 항의 하
지 않아 정말 다행스러웠다. 피멍 자국은 무려 열흘이 넘도록 사
라지지 않고 있었다. 막상 때려놓고도 한편으로는 겁도 나고 얼
마나 가슴이 아팠던지! 아무리 못나도 제 자식은 예쁘게 보이기
마련인데, 비록 가난했어도 훌륭한 부모님들이었다. 아마 아이들
의 부모님은 가슴앓이에 앞서 하나같이 제 자식이 벌을 받을만해
서 받은 것으로 여기셨던 것 같다. 선생을 고소하고 교실에서 행
패를 부리기도 하는 지금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몰매를 맞
거나 경찰서 조사과에서 초라한 몰골로 조사를 받고 있을 테지.
그래도 그때 종아리를 맞은 여학생들은 중년을 넘어선 나이에도
만날 때마다 허연 장단지를 걷어 보이며 항의 아닌 항의로 생떼
를 쓰기도 한다. 그때 얻어맞는 바람에 다리가 굵어지고 미워졌
다며 곱디곱던 시절로 원상회복 시키라는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얼굴을 자라목처럼 쑤셔 박아야 한다.
고참들의 서릿발 트집!
생각만 해도 ʻ으흐흐ʼ 소름이 끼친다. 공군의 내무반 군기는 알
아줘야 한다. 괜히 트집을 잡아 저녁마다 원산폭격의 힘든 기압
으로도 성이 차지 않으면 몽둥이 찜질이었다. 그것도 비일비재
로. 문제는 빳따를 얻어맞은 다음날은 엉덩이가 쓰라려 쩔뚝이는
걸음걸이를 감춰야하는 일이었다. 선생님이 빳따나 맞고 다닌다
면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에게 그런 모습
부터 감추느라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고약한 고참은 제대만 해
보라며 마음속으로 벼르기도 했었다. 사회에 나가 만나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하지만 그런 비좁은 속마음은 군 제대로 헤어
지는 순간부터 그저 봄날의 눈처럼 녹아버리는 것이다. 지금도
그때의 고참들을 만나지만 조인트를 까고 빳따를 치던 선배들이
오히려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연유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공군 레이더 사이트에 근무한 우리는 24시간 근무하고 2일을
쉬는데 그 쉬는 날을 이용해 돌아가며 자원봉사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부대에 복귀할 때마다 고참 병사들의 기압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일등병 때는 상병이, 상병 때는 병장이 애를 먹였
다. 괜히 청소상태가 나쁘다고 트집을 잡아 몽둥이를 휘둘렀고
졸개가 식기당번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외부에 나간다며 워커
발로 조인트를 까는 것이었다. 그렇게 얻어맞고 기압을 받아도 우
리 15명의 자원봉사 교사들은 단 한 번도 아이들의 수업을 건너뛰
거나 빼먹은 적이 없었다. 정말 열정으로 봉사했었다. 쓰라린 엉
덩이를 아이들 몰래 쓸어내리며 웃는 얼굴로 화학방정식을 가르쳤
고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내 수업을 듣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이고 그 아이들은 나를 존경하는 학생들이었다. 선생의 똥
은 개도 안 먹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그래도 선생은 훌륭한 제자들
을 거느릴 수 있는 존경받는 직종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자랑스러운 제자들!
그렇게 어려운 상황을 딛고 일어선 가운데 대학 강사는
물론 현재 KBS의 부장급 책임PD로 활약하고 있는가하면 서울지
역 증권사 지점장과 중견 세무공무원도 있으며, 시인으로 등단해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는 등 풍호학원을 거쳐 간 학생들 중에는
정말 자랑스러운 인물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고향을 떠나지 않은
제자들은 마을 발전의 주춧돌이 되었고, 여학생들은 교사로, 간
호사로 또는 자녀들을 훌륭히 키운 전업주부로 안착해 있어 그들
이 정말 자랑스럽고 대견하다. 그때를 돌아보면 볼수록 참으로
보람 있는 나날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 시절을 내 가슴에 아주 소
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