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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벗이 되어>: 이 달에 만난 사람(6)
김용준 고려대 명예 교수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金容駿 교수는 1927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화학공업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농공대에서 유기합성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화학공학과 교수, 대한화학회 유기화학분석회회장, 과학사상연구회 회장,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장 및 발행인, 계간지 『과학사상』 편집인 등을 역임하였다. 金교수는 성천아카데미 미래강좌에서 <인간성의 과학>을 강의해 오고 있다. (대담 김홍근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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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 자연과학자이면서도 철학이나 종교를 함께 추구해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나야 유기화학자이니까 평생 유기화학을 연구했죠. 하지만, 돌이켜보면 만일 일제시대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유기화학을 전공하지 않았을 겁니다. 일제 말에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징병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쪽으로 가게된 거죠. 일본사람들은 나라가 망하는 순간에도 어떻게든 식민지의 자연과학도까지 아껴서 군대에 안 보내는 정책을 썼던 것이죠. 지금 일본이 다시 부흥한 원동력 뒤에는 이런 일들이 숨어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로서는 만일 그런 시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철학이나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게다가 나는 40대 후반에서 50대 후반까지 10여 년간을 해직교수로서 학교를 못나가게 된 적이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 때 1차 해직을 당하고, 전두환 정권 때 2차 해직을 당했던 거죠. 어쨌든 나는 전공이 아스피린 같은 약을 만드는, 즉 유기합성을 하는 실험과학자인데, 학교에서 해직되어 실험실을 뺐기고 실험을 못하게 되니까 별안간에 할 일이 없어졌어요. 빤한 교수 월급으로 모아둔 돈도 없고 하니까 번역도 하고, 책도 써보고 하면서 해직기간을 넘겼죠. 정말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요즘은 사단법인 학술협의회 이사장으로 주로 활동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두 번째 해직되었을 때인 1980년에 대우재단이 복지재단에서 학술재단으로 전환되면서 인문, 사회, 자연과학 분야에서 각각 자문위원을 구하였습니다. 그때 이사장이던 이용희 선생께서 저를 만나보자고 하여 제가 대우재단과 관계 맺게 되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대우재단이 후원하는 학술협의회에서 제가 일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대학에서 나오게 되어 유기화학 실험을 못하게 되었을 때, 그 계기로 어떤 다른 공부를 시작하셨습니까?
난 터놓고 하는 이야기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예배당에 나간 모태신앙이고, 본의였건 아니건 간에 자연화학을 전공했고 하니까, 아무래도 과학과 종교가 서로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한쪽으로는 기독교 신앙 내에서 자랐고, 다른 한쪽으로는 과학적 사고에 철저했고, 거기다가 해직 같은 인생의 어려운 일도 당하고 해서 그런 것들의 의미를 많이 생각해보았죠.
신앙을 가지고 있는 많은 과학자들이 모두 나름대로 그 문제를 피할 수 없겠지만, 선생님에게는 좀더 근본적인 문제로 다가왔군요.
종교라는 것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데에는 참 문제가 많죠. 종교가 뭔지는 저도 사실 모릅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이라고 하면 보수적인 신자들에게는 거의 절대적인 존재이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이성적으로 종교를 봅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굉장히 문제가 많습니다. 일종의 샤머니즘에 너무 물들어 있어요.
하지만 역사상으로 사람이 이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머리에 신적인 존재에 대한 개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얼마 전 홈즈 롤스톤이라는 미국의 교수가 영국의 기포드 렉춰에서 학술 강연한 것을 기초로 하여 책을 내었는데, 그 제목이 재미있게도 3G 즉
일반적으로 인류사 최대의 사건은 17세기 과학혁명으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표면적으로 얘기하면 그렇죠. 과학혁명만큼 인류의 생활과 문화에 변화를 가져다 준 사건은 없지 않아요? 그런데 17세기 과학혁명도 따지고 보면 서구 역사에서 15세기 르네상스, 16세기 종교혁명에 이어진 하나의 사건이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16세기 종교혁명의 퓨리터니즘이 과학혁명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 과학혁명이 인류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인간의 사고 기반이 완전히 바뀐 거죠. 그전에는 모든 사고의 중심이 신이었는데, 과학혁명이 나오면서 밤하늘의 천체현상 등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만유인력 같은 메커니즘 즉 물리적 법칙에 의하여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과학혁명의 주역인 뉴턴이 고전역학의 패러다임을 수립하여 물질의 인과관계를 물리법칙으로 해명한 것은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모든 것의 원인이 신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가, 이제는 원인과 메커니즘과 결과가 일관되게 일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인간의 사고방식이 합리성에 기초하게 된 것이지요.
과학혁명은 그 이후로 어떻게 발전되었습니까?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인과율이 18세기에 와서 프랑스에서는 계몽주의로,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으로 발전했는데, 그때부터 사람들의 머리에 ‘진보’라는 새로운 사상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진보’라는 아이디어가 당연하며 매우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인류 역사상 18세기에 서구에서 겨우 생겨나기 시작한 신 개념입니다. 결정론적 인과율과 진보가 합쳐서 근대성 혹은 현대성으로 번역되는 모더니티를 만든 것 아니겠어요. 그게 심하게 흘러가서 과학만능주의가 되기도 했구요.
그때 형성된 모더니티란 가치가 지금 우리들의 사고방식도 지배하고 있는 것이군요.
아마 앞으로도 우리가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 산업화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여전히 인간의 두뇌를 지배할 것이에요. 인공위성을 쏘고 하는 것은 모두 뉴턴적 패러다임에 따른 일입니다. 다만 예전에 신의 이름으로 논의되던 가치관이 말소되면서 기계론적으로만 뻗어나가고 더불어 생활이 유복해지니까 사람들이 점점 기고만장하게 된 거죠. 함석헌 선생이 재미있는 말씀을 했어요. “‘어때, 조금 뵈줄래?’ 하고 원자 세계의 비밀을 열어 쬐끔 보여주니까, 까불다가 그만 원자탄이 터지고 만 거요.” 그 분은 과학자가 아니지만, 역시 날카로운 직관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아요. 20세기 초반에는 양대 세계대전과 원자탄의 투하로 혼이 났는데, 지금도 유전공학이다, 분자생물학이다 하고 있는데, 또 한 번 혼나지 않겠어요?
그러면 모더니티에 대한 회의는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20세기에 들어와서 아인스타인의 상대성 원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발표되어 뉴턴의 이론이 흔들렸죠. 하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세 사람의 이론은 서로 영역이 달라요. 뉴턴의 물리학이 미치지 못하는 광속의 세계를 다룬 것이 아인스타인이고, 하이젠베르크가 다룬 것은 10의 마이너스 8승 밀리미터 이하의 미시 세계입니다. 말하자면 아주 큰 세계와 아주 작은 세계에는 뉴턴의 고전역학이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거죠. 그래서 뉴턴의 패러다임만이 과학이다 하는 믿음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혼돈이라는 영역까지 다루기 시작하니까, 모더니티의 근간인 결정론적 인과율이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진보라는 믿음은 원자탄의 폭발과 함께 날아갔구요.
20세기 후반기에는 생명과학이 이슈가 되어왔지 않습니까?
이제는 물리학적인 방법 가지고 생명까지 파헤치기 시작했는데, 앞으로 참 문제가 많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나 다른 선진국이나 할 것 없이 과학정책이 참 맹목적인 면이 많아요. 그래서 또 크게 혼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원자탄처럼요?
아니, 이제는 원자탄 정도가 아니죠. 예를 들어 어느 대도시에 원자탄이 떨어졌다고 해도, 몇백만 명 죽는다 하는 걸로 끝나면 그만입니다. 그 뒤 히로시마처럼 3-40년이 지나면 다시 회복되는 거죠. 하지만 생물학과 생태학적으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어요. 지구의 역사를 보통 45억 년으로 잡고 있는데, 인간이 나온 것은 불과 5만년 전후, 기껏 거슬러 가도 10만년 전을 넘지 않거든요. 와인버거가 <최초의 3분간>에서 아주 재미있는 말을 했지 않아요? 지구사를 타임 스케쥴로 24시간에 비유하면, 인류가 나온 것은 밤 11시 59분 몇 초예요. 그러니깐 생명이 몇 초도 안 되는 인간이란 존재가 까딱하면 지구 전체를 망칠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런 걱정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습니까?
내가 61년에 미국에 가서 65년에 나왔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환경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것을 거의 듣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60년대 말이 되면서 환경문제가 급작스럽게 부각되었죠. 72년에는 스톡홀름에서 유엔환경회의가 열리고, 이어 좋은 책들이 줄줄이 나왔습니다. 그런 책들이 요즘 젊은이들에게 읽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이 안타깝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책들이 나왔습니까?
이제는 절판이 되어 구하기 어려울 겁니다. 예를 들면, 나는 영어로 읽었지만 르네 듀보와 바바라 워드 공저의 <오직 하나뿐인 지구>가 급히 번역되어 <월간 중앙>의 부록으로 나왔지요. 출판하겠다는 출판사가 없어서 그 뒤 다시 책으로 나오지 못했죠.
르네 듀보의 <내재하는 신>은 선생님이 번역하지 않았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당시 미국 공보원이 금액을 지원하여 탐구당에서 문고판 탐구신서 시리즈로 나왔습니다. 또 같은 저자가 68년에 낸 <인간이라는 동물>도 제가 번역했는데, 그것도 참 좋은 책입니다. 지금은 모두 구하기 어렵게 되었지만요. 코울더의 <테크노폴리스>도 그 무렵에 나왔지만,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60년대 말에 세계 지식인들이 모여 환경문제를 같이 걱정하기 시작했는데, 그 로마클럽의 제 1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72년에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인류의 위기>인가 하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삼성문고에 들어가 있지요. 1992년에 로마클럽의 20번째 보고서가 나왔으니, 그 동안 참 많은 일을 한 거죠. 지금은 그 과제를 NGO들이 떠맡아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환경단체도 열심히 일을 하시는데, 운동 차원에서만 얘기를 하는 외에 좀 더 깊이를 갖추었으면 좋겠어요.
그 깊이를 위한 과학철학에 관한 책을 좀 소개해 주시죠.
과학학, 즉 과학의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획을 그은 사람은 토머스 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미국에서 69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그가 보는 과학혁명은 17세기의 것만이 아니라 복수複數라는 것입니다. 그는 과학의 역사성을 뚜렷이 보여주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과학이라고 하면 절대 요지부동한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았지요. 요즘 서구에서는 이런 유의 연구가 꽤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 전 서울대 대학원에 과학사 협동과정이 생겼고, 고려대에서도 대학원 철학과에 과학학이라는 협동과정이 생겼으며, 전북대에는 학부에도 그런 과정이 생긴 것 등 관심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리아 프리고진도 소개해 주시죠.
그 분이 노벨상을 탄 것이 77년이고, 대표작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는 84년에 나왔습니다. 그는 심지어 노벨상 잘못 주었다는 소리까지 들은 사람입니다. 뉴턴적 패러다임에서 보면 프리고진은 비주류의 사람이지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뉴턴적 패러다임의 주류 속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고 까지 그쪽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는 바로 그 패러다임 밖에 있는 것을 파헤쳤으니까, 상당히 혁신적인 사람이지요. 프리고진은 우리나라에도 한 번 왔습니다. 옛날에는 비과학으로 치부했던 것을 과학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 그의 큰 업적입니다.
결국 과학의 영역을 확장시킨 것이로군요.
그것이 바로 내가 프리고진에게 한 질문입니다. 제가, “선생님 학설을 보면 과학이란 컨셉트가 확장되어 넓은 의미에서 일부 철학까지도 포함하게 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 새로운 개념의 과학이 정립되어야 장차 21세기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하고 물었지요. 그 분은 원래 비가열 열역학이 전공인데 겸손하게도, “카오스적인 현상들을 수식적으로 정립하는 것이 자기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 질문에 공감은 가지만 뭐라고 답변할 수는 없다”고 말하더군요.
의식의 과학에 양심까지 포함한다는 뜻이군요.
마침 최근 내가 사 가지고 와서 읽고 있는 책이 미국 브라운 대학의 석좌교수인 심리철학자 김재권 박사의 <마음의 철학(Philosophy of Mind)>이란 책인데, 역시 현 세계 지성계에선 마음이 굉장한 관심거리이지요. 또 존 호간의 최신 저서인 <감춰진 마음(Undiscovered Mind)>이 굉장히 재미있어 저도 근 한 달에 걸쳐 완독했는데, 이 책은 지금 미국에서 굉장히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도 결국 마지막에 가선 “나는 신비주의자다. 자연과학 가지고는 마음을 알 수 없다.”고 말해요. 그렇지요. 하다못해 정신분열증의 원인 하나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정신병 치료는 단지 약물치료에 그치고 있는 형편이지요. 전 세계적으로 마음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매우 많은데, 그들이 접근하는 길은 모두 다르지요. 그만큼 쉽게 풀리기 어려운 거죠.
지금 서구 일부에선 동양정신을 연구하는 것이 붐을 이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거야 달리 도리가 없잖아요. 서구 문명의 전개과정으로는 당연한 결과이지요. 하지만 나의 불만은 동양을 연구하는 서구과학자들은 많은데, 과학을 연구하는 동양철학자가 없다는 점입니다. 한국에서도 자연과학 하는 사람들이 동양철학을 잘 모르지만, 그보다는 동양철학자 중에서는 자연과학 지식이 있는 사람이 아주 드물어요. 하이데거는 노자를 꽤 많이 이해했지 않습니까? 앞으로 이런 학제적 연구가 많이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봅니다.
신과학운동은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나는 요즈음에는 그 말 좀 되도록 안 쓸려고 그럽니다. 제가 바로 미국에서 발생한 ‘신과학’이란 말을 한국에서 가장 먼저 접한 그룹 중의 한 사람입니다. 신과학이란 쉽게 말하면 ‘과학의 새로운 물결(New Wave of Science)’이란 뜻입니다. 그걸 줄여서 ‘뉴 사이언스’라고 부른 거죠. 그런데 지금은 전혀 이상한 소리하는 망상가들이 그 말을 남용하고 있고, 심지어 신학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이 쪽에 미치다시피 하는 경우가 있어서 제 입장에서는 참 어이가 없습니다. 과학의 차원에서 신과학을 이야기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엉뚱하게 다른 곳에서 신과학이라고 하면서 들고 나오니 할 말이 없지요.
한국에선 프리조프 카프라가 대표적인 신과학운동가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제가 78년에 미국에 갔다가 LA 대학서점에서 카프라의 첫 책인 <물리학의 도(Tao of Physics)>를 샀지요. 그리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읽어보니까, 물리학자가 물리학과 동양철학을 연관시키는 시도는 가상한데, 너무 억지로 끼어 맞추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그는 이 책으로 너무 유명해졌죠. 그 뒤에 나온 책인 <전환점(Turning Point)>과 특히 <탁월한 지혜(The Uncommon Wisdom)>를 읽어보니까, 이 양반이 굉장히 노력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단순히 머리로서가 아니라 생활 속의 체험을 통해 신과학이란 문제에 접근했구나 하는 점을 알고서, 그를 재평가했습니다. 그도 한국에 한 번 오면 좋겠는데, 그의 최신작 <생명그물(Web of Life)>이 한국에서 번역되어 나올 때, 그런 말도 있더니 그게 잘 안되었나 봐요.
그의 생각은 한마디로 '전체론적(holistic)'인 것으로, 언젠가 하나의 새로운 시도로 평가를 받는 날이 오겠죠.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비행기 안에서 읽은, 그의 첫 책 서문에 나오는 어떤 신비체험 장면이죠. 바닷가에 햇살이 내려 쬐는 모습에서 힌두교 쉬바 신의 우주적 춤을 느꼈다는 것이죠. 아무래도 그는 고에너지 학자니까 그런 문제에 민감했겠죠.
한국에서 선생님 외에 과학의 인간화, 철학화를 위해 노력하는 분들은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서울대 물리학과의 장회익 선생을 먼저 얘기해야 되겠죠. 그분은 물리학이 전공인데, 대표적인 저서로는 <과학과 메타과학>과 <삶과 온생명>이 있습니다. 독자적인 사상을 담은 좋은 책들이죠. 그 외에는 서울대 사범대 물리학과의 소광섭 교수가 있죠. 그분은 원불교 신자면서 상대성 이론의 권위자입니다. 그 분도 여러 권의 저서를 냈습니다. 어쨌든 과학자 쪽에선 독자적인 사상을 구축한 이런 분들이 계신데, 철학자 쪽에서 과학을 깊게 다룬 분은 별로 보이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말은 좀 쑥스럽지만, 제 아우인 동양철학자 김용옥이 그런 면에서는 서양 쪽도 좀 아는 편인데, 내가 볼 때는 그도 과학 쪽이 약합니다.
과학과 사상의 접합점 역할을 하고 있는 계간 <과학사상>은 어떻게 하여 탄생하였습니까?
함석헌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씨알의 소리> 발행인까지 맡았는데, 월간 잡지를 맨주먹으로 하려니까 참 혼났죠. 3년간을 맡아서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다가 함 선생님의 주위 분들 사이에서 자꾸 잡음이 들려서, 함 선생님 같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생각해보니, 그래 그냥 조용히 덮어두었을 거다 하는 생각이 났어요. 그래 그만 두었죠.
그리고 나서 어떤 기회에 우연히 지금은 돌아가신, 범양사 회장이던 금곡 이성범 선생을 만나 뵈었죠. 생전의 금곡 선생은 우리 고유의 선비정신을 이어오신 모델 같은 분이었습니다. 그 분과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인간과 과학을 다루는 잡지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래서 내가 그저 안 될 겁니다 하고 말씀드렸죠. 이제 막 <씨알의 소리>를 만들다가 그만두어 실정을 아는데, 만일 하시려면 계간으로 일년에 네 번 내는데 1억이 들고 그렇게 5년을 꾸준히 버텨야 하니 약 5억원을 손해 본다 치고 내시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금곡 선생께서 좋은 책만 나온다면 한 번 해보자고 그러시더라구요. 그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성범 선생이 발행인이시고, 나는 편집인이 되었죠. 그래 1년이 지나니까 딱 1억원이 손해나더라구요. 그렇게 3년을 했는데, 적자의 폭이 안 좁혀지더라구요. 그래서 이회장님께 제가 3년을 했으니, 이제는 말을 한 번 갈아 타보실 때가 되었다고 말씀드렸죠. 그 이후로 김용정 선생이 맡았는데, 고생을 참 많이 하고 계시죠. 지금까지 통권 32호가 나온 <과학사상>은 우리나라에서 독보적인 잡지이고, 또 재단이 있어서 뒷받침을 튼튼히 하니까 참 다행한 일이죠. 단지 자립하는 것이 앞으로의 숙제입니다.
선생님의 스승은 누구이십니까?
나야 뭐 화학 이외에는 다 함석헌 선생께 배웠죠. 6‧25 나기 전 내가 학부 2학년 정도였을 때였는데, 종로 2가 YMCA 앞을 지나다가 보니까 ‘성서강의 함석헌’이라고 써 붙여 놓았더라구요. 그래 들어간 거예요. 그 분 나이가 48세 정도였을 때인데 벌써 그때부터 두루마기에 수염을 기르셨더라구요. 내 눈에 선생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할아버지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변 후 내가 청주농고에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함 선생님이 청주로 내려오셔서 자주 들리셨습니다. 그래서 가까이서 계속 모시게 되었죠. 지금 살아계시면, 꼭 100세가 되는군요.
함선생님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좌우간 평생에 이만한 인격을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은 네겐 특별한 행운이었다고 생각하죠. 그분 전집이 20권이나 있으니까, 앞으로 많은 연구가 나올 것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참 어려운데......, 원래 그 천성은 매우 부끄러워하는 분이거든요. 이렇게 맞대고 말씀을 나누노라면, 대개 그냥 ‘글쎄’ 하고 마시지요. 그래 내가 붙인 별명이 ‘글쎄’예요. 당신은 스스로를 ‘들의 피리소리’라고 하지만, 그 독서량과 학문의 깊이가 참 대단합니다. 항상 제도권 학자보다 야인으로 남기를 희망하셨지요.
그 분이 남겨놓으신 말 중에서 내가 늘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함 선생님이 80세가 넘어 만년에 하신 노자老子 강의 시간에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강의 중 혼자 자문자답을 하시는데 이러시는 거예요. “누가 내게 ‘꼭 한마디로 제자들에게 남겨놓으실 말이 있으시면 그것이 무어냐’고 물어오면 글쎄 난 어떻게 대답할까?” 그러고는 하시는 말씀이 “기다려라.” 이거예요. 함 선생님이 좋아하는 시가 롱펠로의 ‘생의 찬가’이거든요. 나도 그 시를 외우는데, 그 시의 마지막이 “수고하고 기다리는 걸 배우자.”입니다. 내가 해직 당했을 때 한 번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그때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씀을 해주시더라구요. 그걸 수첩에 적어놓고 늘 가지고 다니며 들여다보곤 하죠. “때가 맞지 않고 천하에 궁하게 되면 돌아가 삼가며 기회를 기다려라.”는 말입니다.
“기다려라” 하는 말이나, “글쎄” 같은 말들을 잘 새겨들으면 함 선생님의 어떤 탈속한 경지와 예언자적인 진면목을 알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대개 그런 분들은 은둔적인데, 그분은 또 포효하는 면도 있거든요. 구국선언 같은 것을 할 때는 정말 대단하죠.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이 철저하게 인간적으로 삶의 질을 구현하셨어요. 함 선생님이야말로 어디 나만의 스승이겠어요. 모두의 스승이었지요.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안 마지막 1년간은 거의 몸을 내놓으시더군요. 말씀하실 기회가 있으면 사양하시지 않더라구요.
함 선생님은 스승 다석 유영모 선생과 같은 날에 나서 기일(忌日)은 하루 차이가 아닙니까?
글쎄 그것 참 묘하지 않습니까? 두 분은 11년 차이인데, 생신날은 3월 13일로 똑 같고, 다석 선생은 2월 3일에 돌아가셨고, 함 선생님은 2월 4일에 돌아가셨죠. 함 선생님 2만날 때 내가 댁으로 가서 밤을 샌 일이 있는데, 그때 선생님이 밤에 그래프를 하나 그려 가지고 우리들 앞에 나오시더라구요. 당신 평생의 정신적 연령성장을 그리신 거예요. 완만한 상승 곡선이 두 번 수직으로 치솟아 올랐는데, 첫 번째 브레이크가 당신이 다석 선생을 만난 날이고, 두 번째가 우치무라 간조를 만난 날이라고 설명해 주셨어요. 그게 생생히 기억납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어디 선생님도 그래프를 한 번 그려보시죠. (웃음) 다석 선생도 직접 만나보셨죠?
그럼요. 종로 YMCA에서 목요강좌를 하실 때, 몇 년을 착실히 나가 말씀을 들었습니다. 선생님 모시고 성환 농장에도 가서 같이 밤을 샌 적도 있습니다. 또 백운대 올라갔다가, 그때 함 선생님도 같이 계셨는데, 일행이 길을 잃어서 자하문 밖 어느 돌밭에서 함께 밤을 새웠어요. 유 선생님이 말씀을 시작하시면 거의 밤을 새우세요. 그러면 함 선생님도 꼭 옆에서 떠나지 않고 앉아 계셨어요. 나는 앉아 있다가 졸기도 하고 그랬죠.
유영모 선생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마디로 얘기하면, 시대의 기인이죠. 자기 생활에 그렇게 철저했던 분이 글쎄 있을 수 있어요? 일일일식(一日一食)도 유 선생님한테서 함 선생님으로 옮겨진 것이었죠. 또 소위 간디의 브라스마 찰리아 즉 부부가 성생활을 끊는 해혼(解婚)도 실행하셨죠. 유선생님은 꼭 걸어서 다니셨는데, YMCA의 현동완 총무가 세계일주를 하고 오니까 하시는 말씀이, “현총무는 세계일주를 했지만, 난 늘 걸어서 일주를 하고 있지.” 그러셨어요.
말년에 함 선생님과 유 선생님 사이가 좀 이상해졌는데, 지금 생각해도 함 선생님이 아주 끝까지 용서를 못 받으셨지, 아마.
내가 유 선생님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도 있어요. “선생님이 정주의 오산고보에 선생으로 또 교장으로 계셨는데, 그때 육당이나 춘원 등 많은 사람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춘원의 글은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선생님이 보시는 춘원은 어떻습니까?” 그랬더니 한참 묵묵히 계시더니 한 마디 밖에 안 하시더라구요. “그저, 재주가 좀 있습죠.” 그 한 마디에 딱 끊기더라구요.
성환 목장에서 밤샐 때, 어쩌다가 나를 붙잡으시고 밤하늘을 가리키며 성좌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정말 대단하더라구요. “내가 중학교 밖에 안나왔는데, 중학교에서 물리선생을 해요.” 하시면서 별자리를 설명하는데, 막힘이 없더라구요. 주무실 땐 웬만큼 추워도 담요 하나 딱 덮고, 널빤지 위에서 깊은 잠에 빠졌죠. 당신 말대로 중학교 밖에 안 나오신 분이 동서고금에 막히는 것이 없었고, 또 그렇게 철저한 삶을 실천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죠.
거기에 비하면 함 선생님은 로맨티스트죠. 함 선생님을 보면, 아마 원효대사가 저러지 않았을까 하고 혼자서 생각해보죠. (웃음)
국내외에서 과학도로서의 선생님은 누구입니까?
노벨화학상도 타고 퀘이커 교도로서 노벨평화상도 탄 라이너스 폴린이라는 분이 계셔서 생전에 얼굴이라도 보러 한 번 찾아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왓슨이 쓴 <이중나선>을 잃고 정이 딱 떨어졌어요. 노벨상까지 탄 분이 젊은 왓슨을 방해 공작하는 모습이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되었어요. 그래서 노벨상이 헛거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안동혁 선생이 참 훌륭하신 분이었죠. 독서의 범위도 넓고, 자신의 철학도 있으신 분입니다. 그분께 화학과 함께 독서하는 것을 배웠죠.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지만, 두문불출하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저서가 얼마나 됩니까?
딱히 저서라고 내세울 것은 없지만, 이것저것 하면 한 열 권쯤 되겠네요.
제일 애착이 가는 책은요?
제 생각을 가장 잘 요약해 놓은 게 솔출판사에서 나온 <갈릴레오의 고민>이란 책이죠. 그 동안 쓴 글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뽑아 모은 것이니까 개중 낫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앞으로 시간이 되는대로 ‘과학과 종교’라는 테마로 정성껏 책다운 책을 한 번 써보고 싶은데, 글쎄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역서도 있지 않습니까?
대여섯 권 될까요.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는 공들여 번역한 책입니다. 학교에서 막 쫓겨 나온 뒤라 정말 열심히 번역했죠. 주간 조선에서 연재되어 제게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도 아끼는 책입니다. 원저는 불어로 되어 있어서 사양했는데, 그래도 내용을 잘 아는 과학자가 번역해야 한다고 해서 영어책에서 번역을 하였습니다.
가장 영향 받은 책은 어떤 것입니까?
그야 당연히 함 선생님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입니다. 원 제목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입니다만, 그것을 읽고 내가 한국 사람이 된 거죠. 그 외에 내가 번역하면서 감명을 받은 <부분과 전체>가 내용이 참 좋습니다. 또 제이콥 브로노프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란 책 역시 지금 읽어도 좋구요. 역시 노력을 기울인 책들이 좋은 거죠.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 독회를 하지 않으셨습니까?
과학사상연구회 멤버들과 내 아우인 김용옥도 함께 근 1년 넘게 읽어나갔는데, 참 어려운 책입니다. 늘 하는 소리인데, 지금은 유명하게 되었지만 김용옥이 내 아우가 아니면 재미있는 젊은이가 있다 하고 구경을 잘 하겠는데, 그만 내 아우니까 구경이 안 돼요. 6남매 중 내가 제일 위고, 그 애가 내 큰 아이와 동갑으로 20년 차이죠. 내 막내 동생도 공부를 하느라고 했으니, 활용을 해야겠죠. 원래 집중보다 발산이 요란하니까, 항상 조마조마하죠.
한국 지식사회의 장래를 전망해 주십시오.
함 선생님 글 중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명문이 있는데, 지금은 반대로 너무 경박한 시대이니까 즉흥적이고 인기 위주로 매사가 돌아가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나보고 꼭 한마디 하라면, “생각들 좀 하며 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음 세기에 기대되는,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습니까?
아마 앞으로는 함 선생이나 유영모 선생 같이 시대의 모델 같은 전형적인 인간상이 나오기는 힘들 겁니다. 일제시대 안창호니 남강이니 월남이니 하는 맥이 이어져 나오는데, 앞으로는 그런 영웅주의적인 인물은 거의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시대에 맞춰 다양화된 인물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이제 숨어있는 데가 없으니까요. 그래도 시대를 꿰뚫는 정신, 그런 짜이트가이스트(Zeitgeist)는 도리 없이 없을 수가 없겠죠.
나라가 못나서 해방 이후 지금까지 교육 등 모든 것이 엉망인데, 그래도 한국 사람들이 똑똑해서 세계 온갖 곳으로 나가 훌륭한 학위를 따고 돌아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 젊은이들을 학대하는 세상이 된 게 가장 안타깝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세상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 어려운 과정을 거치고 나온 인재들을 보따리 장사를 시키면서 부려먹고 있는데, 어느 정권이 되던 저 힘을 결집해나간다면 뭔가를 이룰 수가 있을 거라고 봐요.
역대 정권이나 지금 정권도 국가의 장래라고 할까 미래의 비전이 도대체가 없지 않아요? 눈앞에 있는 이익만 좇고 정권유지만 하려고 하지, 거시적인 안목이란 조금도 없는 것 같아요. 다행스럽게도 곳곳의 지방대학까지 젊은 일류학자들이 다 들어가 있어서 그 힘을 어떻게 모으느냐 하는 과제가 문제입니다. 기초를 너무나 무시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라는 것을 어떻게 보십니까?
진리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진리가 진리 아니게 됩니다. 요즘의 종교분쟁이 다 그런 것 아니겠어요? 제 생각에 진리는 상식이 될 것 같아요. 상식이 제일 좋은 진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
함 선생님에게서 냉수욕을 배워 많이 했는데, 요즘에는 동내 목욕탕에서 냉온탕을 자주 하지요. 함 선생님이 이사하신 쌍문동 댁의 목욕탕을 가보면 욕조 두 개가 나란히 있는데, 아마 댁에서도 더운 물 찬물을 받아놓고 냉온탕을 번갈아 하셨나봐요. 냉수욕도 사실은 함 선생님이 유영모 선생님께로부터 배운 건데, 유 선생님 말씀이 “냉수욕하지 않는 사람은 나하고 관계없다.”고 하셨어요. 매일 아침 약 20분간 심호흡하는 것도 함 선생님에게서 배운 것이지요.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등산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