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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최고의 경건이고 최상의 거룩이다. 최선의 도이다.
그러나 순종이 능사는 아니다. 분명 순종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떠한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그럴까?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것일까?
순종이 능사가 아닌 이유는 세 가지 정도가 있다.
첫째 '될까?'로 순종한다. 즉 의심이다. '한들 되겠어?'란 식으로 하면 그것은 순종인가? 두 마음으로 하는 것은 외식이다. 좋다! 두 마음도 좋다. 다만 정직하라. 그 두 마음까지도 하나님께 고백하라. "하나님 솔직히 이렇게 한다고해서 될 것 같지 않습니다. 부디 믿음없음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렇다. 요단강에서 일곱번 몸을 씻는다고 그 행위자체로 나병이 고침받는게 아니다. 하나님은 그 행위의 진위여부를 보시는 것이다. 의심하지 말고 믿자! 믿음은 자신의 의심과 싸우는 행위이다. 그것이 바로 요단강에서 일곱번 씻으라는 것이다.
둘째 '감히 내가 누군데?'로 순종한다. 아주 잘난 사람이다. 대단한 성공을 이룬 사람이다. '알았어. 그까지것 해주지뭐!'란 식으로 하면 그것은 순종인가? 순종은 결코 높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순종은 낮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즉 교만이다. 내 방법, 내가 알고 있는 지식, 그로 말미암는 지혜가 앞서면 순종할 수 없다. 심지언 순종도 자기 식으로 한다. 자기 마음대로 한다. 겸손은 군말없이 하라는데로 하는 것이다. 겸손은 할 수 있는 위치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렇다. 요단강에서 일곱번 몸을 씻는다고 그 행위자체로 나병이 고침받는게 아니다. 하나님은 그 행위가 당신의 말씀과 정확히 일치하는가를 보신다. 교만하지 말자. 겸손은 자신의 방법(지혜와 지식)과 싸우는 행위이다. 그것이 바로 요단강에서 일곱번 씻으라는 것이다.
셋째 '아직은 괜찮아!'로 순종한다. 즉 절박하지 않다. 아직은 살만하다. 좀더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가진 것이 있으니 지금 당장이 아니도 된다. 이런 사람에게 뭘 기대하겠는가? '되도 그만 안되도 그만'이란 식으로 순종하면 그것은 순종인가? 낙하하는 공이 다시 튀어 오르려면 바닥을 쳐야한다. 왜, 도대체 왜 낙하를 즐기고 있는가? 낙하산도 없으면서 왜 그리도 추락을 즐기고 있는가? 그러다 정신줄까지 놓게된다. 바닥을 끌어올려라. 더 이상 추락하지 말라. 그 알량한 것들을 기대하지도 의지하지도 말라. 심령을 가난하게 만들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심령의 가난함이다. 절박함이다. 바닥을 치라는 것이다.
그렇다. 요단강에서 일곱번 몸을 씻는다고 그 행위자체로 나병이 고침받는게 아니다. 하나님은 그 행위가 마지막 선택지이길 바라신다. 절박해지자. 내려놓음은 자신만의 비빌 언덕과 싸우는 것이다. 하나님하고 싸우지 말고 자신의 대안이나 차선책을 무위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순종이다. 이것이 바로 요단강에서 일곱번 씻으라는 것이다.
나에겐 아직도 일곱개의 의심과 교만과 부함이 있다. 그래도 순종할 것이다. 될 때까지, 나라는 사람이 없어질 때까지, 하나님만이 시작과 끝이 되실 때까지!
일곱은 쉼이다. 안식이다. 그 행위의 마침이다. 나는 지금 몇 번째 요단강에서 몸을 씻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