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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하원갑자엔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로 바뀐다.바이킹이 프랑스에 국가를 세운다.타지마할 건설시작
음하원갑자엔 소수림왕,문종 등 문치주의임금 등극,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으니 조선정권이 바꿨어야 했다.
그리고 목기운을 수렴하고 다음간지 申을 관대하기에 금기운이 엄청 강하다. 신유처럼 멈취있는 것보다 더 강하게 행동한다.
물론 성격이 아니면 잘난척하고자 한다.
하원갑자(신금)
1991년 지방자치제가 30년 만에 부활, 지방선거가 다시 시행되었다.
6월 12일 - 보리스 옐친이 러시아의 대통령으로 당선되다.
8월 19일 - 소련의 보수파들이 8월 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연금하다. (~21일)
9월 17일 -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유엔에 가입하다.
년말 금의 시대에 소비에트가 붕괴된다,
90년전 1901년,러시아 국내에 '사회혁명당(SR)'이 결성됐다. 사회혁명당은 기관지 <혁명 러시아>를 발간하여 전제정권에 대해 투쟁을 열망하나 정치적으로 자각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70년전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창당.
김사국의 서울청년회 창설.
복드 칸 복위, 몽골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외몽골 출병 종식.
자유시참변. 독립군 무장해제 당한다
이후 올가강전투.이만전투 김경천활약
1921년에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부인하는 계층에 의하여 소집이 강조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는 2년 만인 1923년 1월 3일 개막되었는데, 국내의 각 지역단체 대표 140여명이 모인 가운데 공산당계가 20%를 점하고 있었다
이해 해체.
60년전 일본이 만주 침략을 계기로 한반도 공업화에 착수
박흥식 화신상회 설립
장개석이 30만대군으로 공산당토벌에 나섬.
일본이 만주 침략.만주사변터짐.
우가키 가즈시게총독은 1931년에 예편과 동시에 또다시 사이토 마코토의 후임으로 조선 총독에 부임했다. 취임 직후 그는 무단통치 대신 문치를 내세워 황국신민화정책(皇國臣民化政策), 농촌진흥운동을 추진하였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전후 조선의 인력을 식량증산과 대륙침략전쟁에 총동원하였다. 또한 최남선, 윤치호, 이광수 등 조선의 지식인들에 대한 회유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한인애국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령 김구(金九)가 한중 우의(韓中友誼)와 일본 수뇌암살을 목적으로 1931년 조직하였다.
간부는 단장인 김구를 비롯해 이유필(李裕弼)·이수봉(李秀峰)·김석(金皙)·안공근(安恭根) 등이며, 단원은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이덕주(李德柱)·유진만(兪鎭萬)·최흥식(崔興植)·유상근(柳相根) 등이다.
중국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창립, 안창호, 조소앙 등은 조선혁명당 창립
한국독립당의 당군인 한국독립군은
북만주에서 중국군과 연합군을 편성하여 항일전투를 전개하는 동안 남만주에서는 조선혁명당 예하의 조선혁명군이 별도로 한·중연합으로 작전을 수립하고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31년 일제가 9·18사변을 일으키자 조선혁명당은 한·중연합전선을 구축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김학규(金學奎)·김이대(金履大)를 당대표로 하여 중국 당국과 협의하였다.
국민당내 백색테러집단 남의사결성
1931년 오성륜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판스현위의 무장조직인 적위대(赤衛隊)를 결성하였는데, 후에 동북항일연군의 모태가 되었다.
한국 독립당은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이 들어서자 1931년 12월에는 1931년 12월 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이 지린성 자위군 총지휘관 딩차오(丁超)와 만나 연합 전선을 결성할 것을 합의하였고, 이에 따라 중국 하얼빈의 호로군(護路軍)과 한중 연합군을 결성한다.
50년전 1939년 일본 관동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동북항일연군은 1942년 소멸되고, 잔존 세력은 소련으로 도피하였다.88여단에 흡수됨.
조선의용대 김원봉 등 화북지역으로 이동.
호가장전투.반소탕전을 거치며 옌안에서 조선의용군으로 개편.
1941년 김원봉과 의용대내의 라이벌이었던 공산주의자 최창익은 의용대가 화북으로 이동하자 중국 공산당과 함께 김원봉을 화북으로 오지 못하게 하고 김무정, 김두봉, 한빈 등을 내세워 화북지방의 의용대 통제권을 장악했다.
고노에 내각끝나고 도죠 히데키내각 수립. 진주만기습.
미국 필리핀 클라크기지 일본공군기의 기습으로 피해.미국 대일전쟁선언
40년전 6.25 1.4후퇴. 전선 교착상태.
여름의 폭염
30년전 2월 구파 신민당창당.
국토개발사업 투입 실업구제.
반공법반대시위
4월 12일 -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최초로 우주 비행을 한 사람이 되다.
4.19혁명 1주기
4월 27일 - 시에라리온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다.
5월 16일 - 5·16 쿠데타로 군정이 실시되다.
육사생도 지지시위후 대중앞에 박정희 나타남.
5월18일 장면내각 총사퇴 선언.깡패검거
5.20 혁명내각수립.5.24댄스광검거
부랑아집단수용.무허가주택 철거
신생활복 강요.실업자등록
6월 3일 - 미국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소련과 핵금지 조약체결을 함
7월3일 장도영체포.박정희 전면나섬.반공법실시로 언론탄압
혁명재판으로 민족일보사장 사형
박정희 11월 대장진급.청계천 복개완료
12월31일 KBS개국
1631년 9월 17일 -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이 교황군을 격파하다.
로마노프 왕조 초대왕 미하일1세 키예프에 신학교를 만들다
신대륙의 고혈을 빨아 향신료를 팔아 인도의 아그라에 타지 마할 건축 시작.
임란 선봉장 카토 기요마사탄생. 박새채탄생
60년전 신성 동맹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레판토 해전이 발발하여 오스만 해군이 패배한다
필리핀에 마닐라가 건설된다
케플러탄생. 이황,남명조식 사망
50년전 일본의 무장 오다 노부나가가 이가 국을 공격하였다.
40년전 임진전쟁 발발 전 신립에 의해 왜군이 수전에 강하다며 육상전에 주력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고 축성을 비롯한 실제 전쟁 대비도 이에 역점을 두어 이루어졌다
30년전 오테나가 미국 중부를 탐험하였다.튀코 브라헤 : 덴마크의 천문학자가 죽자 제자 케플러가 집대성
20년전 칼 9세 : 스웨덴의 국왕사망.
10년전 코시모 2세 : 토스카나의 대공
사망
- 펠리페 3세 : 스페인의 국왕 겸 포르투갈의 국왕 사망
10년후 송산 전투에서 명나라 군이 청군에게 대패하였다.
네덜란드가 포르투갈로부터 말루쿠 향료 제도를 빼앗고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20년후 독일의 해변에 대홍수가 몰아닥쳐 수천명이 익사하였다.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이 항해법을 공포하였다.
말레이시아의 페라크에서 VOC 대표를 포함한 네덜란드 인 24명이 살해되었다. (28년 전 암보니아 사건에 대한 복수 가능성)
30년후 정성공이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내고 타이완 남부를 점령하였다.
40년후 이탈리아 출신의 프랑스 천문학자 조반니 도메니코 카시니가 토성의 위성인 이아페투스를 발견하였다.
50년후 인현왕후가 숙종의 계비에 책봉되었다.
청나라에서 삼번의 난이 평정되었다
강원도 양양 지역에서 규모 7.5+급으로 추정되는 지진이 발생했다
실학자 이익 탄생.
60년후 미셸 롤에 의해서 롤의 정리가 증명되었다
과학자 로버트 보일사망
1271년 원 건국,여몽 연합군이 삼별초의 진도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배중손과 승화후 온을 죽임.
9차 십자군이 아크레에 도착하였다. 에드워드는 일 칸국에 맘루크 협공을 요구하는 사신을 보냈다
쿠빌라이가 원제국이라 칭함
몽고지배하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영웅으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막내 아들 다닐 알렉산드로비치가 1271년 왕위에 오르면서 대공국이 됩니다.
60년전 몽골 제국의 금나라 침공이 시작되었다
서요는 신나이만으로 개편되었다. 카슈가르를 함락시켜 동 카라한 왕조를 멸망시켰다
최충헌은 임의로 희종을 폐위시킨 뒤 14년 전 자신이 폐위시켰던 명종의 아들인 강종(왕오)을 즉위시켰다.
고려왕조는 끝난셈.
50년전 주치가 이끄는 몽골군이 호라즘의 우르겐치를 함락시키고 거주민들을 모두 죽였다.
- 메르브가 툴루이의 몽골군에게 함락당하였다. 무슬림 역사가는 백만이 학살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일본에서 가마쿠라 막부와 호조씨에 대해 고토바 상황이 봉기하여 조큐의 난이 일어났다
나일 강이 범람하여 5차 십자군이 고립되었다.
십자군이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에게 항복하였다. 8년간의 휴전 협정이 맺어졌고 십자군은 이집트에서 철수하여 5차 십자군이 종결되었다
무칼리의 몽골군이 보안, 부주를 함락하고 섬서성 북부 일대를 평정하였다.
수부타이의 몽골군이 트빌리시 근처에서 조지아의 군대를 섬멸하였다
40년전 남송이 몽골 제국군에게 금나라 침공을 위한 길을 빌려주었다. (한중 일대)
살리타가 이끄는 몽골 제국군이 고려를 공격하였다.
30년전 헝가리의 모히 전투에서 몽골 제국군이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성전기사단의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폴란드 발슈타트에서의 레그니차 전투에서 바투가 지휘하는 몽골 제국군이 폴란드와 보헤미아의 연합군을 전멸시켰다.
얼스터 전투에서 브라이언 오 넬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아일랜드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발트 해 연안의 도시들 간에 한자 동맹이 결성되었다.
헨리 3세의 잉글랜드 군대가 웨일즈를 침공하였다
20년전 몽케 칸이 몽골 제국의 4대 칸으로 선출되었다.
차가타이, 우구데이 가문에 대한 숙청이 이루어졌다.
독일의 왕 콘라트 3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였으나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동맹군에게 패배하였다.
고려의 팔만대장경 제작이 완공되었다.
10년전 바이바르스가 맘루크 왕조의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니케아 제국의 황제 미카일 8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여 라틴 제국이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이 부활하였다.
아리크부카와 쿠빌라이 간의 몽골 제국 내전 : 시무토노르 전투 후 아리크부카가 카라코룸을 회복하였다
카스티야 왕국이 카디스를 점령하였다.
헝가리 국왕 벨라 4세가 킵차크 칸국의 공격을 격퇴하였
10년후 - 태풍으로 히라도에 정박 중이던 몽골군의 상당수가 사망하며 원나라이 실패하였다.
- 2차 홈스 전투에서 일 칸국 - 소 아르메니아 - 조지아 왕국 - 성당기사단의 연합군이 칼라운이 지휘한 맘루크 왕조 군대에 패하였다.
오스만 1세가 룸 셀주크의 쇠위트의 베이가 되었다.
원나라 군대가 참파를 원정, 복속시켰다.
태국의 란나타이 왕국이 몬 족의 하리푼차이 왕국을 멸망시켰다.
20년후 맘루크 왕조가 1291년에 팔레스타인의 마지막 십자군 지역인 아크레를 점령하면서 십자군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제노바의 반디노와 우글리노 형제가 인도 제국를 향한 항해를 시작하였다. (대항해시대의 시초) 그들은 다시 기록되지 못하였다.
치악성 전투에서 원충갑이 이끈 고려 군민이 카다안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30년후 헝가리의 왕 언드라시 3세의 사망으로 아르파드 왕조가 단절되었다.
- 일 칸국 군대가 시리아로 진입, 알레포 일대를 약탈하였으나 곧 회군하였고 아르메니아 - 키프로스군대도 곧 철군하였다.
단테 피렌체에서 추방
40년후 원인종이 4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 할미로스 전투에서 카탈로니아 용병단이 아테네 공작인 브리엔느 드 월터를 전사시키고 아테네 공국을 정복하였다.
50년후 이탈리아의 작가인 단테 알리기에리가 신곡을 완성하였다.
흉작으로 유럽 전역에 기근이 발생하였다.
피렌체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60년후 비잔티움 제국의 도시 니케아가 오스만 군대에게 함락되었다
고다이고 덴노의 반 막부 운동 소식이 측근에 의해 누설되면서 그는 호조씨에 의해 폐위되고 왕자가 고곤 덴노로 즉위하였다. (북조의 1대 덴노)
이후 동아시아에 왜구들이 들끊게된다.
독일의 수도자 베르톨드 슈바르츠가 흑색화약을 발명하였다.
불가리아의 귀족들이 이반 알렉산더르를 제2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로 선출하였다.
충혜왕 즉위.2년후 기황후가 공녀로 원에 끌려감.
122년후 고려멸망
911년
궁예가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바꿈.
911년 궁예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는지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바꾸고 연호도 '수덕만세'로 바꿉니다.
아직 나주에 남아있던 왕건은 군대를 그대로 북상시켜 무진주의 경내를 공략하러 출정합니다.
바이킹,노르망디 왕국 세움
프랑스의 왕 샤를 3세이 바이킹의 우두머리인 롤로와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을 맺었다
올레크 베시는 882년부터 912년까지 키예프 대공을 역임했다고 한다.
프랑크의 루트비히 4세, 동프랑크 왕국의 마지막 카롤링 가문의 왕사망
콘라트 1세선거로 즉위한 국왕인데다 마자르 족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해 그의 왕권은 취약했다,공식 직함을 동프랑크의 국왕이라 하였으나 이후 그의 왕국은 독일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118년전 바이킹이 최초 진출.
66년 매그넘가 이끄는 바이킹 센강을 따라 프랑크공략.
60년전 팜플로나 공국, 나바라 왕국으로 독립
오토1세탄생.로타르1세의 중프랑크 위태
851년엔 청해진(淸海鎭)에 토벌군을 보내 청해진을 완전히 없앴으며 청해진에 살던 주민들은 현 전라북도 김제시인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50년전 헌안왕이 죽고 사위인 경문왕이 신라 제 48대 왕이 되었다.
40년전애설레드 1세가 이끄는 웨식스군이 데인족바이킹들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 비잔틴 제국군이 사라센 세력의 무슬림 토후국이 지배하고 있던 이탈리아 반도의 바리를 회복하였다.
포르투갈 백작, 남진하여 현 포르투갈 중북부 (코임브라) 일대 점령.
30년전 루이 3세가 군을 이끌고 바이킹군을 격퇴하였다
20년전 귀도 3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아르눌프 폰 케른텐이 이끄는 프랑크족 군대가 바이킹들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10년전 전해 견휜이 후백제세우자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루트비히 3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911년, 후량의 협채의 대승 이후로 진군은 파죽지세로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이제 하북성의 백향현을 공격하게 되었는데, 적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이존욱은 여유 만만했다.
11년후 922년, 이존욱이 한참동안 세력을 키우고 후량을 거의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었던 시기이고, 야율아보기는 대군을 이끌고 유주, 탁주(탁현), 정주를 공격했다. 야율아보기의 부인이였던 술률후는 이에 반대하였다
20년후 라미로 2세가 레온 왕국의 왕이 되었다.
에릭 블러드액스가 노르웨이의 왕이 되었다.
후우마이야 왕조, 탕헤르와 세우타 일대 점령, 지브롤터 해협 통제권을 얻게 되었다
30년후 콘스탄티노플에서 비잔티움 제국과 키예프 대공국 간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40년후 곽위가 카이펑에서 후주를 건국하였다.
요목종즉위.
오대십국시대의 북한이 건국되었다.
오대십국시대의 초나라가 남당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50년후 알 하캄이 후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로 즉위하였다
- 하콘 고디 : 노르웨이의 왕사망
60년후 비잔티움 제국군이 파티마 왕조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실리스트라에서 비잔티움 제국군이 키예프 대공국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진흥왕
12년 (551년)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었다. 거칠부 등에게 명해 고구려를 침공케 해 10개 군을 취했다.
돌궐 제국이 성립되었다.
비잔틴 제국의 장군 나르세스가 충분한 군대와 함께 이탈리아로 파견되었다
60년전 장수왕이후 손자 문자명왕이 고구려 21대 왕이 되었다
제노이 죽고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백제는 해구 제거후 진로가 실권을 쥠
50년전 남제의 정로장군 왕진국과 수비장군 장직 등이 소연과 내통하여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가 황제 소보권을 살해하였다.
소보융이 남제 제 7대 황제가 되었다.
- 무령왕이 백제 제 25대 국왕이 되었다
고구려성 공격.
지증왕 2년차
40년전 프랑크 왕국의 군주 클로비스 1세가 사망한 이후 프랑크 왕국의 영토가 살리카 법에 입각하여 그의 네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30년전 신라 율령반포 이듬해
20년전 531년 4월에 이찬 철부(哲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했는데 이 또한 신라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관직명이다. 귀족의 대표를 상대등에 임명했다
호스로 1세가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가 되었다.
고구려 안원왕 즉위
10년전 진흥왕 원년. 이미 법흥왕이 매금왕에서 태왕으로 상격화했다.
토틸라가 동고트 왕국 제 6대 국왕이 되었고 비잔틴 제국의 이탈리아 지배를 거부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후 동고트 군이 이탈리아를 유린하였다
20년후 소동을 황제 자리에서 몰아내고 양나라의 황제를 자칭하였다. 이에 국호도 한(漢)으로 고쳤으며 죽은 소강의 딸 율양공주 소씨를 황후로 삼았다.
돌궐 제국이 성립되었다.
비잔틴 제국의 장군 나르세스
비잔티움 제국의 함대가 동고트 왕국의 함대를 격파하였다.
베이루트에 지진과 지진 해일이 덮쳐 도시의 곳곳이 파괴되고 약 3만명이 사망하였다.
30년후 - 프랑크 왕국을 통일하였던 클로타르 1세가 사망하자 그의 네 아들들에 의해 프랑크 왕국이 다시 분할되었다.
고담(북제)이 북제 4대 황제가 되었다.
신라가 561년에 안라국을 정벌하였다
40년후 메카인이 그곳을 더럽히자 아브라하는 코끼리를 앞세운 6만 대군으로 카으바로 진격했으나 전염병이 돌아 퇴각하였다.50여일이 지난 후 무함마드가 태어난다.
베네벤토가 롬바르드 족이 세운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50년후 마우리키우스가 이끄는 비잔티움 제국군이 사산조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사발략가한이 동돌궐 제5대 가한이 되었다.
양견이 그에게 대항하는 반대 세력을 제거한 뒤 9세인 정제에게 선양을 받아 수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의 자리에 즉위하면서 북주가 멸망하였다.
60년후 샤흐르바라즈가 이끄는 사산조 페르시아군이 안티오크를 점령하였다
191년 고국천왕이 을파소를 국상으로 임명함.
동탁 토벌전(董卓討伐戰)은 190년~191년에 동탁과 동탁에 대항하여 연합군을 결성한 관동의 지방 세력 간의 싸움이다. 동탁이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옹립하며 공포 정치를 행하자 관동의 지방 세력들은 원소를 중심으로 연합군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연합군 대부분은 동탁과 싸우기를 꺼려 조조 · 위자 · 포신 · 왕광 · 손견만이 동탁과 교전을 벌였고, 동탁은 낙양에서 장안으로 천도하여 연합군의 예봉을 피했다. 손견이 여러 차례 이긴 데 힘입어 연합군은 낙양을 빼앗았으나 내홍이 일어나 분열되어 동맹은 결렬되고, 동탁이 주축이 된 후한 조정은 지방에 대한 통제를 잃었으며, 지방 세력의 할거 · 경쟁 구도로 바뀌었다. 정사에서 손견은 낙양의 우물에서 전국옥새를 발견했으나 이를 눈치챈 원술이 손견의 아내를 인질로 잡고 옥새를 내놓으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손견은 어쩔 수 없이 원술에게 옥새를 강탈당했다.
낙양(洛陽)에서 군사를 거둔 원소는 한복(韓馥)을 속여 기주(冀州)를 차지하고 이로 인해 북방의 강자 공손찬(公孫贊)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홀로 동탁을 쫓던 조조는 동탁의 장수 서영(徐榮)에 패해 산동(山東)으로 돌아간다. 황건적 잔당을 토벌하면서 아우른 병사들로 청주병(靑州兵)을 새로 조직하고 새로운 인재들을 받아들이니 이는 훗날 천하를 호령하게 될 조조의 힘의 근거가 된다. 원술(袁術)은 회남(淮南)에서 사사로이 칭제(稱帝)할 준비를 갖추고, 유표에게 원한을 갖게 된 손견은 결국 유표와의 싸움에서 전사하여 강동(江東)에는 손책(孫策)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황건의 잔당에게 시달리던 공융(孔融)을 도와준 계기로 도겸(陶謙)으로부터 서주(徐州)를 양보 받게 되는 유비(劉備)는 드디어 일방의 군웅으로 거듭난다. 천도한 장안성(長安城)에서는 왕윤(王允)이 여포(呂布)를 설득해 동탁을 죽이고 이각(李傕)과 곽사(郭汜)의 난정(亂政)으로 서량(西凉)의 마등(馬騰)과 익주(益州)의 유언(劉焉)이 장안을 공격하지만 실패하고 돌아간다. 이로써 본격적인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시대가 시작되고 삼국이 정립하기까지 수많은 싸움들이 벌어지게 된다.
50년전 안토니오와 파우스티나의 신전이 착공되었다
30년전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가 로마 제국의 공동 황제가 되었다.
10년후 201년 조조군이 창정의 원소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20년후 카라칼라, 게타가 로마 제국의 공동 황제가 되었다.
: 카라칼라가 게타를 살해하고 단독 황제가 되었다.
한수가 마초 등 서량의 군벌들과 함께 거병하여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조를 공격했다.
30년후 유비가 촉한을 건국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다.
- 촉한과 후한의 군벌 손권 세력 사이에 이릉대전이 발발한다.
40년후 촉한의 제갈량이 위나라를 치는 4차 북벌에 나섰다.
북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산 제국과 로마 제국군이 대치하였다.
50년후
60년후 아브리투스에서 고트족이 로마 제국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을 지휘하던 황제 데키우스와 그의 아들이 전사하였다. 데키우스 사후 그의 아들인 호스틸리아누스와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로마의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호스틸리아누스는 전염병에 의해서 곧 사망하였다
bc170년 그라쿠스 형제의 부친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셈프로니아 바실리카를 세움.
60년전 로마의 상인들이 일리리아인들에게 살해당하자 로마는 일리리아로 대사를 보내 항의하려 했으나 일리리아의 지도자 테우타의 심기를 건드린 이들은 일리리아군에게 살해당하였고, 이에 로마는 테우타의 기를 죽이기 위해 코르키라 섬을 점령하였다.
진나라가 한신의 한나라를 멸망시켰다.
50년전 셀레우코스 제국의 장군 몰론이 제국의 일부 지역을 차지하고 자신이 왕임을 자처하자 안티오코스 3세는 이집트가 점령 중인 시리아 남부를 정복하기 위한 원정을 포기하고 몰론을 향해 진격한 뒤 그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를 살해하였다.
아르시노에 3세 필로파토르가 오빠인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와 결혼하였다.
진시황이 북방 민족의 침입을 대비하여 방어 산성을 쌓기로 하여 만리장성이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40년전 시황제 사후, 영호해, 조고, 이사가 공모하여 영호해를 황제에 옹립하여 그들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시황제의 조서를 위조하여 부소와 몽염에게 자결을 명하였는데, 몽염은 이를 수상히 여기고 조서의 진위 파악을 요구하였으나 부소는 순순히 자결하였다. 이후 몽염 또한 자결하였으며 그의 동생 몽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면서 몽씨 일족이 몰살당하였다.
30년전 밀레토스에서 마케도니아 왕국의 해군이 로도스군을 격퇴하였다. 이후 마케도니아 왕국군은 페르가몬으로 진격하여 페르가몬 영토 곳곳을 약탈하였다.
백등산 포위전에서 전한이 흉노에게 패배하고, 흉노는 전한과 화친하였다.
20년전 알탁시아스는 아르메니아 왕국과 수도 알탁사타를 건설하고 아르메니아 초대 왕이 되었다
에우리메돈 전투에서 로마와 동맹을 맺고 있던 로도스 해군이 한니발 바르카 장군이 이끌고 있던 셀레우코스 제국 함대를 상대로 승리하였다.
테오스 근처에서 로마군과 로도스군 함대가 셀레우코스 제국군 함대를 상대로 승리하였다
20년후 로마 원로원은 카르타고가 자신들의 동의 없이 누미디아를 공격한 것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였고,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로마의 감찰관인 카토를 중심으로 하는 강경파는 카르타고를 공격하자고 하였다.
미트리다테스 5세가 폰토스의 왕이 되었다
30년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몇 명의 로마 대사와 함께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하여 그 곳에서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접견하였다
40년후아라비아 반도 남부 예멘에 있던 마리브 댐이 붕괴하자 남부 아랍인 (카흐탄 족)이 북으로 이동, 북부 아랍인과 함께 가산 왕국, 라흠 왕국을 건국하였다
50년후전한의 황제 무제가 대외 원정으로 인해 소비되어진 국가 재정을 새로이 보충하기 위해 국가가 각 지방의 산물을 조세로 거두어들여 다른 지방에 운송, 판매하여 이익을 거두는 균수법과, 가격이 쌀 때 국가가 매입하였다가 가격이 비쌀 때 매입한 물건을 판매하여 이익을 거두는 평준법을 실시하였다.
60년후 전한의 황제 무제가 대외 원정으로 인해 소비되어진 국가 재정을 새로이 보충하기 위해 국가가 각 지방의 산물을 조세로 거두어들여 다른 지방에 운송, 판매하여 이익을 거두는 균수법과, 가격이 쌀 때 국가가 매입하였다가 가격이 비쌀 때 매입한 물건을 판매하여 이익을 거두는 평준법을 실시하였다.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가 스키타이인들을 격퇴하고 보스포루스를 장악하였다
bc 530년 페르시아캄비세스 2세선왕 키루스 대왕이 동쪽의 정벌에서 죽자 제국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고
50년전
40년전
30년전
20년전
20년후
30년후
40년후
50년후
하원갑자(인목)
1811년
네덜란드 나라없이 2년간 지배당함.
미국은 땅을 사들이고 다음해 영국과 전쟁
조선은 홍경래의 난 일어나고
김이교(金履喬)의 조선 통신사가 쓰시마 섬을 방문.
이러한 일본의 발전상은 조선의 학문계에도 영향을 끼쳤고, 북학파의 거두인 박제가는 청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을 예로 들어 해외무역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학문적으로도 일본의 유학 사조인 고학(古學)의 연구성과가 조선에 들어와 정약용 등을 비롯한 실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이후 통신사를 파견안한것은 집권노론의 사욕이었을터 중요한 기회를 놓치고 있다
순조초기 너무나 아쉬운 대목이다.
66년전 드레스덴협정으로 오스트리아계승전쟁 일단락. 프로이센만 남는 장사함.
60년전 택리지가 저술되다.
프랑스에서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주도 하에 백과전서 1권이 출판되다
50년전 포르투갈에서 노예무역이 금지되다.
- 영국에서 조지 3세의 대관식이 거행되다.
7년 전쟁: 4달에 걸친 포위전끝에 러시아군이 프로이센의 요충지 콜베르크 요새를 함락시키다
40년전 스페인 제국이 대영제국에 포클랜드 제도를 양도하였다.
- 구스타브 3세가 스웨덴의 국왕으로 즉위하다.
- 제7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점령하다.
30년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요제프 2세가 농노제를 폐지하다.
- 임마누엘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을 출간하다
스페인 개척자들이 로스엔젤레스를 건설.
- 조지 타운에 고립된 영국군이 요크타운에서 조지 워싱턴에게 항복하다. 이 충격적인 항복 소식은 영국 내 반전 여론에 불을 붙인다
20년전 버몬트 주가 미합중국에 가입하다. 미국혁명을 통해 맨 처음 미합중국을 창립한 13개 식민지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연방에 가입한 사례.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유럽 최초로 헌법을 제정하고 귀족의 리베룸베토 특권을 폐지하다.
- 바렌느 배신사건. 해외로 망명을 시도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등 왕실 일가가 붙잡히다.
10년전 원년 순조의 명령에 의거하여 공노비가 철폐되다.
프로이센 왕국의 수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정수론연구를 저술하였다.
10년후 베네수엘라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미국이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 매입.
- 조지 4세 즉위.
파나마.페루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미주리 주의 미합중국 가입. 러시아의 알래스카 영유권 주장
20년후 - 찰스 다윈이 비글호와 함께 여정을 시작하다.
- 마이클 패러데이가 전자유도의 법칙을 발견하다.
30년후 아편전쟁: 영국군이 홍콩을 점령한다. 이후 1997년 반환까지 156년 동안 홍콩은 영국의 영토가 된다.
- 엘살바도르가 독립을 선언하다.
- 상류 캐나다와 하류 캐나다를 통폐합해 캐나다가 탄생하다.
40년후 안동 김씨가 다시 세도정치를 시작하다.
- 홍수전이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키다. 이 때부터 14년간 지속된 이 난은 무려 20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가게 된다.
50년후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다.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 해방령을 발표했다.
- 이탈리아가 이탈리아 왕국으로 통일되었다
태평 천국이 안칭시를 점령했다.
- 남북전쟁에서 제1차 불런 전투가 시작되었다.
- 청나라에서 신유정변이 일어나 서태후와 공친왕이 정권을 잡다.
60년후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독일 제국이 선포되고 빌헬름 1세가 통일 독일의 초대 황제에 즉위하다. 비스마르크가 초대총리
신미양요가 발발. 6월 10일 초지진 전투, 6월 11일광성보 전투. 전원사상.
1451년 동로마를 2년후 멸망시킬 메흐메트 2세가 즉위한다.세종다음 문왕이 즉위한다
고려시대 역사서인 고려사가 완성되었다
사창실시
60년전 토지 제도인 과전법이 만들어져 조선 전기 양반사회의 경제 기반을 이루게 된다.
고려기득층 몰락. 사학12도 폐지
스페인 카스티야 왕국의 세비야에서 유대인에 의한 범죄가 발생하자 이를 빌미로 부주교 에르난 마르티네즈의 선동과 함께 4천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다. 시나고그가 파괴되었고 이후 다른 지역에서도 학살이 일어났다
50년전 티무르가 바그다드를 정복하였다
40년전 프랑스 슈농소 성의 영주 장 마르케가 영국군에 동조한 죄로 고발당했고, 슈농소 성은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20년전 잔 다르크가 화형을 당하였다.
포르투갈 왕국이 아조레스 제도를 점령하였다.
10년전 장영실과 이천이 서운관에 측우기를 설치하였다.
질 에아네스 함대가 블랑코 곶 (흰 곶) 을 발견하였다.
서유럽 최초의 흑인 노예 무역이 시작되었다
10년후세조실록이 완성되었다.
헨리6세 사망.
리처드 네빌은 후환을 두려워 해서 프랑스로 망명하여 랭카스터 가문, 루이 11세와 손을 잡고 1470년 9월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이에 놀란 에드워드 4세는 지지자들과 함께 10월 네덜란드로 망명했는데 용담공 샤를의 지원을 받아 1471년 3월 동생인 글러스터 공작 리처드와 함께 런던을 탈환하고 4월 바넛 전투에서 리처드 네빌을 죽였다. 같은 날 헨리 6세의 왕비 마가렛이 외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와 함께 상륙했으나, 투크스베리에서 격파당하고 에드워드는 피살되었다. 이로써 남아 있던 랭카스터 가문은 대부분 전사하거나 처형되었으며 그 후 헨리 6세를 죽인 에드워드 4세는 평생을 안전하게 지냈다
20년후시스티나 성당 건축이 완료되었다.
오스만 제국과 나폴리 왕국 사이에서 일어난 오트란토 전투가 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끝났다.
40년후 1491년 말 스페인의 페르난도 국왕과 이사벨 여왕이 이끄는 10만 대군이 이슬람 왕국 그라나다를 포위했다.1월2일 입성함
50년후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브라질 연안을 항해하였다
조식.이황탄생
60년후 포르투갈이 믈라카와 호르무즈를 점령하였다.
우즈베크인의 나라인 히바 칸국이 건국되었다
1091년노르만 군대가 시칠리아의 마지막 무슬림 거점이었던 노토를 함락, 시칠리아 정복을 완료하였다.
- 페체네그족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였으나, 알렉시오스 1세의 비잔틴 군대에게 대패하였다. (레부니온 전투)
잉글랜드의 윌리엄 2세가 노르망디를 공격하였다.
웨일스에 카디프 성이 지어졌다.
노르만 왕조의 로버트와 루푸스가 화해하였다.
무라비트 왕조가 세비야를 점령하여 아바드 왕조를 멸망시켰다
60년전 노르웨이 하랄드는 키에프에 도착.동방시장을 접하게 된다.
후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였다. 코르도바 토후국이 세워지고, 지브롤터 해협 일대는 세비아의 월경지가 돤다.
- 앙리 1세가 프랑스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이원호가 탕구트 족의 수장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대기근이 발생하였다.
베즈프림이 미에슈코 2세를 꺾고 폴란드 왕국의 왕이 되었다.
50년전 지리 왕조가 시아파인 종주국 파티마 왕조를 거부하고 수니파를 받아들이며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에 대한 명목상 충성을 맹세하였다. (사실상 독립 선언)
: 남부 이탈리아의 올리벤토 전투에서 노르만족과 랑고바르드족의 연합군이 비잔티움 제국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호수천 전투에서 서하 군대가 송나라를 대파하였다
애설레드 2세의 아들 에드워드가 노르망디로부터 돌아왔다. (하레크누드는 그의 이복 형제)
45년전 하랄드는 조카와 노르웨이 공동왕이 되다.
40년전 노르망디 공 기욤 (윌리엄 1세)이 앙주 공 지오프리와 싸워 이겼다.
- 프랑스의 카페 왕조의 앙리 1세가 키예프의 안네와 랭스 성당에서 결혼하였다.
이스파한이 셀주크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30년전 로베르 기스카르와 그의 동생 로제르의 노르만군대가 시칠리아의 메시나를 점령하였다.
프리지아 서부가 신성로마제국에게 정복되어 위트레흐트 주교구에 속하게 되었다.
25년전 하랄드왕 영국에서 패배이후 노르웨이는 위축.
20년전 동로마 제국과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족 간에 벌어진 바리의 공성전에서 노르만족이 바리를 함락시킴으로써 노르만족의 최종 승리로 끝났다. 이로써 로마는 원래의 발상지였던 이탈리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군이 동로마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 로마누스 4세가 실명되고 폐위되었다.
정복왕 윌리엄이 엘리 섬을 점령하며 헤레워드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머시아의 귀족 에드윈이 윌리엄 1세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처절히 실패하였고, 영지는 노르만 심복들에게 분배된다.
10년전 비잔티움 제국의 전임 황제 니케포루스 3세가 폐위되고 알렉시오스 1세가 비잔티움 제국의 새 황제가 되었다.
금인칙서발표
- 디라키움에서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군이 비잔티움 제국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이로써 알바니아는 1100년까지 노르만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때가 지명 알바니아의 첫 언급임)
10년후 천조제가 거란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 잉글랜드의 왕 헨리 1세의 형인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 로베르가 포츠머스에 상륙하여 자신이 잉글랜드의 정당한 왕위 계승자임을 주장하였다. 양 세력의 전투 끝에 잉글랜드의 왕 헨리 1세가 왕위를 유지하는 대신 로베르가 노르망디 지방의 영토와 막대한 연금을 얻는다는 알톤 협약이 맺어졌다
20년후 시리아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왕 보두앵 1세가 지휘하는 십자군이 부리 왕조와 모술의 아타베그의 군대가 주축이 된 셀주크 제국군과 싸웠다. (샤이자르 전투)
하인리히 5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무라비트 왕조가 타호 강 하류 일대를 점령하고 코임브라를 습격하였다.
알폰소 7세가 갈리시아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보두앵 7세가 플랑드르의 백작이 되었다
30년후 디드고리에서 조지아 왕국군이 셀주크 제국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방랍의 난 종결
금나라가 요서 지방을 점령하고 요나라의 중경 대정부를 함락시켰다. 천조제가 몽골로 피신하자 한인 신하 이처온과 황족 야율대석은 남경 석진부에서 천조제의 숙부 아율순을 옹립, 북요 정권을 수립한다.
노구교 전투에서 요나라 (북요) 군대가 송의 환관 동관이 이끄는 20만 송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40년후 앙주 백작 풀크 5세가 멜리장드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 되었다.
성전 기사단이 아라곤 왕국에 첫 거점을 마련하였다.
시칠리아 왕국의 장수인 안티오크의 게오르그가 로제르 2세의 명령에 불복한 아말피를 포위 공격하여 결국 항복시켰다.
50년후 게저 2세가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이 되었다.
사마르칸트 북부의 카트완 전투에서 야율대석이 이끄는 서요의 군대가 산자르가 지휘한 셀주크 제국 - 서 카라한 왕조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 금나라와 남송이 국경을 회하로 정하였다
60년후 앙주 백작 제프리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헨리 (앙리)가 뒤를 이었다.
가즈니 전투에서 알라 알 딘이 이끈 구르 왕조 군대가 가즈니 왕조 군을 격파, 바흐람 샤를 포로로 잡고 도시에 방화하였다.
731년 프랑크 왕국, 남 프랑스 해안 일시 수복 (vs 우마이야)
세르다냐 (피레네 동부) 의 베르베르 인들이 아키텐의 오도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60년전 신라가 나당전쟁중에 당나라로 부터 사비성을 탈환하여 소부리주를 설치하다
50년전 김흠돌의 난 : 잡찬 김흠돌이 파진찬 흥원, 대아찬 진공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바위 사원이 완공되었다.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 아브드 알 말리크가 이끄는 우마이야 왕조군이 메소포타미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아라비아 반도를 재정복하였다.
클로비스 4세가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40년전 711년과달레테 전투에서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우마이야 왕조군이 서고트 왕국의 왕 로데릭이 이끄는 약 3만 3천명의 서고트 왕국군을 섬멸하였다. 이 전투에서 로데릭은 전사하였다
다고베르트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30년전 - 테우데리히 4세가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 툴루즈에서 아키텐의 공작 오도가 이끄는 가톨릭 세력 (아키텐 - 프랑크 연합군) 이 툴루즈를 공격하던 우마이야 왕조군의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툴루즈 전투)
20년전 세르다냐 (피레네 동부) 의 베르베르 인들이 아키텐의 오도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프랑크 왕국, 남 프랑스 해안 일시 수복 (vs 우마이야)
10년전 샤를르 마르텔이 사망한(741년) 이후에 생 드니 수도원에서 교육받은 두 아들, 카를로망과 소(小) 페펭(페펭3세)이 궁재직을 계승하였다
20년후 샤를 대제(Carolus Magnus)라고 불리는 샤를르(768-814)는 중세기에 있어 가장 유능한 통치자였다. 그는 그의 동생 카를로망과 함께 국가를 분할하여 통치하다가 771년에 동생이 사망하자 단독 영도자가 되었다
30년후 롬바르드 족을 쳐이긴 후에 샤를르는 이딸리아 전역에 대한 자신의 권익을 추구해야 되었기에 헌납약속의 실행을 주저하다가 781년에 로마 공국(公國), 라벤나 등 몇 개의 소지역구를 교황에게 기증했다. 이렇게 하여 이제 교황령이 건설되었고, 이는 1870년까지 존속하였다
40년후 알폰소 2세가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왕이 되었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칸타브리아 일대의 우마이야 왕조 거점들을 점령하고 영토를 도우로 강 이남으로 확장하였다
60년후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칸타브리아 일대의 우마이야 왕조 거점들을 점령하고 영토를 도우로 강 이남으로 확장하였다.
부르비아 강 전투에서 우마이야 왕조 군대가 아스투리아스 군대를 격파하고 갈리시아를 휩쓸었다
371년 고국원왕 근근수태자의 백제에 전사
소수림왕 즉위하고 동진(東晉)의 대사마(大司馬) 환온(桓溫)이 사마혁(司馬奕)을 폐위시키고 사마욱(司馬昱)을 즉위시키다.
1년전 전연멸망 경쟁선비족인 탁발선비
탁발식이 죽고 탁발규탄생 6세에 대나라 망하나 16세에 북위세움
후연은 13년후 개국
60년전
유총이 군대를 이끌고 서진의 도읍 낙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뒤 서진의 황제 사마치를 사로잡았다. 황태자인 사마전을 포함한 3만명이 살해되었고, 낙양은 약탈과 방화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가 니코메디아에서 제국 내에서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는 칙을 공포하였다.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일단로마 제국 동방의 정제가 되었다.
50년전 동진의 조적은 뛰어난 용병술로 장강을 건너서 회음과 그 일대를 회복하고, 남하하는 석륵의 군대를 격파했다. 하지만 사마예의 무관심과 동진 조정의 지원 미비로 결국 철수해야 했고, 화병을 앓다가 옹구의 진채에서 숨을 거뒀다 탁발울률 : 대나라 군주사망.동진 성제탄생.
40년전 미천왕 죽고 고국원왕이 고구려 제16대 국왕이 되었다
20년전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의 군대가 마그넨티우스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하였다.
후조의 황제 석지가 황제 칭호를 폐지, 조왕(趙王)을 자칭하며 전연에 염위군을 상대로 한 구원군을 청하였으며, 2월에 염위의 포위군을 격파하였으나 염위의 왕 염민에게 매수된 부하 유현에게 살해당하였다. 석지가 살해당하면서 후조도 멸망하였다.
10년전 사마비가 동진 제 6대 황제가 되었다.
- 율리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10년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381년에는 화북의 전진(前秦)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내 백제의 공격을 초래하였다. 그래서 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 관련 기록의 주인공을 백제로 바꾸어 보기도 한다.
닌토쿠43년 355년(425또는475년으로 수정해서 봐야함)의 기록이후 5세기 후반까지 연대 조정의 축이 될 백제 관련 기록도 없다.아니면 신라 내물왕이전 기록이 60년내지 120년전의 기록이 되야하는데 무리가 따른다.
20년후 광개토대왕이 고구려 19대 왕이 되었다.
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인정하였다.
30년후 알라리크 1세가 고트족 군대를 이끌고 서로마 제국이 지배하고 있는 북부 이탈리아를 공격하였고, 이에 호노리우스 황제는 라벤나로 수도를 옮겼다.
오호십육국시대 북량의 초대 군주인 단업이 저거몽손의 군대에 사로잡혀 살해당하였다. 이후 저거몽손이 스스로 양주목 장액공을 칭해 북량 2대 군주가 되었다.
후연 4대 황제 모용성이 용성 내에서 단기가 일으킨 반란으로 습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이후 모용희가 후연 제 5대 황제가 되었다
40년후 콘스탄티누스 3세 : 서로마 제국의 장군사망.
유유장군은 남연을 멸한 다음해 손은의 잔당 노순(盧循)과 서도복(徐道覆)이 거병하여 하무기를 전사시키고 유의를 대패시켰다.
신라가 고구려의 사주로 일본 열도를 침공하여 야마토(倭) 오진(應神) 왕의 항복을 받았다.
삼국사기엔 295년.408년 왜침공계획만 세우고 포기한 것으로 나오나 침공가능성이 휠씬 크다.
일본서기상 친신라적인 천황 인교천황이 412~453년까지 지배한다.
50년후 콘스탄티우스 3세가 호노리우스와 함께 서로마 제국의 공동 황제가 되었다.당해 사망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간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가야좌지왕 : 금관국 제 6대 왕사망
60년후 비잔티움 제국의 에페소에서 에페소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의 2개의 본성인 인성과 신성이 서로 혼돈과 분리됨이 없이 일치를 이룬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네스토리우스파를 단죄하였다
11년 아우구스투스 말년이다
아르타바누스 3세가 파르티아의 왕이 되었다
60년전 신라 남해차차웅탄생.
갈리아지역 일리시야에서 케사르는
부관 안토니우스의 공으로 베르긴갈틱스의 항복을 받아낸다.
50년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가 브린디시에서 서로의 통치영역을 재확인했다.
파르티아의 왕자 파코루스와 로마에서 망명해 온 퀸투스 라비에누스의 군대가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 페니키아 지방, 안티오크,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40년전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의 수도인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면서 이집트는 사실상 로마 공화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절망적인 상황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0년전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간에 평화 조약이 맺어졌다.
신라가 마한에 사신 호공을 보냈다. 마한의 왕은 신라가 조공하지 않음을 이유로 호공을 힐난했으나, 호공은 '우리나라는 진한의 유민 및 변한, 낙랑, 왜인까지 두려워 하는 나라다
10년전 아르샤크 2세 : 이베리아 왕국의 왕사망
10년후 동부여의 대소왕이 대무신왕이 이끄는 고구려군과의 전투에서 전사
20년후 - 세야누스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에 의해 국가반역죄로 처형당하였다
30년후 로마 황제 칼리굴라가 암살당했다. 이후 클라우디우스가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40년후
50년후 이케니족의 지도자 프라스타고스 사망 이후 로마 제국이 브리튼 섬을 점령하였다
60년후 로마군이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헤로디온 요새를 점령하였다
bc350년 연나라 상곡 공략,이후 전쟁 잦아짐
진나라 상앙의 2차 변법(變法) 실시로 120년후 한공략 10년통일전쟁의 기초를 다진다.
60년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 키지코스 해전에서 아테네군이 스파르타, 페르시아 제국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하였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군은 흑해 주변의 넓은 곡창지대를 획득하여 더욱 원활한 식량 조달을 꾀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아테네의 함대가 민주정으로의 복귀를 강하게 요구하면서 준과두정제였던 5000인 회가 다시 기존의 민주정 체제로 회귀하였다.
카르타고의 이베리아 반도 식민지가 분리 독립에 성공하여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 마고는 시칠리아로 눈을 돌려 이곳을 공격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50년전 기원전 400년경부터 위 사건 같이 제후가 천자의 권한을 침범하는 일이 발생한다. 주나라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백 년 전부터 이런 제후들의 탈선을 통제할 힘은 남아있지 않았고 춘추시대였다면 다른 나라의 제후들이 군사를 일으켜 통제했겠지만 이 시점부터는 그런 움직임도 없었다. 결국 주나라 천자는 자신의 권한을 침범한 사람들을 새 제후로 인정하는 사실상 항복 선언을 한다.
스파르타와 엘리스 간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무렵 그리스에서 캐터펄트가 발명되었다.
카르타고가 몰타를 점령하였다
40년전 망명 중이었던 독재관 카밀루스가 군대를 이끌고 들어오면서 다시금 로마에서 시가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며 브레누스의 골족은 퇴각하게 되고, 카밀루스는 제2의 건국자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로마 내에서 엄청난 칭송을 받게 된다.
이집트가 키프로스와 아테네와 동맹을 맺었다
30년전 이집트의 파라오 하코르의 사후 그의 아들 네페리테스 2세가 뒤를 이었으며 곧 넥타네보 1세가 왕좌를 빼앗았다. 이렇게 이집트 제29왕조가 막을 내리고 이집트 제30왕조가 시작되었다.
스파르타의 왕 아게시폴리스 1세 사망 이후 클레옴브로투스 1세가 새 왕이 되었다
20년전 스파르타가 아르카디아를 공격하였다. 아르카디아는 이에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것이 실패하자 테베에 도움을 요청했다. 테베의 에파미논다스가 이 도움에 응하여 군대를 이끌고 스파르타 군을 상대하러 왔다.
테베의 도움으로 아르카디아의 수도인 메갈로폴리스를 성공적으로 건설하고 민주주의를 확립시킬 수 있었다.
10년전 진 효공 2년(기원전 360년), 현왕은 사신을 보내 제사 지낸 고기를 보냈다. 이때 위의 재상 공숙좌가 죽자 그 식객 상앙이 진 효공이 구현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상앙이 진 효공의 측근인 경감을 통해 진 효공을 만나 성인의 도리와 왕도 정치에 대해 논하자 진 효공은 졸았다.그 뒤 진 효공에게 상앙이 자신의 주특기인 법가의 부국강병책에 대해 논하니 진 효공은 기뻐하며 그를 등용했다
스파르타 왕의 도움으로 넥타네보 2세는 테오스 왕을 이집트의 왕위에서 몰아내고 새로운 왕이 되었다. 테오스 왕은 망명길에 나섰다. 넥타네보 2세는 이 도움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스파르타에게 돈을 주었다.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오스 2세가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돌아오는 길에서 죽었다. 그의 사후 그의 아들 아르키다모스 3세가 스파르타의 왕이 되었다.
예루살렘이 재건되었다
10년후마케도니아 왕국의 왕 필리포스 2세가 비잔티움을 공격하던 도중 스키타이 군대에 의해 제지를 당했다. 이에 필리포스 2세는 스키타이의 군대와 싸웠고,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의 출정 기간 동안 마케도니아 왕국의 섭정으로 있었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이 로도스 섬을 점령하였다
20년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가 사트라프 아리오바르자네스가 이끄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세폴리스로 입성하여 크세르크세스 1세의 궁전을 불태웠다.
-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왕 다리우스 3세가 박트리아의 사트라프 베소스에게 살해당했다
위나라의 하서(河西) 지역을 정벌하였다. 과거에 위나라의 장수 오기(吳起)의 군대에 격파당한 곳이라서, 진나라는 큰 성과를 이뤘다
30년후 신정왕이 주나라의 왕이 되었다
기원전 320년), 진 혜문왕 사망
40년후마케도니아 왕국의 안티고노스가 장군 니카노르와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에게 바빌로니아 지방을 공격하라 명하였다. 그러나 니카노르는 티그리스 강에서 셀레우코스군에 의해 처참히 무너지고 데메트리오스 또한 셀레우코스군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바디모 강에서 로마군이 에트루리아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50년후기원전 300년 - 연소왕이 진개를 보내 고조선을 토벌한다
60년후 삼니움 전쟁 - 로마의 장군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가 삼니움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50년에 걸친 삼니움과의 전쟁을 끝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