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생기의 우리학교 VOL. 26 도쿄조고(東京朝高) 축구부(上)
(글 장혜순)
한 무대에서 싸워 4강에 빛나다
1955년, 도쿄조선중고급학교가 도립조선인학교였던 시절, 고급부 축구부가 제33회 전국고교 축구선수권대회에 출장해 4강에 빛난 적이 있다. 그 후 1996년에 조선학교의 공식전 출장이 가능해진 이후로 지금까지도 재일조선인 축구의 쾌거로 전해지는 ‘사건’이다.
- 제33회 전국고등학교 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도쿄조고 축구부 -
도립학교 시절에 태어난 도쿄조고 축구부
일본 정부가 1948년, 49년에 조선인학교 폐쇄령을 발령한 것은 일본 각지의 조선학교를 비합법적인 존재로 깎아내리고, 민족교육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조선인학교의 폐쇄 및 개조> 기한이었던 49년 11월 2일 이후, 조선학교측은 도쿄도 당국에 대해 재단법인 설립 절차를 밟아 사립학교로 인가를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쿄도는 자금부족 등을 구실로 부정적으로 대처하며 학교를 <도립화>시킬 준비를 착실히 진행해 갔다. 그리고 12월 17일, 결국 도쿄도는 <조선인학교 취급 요령>을 발령하고, 도내의 조선학교는 모두 도립화 시켰다. 이때 민족교육사상 특이한 ‘공립조선학교’가 존재하게 되었다. 조선학교에는 일본인 교원이 배치되고, 수업 언어는 일본어, 민족교과는 정식교과 과정 외에서만 실시하게 되었다.
도쿄조고 축구부가 생긴 것은 혼란기로도 일컬어지는 도립시대였다. 축구부가 만들어진 것은 52년, 이 학교에 체육교사로 부임한 김세동(金世烔, 1928년생)씨다. 제주도 태생으로 자이니치 1세인 김씨는 도쿄교육대학(현 츠쿠바대학)에서 공부한 후 교원의 길로 나섰다. 후에 조선대학교 축구부 초대감독이 되었던 자이니치 축구계의 중진이다. 김씨는 부임 2년 후인 54년에 도쿄조고 축구부를 만들고, 곧바로 공식전 출장을 목표로 힘을 쏟았다.
김씨는 대학 선배였던 당시 전국고등학교 체육연맹(고체연)의 마츠우라 토시오(松浦利夫) 축구부장에게 고체연 주최 대회에 출장을 요청한다. ‘도립고등학교니까 문제없겠지.’ 라며 두말없이 출장을 허가 받았다. 공식전에 출장 자격을 얻은 도쿄조고는 54년 여름에 열린 제3회 동일본 고등학교 축구 선수권대회(7월 31일~8월 5일, 97개교 참가)에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내며 준준결승까지 진출했다. 조고는 고교축구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샛별이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1월부터는 제33회 전국고교 축구선수권대회 출장을 목표로 도쿄예선에 나섰다. 당시의 조고축구부 부원은 서른 명 정도였는데, 주장을 맡은 3학년 허종만의장이 후에 도쿄교육대학에 진학했고, 북으로 귀국해 유명한 축구해설가가 된 이동규(故人)씨는 2학년이었다. 조고는 오오모리(大森)고교를 15-0으로, 분쿄(文京)고교를 3-0으로, 샤쿠지이(石神井)고교를 1-0으로 물리쳤고, 12월에 들어서는 치토세(千才)고교를 7-0으로, 오오이즈미(大泉)고교를 3-2로 이기며 연승을 거둔다.
드디어 맞이한 결승전 상대는 아오야마(青山)학원 고교. 오른쪽 날개 포지션을 맡은 허선수가 중앙에 패스로 찔러 넣은 공을 쫒아간 1학년 김명식선수가 골을 넣었다. 시합은 2-0, 압승을 거둔 조고는 도쿄의 연승팀으로 전국대회 출장 티켓을 거머쥐게 된다.
- 제33회 전국고교축구선수권대회, 준준결승전 모습 -
동포들로 가득 메워진 니시노미야(西宮)경기장
도쿄 예선을 연승으로 치르고 올라온 도쿄조고 축구부는 이듬해 55년 1월, 효고현에 있는 니시노미야 경기장에서 열린 고교선수권(참가교 20개)에 당당히 출장했다. 팥색 유니폼의 왼쪽가슴에는 선명한 ‘조고’ 마크. 1학년임에도 정규선수로 대회에 출장한 김명식씨는 개회식에서 기수를 맡았다.
“이 많은 관중을 보세요.” 김씨가 내민 사진에는 도쿄조고를 응원하는 많은 동포들이 찍혀있다.
“오사카의 여관에 숙박하고 있었는데, 출장을 기뻐한 간사이 지방 동포들이 매일같이 먹을 것을 갖다 주었죠. 사시미, 고기, 과자, 과일 등등. 그 때는 도교중고에 기숙사가 있었는데, 기숙사 밥만 먹었던 팀 멤버들이 특히 즐거워했죠.”
일본고등학교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 동포들과의 만남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센다이의 이쿠에이(育英)고교에는 4명 정도 동포선수가 있었는데, 숙소로 놀러 와 동일본선수권대회 이후로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이 대회에서 조고는 첫 출전인 시마바라(島原)고교와의 경기를 2-1로, 이어진 센다이 이쿠에이(育英) 고교전을 1-0으로 이기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앞으로 2경기만 이기면 우승이었다. 준결승 상대는 우라와(浦和)고교. 그러나 0-7로 패배를 맛보며 결승 진술의 꿈은 무너졌다. 경기 전날 동포들이 보내온 기름진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 배탈이 난 선수가 많이 나온 것도 화근이 되었다. 그럼에도 첫 출장에서 4강의 쾌거를 이룬 것은 학생은 물론 지도자들에게 커다란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감독인 김세동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일본에서 차별을 견디어 온 우리 1세들에게는 일본인과 같은 무대에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이 감개무량했어요. 우승했더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준결승에서 졌다는 그 사실이 기뻤지요.”
첫 출장에서 4강에 오른 저력은 무엇이었나
조고가 선수권대회에서 4강에 빛났던 때, 조선학교를 둘러싼 상황은 교육의 장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김명식씨는 말한다. “도쿄조선 제2초급을 졸업하고 도쿄중고에 입학한 것이 51년. 6.25전쟁이 한창이었죠. 어느 날, 고교생들이 전쟁반대 전단을 배포하러 거리에 나간 틈에 경찰이 학교를 습격해 왔어요. 학교에 남은 것은 중학생들뿐이었는데, 교문 앞에서 스크럼을 짜고 학교를 지켰어요. 그런데도 경찰은 도망치는 우리들을 곤봉으로 내려쳤죠. 겨우 중학생을 말이에요.” 완전무장한 경관대 500여명과 60여명의 사복경찰관에 의한 탄압, 난입사건의 기억이다.(51년 2월 28일)
1938년, 도쿄 에다가와(枝川)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난 김씨는 후에 재일조선축구단 주장을 했고, 은퇴 후인 71년부터는 도쿄조고 축구 감독을 16년간 맡아온 조고 축구부의 산증인이라 할 인물이다.
“소학교 시절, 늘 그랬듯이 선배들에게 아침 축구 연습을 알리러 가면 철모를 쓴 경찰들로 거리가 새까맸죠. 밀주 막걸리를 만드는 동포들을 노린 급습이었어요.(48년 7월 30일) 막걸리를 빼앗기면 증거가 되기 때문에 동포들은 항아리를 숨겼지요. 그 후 52년 5월에는 ‘메이데이 사건’ 때문에 활동가들이 많이 체포됐어요. 학교가 폐쇄당한 후에도 경찰들과의 싸움은 계속됐어요. 그 지경 속에서 축구를 했으니까 투쟁 정신과 민족에 대한 마음만은 강했다고 생각해요.”
에다가와에는 태평양전쟁 전에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동포들이 강제이주 당한 부락이 있었는데, 경찰의 탄압도 집중되었다.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고 자존심을 걸었던 축구. 그것이 4강 쾌거로 이어졌다고 김씨는 말한다. 그러나 조고의 전국대회 출장은 이때 한 번으로 끝나게 된다. (下로 이어짐)
*월간 <이어> 2017년 5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