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 시가 있는 시론3 41 문익환 목사와 동행했던 유원호 선생 별세
문익환 목사와 동행했던 유원호 선생 별세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하늘을 한번 바랍았다. 하늘은 아무런 말이 없었는데 1989년 3월 25일 문익한 목사와 유원호 선생이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치에 있어서 대혼란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일을 생각했다.
1989년 3월 27일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유원호 선생은 정치인이었다. 특히 광주 조선대학에서 수학했기에 1985년 12대 국회에서 고 김녹영 국회부의장 비서실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민주화운동을 하던 이들에게 있어서는 생소한 편이었지만 문익환 목사와 방북한 뒤에 전국적으로 알려진 정치지도자로 인식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노태우 정부에서는 재야 민주인사들과 야당을 고리로 탄압할 수 있는 빌미를 잡고 문익환 유원호 씨에 대하여 대대적인 선전을 했다. 당시에 언론은 노태우 정권의 언론이었다. 특히 문익환 목사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이었다. 일행은 1989년 4월 13일에 김포공항으로 귀국해 국가보안법 위반협의로 구속했다.
문익환 유원호 선생에 대한 언론 보도는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 김영삼 총재들에게는 정치에 있어서 관계가 있는 유력한 인사로 지목해 정치에 있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었다.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일을 생각한다면 당시대승적 보살의 역할을 했다고 본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역사성을 부여안고 살고 있는 재야 인들은 그날을 회상하면 가슴이 벅찬 시간을 맞이할 수 있다. 특히 불교계에서는 그러한 결단성을 보이지 않고 있음을 보면서 불교계에 반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불교계는 아직도 잠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민주화 통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결사를 하기도 했다.
민주화운동에는 참여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일궈 지만 통일운동에 있어서는 기틀을 잡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통일운동에 나서는 기초를 다지기 위하여 감옥에 가 있는 양심수 석방 운동에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감옥에 있는 비전향 장기수 선생에 대한 편지쓰기 면회하는 영치금 보내는 등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어떠한 고난도 탄압도 감수하는 것은 보살의 정신을 실현하려는 운동이라고 생각했던 역사다.
유원호 선생 방북 30주년을 넘어
유원호 선생 방북 30주년을 넘었다
그날에 우리는 새로운 지도자로
유원호 선생을 보았다
당시 얼마나 우리에게는 위대한 인물로
어떻게 그러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는지
감옥에 가 있는 동안에 가족들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역할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참으로 위대한 역할을 하고
조국 분단의 아픔을 치유할
통일운동의 선구자였다.
유원호는 민족의 역사를 새로 쓰고
분단의 역사를 거더 치유는 참 지도자
정치사에 영원히 기억하리.
역사여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었던 열사
조국 통일의 열사
언제나 우리들 가슴에 남아
분단의 장벽을 허문 꿈을
그날을 우리가 쟁취하세
2019년 10월 27일
진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