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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창세 26장-31장
<26,1-33 이사악 이야기 - 주님께 복받은 사람>
이사악의 두 아들이 태어나 성장한 이야기에 이어 이사악에 관한 여러 전승들로 이루어진 이야기가 소개된다. 처음 나오는 이야기는 기근에 얽힌 사연이다. “일찍이 아브라함 시대에 기근이 든 적이 있었는데, 그 땅에 또 기근이 들었다. 그래서 이사악은 그라르로 필리스티아 임금 아비멜렉에게 갔다. 주님께서 이사악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땅에 자리 잡아라”(26,1-2).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이사악도 기근을 만나 고생한다. 그런데 피신처가 다르다. 아브라함은 처음에 스스로 이집트로 내려갔는데, 이사악은 가자와 브에르 세바 사이의 그라르 땅으로 옮긴다. 그런데 좀 갑작스럽게 주님께서 처음으로 이사악에게 ‘나타나’ 시어 말씀하신다(2).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 이사악은 그라르 땅에 머문다. 이 지역은 가나안 땅에 속하지만,여기서 이사악은 나그네일 뿐이다. 그래서 이사악은 아내 레베카를 자기 누이라고 속인다. 현지인들이 자기를 죽일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여전히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임금이 레베카를 원하거나 데려가지 않으며, 하느님의 개입이 없다는 사실이다. 아비멜렉 임금은 레베카가 이사악의 아내임을 알게 된다. 레베카가 이뻤으므로 임금도 레베카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다.
아비멜렉이 말하였다. “그대는 어쩌자고 우리에게 이런 일을 저질렀소? 하마터면 백성 가운데 누군가 그대 아내와 동침하여, 우리를 죄에 빠뜨릴 뻔하지 않았소?”(26,10).
이사악은 이방인의 땅에 씨를 뿌려 백배의 수확을 거두면서 큰 부자가 된다. 이처럼 이사악이 필리스티아 땅에서 농경생활을 한다는 표현은 역사적 관점에서 기원전 12세기 이전에는 부합되지 않는다. 하지만 목축과 농경을 겸했던 고대 근동의 경제생활 보면 이런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풍요가 주님의 말씀과 강복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12). 그런데 복이 화로 바뀐다. 현지인들이 이사악을 시기하게 되어 아비멜렉이 그 땅에서 떠나라고 명령한 것이다(16).
뒤이어 우물을 둘러싼 세 차례의 다툼이 소개된다(17-25). 여기서 이사악은 농사짓는 큰 부자가 아니라 옮겨 다니며 천막을 치는 목자로 등장한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도 보았듯이 우물은 목축민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했기에 이를 둘러싼 싸움이 잦았고, 그 소유권은 양도될 수 있었다.
이사악의 경우도 그가 관계된 우물이 네 군데나 언급될 만큼 우물 이야기는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에섹( ‘싸움,다툼’ 의 뜻),시트나( ‘비난,괴롭힘’의 뜻), 르호봇(넓어짐’이란 뜻)과 시브아가 그것이다. 앞의 두 곳은 모두 우물을 두고 그라르의 목자들과 다툰 사연을 보여주는 데 반해, 르호봇은 ‘넓은 곳’ 을 마련해 주선 주님을 찬양하는 이름이다(22). 주님께서 늘 쫓기듯 사는 나그네에게 생존에 꼭 필요한 우물을 계속 마련하시어 숨쉬며 살 여건 을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다. 우물은 눈에 띄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복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사악은 애써 마련한 르호봇을 떠나 브에르 세바로 올라간다. 이어 그곳에서 벌어진 세 가지 사건이 기술된다. 첫째는 주님께서 다시 나타나신 일이다. 둘째는 주님께서는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느님”으로 소개한다. 그리고 셋째는 많은 후손과 복을 약속하신다(24). “그날 밤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나의 종 아브라함을 보아서, 내가 너에게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의 수를 불어나게 하겠다”(26,24).
이사악은 아버지와 같이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뜻으로 그곳에 제단을 쌓고 예배하였다(25). 그리고 그의 종은 거기에서도 우물을 팠다(25L). 그리고 이사악은 아비멜렉과 야후잣 그리고 장수 피콜이 찾아와 만난다. 이사악은 그들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그런데 그들은 이사악이 주님의 축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공식적으로 계약을 맺는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계시는 것을 똑똑히 보았소. 그래서 우리 사이에, 곧 우리와 그대 사이에 서약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였소. 우리는 그대와 계약을 맺고 싶소. 우리가 그대를 건드리지 않고 그대에게 좋게만 대해 주었으며 그대를 평화로이 보내 주었듯이, 그대도 우리한테 해롭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오. 이제 그대는 주님께 복 받은 사람이오”(26,28-29).
지금 나그네살이하는 이사악과 필스티아 임금이 대등한 자격으로 계약을 체결한다. 그 이유는 이사악의 남다른 위력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계시고"(28) “주님께 복받은 사람” (29절)이기 때문이다. 아비멜렉은 그 사실을 알고 인정하게 된 것이다.
계약을 맺은 “바로 그날” 이사악은 또 다른 우물을 발견하였다. “이사악은 그 우물을 스브아라고 하였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그 성읍의 이름이 브에르 세바이다”(26,33). 이사악은 주님께서 맹세한 바를 지키셨다 하여 시브아(맹세란 뜻)라 명명한다. 왕정 시대에 이스라엘의 영토가 흔히 ‘단에서 브에르 세바까지’ 로 일컬어지듯이,브에르 세바는 네캡 남부에서 매우 중요한 성읍이었다.
<26,34-28,9: 에사우의 혼인과 야곱의 도망 - 축복까지 가로채다>
흥미롭게도,26장의 이사악 이야기에는 무척 성장했을 두 아들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가 끝난 뒤에야 에사우의 혼인이 소개된다. 에사우는 아버지처럼 나이 마흔에 혼인하는데, 배우자가 모두 히타이트 여자 곧 가나안 땅의 원주민이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친족과 혼인시키려고 애쓴 반면(24장), 여기서는 이사악 대신 에사우가 주체적으로 일을 저지른다. 이 일이 부모에게 근심거리가 되었다는 표현(35절)에서, 사려 깊지 못한 에사우의 모습이 또 다시 드러난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부분에는 유다를 괴롭힌 에돔에 대한 비난이 담겨 있으며, 유배 이후에 대두된 이방 여인과의 혼인 금지 규례가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늙어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48,10참조) 이사악은 에사우를 “내 아들아’ 하고 부르며, 축복을 받기 위해 준비하라고 이른다(2-4). 그 준비는 사냥을 해서 별미를 만들어 오는 것이다. 이사악은 여전히 고기를 즐기며 에사우를 편애한다. 에사우도 맏아들 권리를 판 일(25,29-34)과 상관없이 아버지 뜻에 따라 복을 받으려고 사냥하러 떠난다.
이사악의 “눈이 어두워 잘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이야기의 주요 모티브로 작용한다. 구약성경에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남기는 유언은 매우 큰 의미를 지녔다. 유언에는 단순한 상속 문제를 넘어 헤어질 때처럼(24,60) 축복이 포함되었다. 이 축복의 말과 행위를 통해 죽어가는 사람이 받은 복과 생명력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옮겨지는데, 그 힘은 총체적이어서 다시 되돌리거나 변경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본문에서 축복하는 주체는 축복을 주는 ‘영’으로,자신이 지닌 생명력,온마음 온존재를 다해 축복한다는 뜻이다. 축복은 가족 내의 한 사람에게만 내렸으나, 중요한 인물의 경우 부족과 관련되거나 이스라엘 백성과 연결되었다.
레베카는 이사악의 말을 엿듣고 야곱에게 말한다. 그에게 “내 아들”은 곧 야곱이었다(8.13). 여기서 모든 일을 꾸미고 실행하는 주역은 야곱이 아니라 레베카다. 레베카가 저주까지 받겠다며 이런 속임수를 쓴 까닭은 단지 사랑하는 아들에 대한 눈먼 모성애인가, 아니면 주님의 신탁을 이루려는 믿음의 행위인가?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앞의 흐름으로 보면 후자이다. 레베카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민감하였고 단호하게 응답한 여인임을 알 수 있다. 야곱 역시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받자는 어머니의 계획에 동의하지만, 단지 살갗이 매끈하여 아버지께 들킬지 모른다는 걱정만 할 따름이다.
마침내 야곱은 모든 준비를 갖추고 아버지에게 간다. 과연 이 속임수는 통할 것인가? 긴장이 고조된다. 그는 에사우로 자처하며 “아버지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잘되게 해 주셨다고 거짓말한다(19-20). 어쩌면 야곱은 뜻하지 않게 하느님의 뜻을 밝혔는지 모른다. 이사악은 오감으로 그를 확인한다. 눈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는 야곱인데, 고기 맛이나 옷 냄새, 만져본 손의 털은 에사우였다. 이렇게 상대방을 확인하고(24) 식사를 하며(25) 입을 맞추는 등,선체를 접촉하여 생명력을 전하는 것은 축복의 단계이다. 마지막으로 축복의 말을 준다.
“그가 가까이 가서 입을 맞추자, 이사악은 그의 옷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였다. ‘보아라, 내 아들의 냄새는 주님께서 복을 내리신 들의 냄새 같구나.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하늘의 이슬을 내려 주시리라. 땅을 기름지게 하시며 곡식과 술을 풍성하게 해 주시리라. 뭇 민족이 너를 섬기고 뭇 겨레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는 네 형제들의 지배자가 되고 네 어머니의 자식들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27,27-29).
이사악이 야곱에게 준 축복의 말은 네 가지이다.
첫째는 복을 내리신 들의 냄새로 풍요를 상징한다.
둘째는 땅의 비옥함과 풍성한 소출이다.
셋째는 뭇민족을 다스리고 형제의 지배자가 되는 정치적 우위권이다.
넷째는 아브라함에게 처음 주었던 축복의 보존과 동일하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에게는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12,3).
야곱의 속임수는 성공했다. 야곱이 아버지 앞에서 물러나자마자 에사우가 들이닥친다. 출생 순서가 역전되었다. 에사우는 “아버지의 아들, 아버지의 맏아들(32)이라고 알리며 아버지의 축복을 호소한다. 하지만 비록 속임수로 준 축복이지만 한 번 준 축복은 확정적이며 번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에사우는 큰소리로 울부짖는다. 야곱은 처음에는 콩죽 한그릇의 협상을 통해, 두 번째는 속임수로 에사우의 권리를 가져간 것이다. 에사우는 “아버지 아버지께는 축복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까? 아버지, 저에게, 저에게도 축복해 주십시오”(38). 그런 다음 에사우는 목 놓아 울었다. 그러자 아버지 이사악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네가 살 곳은 기름진 땅에서 저 위 하늘의 이슬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리라. 너는 칼을 의지하고 살면서 네 아우를 섬기리라. 그러나 네가 뿌리칠 때 네 목에서 그의 멍에를 떨쳐 버릴 수 있으리라”(27,39-40). 에사우가 비록 기름지지 않은 목초지라도 살아갈 수있도록 해준다.
속임수는 위험했다. 에사우는 이 일로 앙심을 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카인처럼 동생 야곱을 죽이려고 마음먹었다(41). 이 마음속의 에사우 말을 전해 들은 레베카는 사람을 보내 야곱을 불러 “얼마 동안” 외삼촌 집에 가 있으라고 이른다. 사실 에사우가 야곱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어 친척들과 부족의 복수를 받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두 형제가 모두 죽는다(45). 레베카가 이사악을 속인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았다. 야곱은 궁여지책으로 ‘잠시’ 피해 있으려고 떠났지만 그 기간은 무려 20년이었다. 레베카는 그를 두번 다시 만나지 못했으며, 홀로 책임지고 이 아픔을 견뎌야 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의 초점은 다시 자식들의 혼사로 모아진다. 축복을 둘러싼 형제간 싸움은 묻히고 에사우의 혼인이 재론되면서 야곱의 혼인 문제가 대두된다. 문제를 제기한 이는 레베카이다. 히타이트 며느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그는 이사악에게 야곱이 히타이트 여자와 혼인하지 않게 해달라고 말한다. 또 다른 레베카의 계획이다. 이사악 역시 그것이 근심거리였기 야곱을 불러 축복한 다음 외숙 라반의 딸들 가운데서 아내를 맞으라며 떠나보낸다.
이때 야곱은 야반도주하지 않고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며 당당하게 파딴 아람으로 떠난다. 아무튼 떠나는 야곱을 지켜본 에사우는 그를 본 따서 다시 이스마엘의 딸인 마할닷과 혼인함으로써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쓴다. 야곱이 어머니 친족에서 아내를 찾았다면 에사우는 아버지 친족 중에서 아내를 고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브라함의 상속을 이어 받지는 못했다. 왜 그랬을까? 현재 본문의 맥락에서는 그가 가나안 여자와 혼인했기 때문이다. 친족과 혼인했느냐 여부가 아브라함을 통해 주는 하느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28,10-22 : 야곱의 꿈과 하느님 체험 - 하느님의 집에서>
지금까지 아버지 이사악 집에서만 지냈던 야곱은 브에르 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한다(약740킬로). 처음 가는 낯선 길이다. 하란에서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lOOkm 정도 왔다. 날이 저물어 어떤 곳(maqom -ll절에 세 번 나오는 이 히브리어는 흔히 ‘성소’를 뜻한다)에서 노숙하는데, 그 밤에 놀라운 꿈을 꾼다. 일종의 환시이다. 하늘과 땅을 잇는 층계가 서 있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위를 오르내린다. 하늘과 땅이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야곱 곁에 서서 말씀하신다.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이사악의 하느님인 주님이다. 나는 네가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네 후손은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고, 너는 서쪽과 동쪽 또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땅의 모든 종족들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28,13-14).
그분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이사악의 하느님인 주님(야훼)"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신다. 이어 아브라함과 이사악에게 약속하신,땅과 후손 및 모든 종족에 대한 복을 야곱과 그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이르신다. 이는 야곱이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의 계승자가 되리라고 밝히시는 것이다. 그가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받았지만,하느님께서는 은총으로 복을 주시며 약속하신다. 야곱이 떠나온 그 땅까지 주겠다고 하신다. 계속해서 주님께서는 야곱과 함께 계시며 그를 지켜 주고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시겠다는 개인적인 약속까지 하신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하면서, 두려움에 싸여 말하였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16-17).
잠에서 캔 야곱은 자신이 아무런 의식 없이 잠잤던 그곳이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임을 깨닫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하느님이 계시는 곳은 사람에게 금지된 장소 곧 성역(聖域)이며, 성역을 침입한 자는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거룩함을 체험하고 신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그는 베개로 썼던 돌을 기념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붓는다(18). 고대에는 주술적 힘을 가졌다고 믿는 신령한 돌을 세우고 숭배하곤 했다. 가나안에서도 하나의 제의로 기념기둥을 세워 예배한 예가 잦았다. 모세와 여호수아도 이러한 기념기둥을 세웠다(탈출 24,4; 여호 24,26). 야곱도 돌을 세워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증거하고 기념하면서, 이곳이 거룩한 자리임을 표시한다. 야곱은 이곳을 하느님의 집 베텔(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중요한 성소였다)이라고 명명한다.
야곱은 그 자리에서 이렇게 서원한다. 먼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한 약속을 지키신다면, 즉 “함께 계시면서 지켜 주고 마련해 주시며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하는 조건을 붙인다. 그 조건이 이행되면 주님(야훼)을 하느님으로 모시고 그곳을 성소로 삼으며,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한다(21-22). 이 서원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길다(민수 21,2; 판관 11,30; 1사무 1,11; 2사무 15,7-9 비교). 여기서 우선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은 야곱의 서원이 성취되면서 베텔이 주님의 성소가 되었다는 점이다.
야곱의 베텔 이야기는 고대의 종교관을 잘 드러낸다. 거룩하신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층계나 문 등으로 땅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분이 땅에 나타나시는 특정한 장소에는 성역임을 알리는 기념물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도 이러한 성소 믿음을 공유하였다.
베텔 사건은 야곱의 생애에서 전환점을 이룬다. 베텔은 야곱이 가나안 땅에서 나가고 들어오는 문과 같은 구실을 한다. 베텔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 충격적인 만남을 통해 야곱은 조심스럽게 그분을 의지하며 관계를 맺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된다. 지금은 발걸음을 떼는 걸음마 단계이지만, 점차 그 변화는 두드러질 것이다. 이제 곧 닥칠 고난과 사랑 속에서 변화는 이루어진다.
<29,1-32,1 야곱과 라반 : 속고 속이는 갈등 속에서>
이제 무대는 “동방인들의 땅”에 있는 라반의 집안이다. 야곱은 외숙부 라반과 갈등을 빚으며, 그의 두 딸과 혼인하여 자식을 낳고 재산을 불린다. 낯선 땅에서 나그네살이 하는 야곱의 이십 년 세월은 라반과의 관계와 자녀 출산 이야기로 진행된다.
베텔에서 하느님을 만난 야곱은 다소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겨, 마침내 동방인들의 땅에 도착한다. 여기서 동방인으로 지칭하든 이들은 가나안 지역의 동쪽 또는 북동쪽 시리아 아라비아 사막 주변에 사는 부족을 가리킨다. 하란에서 왔다는 그들을 들의 우물가에서 만난 야곱은 라반의 안부(살롬)를 묻는다(6절). 때마침 라반의 딸 라헬이 양떼를 데리고 우물을 찾는다. 기막힌 우연인가? 주님의 이끄심인가? 그 당시, 아들이 없거나 어린 경우에는 딸들도 목자일을 거들었다. 야곱은 외사촌을 보자 우물을 열어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친척으로서 라헬과 입을 맞추며 목 놓아 울었다.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그는 라헬에게 자기 신분을 알리고, 라헬은 급히 아버지에게 알린다.
골육으로서 환영 받으며 라반의 집에 머물게 된 야곱은 라반에게 라헬과 혼인하고 싶다고 청한다. 하지만 야곱은 도망쳐 온 처지라 넉넉한 신부값을 지불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신부를 맞기 위해 제안한 칠 년간의 노동은 상당한 대가이며 결코 짧지 않은(31,38-41 참조) 기간이었다. 라반은 사촌이 최우선의 구혼자라는 당시의 관습(아랍인 사이에서도 아내는 흔히 ‘삼촌의 딸’ 이라고 불린다)에 따라 야곱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제 야곱과 라반은 대등한 친척 관계에서 조건부로 일을 해야 하는 주종관계로 변화되었다.
야곱은 라헬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칠 년간의 노동을 며칠로밖에 여기지 않았다(20). 약조한 때가 되었을 때 라반은 큰딸 레아를 야곱에게 데려다 결혼시킨다. 다음날 아침에야 진상을 안 야곱은 비통하게 외친다. “저에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25). 야곱은 또 묻는다.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 자기 형을 속였던(27,35) 그로서는 뼈아픈, 모순된 물음이다. 라반은 답한다. “우리 고장에서는 작은딸을 맏딸보다 먼저 주는 법이 없다”(26). 맏이의 권리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야곱은 첫 번째 큰 좌절을 맛본다. 라반에게 멋지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라반은 라헬과 혼인하는 대가로 다시 칠 년 동안 일할 것을 제안한다. 라헬을 사랑하는 야곱으로서는 결코 뿌리칠 수 없는 제안이다. 결국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십사 년을 일해야 했고, 본의 아니게 두 아내를 두게 되었다. 이로써 야곱과 라반, 라반과 라헬, 레아와 라헬 간에 갈등이 생겨나 이후의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라반이 자기보다 약한 야곱과 두 딸의 희생 위에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에, 갈등은 점차 심해지면서 이들 사이의 평화(살롬)가 깨어진다.
<29,31-30,24: 야곱의 자녀들 -아들 열한 명과 딸 하나>
야곱은 레아를 사랑하지 않았다. 원하지 않은, 속아서 맞이한 아내였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의 사랑에서 소외된 레아의 아픔을 주님께서 헤아리시어 그의 태를 열어 주신다(31-33절). 그래서 남편의 사랑 대신 자식을 주신다. 반면에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지만, 사라와 레베카처럼 “임신하지못하는 몸”이었다(31). 레아와 라헬은 가지고 싶으나 가질 수 없는 서로 엇갈린 처지로 고통스러워한다(1사무 1장 참조). 고대에서 부인의 자리를 결정하는 것은 남편의 사랑과 아들의 존재였다.
따라서 레아와 라헬은 각자 자기 몸종까지 동원하여 많은 자식을 얻으려고 경쟁한다. 이를 뚜렷이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합환채 사건이다. 르우벤이 가져온 합환채는 지중해변에서 자라는 풀로서 줄기가 없고 넓은 잎에서는 냄새가 나며 누런 열매를 맺는다. 마술적으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마취나 성욕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다고 여겨졌다. 사양말로 ‘사랑 사과’라고 한다. 결국 레아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아들 여섯과 딸 하나를 낳고, 나중에 몸
종 질파를 통해 아들 둘을 더 얻는다.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받는 대신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불임녀 라헬이 자기 아이를 출산한 것은 “하느님께서 라헬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22절). 라헬이 기대하지 않았던 아니 기대할 수 없었던 요셉을 낳자, 야곱은 그를 놀라운 선물, 덤으로 여기면서 이곳에서 자녀의 축복을 충분히 받았다고 느낀 듯하다(벤야민의 출생은 35,16-20에 나온다). 그리하여 야곱은 처음으로 귀향할 생각을 한다.
각 아들의 이름에는 그 이름을 지은 어머니의 처지가 반영되었다. 아이들의 이름에서 우선 드러나는 점은 레아의 믿음이다. 그는 불우한 처지에서 하느님께 울부짖었고,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의 복과 자비를 자녀 이름에 담았다. 하느님께서 보시고(르우벤) 하소연하는 소리, 호소를 들으시고(시메온), 좋은 선물(즈불룬)을 주시니 찬송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유다). 그래서 레아는 가장 풍성한 지식복을 받은 시조모, 다윗 왕조를 이룬 유다 지파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인 레위 지파의 으뜸 시조모가 된다.
불임의 고통을 겪던 라헬 역시 뒤늦게 출산하며 더 달라고 청하는데(요셉), 후에 요셉 대신 야곱의 아들로 들어오는 므나쩨와 에프라임(48,5-7)을 통해 북이스라엘 왕국의 시조
모가 된다. 결국 두 자매의 시기와 다툼 속에서도 하느님의 자비로 가족은 늘고 번성한다. 인간의 한계로 편애와 불공평, 갈등과 분쟁이 그치지 않지만, 사람들의 삶 깊숙이 작용하고계시는 하느님께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 주신다.
<30,25-43 : 대단한 부자가 된 야곱 - 주님께서 복을 내리시어>
자녀의 복은 충만하게 받았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까지 아들 요셉을 낳자, 야곱은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게 해달라고 라반에게 청한다(25). 야곱이 라반에게 속한 일꾼 신분이라 아내와 아이들도 주인에게 속해 있으므로 그에게 “내주시”라고 청하는 것이다(26절; 참조 31,43: 탈출 21.2-4). 야곱의 이 말로써 야곱-라반 이야기는 큰 전환점을 맞는다.
라반은 오히려 야곱에게 청한다.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주게나"(27절). 점을 쳐 보니, 주님께서 야곱 때문에 자신에게 복을 주셨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2사무 6.12 참조). 그의 가정에 야곱은 복의 원천이었다. 라반은 야곱 일가가 떠나면 복도 사라지고 노동력도 큰 손실을 입기에, 어떻게든 그들을 잡아두려고 협상에 나선다. 그래서 야곱이 품삯을 정하면 그대로 주겠다고 제안한다(28절). 지금까지 자기가 품삯을 정했으면서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는 말이다(31,7).
야곱 역시 주님 덕분에 라반의 재산이 크게 불어났음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얼룩지고 점박힌 양과 염소, 검은 새끼양을 제 몫으로 달라는 상당히 묘한 청을 한다. 근동에서 대체로 양은 희고 염소는 검기 때문이다. 라반은 얼른 이 청을 받아들인 후 즉시 가축 떼 중에서 얼룩지고 점 박힌 양과 염소를 모두 빼돌린다(35절). 게다가 ‘사흘 거리로 떼어 놓아’ 전혀 오갈 수 없게 한다. 라반은 또 다시 ‘정직한’ 야곱(33절)을 속이려고 한다. 야곱이 어떻게 대응할까?
야곱은 은백양나무와 편도나무와 버즘나무의 싱싱한 가지의 껍질을 벗겨 하얀 부분이 드러나게 하였다. 그 가지들 앞에서 짝짓기 하게 하여 줄쳐진 것, 얼룩진 것, 점 박힌 양과 염소를 낳았다. 이 이야기의 배경에는 짐승들이 교미할 때 받는 시각적인 인상이 새끼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람들의 생각이 깔려있다. 여기서 야곱은 영악한 목자로 그려진다. 그는 자기의 품삯을 열 번이나 바꿔 치는 장인의 계교에 대응하여 자기의 몫을 차지한다. 그의 방법은 적중하여 육 년 동안(31,42) 그의 몫이 되는 얼룩 양과 염소가 무척 많이 불어났다.
<31,1-32,1 : 라반과 헤어진 야곱 - 네 본고장으로 돌아가거라>
양과 염소들이 짝짓기하는 시기 곧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될 때, 부유해진 야곱은 귀향할 결심을 굳힌다. 계기는 세 가지이다. 하나는 야곱의 재산에 대한 라반 아들들의 불평이고, 둘째는 전과 같지 않은 라반의 태도이다. 야곱의 재산이 그들의 시기와 질투, 미움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셋째는 어디서나 함께 있을테니 네 조상들의 땅으로 가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야곱은 두 아내를 따로 불러 가나안으로 떠날 것을 협의한다.
라헬과 레아는 아버지 집에서 자신들이 얻을 몫이 없다고, 그동안 라반이 자신들에게 줄 자참금을 다 썼다고 비난한다. 야곱은 십사 년 노동의 형태로 신부 값을 치렀는데 그중의 한 몫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라반에게서 거두신 재산은 모두 “우리와 우리 아들들의 것”이므로,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가나안으로 떠날 것에 동의한다. 이제 딸들도 라반을 배척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야곱은 모든 가족과 재산을 모아 파딴 아람에서 아버지 이사악에게 돌아가기로 하였다.
야곱은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나간 틈을 타(보통 그 기간과 거리는 사흘길이다.22절; 30,36 참조) 감쪽같이 라반을 속이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가나안을 향해 도망친다. 유목민과 목축민들에게 양털을 깎는 일은 매우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에 며칠 동안 먹고 즐기며 잔치를 벌였다(2사무 13,23-27 참조). 야곱과 그 가족이 여기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라반이 그들을 ‘이방인처럼 여겼다’(15절)는 레아와 라헬의 항의를 입증한다. 이때 라헬은 아버지의 수호신을 훔쳤다(19절). 수호신은 사람 모습으로 만들어 집안에 모셨던 작은 가신상(家神象)이다. 수호신상은 그 집안의 가족 제의에 쓰였으며, 가장에게 계속 상속되면서 그 집안의 연속성을 보증해 주는 역할을 했다.
사흘 뒤에야 야곱의 도망을 알게 된 라반은 이렛길을 달려 요르단 동편 북부의 길앗 산악지방에서 그를 따라잡는다. 그들은 각각 천막을 치고 대립한다.
라반은 먼저 야곱이 몰래 도망친 일(26-28절)을 질책하나, 하느님의 계시를 들어 더 이상 공박하지 않는다(24.29절). 하지만 자기 수호신을 훔친 일은 비난한다. 야곱은 아내들을 빼앗길까 두려워서 몰래 도망쳤다고 해명하면서, 수호신을 훔치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31-32절). 훔친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고까지 극언한다. 라반은 야곱네 천막을 샅샅이 뒤졌으나 수호신을 찾아내지 못한다(세 차례나 언급된다: 33.34.35절). 여기서 창세기 저자는 수호신상이 달거리하는 여인이 앉아 있는 낙타 안장 속에 들어 있다고 묘사함으로써 이방신상의 무력함을 희화적으로 보여준다(34절).
이제 사태가 반전된다. 도망자 야곱이 화를 내며 라반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항변하기 시작한다. 제가 무엇을 잘못하였습니까?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 ." (36절). 그는 예전의 야곱이 아니었다. 이십 년 동안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면서 받은 온갖 고통과 손의 고생, 특히 품삯을 열 번이나 바꿔치기한 라반의 불의를 토로하는 야곱은 분노에 차 있다(38-42절). 라반의 모든 행위는 그 당시에 있었던 목자에 관한 법규 (탈출 22,9-13)를 위반한 중대한 범죄였다. 그러나 약자인 야곱은 이를 바로 잡을 수 없었다. 다만 하느님만이 약자 야곱을 대신하여 정의를 세워 주셨고, 가족과 재산을 지켜 주셨다. “제 아버지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두려우신 분께서 제 편이 되어 주지 않으셨다면, 장인어른께서는 저를 틀림없이 빈손으로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저의 고통과 제 손의 고생을 보시고, 어젯밤에 시비를 가려 주신 것입니다”(31,42)이라는 야곱의 외침은 불의와 고난의 현장에서 울부짖는 의인의 통렬한 고발이요 신앙고백이다.
라반은 여전히 야곱의 가족과 재산이 대 것 이라고 주장한다. 아내를 빼앗길까 두려워한 야곱의 걱정(31절)은 결코 기우가 아니었다. 하지만 라반은 뜻을 바꾸어 딸들을 확실히 보호하기 위하여(50절) 또 나쁜 뜻으로 서로 침략하지 않는다는(52절) 조건으로 계약을 맺자고 제안한다(44절 이하). 이 계약은 일반 계약이라기보다 특정 사항에 대해 체결하는 특수 계약이다. 그들은 돌 기념 기둥(45절)과 돌무더기(48절)를 계약의 증인으로 삼고, 주님을 계약의 또 다른 증인으로 모셨다(49절). 그래서 이곳을 갈엣( ‘돌무더기/언덕 증인’) 이라고 하고,또는 미츠파(망보는 곳)라고 불렀다. 그들은 각자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나호르의 하느님을 두고 맹세한다. 이로써 야곱과 라반 사이의 갈등은 해소되고 음식을 함께 나눈(54절) 다음, 라반은 딸과 손자들을 축복해 주고 돌아갔다(32.1 : 처음 만날 때 와 달리 야곱에게는 입맞추지 않는다).
야곱은 장가들기 위하여 라반의 집에 왔지만,여기서 아내와 자녀들만 얻은 것이 아니라 힘든 노동과 속임수, 불의 같은 비열한 현실과도 싸워야 했다. 골육으로 시작된 야곱과 라반 관계는 가족과 재산을 둘러싼 사회 경제적 이해관계로 변형되고, 이렇게 불의한 지배 종속 관계에서 정의와 평화는 사라진다.
이 비뚤어진 관계를 바로 잡아 정의를 세우고 축복을 나누며 공존하는 관계로 바꿔 주신 이는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야곱과 함께 계시면서(41 L-42절) 그의 집안에 있는 갈등과 다툼을 서서히 변화시키신다. 고래 심줄같은 사람의 고집을 무엇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사랑과 고통,그리고 은총만이 가능하다. 라헬에 대한 뜨거운사랑, 낯선 현실에서 겪는 깊은 고통,조금씩 눈 뜬 하느님 체험을 통해 야곱은 성장하고 변화된다. 이렇게 고통받는 이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시편에 보이는 의인들의 탄원과 예언자들의 사회적 고발에서 계속 드러나며,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를 일깨워 준다. 오늘날에는 정의를 외면하는 힘을 통제하기 위해 법 규범이 강조된다.
하지만 정의에 기초하지 않는 법은 또 다른 폭력에 불과하다. 정의로운 계약 관계로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서로 축복을 나눌 때 공동체의 안녕과 평화는 유지된다. 따라서 조화로운 삶을 보장하는 정의로운 법 규범을 위해 하느님 백성의 예언자 역할은 계속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