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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진짜 교회1-부르심>의 줄거리: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은 누가의 특별한 의도 속에서 단지 한 끼 먹고 배부른 해프닝으로 끝나질 않습니다. 바로 뒤의 베드로의 고백과 연결 짓고 있음을 볼 때, 사람의 모임이 단순히 무슨 단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교회로 성립 되게 하는 부르심의 사건으로 본 것입니다. 이 부르심이 대체 무엇으로부터의 부르심인지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짜 교회(I) - 부르심
(눅9:10-17)
10.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12.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15.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진짜 교회1-부르심>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우리가 어제는 ‘진짜 처음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12제자를 불러 모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님의 위치를 나누어주셨다.
그분의 능력과 그분의 권세를 허락하셨다.
그래서 12제자가 나가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실제로는 예수님이 움직이시는 것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첫 번째 태동을 알리는 말씀이다.”
그렇게 태동을 알린 누가는 다시금 언뜻 보면 전혀 교회론과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사건들을 마태와 마가에서 갖다가 기록하지만, 전혀 다르게 누가의 특별한 의도 속에서 가져다가 접목을 시킵니다.
우리가 내일 살펴보게 될 가이사랴 빌립보 지경에서 행한 베드로의 유명한 고백이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과 붙어서 나옵니다.
마태도 마가도 요한도 이렇게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특별한 의도가 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9장은 교회 장(章)이라고 해도 될 만큼, 성령에 이끌려가는 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누가가 교회를 염두에 두고 썼다고 보여 집니다.
누가가 교회를 염두에 두고 예수님의 공생애 때 일어난 사건들을 교회의 의미를 밝히기 위하여 연결시키며 편집을 했다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교회에 대한 관심이 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고백을 오병이어에 가져다 붙였다는 얘기는 무엇을 말하느냐?
누가가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볼 때, 교회라는 것은 베드로의 고백을 입에 담는 사람들이고, 베드로의 고백을 하게끔 하려고 불러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부르심의 사건에 해당되는 위치에 오병이어의 사건을 넣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부르심이라는 것의 내용이 무엇인가, 무엇으로부터의 부르심인가?
우리가 사람을 부르면 저기 있던 사람이 자기가 있던 자리를 떠나서 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부르심을 받아서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무엇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냐 하는 것을 오늘 누가가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확인시켜주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 9장의 내용을 가지고 몇 차례에 걸쳐서 진짜 교회가 무엇이냐를 우리가 한번 살펴
봅니다.
‘진짜 교회가 무엇이냐?’라는 주제를 놓고 얘기할 때 신학자들이 말이 많습니다.
가시적인 교회, 불가시적인 교회, 사건으로서의 교회, 조직으로서의 교회, 말이 많아요.
그런데 이렇게 사변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우리 평신도들, 보통 교인들이 내가 다니는 교회가 진짜 교회다, 아니다 라는 것을 어떻게 느끼며 살아갑니까?
우선은 그냥 기성교단에 속해 있는 것, 나는 장로교회에 속해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기독교장로회, 장로교 중에서도 통합에 속해 있다, 감리교에 속해 있다, 성결교에 속해 있다.
이렇게 기성교단에 속했으면 진짜 교회가 아니겠느냐?
이런 느낌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 목사님이 문교부에서 인정한 정통 신학과정을 마치신 분이다, 우리 목사님이 외국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따셨다, 그리고 우리 목사님은 인간적으로 좋으시다.
아니면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사람이 우리 교회에 나온다, 저런 사람이 나오는 교회라면 잘못될 리가 있겠느냐?
뭐 이런 느낌을 가지고 내가 다니는 교회가 진짜 교회라고 다들 막연하게 생각하면서 다니고 있는 겁니다.
우리 그러지 말고 말씀이 진짜 교회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하는가를 보자는 거예요.
누가복음 9장 말씀이 어떻게 보면 최초의 교회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이렇게 쓱 훑어지나가다 보면 이게 무슨 교회와 관계가 있는 얘기냐고 하겠지만, 분명히 마태는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서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는 교회,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처음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의 고백을 누가가 오병이어에 붙였다는 얘기에요.
자, 그러면 이러한 누가의 의도 속에서 나타나는 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인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부르심은 무엇으로부터의 부르심일까요?
오늘 오병이어의 사건이 빈들에서 남자만 5천 명,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치면 만 오천 2만 명까지도 추산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나오면 아이들이 다 따라 나와야 되니까.
또한 오병이어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도 아이였음을 우리가 염두에 둘 때, 만 오천에서 2만 명까지 추산할 수 있는 많은 사람이 빈들에 모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 집중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 아무도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는데, 도대체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해가 저물어서 이제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먹을 것을 걱정하며 얘기합니다.
사람들은 전부 예수님께 집중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어디서? 빈들에서.
그리고 빈들에서 예수님께서 그들 스스로가 먹을 것을 걱정하고 있지 않는 상태에서 먹을 것을 해결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부르심의 내용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왜 부르심의 내용입니까?
단순히 교회를 출입하는 것으로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떠나야 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떠나야 부르심을 받은 겁니다.
그런데 부르심의 내용이 오병이어로 기록된 것은, 이렇게 부르심을 받았다는 내용이에요.
빈들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얘깁니다.
빈들이라는 것은 생업에 종사할 수 없는 현장입니다.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할 수 없는 곳이 빈들입니다.
먹고 사는 것을 우리가 노력하고 해결할 수 없는 빈들로 우리를 불러내시고, 그곳에서 주님께서 먹을 것을 해결해 주십니다.
이게 바로 부르심의 내용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이제는 먹고 살아야 된다고 하는 생업의 문제로부터 떠나와야 된다는 얘깁니다.
먹고 사는 것이 과제가 아닌 상태로 부르신 것입니다.
먹고 사는 것을 내가 애써서 해결해야 되는 지점으로부터 빠져나와야 부르심을 받은 것이고, 생업의 문제를 전혀 염려하지 않고 예수님께 집중하는 자들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인들이라고 하면서 목사님 장로님부터 모두가 다 먹고 사는 것을 문제로 삼고, 잘 먹고 잘살자고 얘기하고 있다면 그 교회는 목사님이 아무리 문교부 인가를 받은 신학교를 나왔어도, 아무리 사회의 명망 있는 자가 그 교회에 다니고 있어도, 아무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이고 합동이고 감리교이고 성결교라도 그건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
출애굽을 하고 나서 제일 먼저 홍해로 데려가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게 부르심이에요.
노예로 살면서 먹고 살아야 되기 때문에 채찍질 밑에서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우리가 모두 살고 있는 모습이 먹고 살기 위해 이 세상의 노예로 살고 있는 거예요.
창세기 3장에 보면, 뱀의 유혹을 받은 하와의 말을 듣고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오셔서 하신 말씀, ‘네가 네 아내 하와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 명한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이제 너에게 저주가 내리는데,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것이다, 그리고 네가 수고하여야 겨우 목구멍에 풀칠을 하게 될 것이고, 흙에서 왔으니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저주를 하나님께서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 좀 더 잘 먹고 좀 더 잘 입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일하는 것, 그리고 이 의미를 무리 없이 넓혀서 얘기하자면,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게 될 몸에 의해서 생기는 필요 때문에 매여서 살고 있는 삶, 그게 바로 저주의 삶이라는 겁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게 될 몸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필요에 따라서, 몸 때문에 생기는 요청에 따라서 움직이며 따라가는 삶, 그게 바로 저주받은 삶이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그 저주를 극복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이 저주로부터 불러내시는 겁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해서 저주로부터 불러냈다니까, ‘우리가 부자로 살고 잘 먹고 사는 일, 이 일을 위해서 오셨으니까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자!’ 이렇게 돼버리면 곤란하다는 얘기에요.
빈들에서 예수님께 집중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 걱정 안 하고, 몸에서부터 나오고 있는 요구에 반응하지 않은 채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 이게 바로 부르심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이제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이유가 먹고 사는 것을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먹고 사는 일에 애써야 되는 그 아담 이후의 저주받은 삶의 모습, 모든 자연인이라고 우리가 이름 붙인 사람들의 일반적인 삶의 모습, 상식적인 삶의 모습, 상식적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지금 제가 말씀을 드리는 부르심의 내용은 되게 몰상식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그게 부르심인데.
그러한 삶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게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거라 이겁니다.
더 이상 마음에 ‘내가 어떻게 먹고 살아야지? 어떻게 입어야지?’ 그리고 이 몸에서부터 요구되어지는 필요, 심지어는 사람을 만나는 것까지도, 우리의 몸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 것 아닙니까?
이 모든 것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겁니다.
데살로니가 후서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속담을 인용합니다.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후서에서 말씀하시는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라는 말씀을 ‘먹기 위해서 일하라’는 말씀으로 해석을 해버린다면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저주의 삶으로 다시 이끌어 들이는 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선악과를 따먹고 난 죄 때문에 주어지는 저주의 삶이 이 육체의 요구를 따라서 먹고 입는 것의 필요를 내가 느끼고 그것을 내가 해결하기 위해 얼굴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다가, 결국은 몸에 의해서 생긴 요구와 필요를 따라 노예처럼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게 인간의 운명인데, 주님께서 오셔서 불러내신 겁니다.
분명히 우리는 일을 할 거예요.
일은 할 거지만, 일단은 먹고 사는 이 육체 때문에 생기는 필요에 대해서 반응하며 사는 일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아 그 일로부터 빠져나온 뒤에 영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삶을 살게 되는 거라는 얘깁니다.
흙으로 돌아갈 육체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모든 필요와 요청에 대해서는 주님이 완전히 책임을 지시겠다는 얘기에요.
몸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 삶을 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뿐만 아니라 몸 때문에 생기는 가정의 일, 친구를 만나는 것, 직장에 나가는 것, 이 세상에서 잘살아보겠다는 비전을 갖는 것, 이 모든 일들을 다 여기서부터 부르심을 받아서 빠져나오라는 얘깁니다.
이 세상에서 몸 때문에 있을 모든 요청에 대해서 빠져나오면, 몸 때문에 생기는 모든 필요와 요청은 주님께서 완벽하게 주님이 가장 선하다고 생각하시는 방식대로 이끌어 가실 테니까 너는 빠져나오라는 얘깁니다.
빠져나와서, 오늘 본문만 볼 때는 예수님에게 집중하라는 얘기에요.
그런데 이게 안 되지요.
교회에 나와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어떻게 먹고 살까, 어떻게 입고 살까? 어떻게 더 높아질까?’
몸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요청에 대해서 자꾸 고개를 돌립니다.
부르심을 받는 게 아니에요.
한쪽에서는 예수님이 부르시는데, 또 부르시기나 합니까? 강단에서 나오는 설교들이 진짜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오라고 부르십니까, 아니면 그곳에 완전히 박히도록 밀어 넣습니까, 부르시는 게 아니라.
진짜 교회인지 아닌지 여러분 스스로가 판단하세요.
목사님이 신학박사님이라도 그건 의미가 없는 일이에요.
아무리 사회적인 명망이 있는 사람이 와도 소용없는 일이에요.
통일교의 교주인 문선명 씨가 돌아가셨더라고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얘기해요, ‘우리 교회가 교회다우니까 부흥하는 것 아니냐?’
곽선희 목사님도 자꾸 그런 말씀하시더라고요, 교회가 교회다우면 부흥한다고.
문선명이라고 하는 한 사람의 통일교인이 전 세계적으로 300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것만 갖고 알 수 있습니까?
교회가 부흥하면 진짜 교회에요? 숫자적으로만 늘어나면?
내가 전한 말씀이 내가 죽은 다음에 부흥할 수도 있지요.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누가가 얘기하잖아요?
부르심은 빈들로 부르심이다.
빈들을 삭막하다고만 이해하지 마시고, 내가 애써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준비할 수 없는 곳으로 부르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내 먹을 것과 입을 것, 몸 때문에 생기는 모든 요구, 필요, 인간관계조차도 주님께서 알아서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약속임을 믿으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몸 때문에 생기는 필요와 요청에 대해서는 완전히 자유로워질 각오를 하라는 말이에요.
실제로 내 존재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의 움직임은 자유로워지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거라는 얘깁니다.
‘아,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주님께서 부르시는 것은 빈들로 부르시는 것인데…
‘나의 힘으로는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몸의 필요에 대해서 도저히 노력하고 반응하고 애쓸 수가 없는 빈들로 부르시는 것인데 내 마음이 왜 자꾸 생업의 현장에 남아 있는 것이냐?’
‘내 마음이 빈들로 가서 도저히 이 세상의 삶, 몸의 요구에 대해 반응할 수 없는 그러한 곳으로 가서 예수님께 집중하자!’
이것이 바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마땅한 응답의 마음가짐이라 이겁니다.
이건 나 자신부터 확인할 수 있지 않아요?
내가 과연 생업에 종사할 수 없는 삶이 끊어진 빈들로 나가면서 예수님께만 집중하는가,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를 건너 광야로 끌어들여서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도록 만드신 것처럼, 그렇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께 집중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는지 나 자신을 보며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목사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과연 목사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부르심을 대행하고 있는 것인가?
빈들로 우리를 불러내셔서, 오늘 이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이 자기의 먹을 끼니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이 예수님의 활동과 말씀에 집중하는 것처럼 예수님께 집중하도록 우리 삶의 현장에서 불러내고 계시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르심을 대행하고 있는 분이고, 아니라면, 삶의 문제를 자꾸 이야기하고 그쪽으로 마음을 돌아가도록 한다면 예수님께서 내 삶을 맡아서 행하시는 저주에서 빠져나온 복된 삶을 이야기하시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사업 잘할 수 있습니다, 건강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 잘될 수 있습니다, 가정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꾸 빈들이 아닌 삶의 현장의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 믿는 것을 그 삶의 현장에 대해서 내가 갖고 있는 계획대로 잘되는 것이라고 얘기한다면 그분은 바로 진짜 교회를 이끌 수 있는 목자가 아닌 것이지요.
분명히 알 수 있는 겁니다.
누가 말하는 겁니까?
누가 말하긴 누가 말해요? 누가가 말하고 있지요.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누가의 입을 빌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죠.
진짜 교회, 첫 번째, 부르심.
이 내용을 빈들로 불러내셔서 먹을 것을 주시는 이 주님의 기적의 역사 속에서 부르심의 참 내용을 알고 우리가 교인으로서 살아야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빈들로 불러내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해주셔서, 아담 이후에 자연인의 삶으로 여겼던 저주 속에서 우리가 빠져나와 주님의 부르심에 바른 응답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